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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14화 (11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14화

12층 - Lv. 355 낙오클랜들(5)

클랜 마스터는 한가하게 바에서 쉐이커를 흔들고 있었다.

10분을 흔들어야 하는 칵테일이지만 어차피 뱀파이어의 지구력으로는 문제없다.

이곳은 나름대로 고급 술집이었고 클랜 마스터는 이 위장 신분에 만족했다.

술이란 건 오랜 세월 살아가며 취미로 하기 좋은 것이다.

마법적인 숙성을 한 와인은 설사 수백 년이 지나도 맛이 깊어지기만 한다. 식초가 되지 않는다.

그걸 직접 만들고 직접 딸 수 있다.

위스키도 그렇고, 하여튼 간에 수명이 길기에 즐길 수 있는 방향성도 있는 법이다.

손님에게 칵테일이 나가고 일이 없어졌다.

1년 365일이 모두 밤인 이 행성에 술을 마시는 시간이라는 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냥 원하는 사람은 언제건 찾아올 뿐.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지금은 손님이 없었다.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이 주변은 지금 뱀파이어들이 유달리 많아졌을 것이다.

이 무법지대의 주민들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는 방법을 너무도 잘 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전조를 감지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미 죽고 없다.

경호원을 거느릴 정도로 돈 있고 힘 있는 자도 그런 곳에는 얼굴을 내밀지 않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술집 사장이 잔뜩 인상을 쓴 채 가게로 들어온다.

"젠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모기 녀석들이 몰려들고 있어. 프로보이 클랜인가 봐. 너도 어디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

"예, 사장님."

클랜 마스터는 느긋하게 식기를 닦았다.

몇 안 되는 손님들에게 사장이 지금 바깥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린다.

투덜거리면서도 손님들은 얌전히 가게 내부에 있었다.

어딘가의 보호를 받고 있을 가게 내부는 바깥보다 안전한 경향이 있다. 적어도 목숨을 잃을 일은 없다.

닦을 식기는 얼마 없었다.

손님이 적은 탓이다.

마법등이 음울하게 깜빡인다. 이따가 갈아둬야겠군.

자신이 나설 일은 없으면 한다.

일개 유배자 파티 하나를 생포하는데 그럴 이유도 없기는 하다.

난쟁이 무기상은 평판과는 별개로 유능한 인물이다.

굳이 자신을 동원할 수 있게 협상을 해둔 것도 그렇다.

제시한 것은 대량의 혈액.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거절할 수 없는 양을 찔러넣는다.

그 짧은 시간 내에 유유히 오케이를 받고 일을 진행했다.

몸이 뻐근하여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던 와중이었다.

문이 열렸다.

손님인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조금 인상이 굳어졌다.

한눈에 보아도 뱀파이어다. 혹시 모를 태양광 조사장치로부터 방호하기 위한 두꺼운 망토.

문양은 프로보이 클랜을 상징하는 검과 검이 교차한 모습.

주인이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손님들도 일제히 침묵한다.

뱀파이어는 얼른 바로 달려왔다.

아니, 제발 안 된다고. 또 새로 어디서 일 구하고 싶지 않은데. 이 바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소용없다. 클랜의 엘더는 얼른 제 클랜 마스터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마스터, 큰일입니다. 유배자 파티의 뱀파이어가 하나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씁, 어쩔 수 없지.

소리를 죽인다곤 했으나 충분히 새어나갔다.

이미 손님들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사장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멍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멀어진다.

"그래서 뭐?"

"뱀파이어 로드입니다. 거기에 클랜 마스터입니다. 유배자 클랜 마스터."

"클랜 마스터인지 네가 어떻게 알아?"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닌데. 아니 잠깐만 유배자 클랜 마스터?

어디 신생 클랜이라도 또 생긴 게 아닌 이상 그런 존재는 단 하나뿐이다.

연방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온 우주에 알려진 가장 유명한 유배자.

"빨간 망토 두르고 있어? 작은 스카프 같은 거, 두 갈래로 갈라진 것."

"앗, 넵. 그렇습니다."

"넌, 눈이 옹이구멍이냐? 그걸 왜 보고도 말을 안 했어?"

"죄송합니다."

말하면서도 안다. 그걸 어떻게 생각하겠나. 뱀파이어가 되는 유배자는 은근히 많은 편이고 격이 좀 높을 수도 있다.

눈으로 보고만 알기도 힘들다. 능력을 활용하는 걸 보고 깨닫자마자 달려온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애들 다 철수했지?"

"넵! 조치했습니다!"

"빨리 나머지도 다 빼돌려. 최대한 불온한 일은 일으키지 않았던 걸로 간다."

까지 생각한 후, 프로보이 클랜의 클랜 마스터는 다른 생각을 잠깐 했다.

