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24화
12층 - Lv.1350 데미 리치 샤크마(6)
샤크마의 앞에 나타난 것은 당연하게도 그 마투사와, 오크 주술사였다.
이 어둠을 끼고도 자신을 억제할 최소한의 전력.
하지만 그마저도 가소롭다.
샤크마는 인사 대신 미리 구현하고 발현만을 막아두었던 마법을 퍼부었다.
불과 번개가 휘몰아친다.
바닥에는 얼음이 깔렸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마법을 짜 올린다.
찬연한 푸른 화염이 실체화된 어둠조차 불 사르며 솟구친다.
[헬 파이어]
마력의 격류에 대기가, 어둠이, 공간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다음 순간 샤크마는 순간이동으로 몸을 피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가 내쏜 푸른 화염의 덩어리가 손을 떠나는 순간 역으로 침식당했다.
그가 있던 자리로 그대로 반전하여 쏟아진다.
등골이 오싹하다.
이건 주술의 영역이다. 남의 마법을 제어하는 것.
그러나 이렇게까지 실시간이라니. 그 마투사에게 주술사로서의 역량도 있나?
하지만 사정거리가 짧을 것인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뒤편에 마투사가 나타났다. 그 공격은 무시해도 좋다. 그 정도의 마법 저항을 가진 것이 데미 리치다.
무속성의 폭발이 덮쳐올 것이라 생각했으나.
번개가 번쩍인다.
뱀파이어의 손에 성스러운 유물이 들려 있다. 본인의 팔도 끊임없이 불타고 재생한다.
광기에 찬 공격이었다.
지근거리의 어둠이 모두 걷힌다. 신성한 번개는 어둠을 손쉽게 찢어발겼다.
주술사가 도끼를 들고 달려온다. 어떤 마법의 보조가 있는지 쏜살과도 같다.
리치는 당황했다.
그가 상정하고 있던 포지션이 아니다.
몸을 태우는 번개를 마력으로 중화해 내며 밀어낸다. 그러며 도리어 상대에게 손을 뻗었다.
뼈로 된 손이 내뻗어진다.
산 자라면 닿는 순간 영혼조차 빨아들여 시체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접촉 공격이다.
죽은 자여도 마찬가지다. 영혼을 가진 시체가 언데드이기에.
번개를 뚫고 뻗어오는 팔을 사내는 망치를 휘둘러 받아내려 했다.
리치의 손가락 끝에서 이글거리는 푸른 화염이 피어오른다. 태양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업화가 유물 망치에 가 닿았다.
놀랍게도 불꽃이 [묠니르]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망치가 녹아내린다.
그 시점에서 리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 번개는 그 신성한 번개가 아니다. 차라리 속성을 부여한 마투사의 폭발과도 같은……?
옆으로 [대시].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늦었다.
오크 주술사의 도끼가 리치에게 닿았다.
그쪽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어둠을 가르며 내리찍는 천벌.
공기가 작열했다. 이온화되어 너울거리는 플라즈마의 조각이 사방으로 튄다.
리치는 아주 한순간 의식을 잃었다.
* * *
안타깝게도 LFV는 샤크마의 몸속에 없었다. 그렇다면 육신을 파괴해도 LFV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리고 파괴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 순간 최선을 다해 물러났으나 그럼에도 감전당하여 리치가 의식을 잃은 한순간에 무언가 할 수 없었다.
영감님은 안타깝지만 전사로서의 역량은 주술사만큼 뛰어나지 못하다. 물리적 타격보다는 오로지 무기의 성능에 의지한 일격이었다.
그나마 주술적으로 제어된 묠니르의 번개가 미쳐 날뛰며 데미 리치의 육신을 불사른다.
그럼에도 화력이 모자랐다.
리치의 몸에 언제나 감도는 시각화될 정도로 짙은 마력이 급격히 부풀어 올랐다.
꽃가루처럼 미세하게 떠다니는 샤크마 특유의 마력이 폭발했다.
물리적인 충격은 없었으나 마법적인 충격은 심대했다.
나는 멀리 날아가 처박혔고 영감님도 바닥을 굴렀다. 억센 오크의 팔이 뭉개진다.
나이든 오크는 전사답게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망치를 다시 집어 들 수는 없게 되었다.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다.
소녀를 그냥 데리고 와야 했나? 누군가 와야 한다면 지금인데.
