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71화
43서버 – Lv.3365 언더 그라운드(1)
집요한 디테일을 추구하는 게임들을 하다보면 뭐 이런 부분까지 구현했나 싶은 부분이 있을 때가 있다.
설정 상으로만 존재하는 어떤 것들, 결코 어디서도 명시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지만 겪은 후에는 ‘아 그렇구나.’ 하게 되는 부분.
“이것도 그래. 명시적으로는 알려주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기천사를 누가 만들었겠냐 그거지.”
“어? 저 만들어진 존재인가요?”
“진정해. 단지 그런 설정을 가지게 된 거지.”
미궁에는 이상할 정도로 미래적인 디자인을 가진 것들이 있다.
그게 실제로 서버의 미래에서 온 것이라면 문제없겠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중세 판타지 월드부터 존재하던 유적들은 대부분 고대 요정 제국의 흔적들이거나, 그와 비슷한 시기 융성하였던 어떤 이들의 흔적이다.
히든 던전의 보스 몬스터들도 그러하다.
그것들은 더 마법이 융성했던 시대의 흔적이다.
용의 근연종이라고 해보아야 고작 그리폰인 중세가 아닌 고대.
좀 더 많은 용의 근연종과 어떤 의미로는 용조차도 초월한 생명체들이 날뛰던 시절.
하지만 미래의 우주 개척 시대에 발견되는 히든 던전들은 그 결이 전혀 다르다.
어느 서버나 과거에 요정 제국이나 엇비슷한 기반의 문명이 우주로 진출한 사례는 없다.
[언더 그라운드 유적]이 선주 문명이란 건 그런 의미다.
각 서버의 우주에는 대륙의 주민들로 통칭되는 일반적인 NPC가 아닌 무언가들이 있다.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으면 그 존재를 아는자도 드물다.
게임 시절에도 맥거핀에 가까웠다.
그것들이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유산을 우주 곳곳에 남겨둔 것이며 플레이어는 그걸 알아내서 활용할 뿐이다.
지극히 편의주의적 설정이다.
게임일 땐 말이다.
“이젠 좀 다르긴 할 텐데 말이지. 미궁은 분명히 실존하고 있으니까.”
“오빠도 그건 잘 모르나요?”
“몰라. 맥거핀이었다니까.”
“맥거핀이 뭔데요!”
“중요한 거긴 한데 뭔지 안 알려주는 그런 뒷 설정 같은 거? 존재하는 것만으로 중요할 뿐인 그런 거지.”
“좀 알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래서 희우는 선주문명이 창조한 종족인 기천사다.
사실 다른 천사들도 혹은 악마조차도 창조된 종족이 아닌가 싶긴 하다.
정상적인 종족은 아니지 않나.
물리현실에서 그런 내구도를 가진 게 왜 존재 하냐고.
NPC 천사나 악마들의 반응도 그렇다.
그 녀석들은 뭔가 알고 있거나,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천사는 후자야. 아무 생각도 없는 녀석들이 많지. 몽환의 숲에서 봤던 천사들이 뭔가 생동감이 있었어?”
“굉장히 기계적이었죠. 마법사였던 대천사도 그랬고요.”
“그러니까 여길 들어가서는 네가 움직여야 해. 적어도 천사는 너에게 선공을 가하지 않아.”
“같은 천사라서요?”
“맞아.”
당연한 일이다.
요정인 유배자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요정들 사이를 걸으면 적어도 선공은 당하지 않는다.
오크인 유배자가 그러면? 화살 꽂이가 되겠지.
“그 비유 뭔가 무서운데요. 그럼 여긴 정확하게 말하면 던전이 아닌거네요?”
“오, 그 부분을 캐치하다니. 똑똑해지긴 했어. 맞아 여긴 그냥 천사들의 거주지 같은 느낌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기획자들은 여기에도 스토리 라인을 추가할 생각이 있었던 것일까?
은거한 오래되고 강력한 종족의 본거지.
뭐 그런 거 느낌 있지 않는가.
일단 나는 모른다. 게임 시절에도 없었고.