흠. 맞아, 벌써 여기서 꼬리를 내리란 법은 없지.

결과적으로야 연방에게 좀 밉보이겠지만 그게 꼭 문제가 되진 않는다.

애초에 연방에 밉보이지 않은 적이 있나?

그놈들은 죄다 바르바로이 클랜의 뱀파이어고 그 클랜의 뱀파이어 중에선 당시 쫓겨나다 못해 사냥당했던 녀석들도 아직 많다.

수명을 다해 죽는 일이 없으니 생기는 일이다.

해묵은 원한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해소되지 않는다.

"하, 그걸 동족을 팔아넘겼다고 해석을 하니 원. 하여간 동방 놈들은 사고방식이……."

제국의 수도가 된 고향이 떠오른다. 동방이라는 말 자체가 그곳에서나 쓰던 것이다.

요즘 애들은 동방이 뭔지도 모를 거다. 동서남북이라는 개념 자체가 흐릿해진 시대니.

뛰어나가려던 엘더는 붙잡힌 채 고민하는 자신의 클랜 마스터를 보고만 있었다.

머리가 나름대로 도는 녀석이라 대강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듯하다.

"어이, 우리는 눈치챈 적 없었던 거야. 알겠지?"

저쪽에서 먼저 권위를 내세운 게 아니라면 몰랐던 것이다.

대놓고 알려준다면 맨입으로는 못 놔준다며 땡깡 좀 부리고.

어차피 연방의 미치광이들도 아직 전쟁 중이다.

제국의 수도가 함락되었다고 한들 거긴 상징성뿐인 곳이었다.

실권을 쥔 것은 오우거들이니 오크 황제가 어찌 되건 제국 자체가 무너질 일은 없다.

이 외딴 행성에서 그들의 대전사를…… 사로잡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 * *

본격적으로 스탯이 높아지고, 그에 대한 보정이 잔뜩 들어가고, 마인드맵의 가지도 멀리 뻗어 나가기 시작한 무렵.

소녀는 잡다한 스킬을 꽤 많이 손에 넣었었다.

아저씨는 핵심이 되는 몇 가지의 스킬셋을 완성한 후에는 취향에 따라 찍으라고 말했다.

핵심이 되는 것은 충분한 [단검 마스터리] 스택과 액티브 [충격 강화], 액티브 [히어로 랜딩]이었으며 그 외에도 내구도에 관련된 패시브를 여럿 찍었다.

인간의 육체는 단련한다고 갑옷처럼 단단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유배자의 신체는 그럴 수도 있다.

힘을 찍다 보면 나오는 전사계통의 패시브는 그런 게 많았다.

소녀는 혹시 피부가 튼튼해지는, 그러니까 피부가 상하는 방향의 작용을 생각하고 겁을 먹었다.

하지만 해보니 그냥 초현실적인 보정에 불과했다. 다행이었다.

그런 가운데, 제 맘대로 찍어도 된다고 허가받고 뽑기하는 기분으로 아무렇게나 죽죽 가지를 뻗어 나갔다.

그중 아저씨의 눈에 든 게 있었다.

[낙하 가속]

자유 낙하 속도고 뭐고 무시하고 정말 공중에서 뚝 떨어질 수 있는 액티브였다.

아저씨 왈, 보통은 그 충격량이 감당이 안 되니까 쓰레기 스킬이다.

그러나.

제대로 쓸 수 있는 자의 손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다르다.

[히어로 랜딩]은 기본적으로는 미궁 특유의 불가사의한 작동원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미궁 특유의 방식대로 물리법칙을 어중간하게 따르기도 했다.

기본은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범위와 위력이 커지는 것이지만, 더 강하고 빠르게 떨어지면 당연히 더욱 강력해진다.

소녀는 단검을 쌍으로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스킬을 발동했다.

[충격 강화]

지속 시간 동안 모든 물리적 충격을 강화한다.

[히어로 랜딩]

발동의 순간 대략적인 충격의 범위가 보인다.

저택의 25% 정도를 덮는다.

일단 목표는 회복의 샘.

[낙하 가속]

약 0.1초 만에 소녀는 회복의 샘에 도달했다.

지진이 일어났다.

* * *

대충 지금이겠네 하며 박쥐로 변해 흩어졌다.

대지가 진동한다. 더 이상 난쟁이들은 나에게 사격을 가하지 못했다.

비행 중이기에 대지에 가해진 타격으로부터 자유롭다.

상상도 못 한 강렬한 진동에 대부분은 넘어가 있다.

회복의 샘 쪽을 보니 이미 로켓과 고압 노즐로 공격을 가하던 난쟁이들이 유명을 달리한 후다.

