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79화 (379/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79화

메인 던전 - Lv.9981 천상의 도시(1)

게임의 장르라는 것은 때때로 구분이 불명확하다.

RPG라는 큰 틀 내에서의 세부 장르는 그게 더 심해진다.

미궁 역시 세부 장르가 조금씩 바뀌는 세상이다.

튜토리얼은 정통 로그라이크에 DRPG 요소가 뒤섞여 있다.

왕국 이후는 거점으로서의 ‘왕국’이 존재하는 오픈월드 RPG다.

그리고 마지막인 메인 던전은 또다시 장르가 약간 변한다.

지금까지보다 더 자세한 서사를 가지고 조밀하게 짜인 세상이 나타난다.

좀 더 통상적인 RPG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거기에 RPG의 뜻은 롤플레잉 게임이다.

롤플레잉(Role-Playing)이 무엇인가.

그것은 연기다.

한국에서야 단순히 캐릭터를 육성하는 게임으로만 인식되고 있으나.

본래의 뜻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듯, 그것을 연기하고 또 다른 삶을 간접 체험하는 행위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런 기반하에서 RPG들은 주인공 캐릭터에게 특정 역할을 부여한다.

세상의 구원자, 미궁의 탐색자, 선택받은 영웅 등등.

따라서 유배자들은 메인 던전에 처음 진입하면 각자 다른 형태의 신분을 부여받는다.

지극히 게임적인 요소다.

천상의 도시에서 무너진 교회 스타트라면 우리가 부여받는 신분은 구원자다.

몰락하다 못해 파멸한 베데스다 종파의 구원자.

“좋네. 차근차근 빌드업을 할 수 있는 시작이야.”

눈앞의 낡은 교회는 황폐하다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문짝이 없다. 벽도 무너져 문이 있어도 제 기능은 못했을 것이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을 창은 그 형태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곳에 누군가가 지낸다곤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다.

많은 경우 이런 곳이 이야기의 시작점인 법이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한쪽의 날개 3장이 모두 없는 대천사 노인이 나타났다.

폐허 속에서 나타난 그는 옷이라기보다는 거적데기 같은 것을 걸친 남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눈빛만은 또렷이 빛난다.

불구인 반쪽 날개도 볼품없다기보다는 관록으로 보이게 하는 분위기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베데스다의 사도여. 저는 다른 세계에서 온 유배자입니다.”

“……예언의 그자들인가.”

“그렇습니다.”

[빛과 어둠의 경계]의 시작점은 여러 곳이 있으나 이번은 코인토스로 천사 측 스타트가 결정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데스다 종파의 마지막 희망이 된다.

대천사 노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을 크게 껌뻑였다.

그야 의아할 수밖에 없긴 하다.

파티에 천사인 존재는 하나뿐이니까.

“심지어, 저자는 악마 아닌가.”

하물며 블랑쉐는 악마다.

여기서 어떻게 둘러댈 수 있냐에 따라 전개가 약간 달라질 것이다.

유배자라면 통하는 변명은 있다.

종족 카드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반응을 끌어낼 수단도 존재한다.

“위대한 솔로몬이 사역한 72위 악마를 아시겠지요.”

“사역마라고 말할 셈인가? ……그게 언제 적 전설인데.”

“노인장. 지금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것도 전설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을…….”

메인 던전은 왕국과는 단절된, 한때 왕국이었던 과거를 가진 땅이다.

미궁에 의해 박제당한 그곳은 리셋될 때마다 같은 역사를 반복한다.

사전 지식이 있다면 그들의 문화와 양식에 맞추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더 자연스럽게 호감을 사게 하며 공고한 협력을 구축하게 만든다.

대천사 노인은 떨떠름하게 납득했다.

그에게는 어찌되었건 오랜 예언이 이루어진 순간일 테니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는 아니다.

그렇더라도 이런 식의 태도는 그에게 신뢰를 줄 것이다.

그것은 좀 더 좋은 엔딩을 위한 바탕이 된다.

“예언의 주인공들이 상당히 능글맞군. 그럼 어서 오게. 쉴 자리는 있으니.”

낡은 폐허 속에는 지하실이 있다.

노인은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들어서자 단순한 지하실이라기에는 공간이 상당히 넓었다.

로마 시절 순교자들이 파고 들어간 굴 같은 곳이 생각날 정도다.

