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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66화 (266/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66화

43서버 – Lv.568 용사 키우기(2)

시무룩해진 제니를 본다.

로건을 봤고, 제니를 봤다.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다.

포기해 버린 사람은 많지만 함께하던 사람이 저렇게 포기해 버리는 것은 또 감상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까지 포기한 적이 없다. 그러니 무수히 많은 동료들이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장면을 보아왔다.

아니, 사실 나도 중간에 잠깐 정신을 놓았던 적은 있지.

1층의 천장은 별빛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구조물이고 그걸 멍하니 지켜보는 것도 썩 나쁜 일은 아니다.

그에 비한다면 이미 왕국에 도착한 것으로 로건은 포기한 것이 아니다.

목표가 조금 작았고 그 목표에 도달했을 뿐이다.

제니에게도 아마 낯선 일은 아닐 것이다.

그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 것이겠지.

에길을 슬쩍 보았다.

그 역시 무언가 고심에 찬 얼굴이었다.

이럴 경우 내버려 두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좋아. 에길이 알아서 하겠지.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용사가 떠난 방향을 아직도 지켜보고 있는 러셀에게 갔다.

“러셀, 좀 물어봅시다. 미래에서 용사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을 좀 해봤었다면서요.”

“그래. 아는 건 다 이야기해 주지.”

“아니, 그렇게 다 알려줄 필요는 없고…….”

“별로 전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네?”

그건 좀 흔치 않은 일이다.

지금 같은 정세로 흘러가 버린 상태에서 인간의 영웅이 될 용사의 흔적이 흐릿할 이유가 없다.

특별히 그러기를 원하는 유배자가 공작을 벌였을 수는 있겠지만, 집단으로 그럴 이유도 없다.

용사는 영원불멸의 신화로서 구전되는 게 보통이다.

“행적이 중간에 뚝 끊겼다. 모든 일을 마치고 자취를 감추었다는 식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않더군.”

“대강의 연대가 있습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래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

지금 용사가 태어난 43서버의 시간대는 기준점인 중세 판타지로부터는 100년 정도가 지나 있다.

그럼 용사로부터 약 400여년 후가 러셀이 정보를 수집한 구간일 텐데.

“전쟁이 끝나고 종적을 감추었다는 식이던데, 흔적을 좀 더 캐봤지. 전쟁은 인류의 승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의 타협으로 끝났다. 그런데…….”

그걸 더 캘 수가 있다고? 수준이 전문가입니다.

“나이트 크로우의 흔적도 그 시점부터 사라졌다.”

“그거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군요.”

“그래. 아마 일종의 파벌로 간주된 것이 아닌가 싶다.”

“토사구팽이라니 이것도 드문 일인데.”

“네놈을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은데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러셀이 내 파티원들을 가리킨다.

“조금 전의 전투를 연습이나 훈련 취급하는 꼬라지를 보니 네가 기를 용사가 어떻게 될지 알 것 같더군.”

“아, 저는 적당히는 안 합니다. 시간이 없거든요.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원래 용사란 건 저 어디 꼬리 달린 전투민족처럼 죽었다 살아나면 더 강해지니까요.”

“바로 그게 문제야.”

너무 강해서 문제라고? 아니지. 달리 생각하면 그 전력을 가지고도 인류가 승리하지 못한 것이다.

나라면 분명히 비대칭 전력 수준으로 만들어 낼 텐데.

적이 핵을 쓰는 걸 알게 된 이상 그 정도는 대응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건 충분히 이상하다.

“내분이겠지. 네가 만든 용사가 인류를 포함한 모든 종족에게 재앙으로 보이는 결과라도 나왔을 거다.”

이건 또 새로운 발상인데.

용사는 사실 내가 아주 열심히 건드린 분야는 아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내가 파야 할 곳은 내가 강해지기 위한 영역들이었다.

고로 나는 게임 시절의 이벤트로서만 구현되어 있던 루트까지만 파악하고 있다.

제작진들이 아무리 악랄해도 용사가 마왕이 되는 루트는, 아니, 있긴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거 신빙성은 얼마나 됩니까?”

“겪어보았다.”

“오호.”

러셀의 지금까지의 행동거지로 보아서 믿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일단 나를 배신할지언정 인류나 용사를 배신할 양반은 아닌 것 같다.

지금도 저거 봐라 습관적으로 나이트 크로우 휘장 닦고 있잖아.

독립부대를 이끌던 더스번 경보다 한 급 높아야 가질 수 있는 휘장인데. 아마 진품이겠지? 어느 서버의 것인지는 몰라도 말이야.

“그게 미궁에서 나올 수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래. 씁쓸한 결과지.”

뭐 아직까지는 억측이다. 실제로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봐야한다.

“혹시 좀 바꾸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있습니까?”

“아니, 완전한 승리는 결국 인류를 썩어들게 만들지. 다른 종족은 여전히 남아있는 편이 좋다. 주도권을 쥐고있는 정도가 딱 좋아.”