소녀가 나를 보고 윙크한다. 그러다가 살짝 비틀. 아닌 척하지만 꽤 힘들어한다.

체력 소모 자체는 어마어마하게 컸으리라.

[대시]만 가지고 거기까지 올라갔다. 거기에 아마 착지의 순간에는 몸이 박살 났을 것이다.

이 정도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위력을 낸 건데 사람은 그 높이에서 추락하면 죽는다.

회복의 샘 위로 떨어지라고 말해뒀으니 즉시 회복되었겠지만 말이다.

바깥을 보자 지진 덕에 놀라 웅성웅성하는 녀석들이 보였다. 저놈들은 못 들어오는 녀석들이다.

이건 인식의 문제다. 이곳에 뭐가 있는지 뻔히 알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이 저택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회복의 샘은 출현하는 순간 주변을 가리는 구조물과 함께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처리된다.

멀쩡히 볼 수 있는 유배자나, 이미 유배자가 길을 뚫어준 다른 NPC가 통과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한 계속 유지되리라.

아니면 우리가 떠나 샘 자체가 사라지거나.

보여줄 필요는 없다. 저택의 상공을 넘어서지 않는 수준에서만 전투를 진행…….

어떤 놈들이 들어왔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뱀파이어다. 녀석이 저택에 들어옴으로써 주변인들의 인식을 바꾼다. 이곳은 이제 저택으로 제대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옆에 다른 녀석이 하나 있다.

입장하는 모습을 본 다른 난쟁이나 뱀파이어들도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귀찮군.

* * *

"무너지잖아?"

영감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며 같은 유배자들을 돌아보았는데 이중 가장 경력 있는 유배자인 사냥꾼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다.

여신이 충격을 경고했기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택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은 정신적으로 충격적이다.

하물며 이 저택은 결코 내구도가 낮지 않다. 영감님으로서는 설명을 들어도 모를 기술적 발전이 느껴진다.

아까 후려친 철문만 해도 단순한 강철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흔들흔들하더니 무너진다고?

"위대한 전사는 많이 보아왔지. 개중에는 무기로 땅을 긁어 바위의 해일을 만들어내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지진은 좀 다른 문제다. 주술사로서 기본적인 힘의 크기에 대한 것은 안다.

지진은 정말로 다른 문제다.

땅거죽을 갈아엎는 것같아 보여도 표면을 압도적인 완력으로 긁어내어 날리는 정도이거늘.

"유배자는 정말 놀라운 존재들이군."

이게 그 마인드맵을 통한 [스킬]의 조합을 통해 나오는 시너지라면.

유배자들이 미궁의 주민들은 NPC라며 멸시하는 것 또한 이해는 간다.

영감님은 거의 무주공산이 된 저택을 달리며 물었다.

"거 나는 유배자 못하나?"

"글쎄요, 저는 모르지만 또 저기 리더라면 알지도 모릅니다."

"나도 좀 해보고 싶어졌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찮은 버러지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힘이라면 피가 끓는군."

망치를 내려친다. 번개가 땅을 타고 달린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난쟁이들이 감전되어 버르적거리며 쓰러진다.

푹푹 찌르며 지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병사 중에는 인간도 몇 명 있었다. 꼬맹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면서 피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인상을 쓴다.

사냥꾼은 밀크티가 아쉬운 모양이다 하고 생각했다.

무기고를 찾는 것은 포기했다. 우선 저택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저택의 잔해를 엄폐물 삼아 농성하는 것이 좋다.

창문을 발견하여 다 같이 깨고 나갔다.

꼬맹이와 꼬마 마법사가 솜씨 좋게 착지할 수 있게 마법을 구사한다.

마법진이 떠오르며 떨어지는 속도가 느려졌다.

바깥도 개판이었다.

땅이 쩍쩍 갈라지며 정원이 작살이 나 있다.

소녀가 달려왔다.

"저 짱 세요! 완전 쩔어요! 엄청 굉장해!"

"그렇게 적당히 말해도 되는 광경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냥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밖으로 나왔지만 사격은 없었다. 난쟁이들의 시체만이 보인다.

미리 알지 못하는 채로 지진에 노출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광역 기절이나 다름없다.

그러면 소녀의 모습을 한 사신이 찾아오는데 충분한 시간이다.

뒤편으로 저택이 흔들흔들하더니 주저앉기 시작했다. 위험하니 더 멀어져야 했다.

그런데 앞으로 쏟아지는 적들이 있다. 아까 함께 들어온 인원이 아니다.

"엄폐!"

사냥꾼이 소리치고 다 함께 저택의 잔해로 다가간다. 꼬맹이는 기절하여 축 늘어진 난쟁이 무기상을 인형처럼 흔들며 따라 들어왔다.