리치가 소리쳤다. 마법 그 자체인 목소리에는 힘이 실린다. 의표를 찌르는 시의적절한 활용이었다.
[엎드려라!]
마법이 된 목소리에 영감님의 몸이 따르고 만다. 일어나려던 전사는 그대로 땅으로 엎어졌다.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으나 일어서지 못했다.
나는 재빠르게 리치의 언령(Power word)을 중화해 내었다.
허리가 꺾이다 만다.
이후의 공격이 이어질 것을 대비했으나 공격은 없었다.
"좋아, 이 어둠이 문제로군. 마법으로 감지도 할 수 없고 눈도 귀도 가린 것과도 같다. 분석은 네 녀석을 붙잡아 해보도록 하지."
리치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앞으로 전진하며 간섭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샤크마는 마법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
대지가 찌그러진다.
사방에 날고 있는 박쥐들이 똑똑히 그 모습을 감지했다.
영감님과 내가 발을 디딘 땅의 일부가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단지 마력을 물리력으로 바꾸는 마법조차 아닌 무언가만으로 도시의 일부가 통째로 둥그렇게 도려내어진다.
그대로 도시가 부유하기 시작한다.
공중에 떠 있는 뜬 섬처럼 통째로 잡아 뜯겨 솟구쳐 오른다. 그 위와 주변의 시설들이 붕괴한다.
마법은 아니되 지극히 마법적인 폭력이 사방을 으깨어 뭉갰다.
어둠을 깔아둔 마법도 무너진다. 꼬맹이가 쓰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축인 마법이 말 그대로 힘으로 으깨지는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모양이다. 조금씩 살아 있는 어둠이 걷힌다.
든든한 아군이던 암흑이 단순한 빛의 부재로 돌아가고 있다.
리치는 그런 일을 하며 동시에 영감님에게도 손을 뻗었다.
마법이 아닌 순수한 마력적 충격이 영감님을 강타했다.
영감님은 다시 눈을 뜨지 못했으나.
나는 재빨리 분해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내 몸을 박쥐와 늑대로 분해해 흩어졌다.
리치의 손이 뻗어지는 순간 흩어진 박쥐의 절반이 당해 핏물로 돌아갔다.
바르바로이의 권능에 의해 모두 떠올라 다시 내게 돌아오려 했으나 철저하게 짓이겨졌다.
애초에 마법이 아니니 저항할 수단은 마찬가지로 단순함, 힘일 뿐이다.
그러나 마력의 규모를 비교하자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니 저항할 수단이 있을 리가 없다.
리치가 손을 뻗는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짙은 마력이 뻗어 나왔다. 제어하려고 해보았으나 단단하다.
남은 박쥐와 늑대들도 뻗어 나오는 손아귀에 고스란히 붙잡혀 버렸다.
하나하나 박살이 난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심장에 해당하는 박쥐 한 마리뿐이다.
그 한 마리만큼밖에 남지 않은 내가 리치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가 붙잡혔다.
[피의 샘]도 이제 바닥이 보이려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했군. 괜한 호기심이었어. 역시 유배자는 너무 위험하군. 마법을 구사함에 있어서는 나보다 위일지도 모르겠구나. 유배자여."
박쥐의 날개에 인간의 입을 형성해 대꾸한다.
"호기심을 좀 더 가지지 그랬어. 나랑 마법전도 좀 해주고 말이야."
"그건 네 영혼을 분리한 다음에 즐기기로 하지."
"하, 이건 안 하려고 했는데."
나를 지켜보던 자연의 신이 잠깐 자리를 비켜주었다.
‘여신님 세 번째입니다.’
「오냐.」
세상이 잠깐 멈춰 선다. 시야가 보랏빛으로 물들고 다시 무언가 말하려던 리치도 얼어붙는다.
온 세상을 황사마냥 뿌옇게 만들던 막대하고도 농밀한 마력도 잠시 멈춰 섰다.
‘맵 리롤 좀 돌리죠. 이젠 할 수 있죠?’
「충분히 가능하지. 어떻게 해주면 되겠나?」
한 계층의 형태를 다시 주사위 굴린다.
본래 랜덤으로 굴릴 뿐인 것을 이번에는 내가 설계할 수 있다.
이것 하나 정도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다가 [메인 던전]에서나 사용하려고 했는데 아쉬울 따름이다.
이제 여신님이 재기를 성공했기에 다시는 이런 계약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여신님이 원하더라도 신좌가 용납하지 않으리라.
