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12화
12층 - Lv. 355 낙오클랜들(3)
신들 간의 교류는 없지는 않으나 적극 권장할 만한 일로 인식되는 경우 또한 없었다.
그들은 일단 서로 경쟁자이기도 했으며 그다지 선의의 경쟁자는 아니었다.
기나긴 세월을 살다 보니 개인적인 친분 정도야 어찌 생길지라도 대부분의 신과는 데면데면한 관계인 것이다.
물론 그 데면데면함은 정말로 그 수준에서 그치는 정도다.
게임에서 길드 간의 전쟁을 벌인다고 한들 사생결단은 아니다.
신들의 싸움이란 것도 그랬다.
신도를 모두 잃어 소멸하는 일은 타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도전자가 무수한 세계들의 파편 속에서 신좌를 찾아내어 도전해오는 일도 극히 드문 것이다.
신은 미궁의 유배자가 기나긴 여정 끝에 손에 넣은 불로불사 그 자체다.
짧아도 수십 년에서 길게는 100년을 꼬박 채워온 무수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신들은 대체로 관대해졌다.
물론 유배자 시절에 비하면 관대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100년의 기한에 쫓기는 도전자도 아니다.
실패한 패배자가 될지언정 자유로우며, 신도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존재다.
그 무엇보다 게임 같은 세상을 살아온 그들에게 신좌란 예쁘게 세팅된 PC와도 같은 것이다.
혼돈의 여신은 실로 오랜만에 접하게 된 무수한 신도들을 관찰하며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와중이었다.
"신은 이가 썩지 않지."
불로불사이니 당연하다. 신좌에 앉은 유배자의 시간은 고정된다.
신좌의 방에 거미가 산다면 거미줄을 쳤을 공물 제단이 풍족하게 차오른다.
사탕을 꺼내도 꺼내도 계속해서 나온다.
젤리며, 푸딩이며, 이제는 기호품으로서의 기능밖에 하지 않는 음식들이 무수히도 쏟아져 나왔다.
특별히 중대한 역사적 공물이 아니라면 자잘한 식료품 같은 것들은 스킵된 시간 속에서 보존되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니 지금 신좌에서 알려오는 공물의 양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 동안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흠, 이건 좀 돌려줘야겠는데."
가산을 몽땅 털어 바치는 신실한 자들도 있다. 여신께서 돌아왔음을 모두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알려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괜히 폼을 잡았네. 이렇게 골치 아파질 줄이야."
기억을 이어받는다 해도 자신의 것이냐면 약간 다른 감각이다. 파티원들에게 하듯이 엄숙하게 좀 해보았더니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그래도 신좌는 신도 관리에 상당한 편의를 제공한다. 여신은 마침내 공물에 대한 분류를 끝냈다.
도로 돌려줘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기준을 만들어 입력했으니 신좌가 자동으로 처리할 것이다.
남은 것들은 대체로 산더미 같은 음식들이다.
막대 사탕을 하나 뽑아 할짝대며 평가를 한다.
"조금 아쉽군."
미궁은 단일 종족들만이 거주하는 세계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전란도 끊이질 않는다.
평화는 정말 잠깐에 불과하며 스쳐 지나가는 허상이다.
그러니 기술의 발전도 편향될 수밖에 없다. 전쟁은 언제나 발전을 만들어낸다.
더 많은 무기와 병기들의 발전을.
사탕을 더 맛있게 만드는 법 같은 것은 좀 더 평화론 세상에서나 열심히 연구되는 문제일 것이다.
"그 녀석이 만든 게 그리운데."
지금이라면 재료야 구할 수 있겠지만 바빠 보이니 건들기가 뭣하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뱀파이어 무리와 난쟁이의 저택을 찾아가는 중이다.
튀김이나 구이 같은 것들은 맛있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하면 연방은 식도락을 즐기는 종족이 적은 국가다.
맛있는 음식이라면 동맹 쪽이 더 어울리리라.