“그러니까 움직이는 법 연습하자.”
“연습까지 해야 해요?”
“그 기계적인 움직임 기억 나?”
“네.”
“그렇게 움직여야 해.”
직접 해본 적이 있어서 전수할 수 있다.
내가 기천사였던 시절에는 직접해야했으니까.
고위종족이 좋은 건 꼭 자체 성능만이 아니다.
더 강한 존재들과 좋은 관계를 쉽게 만들 수 있거나, 이런 날먹이 가능해서지.
희우는 곧 연기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막상 시작하면 사소한 것에도 금방 열중하고 즐길 줄 안다.
보고만 있어도 즐겁다는 게 이런 거다.
항상 쉴 틈 없이 뭔가 하고, 뛰어다니고, 쪼르르 돌아다니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사방에 흩뿌린다. 좋다. 정말 좋다.
* * *
[언더 그라운드 유적]이라 불리는 하늘 유적은 확실히 기존에 알던 유적과는 겉모습부터 전혀 다르다.
바닥에 깔린 모래는 어디선가 날아와 나중에 덮인 것이다.
살짝 파보면 언뜻 보이는 재질은 불꽃 반응이 검은 색인 것을 보면 아다만타이드다.
그렇다. 섬 전체가 아다만타이드다.
“이거 떼 갈 수는 없나?”
“그러면 이 섬의 모든 천사가 깨어날걸.”
던전을 파괴하고 들어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수단이다.
“애초에 부수는 것도 엄청 힘들어. 그냥 문으로 들어가는 게 좋아.”
희우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걸어갔다.
비행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비상시가 아니라면 비행하는 천사는 없다고 했다.
검은 아다만타이드의 건축물은 곡선을 완전히 배제한 직선의 연속이다.
곳곳에 솟아있는 거대한 오벨리스크들도 그렇고 마치 검은 관처럼 보였다.
파티원들은 섬 외곽에서 대기한다. 마법으로 이어진 통신만은 유효하다. 희우는 평소에 쓰지 않는 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이 안경을 통해 이곳의 풍경이 저쪽에 비치고 있을 것이다.
여신님은 여신통신은 이제 쓰지 않는 것이냐며 시무룩했다.
안경에 비치는 광경은 삭막하다.
생물이라기엔 지나치게 강한 천사이기에 그런지 마을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직선으로 이어진 복도와 관처럼 놓인 건축물 사이에 먼지가 덮인 천사들이 서있다.
에르메스가 어째서 기천사에게 쫓겨 간신히 살아 도망쳤다고 하였는지 알 것 같다.
대부분은 활동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서있을 뿐이다.
생명체라기보다는 석상처럼.
을씨년스럽고도 장엄한 광경이었다.
희우는 그 감탄을 표현하고 싶었다.
천사는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다. 희우도 그렇게 했다.
그러니 평소처럼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대신 속으로만 생각했다.
“와, 진짜 엄청 많네.”
석상처럼 서있던 천사 몇몇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속으로만 생각하라니까!]
‘와와아앗! 실수했다!’
주목 받으면 아무튼 가만히 서서 경직. 나는 석상이다. 석상이 틀림없다. 무기물이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자 천사들의 고개가 서서히 원위치로 돌아간다.
동족으로 인식하고 있는 덕분이다.
선공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질적인 존재를 감지한다면 가차 없이 공격해오리라.
‘정말 로봇 같네요.’
[걸음걸이 각도가 좀 틀어졌다. 그거 자꾸 반복되면 또 저 녀석들이 반응해.]
‘아차차. 이렇게요?’
[좋아. 계속 걸어가.]
먼 곳에 유난히 거대한 건축물이 보였다.
검게 솟은 탑과도 같은 형태.
하지만 대마탑처럼 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크고 웅장한 규모였다.
새삼 날지 못하는 것이 불편하다. 하지만 곳곳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천사들을 보면 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마 무언가 허가 없이 날아오르는 순간 저기서 뭔가가…….