음모론이 있다면 이런 양반이 주인공일 것이다.

일루미나티가 따로 없군. 남의 사상에 간섭할 생각은 없다.

“그럼 결국 달라지는 건 없군요. 하려던 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다만…….”

“다만, 뭡니까?”

“저 소년이 행복할 수는 있으면 좋겠군.”

“고려하도록 하지요.”

* * *

돌아와서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일단은 전 우리 파티였던 두 사람이나, 엔젤이 아니다.

“뭔가? 오랜만이군.”

레미의 의술 스승이자 현재 본의 아니게 혼돈의 교단의 중진 취급을 받고 있는 의사 양반이다.

노의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혹시 방사능 관련으로도 잘 보십니까?”

“바깥에서? 아니면 여기에서?”

“여기 말입니다.”

“하아, 어디 데려와 보게나.”

“못 데려옵니다. 히어로 유닛이거든요.”

“그럼 내가 가야 하나? 장비 없이는 못하는데.”

그리고 노의사의 시선이 관련 장비를 해체해서 차원 수납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는 미아를 본다.

“무슨 짓인가!”

“어허, 우리가 사준 거 아닙니까.”

“아니, 대체!”

“43서버의 여러 목숨이 달린 문제거든요.”

“허, 후원자님이 그렇다면 내 따라야지. 그래도 다음엔 좀 더 절차를 지켜주면 좋겠네.”

미궁에서 의사가 의외로 수요가 존재하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다.

포션은 틀림없이 만능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칠 수 없는 부상이나 병이 생기는 법.

유배자가 아닌 NPC들에게는 한없이 귀할 수도 있는 게 포션이다.

그런 이들은 결국 의사를 찾게 된다.

그리고 나는 용사의 목숨에 달린 일에 나 자신을 믿을 생각이 없다.

전문의가 있다면 맡길 수 있지 않겠는가. 소드 마스터까지 도달할 정도의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끝에, 의사로서 정착한 이 노의사라면 믿을 수 있다.

거기에 용사란 근본적으로는 전사인 존재다.

노의사는 황당해하면서도 나를 따라왔다.

자,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우리 용사는 NPC이며 그의 삶 전반을 우리가 훑게 된다하더라도 시간대는 랜덤으로 튀어댈 것이다.

이상한 시기로 가서는 안 된다. 바로 직후로 가야 한다.

다른 파티원들은 쉬게 놔두고 나와 미아, 그리고 제니, 러셀만이 후다닥 달려갔다.

제니가 용사의 낡은 검을 바친다.

부유감과 함께 도달한 곳은 아주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용사의 앞이었다. 몇 달 쯤 후인가?

개울물이 졸졸 흐르는 곳에서 여전히 나이트 크로우의 차림으로 야영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주변의 대원들로 보이는 다른 이들이 우리를 신기하다는 듯이 본다.

“앗, 어쩐 일이십니까? 주어진 과제는 아직…….”

“오, 그 일 때문에 온 게 아니야. 전에 들은 적 없어?”

“어떤 것을……?”

용사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주섬주섬 자신의 망토를 고정하고 있던 떼서 브로치를 내밀었다.

망토라니, 아주 용사다운 장비로군.

아마 키 아이템을 꼬박꼬박 줘야한다고 교육 받은 모양이다.

“방사능 어쩌고 이야기 들은 적 없어?”

“아, 피폭 관련이라면 꾸준히 치료 받았습니다.”

“위험하진 않았나보네. 지금 그 시점의 너를 찾고 있거든.”

“아하, 저번에 들은 이야기가 이거였군요. 이걸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내민 것은 내 기준으로는 조금 전, 용사 기준으로는 몇 달 전에 돌려받았을 사진이 든 로켓이었다.

“이거야?”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제 삶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때 이걸 다시 돌려받았으니까요.”

“흠, 그런 식이면 아마 그 시기로 이동하긴 하겠지. 하지만 이걸 이렇게 써도 되나?”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게 가족이라고 해도…….”

“아…….”

그렇겠지. 가족이 있었다면 후에 인질로라도 잡혔을 것이다. 그렇다면 러셀의 추측 같은 결말은 맞이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생각해보면 나에겐 나쁘지 않은 결말이다.

그런 식이면 히어로 유닛이 아니게 될거 같거든. 내 마음대로 옮길 수 있단 말씀.

“그래, 뭐 힘들겠지만 고생해라!”

“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재빨리 리프트를 빠져나온 후, 다시 로켓을 투입.

용사의 생각대로 정확히 그 시점에 도달했다.

* * *

로켓을 준 용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바쁘시구나…….”

수줍지만 말해보려고 했다.

제 가족은 여러분인걸요. 같은 말을.

잠깐 망설이자 효율 중시의 스승님은 후다닥 이것저것 처리하고 사라져버리셨다.

신참 대원 하나가 신기해하며 다가온다.

모두 그보다 연상이지만 실력으로, 혹은 저 스승이 부여하는 시련으로 인정받고 있다.