뱀파이어들도 총을 들고 있다. 그다지 질이 좋아 보이진 않지만 무언가 광선이 나갈 것 같은 물건들이다.

난쟁이들이 사용하는 것과 비교해도 질이 떨어져 보인다.

"저길 헤집는 건 자살 행위겠지요?"

"평지에선 참으라고 리더가 항상 말했지 않습니까."

스스로가 만들어낸 참상에 소녀가 잔뜩 흥분해 있다. 사냥꾼은 최선을 다해 말려야 했다.

하늘 위를 날던 박쥐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박쥐들은 땅으로 처박히더니 폭발했다. 이 또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추가 병력들이 기겁을 하며 물러난다.

사냥꾼과 막내가 사격으로 지원했다.

박쥐들이 일으키는 무속성 폭발에 비틀거리던 뱀파이어 몇몇의 머리가 날아갔다.

이쪽으로 대응 사격이 곧바로 날아온다. 엄폐물인 바위가 치익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수류탄을 좀 까 넣어야겠는데."

무기고를 발견하기 전에 작살이 나버린 게 문제가 크다.

딱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무기고가 꼭 저택 내에 있을까요?"

꼬마 마법사가 저택이 무너져 내려 시야가 어느 정도 트인 덕에 보이게 된 것을 가리켰다.

입구와는 먼 방향으로 지하실의 입구 같은 것이 하나 보인다. 무언가로 숨겨져 있었던 것 같은데 개박살이 나서 드러났다.

"저긴가?"

파티는 이동을 시작했다. 리더는 무기고를 가능하면 찾아보라고 했다.

"그럼 저는 여기 숨어서 시키는 거 할게요?"

"그러십시오."

소녀가 남아서 손을 흔든다. 다들 기가 질린 표정이 되었다.

오크조차도 총탄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저리도 해맑게 손을 흔들지는 못할 것이다.

* * *

안 좋은 소식이 하나 늘었다. 뱀파이어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프로보리 클랜.

전사에 특화된 혈족이다.

그리고 처음의 뱀파이어와 함께 들어온 녀석은 아마도 클랜 마스터.

녀석의 검에 스륵 하고 빛이 씌워진다. 과학의 산물 따위가 아니다.

초자연적인 절삭력과 내구도를 내는 검사의 빛.

[오러 블레이드]다.

녀석이 한 번 벨 때마다 박쥐가 거의 열 마리씩 사라진다. 이 짓도 못하겠군.

소드 마스터 뱀파이어 따위의 설정을 가지고 나오는 건 하나밖에 없다.

프로보리 클랜의 클랜 마스터.

그런데 얼굴이 아주 낯익다.

한 번 본 얼굴은 그 회차가 넘어가기 전에는 잊지 않아야만 하는 것이 고수의 소양이다.

미래에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까.

박쥐 폭격을 멈추고 몸을 모아 나타난다.

바로 사격이 날아오지만 클랜 마스터가 가로막았다.

"유배자가 행패로군! 내 친우의 저택까지 무너뜨리고 어찌!"

이 새끼 묘하게 연극조인데? 아니 진짜 어디서 봤더라.

놈이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을 때 깨달았다.

폭발을 일으켜 튕겨낸다. 언젠가의 더스번과 바르바로이처럼.

세 번의 합이 지나가고 다시 서로 물러섰다.

나는 말했다.

"야, 너 동문 수비대장이지?"

용암망치 대대가 쳐들어왔던 국경의 성에서 수비대장 하던 놈인데. 귀찮음이 뚝뚝 떨어지는 인상이었어서 기억이 난다.

이놈이 클랜 마스터였나?

"무슨 개소리냐?"

프로보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아니, 너 나 알잖아. 임마!"

"모른다!"

양상은 4층에서와 비슷했다. 뱀파이어 소드 마스터는 인상을 바짝 쓰며 덤벼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피를 해방했다.

몸이 피로 녹아들며 소드 마스터를 휘감는다. 그리고 묶었다. 피할 수 없다. 이건 유체니까.

베면 베이긴 하지만 오러 블레이드는 결코 면을 공격할 수 없다.

애초에 전사에게는 상극이나 다름없는 형태의 권능이다. 바르바로이가 이렇게 활용할 줄 몰랐을 뿐.

그대로 꽉 묶인 다음에 심장을 피의 가시로 겨눈다. 언제건 죽일 수 있도록.

한순간에 제압당한 소드 마스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내 기억 속의 귀찮음, 나태함, 권태로움이 표정에 돌아왔다.

"에라이. 되는 게 없네. 거 형씨 스쳐 간 인연도 인연이라는데. 한 번 살려줍쇼."

죽일 거면 죽이시던가. 하는 지친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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