들고 있는게 뭔진 모르겠지만 투사체가 발사될 것 같은 그런 것이다.
블랑쉐 언니가 좋아하겠네.
희우는 계속 걷는다.
뻣뻣한 걸음걸이를 유지하고 천천히 움직여야 했기에 한참이 걸린다.
겨우 탑의 앞까지 도착했다.
문이 있었다.
닫혀있지만 거대한 문이.
그 높이만 봐도 수십 층은 되지 않을까? 도저히 밀어서 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밀면 밀려. 저거 보기보다 가볍거든.]
‘천천히 해야겠죠?’
[그래.]
문의 가운데에 양 손을 짚고 힘껏 밀었다. 다만 천천히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소리 없이 문이 미끄러진다. 빙판 위로 미끄러지는 것 같다.
어둠은 아니었다. 천사의 시각도 완전히 빛이 없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다만 희미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인간에 비해 훨씬 짧다.
동공이 확장되고 더 많은 빛을 받아들인다.
문틈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들여다본다.
“……!”
입이 경련하며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무수히 많은 실루엣.
탑의 벽에는 좌석이 있다. 대마탑만큼이나 거대한 규모의 탑 모두에 빼꼭하게 차있는 좌석 하나하나마다 천사가 앉아있다.
활동 중이지 않은 것은 티가 난다.
바깥의 천사들처럼 복식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알몸으로 날개를 접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천사들이 있다.
희미한 빛에 점점 익숙해지는 동공이 천장 없는 탑의 저 위까지 비춘다.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 천사가 있었다. 감히 세려고 들 수 없는 숫자의 천사가.
‘이건 진짜 정면으로는 못 뚫겠네요. 여기 천사들이 풀려나기만 해도 이 서버는 멸망하는 것 아닌가요?’
[침입자만 제거하고 나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긴 해. 원래 기믹으로 지나가야하는 곳이야 거긴.]
‘대륙은 안전하군요. 다행이야.’
하지만 지금은 희우가 침입자다.
희우는 눈을 돌리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 이런 전투에 겁이 많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건 아니다.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조심스럽게 탑의 중심으로 움직인다.
지하실을 찾아야 한다. 어디가 옳은 곳인지는 알 수 없다. 바닥은 다 똑같은 곳 같아 보인다.
이럴 때는 행운의 인도가 필요하다.
희우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 동작은 천사답지 않다.
고개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척 하고 절도있게 움직이는 수백 수천의 천사들이 희우를 향해 시선을 맞춘다.
그 밀도 높은 시선은 물리적 압력과도 같다.
손에 잡히는 행운의 성물, 보석 형태의 일회용 성물을 쥐어 깨트린다.
행운을 상징하는 은빛의 신성이 번져나간다.
척하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의 고개가 원위치 된다.
운이 좋군이라고 부를만한 상황이다. 이 성물은 그런 일을 만들어낸다.
다시 하나 더 깨트린다.
은빛의 신성이 희우를 인도했다. 원하는 곳의 입구가 어디인지를 은은한 빛의 꼬리로 가리킨다.
희우는 여전히 품 속에 손을 넣은채 천천히 걸었다. 아직 성물은 많다.
효과가 끝나자 다시 하나 깨트린다. 인도는 이어진다.
탑은 너무 넓었다. 무수한 천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걸어간다.
중심에서 한참 빗겨간 곳의 바닥에 빛의 선이 닿았다.
여기서 이걸 여는 것 또한 주목받을 일이다. 희우는 이번에는 행운의 성물을 주변에 떨어트렸다.
하나하나 원을 그리듯이 둥글게 주변에 놓는다.
이건 운이 좋게 보지 못하는 그런 효과를 내는 걸까?
희우가 자세를 숙이고 바닥을 밀자 다시 행운이 효과를 낸다.
바스라지는 보석들에서 은빛이 피어나 장막을 만들었다.
어떤 천사도 이곳을 보지 못하고 있다.
희우는 날개를 폈다.
진동은 추진력을 만들어내고 묵직하게 밀리며 문이 열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소리가 없지 않았다.