[이보시게, 동맹에 아주 유명한 장인의 달달구리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규율의 신에게 말을 걸자 조금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연방의 명물은 목록을 작성해 두었습니다. 교환하도록 하지요.]
신들의 취미 생활 같은 것이다. 서로가 신도에게 받는 공물에는 차이가 있으니 이런 식으로 거래가 오간다.
이마저도 사이가 애매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규율과 금전의 신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저 신은 우연히 앉은 신좌가 저따위인 게 아니라 원래 저런 성격이다.
서로의, 혹은 자신의 이익만 발생한다면 무엇이건 거래한다. 그곳에 개인의 감정은 크게 개입하지 않는다.
친구라곤 못해도 차라리 편한 관계다.
그리고 여신은 이번 거래만큼은 자신의 이득이라 생각했다.
[……거기선 이런 걸 먹습니까?]
떫은 입맛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메시지. 여신이 이미 겪어본 일이다.
[주축이 고블린과 언데드다 보니 죄다 좀 이해가 안 가는 맛이라 말이지.]
[전 평범하게 닭이나 튀긴 게 마음에 드는군요.]
일련의 대화에 서로의 신도에 관한 이야기나 정세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런 말을 꺼낼 만큼 어리석은 이는 신이 되지도 못한다.
규율의 신은 또 먹다 보니 나쁘지는 않은 맛이라며 평가를 올렸다.
여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맹의 사탕이 확실히 훨씬 낫군.]
[연방은 꽤 독특한 식문화를 자랑하는군요. 문화산업은 어떻습니까?]
[교육용, 선전용뿐이라서 좀…….]
[구매할 의사가 있으시다면야. 얼마든지.]
[되었네. 내 신도들에게 구하라고 하면 못 구할 것 같나?]
규율의 신은 낮게 웃기만 했다.
그리고 슬쩍 묻는다.
[지금 왕국에 천사가 하나 나타난 것 아십니까?]
[음? 난 왕국에 눈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혼돈의 천사입니까?]
여신은 전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규율의 신은 모든 정보에 대가를 지불하겠지만 유도심문당한 후에 일방적으로 지불당하는 것은 패배감이 든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쉽군.]
[흠, 많은 신들이 탐을 내고 있습니다. 천사나 악마는 좀처럼 없으니까요.]
[랭커급에는 좀 있지 않았나?]
[왕국에 신도가 없으신지 너무 오래되셨군요. 꽤 많이 죽었죠. ‘운석소나기’ 길드가 붕괴하면서 특히.]
그게 망했다고? 참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여신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왕국을 살폈을 때가 몇 년 전이었는가를 생각해보려고 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유배자는 정신을 내려놓는 것에 능숙하다. 자기 자신마저 속일 정도로 완전히 넋을 내놓고 너무 오래 지냈다.
[어쨌든 요즘 꽤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탐내는 길드들도 많고요.]
[쯧, 나도 한때는 밑에 고위종족이 많았는데.]
[물론 그러시겠지요. 가장 오래된 신이시여. 그러고 보니 왕국에서 누가 만들어 올렸던데 민트초코 드시겠습니까? 서비스입니다.]
[음, 아주 좋지.]
가장 오래된 신.
저것도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다.
혼돈의 여신이 이 회차에서 100년의 기한이 다했을 때, 왕국은 아직 아무런 기반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이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의외로 왕국도 평화로운 곳일 수 있었다.
* * *
[신이시여! 집을 구했습니다!]
천사 신도는 별일이 없다면 신의 충실한 종복이 된다. 그편이 종족 특성을 극도로 살릴 수 있기도 하며 여러모로 강해지는데 이득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이 47년 차 유배자인 천사는 천사 자체도 처음이며, 경험도 상당히 편중되어 있었다.
해본 클래스는 버서커 온리. 왕국까지는 어떻게 꾸준히 갔으나 줏대 없는 성격으로 보아 알 수 있듯이 연차 값은 못하는 축이다.
도전자는 꿈도 꾸지 않으며 그저 왕국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시민적인 유배자.