“저 분이 리온 대장의 유배자 스승이라는 분이군요.”

“아, 그렇죠. 신기하죠?”

“네. 유배자들은 원래도 신비로운 이들이지만 이렇게까지 가까이서는 처음 봐서…….”

“아직 이름도 말해주지 않지만 제게는 가족 같은 분들이에요.”

“저렇게 살갑게 챙기는 건 처음 봤어요. 유배자들은 다 좀 뭐랄까.”

“그러게요.”

이미 소문이 날대로 났다.

강력한 유배자 파티 하나가 싸고도는 나이트 크로우 대원이 하나 있다고.

“어이, 대장, 천사님은 안 오셨네?”

“아하하…….”

다른 소문도 나 있다.

* * *

짝수 층은 이미 다른 유배자가 진입하여 ‘맵’을 형성하고 있다면 다른 유배자가 끼어들 수 없다.

그것은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한 NPC의 삶과 행적을 모두 추적하려면 끊임없이 리프트를 드나들며 수없이 맵을 생성해야 한다.

러셀이 원래 홀몸으로 다른 용사 후보생들을 지켰던 방식도 이것이다.

물샐 틈 없이 짝수 층으로 진입하여 러셀이라는 유배자가 만든 맵으로 한 NPC의 인생 전체를 포장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유배자는 간섭할 수 없게 된다.

다만, 그는 심연의 성물의 존재로 인해 실패했다.

그래서 그는 이겨낼 전력을 찾아 우리를 기다렸다.

미래에서 수집한 정보대로라면 우리가 유력하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자, 리온. 거기 딱 멈춰봐라.”

“네? 네에?”

몇 달 어린 용사.

우리가 구해준 그 시점으로부터 며칠도 지나지 않은 수준의 용사가 어리둥절하게 우리를 본다.

위치는 이제 막 황폐해진 땅을 벗어난 정도였다.

“지금부터 건강검진 들어간다.”

노의사가 황당해하는 가운데 미아와 제니가 각종 촬영 장비나 검사 장비를 뚝딱뚝딱 꺼내서 깔아두기 시작한다.

“그, 전력은 어떻게 할 셈인가?”

미아가 바람처럼 마법진을 그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앉아서 노의사에게 윙크를 한다.

엄지 손가락도 척 하고 세운다.

노의사가 황망해한다.

“수동으로? 그런 장비를 움직이는 전류를 마법으로 즉석에서 공급한다니! 그게 가능 할 리가 있나!”

제니가 스위치를 올리자 위잉 하고 장비가 가동하기 시작한다.

“되니까 빨리 같이 저 아이의 몸이 멀쩡한지 확인해 봅시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돕죠.”

러셀과 제니도 거든다.

“외과적 수술이라면 나 역시 보조는 할 수 있다.”

“하하, 저는 불청객이 오지 않도록 감시하고 있을게요.”

노의사는 이마를 짚더니 진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깥에선 무슨 전문의셨습니까?”

“외과였지. 하지만 결국 뭐든지 다 해야 했어. 어딜 가나 야전 병원이나 다름없는 판에 말이야.”

노의사가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미궁의 사람은 바깥보다 훨씬 더 튼튼하지. 구할 수 있는 생명이 많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그건 맞는 말이다. 어느 정도 고레벨인 유배자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죽을 상태에서도 걸어 다닐 정도로 튼튼하니까.

용사 같은 NPC는 더하다.

사실 큰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용사 후보생이란 것들은 희우만큼이나 초인적인 존재들이다.

후유증을 고려하여 신중한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여러 가지 마법적 야매가 더해진 끝에 용사의 건강검진은 끝났다.

대체로 멀쩡하지만 우려되는 곳도 많다. 일단 영양실조의 조짐이 보인다는 점이 놀라웠다.

“아니, 이 생각을 못했네!”

“나는 했다.”

러셀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어, 그거 뭐 무협에 나오는 벽곡단 같은 거요?”

“그거보다 훨씬 영양가 있는 내 특제 전투식량이지.”

용사가 영문도 모른 채 러셀이 쥐어주는 동글동글한 덩어리를 삼켰다.

끔찍하게 맛이 없는 모양인지 고통스러워한다.

러셀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휘장을 보여줬다.

조직 내에서 엄청나게 높은 지위를 뜻하는 것이기에 용사가 바짝 얼어붙는다.

“물이다. 함께 삼켜라. 그리고 잘 먹고 다녀야 한다. 한참 클 때니까.”

지친 표정의 노의사가 내게 물어본다.

“혹시 이거 꾸준히 해야 하나? 내가 저 아이 주치의라도 되는 건가.”

“검진 정도입니다. 검진. 이 동네 위생 상태부터 해서 여러 가지를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현대의학 만세 아닙니까.”

“후우, 후원자님 말씀이니 따라야지.”

용사도 조심스럽게 묻는다. 러셀에게.

“저, 혹시 계속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는 겁니까?”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겹도록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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