쿠르릉하는 소리가 나며 비로소 던전이 입구를 드러낸다.
이 섬 자체가 단순한 천사 마을이라면 이곳은 비로소 던전이다.
처음에 요정의 숲에서 느꼈던 색다른 공기가 희우를 감싼다.
던전과 일반 필드를 구분하는 기묘한 위화감.
지하실은 계단도 무엇도 없다.
어디까지 이어져있는지 알 수 없는 무저갱.
은빛의 신성이 힘을 다하기 전에 희우는 얼른 그 속으로 들어갔다.
비행을 시작한다.
아래로 아래로.
그리고 마침내 바닥에 도달했다.
바닥에 서서는 반대편의 품속에서 검은 보석을 꺼낸다.
이것은 심연의 성물이다.
[좋아. 이쪽에서도 준비할게.]
지시에 따라 올바른 위치 올바른 방위를 향해 성물이 놓아진다.
대신격의 신성을 빌려 사용하는 전이 마법이다.
공간의 신인 심연의 신의 신성은 통상적으로는 공간이동이 불가능한 지역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과연 대신격! 과연 치트키!
짙은 보랏빛의 포탈이 열렸다.
파티원들이 서둘러 들어왔다. 심연의 신성은 빛을 잃고 사라졌다.
희우가 비로소 안도했다.
“아니, 이거 나갈 때도 이렇게 해야 해요?”
“그건 계단이 어디 있냐에 따라 다르지. 안 그래?”
“어, 그거라면.”
“보스룸에 있겠지.”
“아……. 저 때문인가요?”
“그럼. 못 깨면 탈출도 못하는 거지.”
음, 가끔 생각했다. 역병신마냥 무슨 불운을 불러오는 게 아닌가.
언제나 난이도가 미쳐 날뛰는 꼴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지 않나.
이럴 때는 오히려 도움이 되나보다. 희우는 기분이 좋아졌다.
“자, 다들 장비 점검하고. 여기 안에 있는 천사들은 당연히 바깥보다 더 강하거든. 신을 모시는 제사장의 위치에 있는 녀석들이야.”
“정말 다행이네요!”
* * *
[검은 곰] 길드의 수장, 블랙 베어는 이 의뢰가 수지가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용사를 싸고돌고 있는 녀석들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그 사실을 의뢰주인 [하드스록]에게 전달했다.
며칠 후,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은 삼의회의 용인이었다.
“이걸 줄 테니까 확실하게 처리하고 오라고 하던데.”
“누가?”
“우리 길드 마스터가 그러더군.”
“하, 나 솔직히 하기 싫은데.”
“그럼 마음대로 하지 그러나. 나도 상관은 없어.”
거짓말은 아니다. 용인은 그냥 웃고만 있었다.
블랙 베어는 한숨을 푹 내쉬고 용인이 내민 자루를 받아들었다. 그래서 뭘 쥐여 준 것인지는 알아야하지 않겠나.
자루에선 잘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석인가?
어두운 보랏빛이 은은하게 맴도는 보석이었다.
자루 전체에 가득 차있을 정도로 많다. 이 정도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정도다.
“이건……. 깨작깨작 추적하라고 준 양은 아닌 것 같군.”
“그 정도를 한 번에 제단에 바치면 대충 근방에 떨어져서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바로 옆으로 가지 않겠나.”
“기습하란 말이지. 별로 맘엔 안 드는군. 그럴 거면 암살자들 고용하지 그래?”
“뭔가 이유가 있겠지.”
블랙 베어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이번엔 끝장을 내고 오지. 그 놈의 용사가 뭐라고.”
용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뒤편에서 슈투카와 랭커스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길드의 랭커와 하이랭커 전원을 소집하라는 말도 함께.
용인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 의뢰가 암살자들에게 가지 않은 이유.
그건 시티즌이라서가 아닐까?
‘[하드스록]에서 이번 침공에 시티즌의 그 분과 갈라설 생각이 있나본데. 어디에 줄을 대야하나.’
늘 그렇지만. 생존은 중대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