멀끔하고 다듬어진 벽돌로 지어진 후 무너진 위와는 다르게, 급하게 만든 엉성한 벽돌과 건축인 것이 티가 났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굴이란 것은 실제로 그랬다.

이 세계에서 베데스다는 멸망한 종파다.

그들은 지엄한 천상의 율법에 따라 이단으로 낙인 찍혔으며 악마와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

멀리 천상의 도시가 보임에도 이런 낡은 폐허에 숨어사는 것은 그래서다.

숨어 지내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어딘가 다치고 망가진 천사들이었으며 노인들이었다.

몇 명이 고개를 들어 우리를 보았다.

그리고 블랑쉐를 보면 인상을 찌푸렸다.

블랑쉐는 뭐 어쩔 거냐는 듯 시선으로 노인들을 훑었다.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노인들이다.

블랑쉐는 피식 웃었다.

도발적이나 도발이 되지는 않았다.

몰락한 종파는 그런 곳이다.

희우가 말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각오했던 것보다는 덜 무섭네요.”

“시작부터 개판 나는 경우도 있어. 악마의 장으로 스타트하고 운이 나쁘면 전장 한복판이지.”

그럼 시작부터 전투다. 그리고 첫 게이트가 등장할 때까지도 계속 전투다.

전쟁 중이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이미 어드밴티지다.

대천사 노인은 점점 깊이 내려갔다.

거주하고 있는 다른 천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인이 아닌 아이도 몇 명 섞여 있었다.

여전히 청년이라 할 인원은 없다.

“지하 몇 층이나 되는 거지…….”

타고난 천성이 천성인 만큼 이런 경우 가장 불안해지는 것은 제니다.

지하를 구성하는 잿빛 벽돌은 그리 튼튼해 보이지 않았다. 폐허 아래의 유적 같은 지하다 보니 군데군데 무너져 토사가 쏟아진 곳도 있다.

살고 있는 천사들이 있음에도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흔적은 없다.

인간이라면 진작 병에 걸려 죽었을 환경이다.

제니의 푸념을 들은 미아가 빙긋 웃더니 손가락을 튀겼다.

아주 옅은 지향성 마력 파동이 저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입구를 기준으로 한다면 7층 정도겠네요.”

대천사 노인이 발을 멈췄다. 그리고 미아를 노려본다.

“뱀파이어 계집! 성지에서 그런 짓을 하지 말도록!”

미아를 앞으로 데리고 와서 머리를 눌렀다.

“죄송합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라서 그만.”

미아도 이제 이런 상황 파악이 빠르다.

상식이 부족한 면모라기보다는 이전의 희우를 닮아 맹랑한 면이 부각되는 꼬마가 되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다만 연기에도 소질이 있다는 게 좀 무섭긴 하다. 나를 보고 배웠나?

누가 보더라도 진실 된 사죄를 담고 있는 어린 목소리다.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노인도 결국 표정을 폈다.

희우가 얼른 미아에게 다가가서 말한다.

“조심해. 저런 어르신들은 보통 다 꼰대라고.”

이전 같다면 장난스럽게 할 말이지만 지금은 희우도 진짜로 불안하게 말한다.

꿈에서 깨어난 희우는 어떤 의미로건 자신을 되찾았다.

부끄럼도 많아지고 불안도 많아졌다.

지금도 저렇게 태도가 달라진 것이 눈에 띈다.

하지만 불안이란 건 달리 말하면 신중함이다.

어쩐지 둘 다 너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아는 웃고 희우는 부끄러워했다.

그러는 사이 마지막 계단에 도달했다.

“예언은 예언이니……. 편히 쓰도록 하게나.”

고풍스럽다 못해 장엄한 문이었다.

위쪽의 폐허와는 너무 다르다.

낡고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랬지만, 양식 자체가 다르다.

벽돌을 쌓아 만든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가져온 거대하고 새하얀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든 것 같았다.

문마저도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다.

노인은 옆으로 물러서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진짜 예언의 구원자라면 이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도임이 보인다.

에길과 아서가 앞으로 가서 문을 밀었다.

오랜 세월 닫혀 있던 새하얀 돌문이 쉽게 밀리기 시작한다.

노인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문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났다.

내부 역시 거대한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든 듯 한 정갈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디서 많이 보던 구조물이 보인다.

“회복의 샘이군.”

이미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블랑쉐가 의미심장하게 깔린 목소리로 다시 말한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안 대천사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우리 종파의 오랜 유산. 이 성지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다니…….”

