망겜에 갇힌 고인물 110화
12층 - Lv. 355 낙오클랜들(1)
미래는 사소한 것으로도 바뀐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사소한 것으로 미래가 변한다면 미궁은 그냥 지나치게 운빨로만 굴러가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라고 할 수 있는 중세 판타지 월드에서 ‘미래’를 뒤트는 것은 전적으로 [히어로 유닛]들에게 달려 있다.
[히어로 유닛]은 트리거다. 사실 유배자는 직접적으로 역사를 바꿀 수 없다.
미궁의 일개 서버, 그러니까 한 대륙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바꾸는 것은 [히어로 유닛]이라고 따로 분류된 NPC들이다.
이들은 계단을 통과할 수 없다.
유배자와 함께할 수 없으며 왕국으로 갈 수도 없다.
대신 역사에 관여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유배자가 자기 입맛대로 역사를 뜯어고치는 것은 전적으로 이 [히어로 유닛]들을 통해 발생한다.
[배신당한 성녀]처럼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히어로 유닛]과 관련된 스토리도 있다.
그냥 난수의 산물로 등장하는 [히어로 유닛]도 있다.
유배자의 행위는 직간접적으로 저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결과로 역사는 변한다.
물론 그렇다 한들 결국 운빨망겜인 건 사실이다.
히어로 유닛은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NPC에게 주어지는 지위다.
그럴 영향력이 있다면 일단 강해야 한다.
그런데 별 볼 일 없는 녀석이 알아서 쑥쑥 크더니 히어로 유닛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틀림없이 설계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다.
그리고 여신님이 알려왔다.
자신이 신도의 정보를 열람한 바로는, 바르바로이가 [히어로 유닛]이 되어 있었다고.
이건 아주 드문 일이다. 바르바로이는 그 성격상 어딘가에 안주하려고 한다. 야망을 가진 네임드가 아니라 배경처럼 등장하는 무수한 네임드 중 하나일 뿐이다.
무시무시한 대인능력 덕분에 나름대로 유명한 네임드일 뿐.
고블레타리아 연방이 성립하고, 그 주축이 됨으로써 그는 [히어로 유닛]이 되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역사를 바꾸어 놓았으리라.
인위적으로 [히어로 유닛]을 만드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다.
일이 한번 잘 풀리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가 없다.
미래의 내가 전달한 정보는 애초에 대충 어떤 형태의 층들이 나타날 것이다 정도에 불과하다.
대략적인 구도는 고정이겠으나 그 이외에는 변수가 있으니까.
물론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동맹은 제법 내부의 균열이 큰 상태였다.
규율의 신은 아무래도 자비로운 신은 아니다.
그의 규율은 금전.
그야말로 돈의 망자요 이득의 화신.
저런 조합의 신좌가 필요에 따라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신도와 교단의 이윤이지 어떤 나라의 존망이 아니다.
물론 동맹은 약한 국가는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작은 소국이나 공동체들을 후원하며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에 결속시키고 있다.
이것은 연방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종족에 자긍심을 가진 제국들은 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변방의 소국들은 질이 나쁜 곳도 많다.
아예 범죄조직들이 장악했거나 처음부터 그들이 국가의 형태를 취한 경우도 흔하다.
대체로 그런 곳은 중앙의 감시를 벗어난 무법지대이다.
행성 자체가 슬럼가이며, 거대한 범죄의 온상.
그러나 달리 말하면 자신을 지킬 힘과 거래를 할 의향만 있다면 거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는 땅이기도 하다.
우선은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지부터 증명해야 한다.
우리 파티는 공간이 뱉어내듯 으슥하고 허름한 골목으로 쏟아져 내렸다.
엎어지려는 꼬마 마법사와 꼬맹이를 소녀가 옆구리에 끼우다시피 하고 착지한다.
어두운 뒷골목의 거리는 밤이었다.
한참 총격전이 벌어질 위기였던 가운데에 갑자기 떨어진 일행들을 본 조직원들은 모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동시에 말했다.
"너희들은 뭐냐!"
졸지에 두 조직 간의 항쟁이 삼파전이 되려 한다.
나는 우선 박쥐를 날리며 반응을 보았다.
푸드득 날아가는 박쥐를 보며 우리를 포위한 모양으로 서 있던 불한당들이 고함을 지른다.
"뱀파이어다!"
"이런 제길! 어느 클랜이지?"
여신님 가라사대, 연방의 모든 이들이 혼돈의 신도인 것은 아니다.
연방이라 함은 애초에 여러 국가의 집합이고 당연히 주축이 된 고블린과 뱀파이어, 그리고 언데드들을 제외한 이들도 연방의 일원일 수 있다.
그리고 고블린이나 뱀파이어가 여신을 섬기지 않고 연방의 변방에 살아갈 수도 있다.