고참이라 함은 모두 굉장히 경악스러운 괴물로 묘사되지만 그것도 왕국 이전 구간에서나 그렇다.
고참들 사이에도 급이 있다. 건실한 20년 차가 시간만 흘려보낸 50년 차보다 나을 수도 있기는 있다.
천사는 그런 의미에서 여신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했다.
[이렇게 친절하신 신님은 처음입니다! 아, 신이시여!]
마음 한구석이 제법 무너져 있었던 모양이라 심리상담까지 해주었다.
과거에 파티의 일원으로서 [메인 던전]에 도전하던 일이 생각날 정도다.
어쨌든 제법 귀엽게 구는 천사는 열심히 여신의 조언을 받들어 자신을 숨겼다.
물론 소문은 널리 퍼졌다.
신규 서버의 존재는 무수한 신들을 통해 왕국의 유배자들에게 알려졌다.
그럼에도 왕국으로 건너오는 자들이 한참이 지나도 거의 없으니 일거수일투족이 집중되던 참이었다.
이미 우주 테마부터는 층의 홀짝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생존자가 적은 상황이다.
왕국까지 도달한 이들은 정말로 손에 꼽았다.
천사는 왕국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최고로 집중된 관심을 받았다.
여신께서 일갈했다.
[야야야, 멍청하게 인터뷰 응하지 말고! 그냥 튀어!]
즉시 날개를 펴고 전력으로 비행하여 도망쳤다. 전력으로 도망치는 천사를 잡을 수 있는 유배자는 많지 않다.
종족이 천사임은 누가 봐도 분명했기에 그녀는 그대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대로 보름을 사람을 피해 다니며 제한적으로만 접촉했다.
그 정도쯤 하니까 쫓아다니던 스카우터들도 상황을 두고 보는 편이 낫다는 것을 인지했다.
천사는 그때부터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번화한 왕국은 본적이 거의 없습니다!]
여신이 보기에도 그랬다. 아직 개발이 덜 된 부분이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도시들이라고 불러야 할 만한 곳이 상당히 늘어났다.
중심이 되는 [차원회랑]을 싸고 발전한 도심은 말할 것도 없다.
마도공학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고블레타리아 연방이 존재하는 서버와는 달리 정말로 평화롭고 발전한 땅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랬다.
천사가 생각보다 멍청했기에 여신은 그쪽에도 꽤나 많은 신경을 쏟아야 했다.
깃털과 눈물 등을 팔아서 숙박비를 마련하고 몇 가지 조건을 통한 대출로 집을 구했다.
집문서를 황송하다는 듯이 끌어안고 부동산에서 걸어 나오는 금발의 천사는 날아갈 것같아 보였다.
아니, 실제로 날아갔다.
[그런데 이 집은 그럼 선배님이 오시면 쓰시려고 하는 것인가요?]
여신은 고개를 저었다.
[길드 하우스지.]
천사가 눈을 빙글빙글 굴리더니 답에 도달했다.
[길드를 만드는 겁니까?!]
[그럼, 이제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언론 플레이도 좀 하고 말이야.]
블랑쉐의 상황도 확인해야 했다.
왕국의 입구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온 근미래 첩보원을 보자마자 모든 스카우터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저건 건드는 게 아니다.
차라리 지금 누군가 나서서 죽여버리면 죽였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악명 높은 네임드 유배자 NPC인 블랑쉐는 본인도 모르는 무수한 원한을 사고 있었다.
현재 왕국 내부에서 도주 중이고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고레벨이라고 해도 쉬이 건들기 힘들 정도로 블랑쉐의 초기 장비는 강력하다.
[혹시 블랑쉐가 위기에 처하면 도와야 하니까.]
[네?! 제가 왜요?]
[어허, 하라면 해!]
여신은 엄포를 놓았고, 천사는 찌그러졌다.
그래도 하이랭커급 선배님의 총애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혼자 널따란 집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각오를 다시 다진다.