노인이 어떻게 감격 중이건 파티원들은 성지에 입장했다.

이곳이 메인 던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거점이다.

* * *

“눈치 못 챌 줄 알았어요. 전 천재니까요.”

엄마로서 가장 먼저 미아에게 물어본 희우는 그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미아는 정말로 누군가를 닮아 있다.

현재의 희우가 아닌 조금 더 과거의 희우를 말이다.

그 사실은 지금의 희우에게는 비수와도 같다.

블랑쉐가 웃음을 참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여긴 메인 던전이라고. 신중해야 해. 아무리 아군이라고 해도 돌변할 수 있는 곳이야. 미궁이 어떤 곳인지는 지금까지 느꼈지?”

다만 그것은 나로서도 웃음을 참기가 힘든 장면이었다.

아서는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가가 씰룩이는 게 보인다.

에길은 아빠 같은 미소로 둘을 보고 있다.

제니는 어깨를 으쓱한다.

낌새를 느낀 희우가 도끼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애 혼내는데 다들 왜 그래요!”

미아가 얼른 자진 납세한다.

“엄마, 화 내지 마요. 제가 잘못했어요.”

“으으, 이게 아닌데.”

반성의 의미로 미아가 구석에 꿇어앉아 손을 들고 있기로 했다.

희우는 힘들다는 듯이 나를 본다.

가면을 벗자 나온 것은 저렇게 다른 의미로 귀여운 아이다.

“그래도 다시 하면 안 들키게 할 수 있을걸?”

“그건 맞아요.”

벌을 서던 미아가 얼른 맞장구 쳤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있다. 몸짓마저 닮아버렸다.

희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신중해야죠. 우린 그래야만 하는 기회를 잡은 거라구요.”

아서가 마침내 웃고 말았다.

“크큭. 말하는 것만 보면 닳고 닳은 100년 차 유배자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에길마저 끄덕이자 마침내 희우가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제발 그만해요!”

희우 놀리기는 그쯤하고 블랑쉐가 자리를 진정시켰다.

서브 리더가 어딘가 달라진 것이야 모두 아는 바였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도 한 참이다.

나는 모두의 시선을 받았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자자, 저기 제단들 보이지?”

성지의 문은 닫아두었다.

우리가 정말로 선택받은 구원자들임이 확인되자 노인은 한결 공손하게 물러나 있다.

지금부터는 저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다.

우리 파티가 이 [메인 던전]이라는 세상에서 암약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정보의 독점이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성지라는 이름의 웨이 포인트는 방음이 철저하다.

“홈이 3개가 있어. 저기에다가 성배를 놓아야 해.”

“성배로군.”

아서가 그립다는 듯이 말했다.

아서왕 전설은 성배와도 밀접하게 닿아 있으니 그에게 낯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성배들은 저기 천상의 도시 안에 있어. 각자 도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

“경계가 아주 삼엄하겠네요. 대신 하나씩 탈취할 때마다 도시의 기능이 정지한다고 했던가요?”

“맞아. 그러나 경계도는 올라가서 점점 더 살벌해지지.”

선형적 게임 구성의 단점이 무엇인가.

바로 자유도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하던 이전과는 다르다.

지금부터는 다양한 설정을 통해 틀어 막혀 있어 제약이 강하다.

심지어 이동조차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베데스다의 사도이자 천사도 악마도 아닌 종족들이다.

다종다양한 종족이 날뛰던 대륙과는 다르다.

이곳에서 천사나 악마가 아닌 종족은 자연스러운 배척 대상이다.

그래서 악룡이 메인 던전을 누구도 발 들이지 못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이미 누가 한번 깽판을 쳐버리면 거점도 이용할 수 없다.

유배자의 존재도 널리 알려져 버린다.

입장하자마자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고도 뭔가 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선 운신의 자유를 위해 천사와 악마 카드부터 좀 수집해 봐야겠군. 도시로 잠입하자. 미아, 환영 마법은 준비되었지?”

무릎 꿇고 손을 들고 있는 미아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화력으로서의 마법사보다 유틸리티로서의 마법사가 중요한 이유다.

천사의 도시에서 활동하려면 천사가 되는 편이 가장 좋다.

천사와 악마의 세계인 이 테마는 당연히 그 둘의 카드를 구하기 가장 쉬운 곳이다.

그리고 선형적 게임 구성의 장점.

랜덤 요소가 적으니, 해본 적 있으면 외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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