어디를 가나 범죄자는 있고 그런 이들은 곳곳을 떠도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뱀파이어들은 대부분…….
바르바로이 클랜을 몰아냈던 녀석들일 것이다.
클랜 마스터급이면 당시의 인물이 아직 살아 있을 확률도 높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뱀파이어가 설 자리는 사라진다. 그들을 초인으로 만들어주던 초자연적인 힘들은 점점 의미를 잃어간다.
그렇게 힘을 잃은 뱀파이어들은 변방으로 밀려난다.
이제는 낙오 클랜이라면, 이들 전부가.
어쩌면 내 클랜을 제외한 모두가 낙오 클랜이다.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월의 흐름이란 그런 것이니까.
박쥐들이 날아가 폭발한다.
정규군이라고 할 수 있는 11층의 녀석들에 비하면야 엄청나게 약해빠졌다. 인상을 쓰고 총을 겨누고 있던 녀석들이 벌러덩 넘어갔다.
자신의 역할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막내와 사냥꾼, 그리고 영감님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막내의 방패는 볼품없이 찌그러져 내구도가 다해감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 찌그러짐은 무수한 물리, 마법적 충격의 흔적이다.
이런 곳에서는 보기 힘들 만큼 격렬한 전투의 흔적들.
그리고 라이플.
한눈에 알아보지는 못하더라도 이 정도로 대놓고 보여주면 눈에 띌 것이다.
거기에 우람한 팔뚝을 자랑하고 있는 오크가 날카로운 도끼날을 대놓고 자랑한다.
거기에 동맹군 제식 플라즈마 라이플을 보란 듯이 흔들며 여유롭게 꼬나보는 중년의 삭막한 인간.
불량배들이 가오로 살아가는 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눈에 알아볼 만큼의 힘을 드러내 보여준다면 가오를 접어 넣는다.
막내가 좌우를 살피다가 한쪽의 녀석들에게 걸어갔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막내의 외모는 험악하다.
뒷골목에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없다.
그가 한쪽을 향해 다가가자 반대편의 녀석들은 눈치를 보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겠으나 함부로 엮여서는 안 되는 무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뒤가 없는 것처럼 살지만 정말로 그렇게 살면 단명한다.
의외로 범죄조직의 조직원들은 겁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두손 두발 다 들면 이런 곳에서 살아남지도 못했다.
"이런 제기랄! 쳐라!"
깡패들이 연장을 꺼낸다. 총기도 있다. 그다지 성능이 좋아 보이진 않는다.
소녀가 달려갔다.
한바탕 바람이 불었다.
딱 3분간 구경하고 있으니 실컷 두들겨 맞은 녀석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도열했다.
세상 얌전하다. 선생님께 혼나는 초등학생 같다.
"여기가 어디지?"
"루블 행성입니다."
"그게 어디지?"
대표로 대답하던 수염 덥수룩한 덩치가 잠깐 고민을 한다.
"동맹 외곽 B-2764 지정 인공 행성입니다."
인공 행성?
주변을 보았다. 확실히 좀 부자연스러운가?
마법으로 소행성들을 뭉쳐 만든 행성인가 보군.
옛날 같으면 간척사업 같은 짓인데.
확실히 동맹은 기술적으로는 가장 우월하다.
"좋아, 어디 묵을 만한 곳이 있나?"
수염쟁이의 표정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 * *
미래의 내가 12층에 대해 알려준 정보에서 중요한 것은 세 가지였다.
뱀파이어가 장악한 행성으로 간다는 것.
그 행성은 변방의 슬럼가라는 것.
그리고 난쟁이가 있다는 것.
수염쟁이는 앙심을 품고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다.
허름한 술집 겸 여관 같은 곳이 있었다.
수염쟁이는 안내를 마치고 허둥지둥 도망치듯 사라졌다.
술집의 주인이나 다른 손님들에게 확인한 결과 이 행성은 역시 혼돈의 신앙과는 무관한 뱀파이어들이 장악한 곳 중 하나였다.
뱀파이어임을 숨기고 같이 한잔 걸치자 술술 아무 이야기나 다 흘러나왔다.
알콜 중독자들은 입이 싸다.
가게 주인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건, 우리 일행에 오크가 있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무법지대의 술집이란 으레 그런 것이다.
이 행성은 그런 곳이었다.
뱀파이어만 있는 것은 아니고 소속은 동맹이긴 하나 거의 내놓은 무법지대.
여러 국가의 군상들이 모여 있다.
온갖 국가에서 온갖 일들을 벌이다가 결국 도달하는 말로 같은 행성.
여신님이 감상적으로 말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참으로 신좌와 흡사한 곳이야. 유배자의 말로지.」
"그거보다야 신좌가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일단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연방에는 절대 알리지 마시죠."