어쨌든 천사는 꽤나 잘 지내고 있다. 왕국이 처음도 아니고, 좀 어리바리한 면이 있지만 짬이 완전히 어디로 가버린 것은 아니니까.
현재는 대체로 모두가 눈독 들이는 기대의 신인이라는 위치만 유지한 채 조용히 지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깃털 이불과 자신의 날개에 푹 파묻혀 늦잠을 자고 있다.
묘하게 아니꼽긴 하지만 정말 행복한 얼굴로 침을 흘리고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두자.
여신은 피식거리며 시야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감각적으로는 게임의 화면을 맵의 다른 곳으로 돌리는 기분이다.
* * *
기술의 발전은 유배자의 비밀 상당수를 파헤친다.
기적의 샘물이라 불리며 추앙받던 힐링 포션도 그렇다.
그 병의 메커니즘은 아마도 영영 해명도 구현도 못 하겠지만 치유의 샘물 자체는 아니다.
구성성분은 알다시피 그냥 물에 신성과 마력이 포함되어 있을 뿐인 단순한 것이다.
이게 마도공학적으로 접근하면 꽤 머리 아픈 문제가 된다.
인위적으로 그걸 구현하기에는 지나치게 섬세하고 정밀하다.
힘을 지닌 혈액을 통해 도핑 효과가 있는 식으로 효능이 변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래도 부분적으로는 연구되어 기존의 포션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 유배자표가 아닌 포션들은 충분히 상용화가 되었다.
하지만 숨만 붙어 있다면 사실상 시체인 자도 살려낼 정도는 아니다.
기껏해야 상처가 눈에 보이기는 하는 속도로 낫는 정도.
그것만 해도 치유계 성직자들의 입지가 수직 하락할 정도의 혁신이었으나 진품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 진품이 자신의 저택에 출현했음을 안 난쟁이 무기상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만큼 나와 파티원에게도 살갑게 굴었다.
"이야, 이거 갑자기 집에서 밀려나서 어찌나 당황했는지. 자다가 눈을 떴는데 길바닥이지 뭔가. 경호원들도 같이 밀려 나와서 다행이지 객사할 뻔했어."
바위난쟁이는 늘 그렇듯이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외모다. 그런 모습으로 정장에 시가를 물고는 저런 말을 하니 참으로 어색하다.
소녀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엽다고 생각했는지 자꾸만 손을 뻗으며 꼼지락거렸다.
당연히 진짜로 만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건 큰 실례다.
우리가 앞장서서 들어가자 함께하는 다른 이들도 저택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널따란 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정원의 한가운데, 원래부터도 분수대가 있었을 것 같은 곳에 샘물이 퐁퐁 솟아나고 있다.
난쟁이 무기상은 정말로 기뻐하며 다가가 물을 만져보았다.
"이게 그 기적의 샘물 원본인 게로군. 후후."
맛이 특별히 다르지는 않을 텐데 그럼에도 맛을 음미하듯 입에 머금고 굴린다.
다른 이들도 신기하긴 마찬가지인 눈치다.
"그래, 내 우리 유배자 손님을 먼저 모셔야지. 이보게, 요리사!"
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제 위치를 찾아간다. 나는 옆의 뱀파이어를 보았다.
"그런데 계단의 위치를 알려줄 생각은 없나?"
"일이 끝나고 나면 말이지."
정규군도 아니고 이 행성에 있는 녀석들 정도는 이제 우리 파티에 아주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 낭비가 걱정될 뿐.
"대접은 거절하도록 하지. 다음으로 가자고."
"해야 할 이야기가 더 있을 거야. [모루]에 관해서 말이지."
그건 안 엮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이 난쟁이 무기상이 안 좋은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이 정도 권력을 쥔 이가 마냥 친절하다는 것은 벌써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뱀파이어도 너무 아무런 말 없이 친절하기만 하다.
이건 뭐, 자주 있는 일이다. 보통은 함정이던데.
어차피 우리의 도주 경로는 없다는 것이겠지.
유배자의 무서움이 널리 알려진 만큼, 유배자의 유용함 또한 널리 알려진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