신성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은 철저하게 월권인 행위이므로 타격도 계속해서 누적이 된다. 만약 여신님이 나서서 하겠다고 하더라도 호의적인 신을 잃을 수는 없다.
애초에 세 번이라는 것도 정말 아슬아슬한 것이었으니까.
마지막 한 번, 딱 한 번을 그 [메인 던전]에서 사용해야 했는데.
그러나 이곳은 미궁이다. 결국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하, 진짜. 이거 이렇게 시간을 멈춰놓고 보고 있으니 이길 만은 했는데. 이 녀석이 생각보다 더 빨리 자존심을 포기하는군요. 마법전 좀 더 해줄 줄 알았습니다. LFV를 다른 곳에 두고 왔다면 시간 벌이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뭐 어떠냐. 살아남아 다음으로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유배자에게 있는가.」
‘정말 도전자스러운 발언이시군요.’
「너만 할까. 그런데 이상하군. 미래의 네가 보낸 파티원이 하나쯤 와 있는 게 옳지 않으냐.」
그러게 왜 아무런 소식이 없을까요.
입맛을 다시려고 했으나 권능에 의해 정지한 시간 속에서는 나 역시 움직일 수 없다.
눈동자도 움직일 수 없으나 조금 먼 곳의 하늘 정도는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이 하나 보였다.
‘여신님? 제 시야 보이십니까?’
「왜, 뭐.」
‘저게 뭡니까?’
「……새? 일 리는 없군. 사람, 아니 저런 빛을 낸다면 천사?」
멈춘 시간 속에서 데미 리치의 뒤편 아주 멀고, 높은 허공.
어두운 밤에도 빛을 내뿜고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태양이나 달은 아니다. 그것은 이 행성에 없다.
별도 아니다. 별이라기엔 너무 밝았다.
이를테면 희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신님께서 잠깐 침묵을 한 끝에 말했다.
「권능 사용 취소할 테냐?」
육신이 온전했다면 기쁘게 웃었으리라.
천사, 그리고 소녀.
그렇다면 이 리치를 상대로는 그보다 상극일 수 없다.
역시 나야. 저런 걸 보냈군. 아니 왜 그런데 이제 오는 거지? 왜 저렇게 멀리 있었던 거지?
이 녀석 역시 길 잃었잖아. 큰일 날 뻔했네.
* * *
소녀의 감각에 신호탄이 잡혔을 때, 그녀는 방향을 조금 잘못 잡고 있었다.
멍청하게 저게 뭐지라는 생각을 약 5초.
그리고 아하 하고 방향을 틀었다.
전력을 다해 비행을 하는 천사는 음속을 돌파한다. 소리를 뒤로 남기고 전진하는 앞에 과연 잿빛의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은 천사의 장애물이 될 수 없다.
기천사의 시야에는 빛 한 점 없는 지상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날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벌어졌다.
실체가 있는 어둠이 뭉클거리더니 잠시 후에는 땅의 일부가 통째로 뜯겨 나가 떠오르는 것까지 보였다.
줌인까지 가능한 무시무시한 시력 덕에 그것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충분히 거리가 가까워지자 허공에 떠오른 대지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보였다.
"위기잖아!"
생각해 보면 자신이 12층에 있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하긴 했다. 길을 잃어 꽤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고.
"역사는…… 반복되는 구나."
서글프게 중얼거리며 소녀는 더욱 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가속했다.
동시에 스킬 발동.
[충격 강화]
[낙하 가속]
[초신속]
[신성한 분노]
마지막 것은 켰다가 다시 껐다. 이런 거에 뱀파이어인 아저씨가 휘말리면 구해내기 전에 즉사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의 권능도.
"시간이시여!"
[시간 정지]
세상의 시간이 잠깐 멈춰 선다. 단순히 신의 권능이 임할 때 시전자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시간이 아니다.
시전자만이 움직이는 정지한 세계 속에서 소녀는 가속하고 또 가속했다.
소리는 이미 아득하게 따돌렸다. 두 눈에 보이는 시야마저 일그러져 보인다.
핀 형태의 날개가 사정없이 진동한다.
일반적인 인간의 시각으로는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도시가 매 순간 다가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근 상위 스킬로 대체한 광역기.
[슈퍼 히어로 랜딩]
한 명의 천사가 정지한 시간 속에서 빛이 되어 도시에 내리꽂혔다.
어둠이 걷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