「그래야겠어. 여기에 대전사가 있다고 알려졌다간 또 대함대가 워프를 시도할 것 같아.」
일단은 동맹의 영토다. 갑자기 동맹과도 전쟁을 시작할 수는 없다.
규율의 신이 께름칙하긴 하지만 대놓고 적인 전쟁의 신보다는 낫다. 공통의 적부터 쳐야 한다. 전력을 분산하면 안 된다.
허름한 여관에 쉴 사람은 쉬게 내버려 둔 후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꼬맹이는 마법을 혼자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
체력이 넘쳐나는 영감님은 도끼날을 갈고 묠니르를 닦은 후에 꼬맹이에게 주술적인 관점에서 보는 마력의 사용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꼬맹이는 노골적으로 듣기 싫은 표정이지만 일단은 경청하는 척한다.
영감님은 그 사실을 모르는지 열정적으로 주술에 관해 강의하고 있었다.
다른 인간들을 널브러져 잠깐 자고 있다. 소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고 실제로 그런 것 같았지만 일단은 재웠다.
정신적 피로는 언제나 육체적 피로와는 별개다.
소녀는 이제 파티 내에서 굉장히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주요 전력의 컨디션 관리는 필수다.
밤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 인공 행성은 언제나 밤이다.
항성의 곁을 맴도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공 행성은 흔히 행해지는 인공 항성 실험의 부산물이다.
그 자리에 마법으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행성.
충분한 질량을 가지지 못해 항성이 되지 못한 자그마한 땅.
바깥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육감 같은 것은 아니고 마법이다.
마투사는 격투가와 믹스인 마법사기에 근거리 감지는 뛰어난 편이다.
내가 먼저 밖으로 나가자 망토에 후드까지 둘둘 감은 사내 하나가 있었다. 그는 내가 어디에 묵고 있는지 술집 주인에게 묻고 있던 참이었다.
"당신이 찾는 게 나일 건데."
시치미 떼며 고개를 젓던 술집 주인은 본인이 나선 것을 보자 곧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던 일을 하기 시작한다.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중요한 소양이다.
척 봐도 입지가 있어 보이는 뱀파이어가 나타나 묻더라도 말이지.
뱀파이어는 나를 흘깃 보더니 거만하게 말했다.
"못 보던 뱀파이어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지. 거기에 모루와 회복의 샘이 행성에 출현했고."
중세 판타지 시절엔 인구 밀도가 그리 높지 않다.
미래로 갈수록 유배자는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아니, 신비로운 존재는 맞되, 아직 밝혀내지 못한 무언가일 뿐이다.
유배자가 나타난다면 계단과 회복의 샘 등이 출현한다는 것은 이젠 익히 알려진 유명한 사실일 것이다.
"붙잡혀서 험한 꼴을 보기 싫다면 우리 밑에서 좀 지내지그래. 우리 일을 좀 도와준다면 계단으로 보내 주지."
뱀파이어는 굉장히 느긋하게 그리 말했다.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도 제법 세력이 되는 클랜일 것이다.
나는 당연하게도.
"그래 준다면 고맙지. 도와야 할 일은? 인체 실험이나 포션 셔틀로 쓸 생각이라면 우리도 격렬하게 저항할 생각이 있어."
뱀파이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원하는 녀석들도 있을 걸, 요정 마피아라거나 말이지. 우리 정도면 아주 온건한 제안이라고 생각해."
간단한 이야기가 끝났다. 동료들은 뱀파이어가 아니기에 조금 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자 뱀파이어는 쉬이 납득했다.
여섯 시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술을 주문하더니 홀짝이기 시작했다.
어디 다른 녀석들이 채가지 않을까 걱정되어 지키는 모습이다.
추가적인 증원도 도착했다.
갑작스레 뱀파이어들이 많이 나타나자 손님들이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빠져나간다.
술집 주인은 뱀파이어들을 보고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으나, 빠져나가는 손님들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킥킥대며 오랫동안 쓸 일이 없었던 금화를 하나 주인에게 튕겨줬다.
"음?"
무뚝뚝한 표정에 의문이 서린다.
"저기 뱀파이어 나리들에게 신선한 피 한 잔씩 대접하시죠. 제가 내는 겁니다.
주인은 금화를 확인했다. 진짜일 것이다. 중세에서 가져온 순금화니까.
주인이 인상을 쓰며 거스름돈을 계산하기 시작하자 내가 손을 흔들었다.
"팁이오."
주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나도 주문을 했다.
"나는 요정 혈액 RH- ES형으로."
처음 나에게 제안을 했던 녀석이 피식 웃었다.
"인간 뱀파이어 아닌가? 굳이 요정의 피라니 변태로군."
"톡 쏘는 맛이 좋거든."
"난 차라리 민트 초코를 먹겠어."
허, 그건 이 시대에도 논란거리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