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99화
메인 던전 - Lv.7799 가라앉은 영광(8)
그간 리프트를 통해 여러 고난이도 지역을 돌아다니며 공부할 기회가 많았다.
몬스터의 인식 범위라는 것이다.
풀링은 고난이도 존일수록 중요하다.
일반적인 필드라고 할 수 있는 각 서버들은 몬스터들의 수준이 고만고만하며 유배자가 노력하면 스펙으로 찍어 누를 수도 있다.
애초에 일방적으로 수적 우위에 짓눌릴 일도 없다.
적이 있다면 그 적의 적도 있을 것이며, 그렇다면 어느 한쪽과 손을 잡아 다른 쪽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령만 있다면 숫자의 폭력에 짓눌릴 일은 드물어진다.
그러나 메인 던전은 다르다.
기본적으로 멸망한 왕국.
그리고 왕국이란 것은 유배자만 있다면 멸망하지 않는 곳.
모든 메인 던전은 유배자를 배척했기에 멸망했고 그렇기에 거의 모든 존재들이 유배자를 적대시한다.
애초에 모든 적을 상대로 무쌍난무를 벌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유배자의 스펙 상승의 한계는 언뜻 끝이 없어 보이지만 존재한다.
경험치 요구량은 레벨이 오를수록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효율을 따질 수 없는 영역까지 도달한다.
하이랭커들 중에서도 오래 산 이들은 대부분 그 한계에 도달해있다.
이제부터는 끝없는 세월과의 싸움이다.
반면 멸망한 왕국인 메인 던전은 아주 오래된 세계이며, 당연히 그만한 시간을 이미 보내온 곳이다.
단순히 스펙으로 싸워 이길 방도는 없다.
자신들의 왕국이 새로운 메인 던전이 되기까지만큼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개념은 의외로 아서와 에길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세상이 참 불공평해요.”
“하지만 어지간한 적을 사대로는 일대 다가 가능했으니 말이지.”
“물러설 필요 없는 싸움이지.”
제니가 투덜거리고 다른 둘이 멋쩍게 웃는다.
피똥을 싸며 왕국으로 향하는 이들과 달리, 고정 NPC인 이들은 너무나도 쉽게 그곳을 헤쳐 나갔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제니가 이 상황에서 가장 익숙했다.
뒤틀린 천사들의 인식 범위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저것들은 이지가 없기 때문에 동물적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타입이다.
짐승과도 같다.
제니는 오랫동안 로건과 함께 짐승을 상대했던 유배자다.
정확히 인식 범위를 파악하고 일부를 끌어들이고, 원거리 공격을 날려 다른 쪽으로 시선을 유도한 후 사각으로 이동한다.
전원 비행이 가능한 종족이며 특별히 큰 소음을 내지 않고 비행할 수도 있기에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후가 골치 아프지만 확실히 단순한 돌파는 빠르군.”
그렇게 전진하다가 아서가 발견했다.
“로스엘이 사라졌다.”
“격추당했나요?”
“그건 아니다. 여기서도 보이지 않나.”
위를 보니 뒤틀린 기천사들이 벼룩처럼 튀어다니며 무언가를 찾고 있다.
로스엘은 어딘가로 숨어든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우린 돌아가나요?”
“음.”
로스엘이 시선을 모으는 사이에 뭔가를 하면 했지, 이미 경계심을 꼭대기까지 올려 놓은 지금이라면 너무 위험하다.
가뜩이나 뒤도 그렇게 된 마당에 위험부담이 극도로 커졌다.
그리고 아서가 미처 판단을 바꾸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도시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지진일 수는 없다.
하지만 땅이 움직인다.
어떠한 마법적 힘, 혹은 권능에 의하여 도시의 구획이 변하는 것이 보인다.
셋은 리더에게 주입받은 여러 가지 사태에 대하여 떠올렸다.
이 도시는 필요에 따라 모습이 변할 수 있다. 그들의 왕국에서 고블린들이 건축한 도시도 그랬다.
“누군가 건드리기 시작했군. 리더인가?”
“아니지. 그럴 리는 없는데. 리더는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했어.”
그 순간 모두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다.
로스엘이 어디론가 날아가 숨었고, 그곳이 아마 제어실일 것이다.
로스엘을 이곳에 데리고 들어오면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베이스캠프가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돌아간다.”
아서가 황급히 돌아섰다.
에길과 제니도 뒤따라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땅이 솟아올랐다.
* * *
뱀장어의 뱃속은 끔찍했지만 동시에 부드러웠다.
단단한 외피보다는 내장을 찢어발기는 편이 훨씬 좋다.
삼키려고 드는 녀석의 입속으로 마주 가속해서 들어가면 씹히지도 않는다.
완전한 카운터.
좀 다치는 것은 필연이지만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단 훨씬 낫다.
녹화를 켜고 뱃속에다가 냅다 [슈퍼 히어로 랜딩]을 처박는다.
물은 의외로 공기보다 소리를 잘 전달한다.
바로 옆에서 펑하고 빛이 솟구친다.
유니크 액티브 [바다의 대리자]
유니크 액티브 [파편의 무기]
[무오의 광휘]는 아낀다. 쿨다운이 너무 길다.
뱀장어의 뱃속이 번쩍이며 찢어진다.
애초에 편린급 적들에게도 먹히던 공격이었다.
곧 빛이 보였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뱀장어의 옆으로 빠져나온다.
제니는 검을 휘두르며 뱀장어를 더욱 난자했다.
[와, 안 죽네.]
피와 살점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어두운 무언가로 변해서 스러진다.
[어둠의 정령과 비슷한 놈들이 맞네. 이곳의 짐승은 사실 다 그런 존재라고 했지.]
진짜는 바깥에 있는 자연환경들뿐일 것이다.
정상적인 생물이 이렇게 강할 리가 없지.
블랑쉐도 쿨다운을 아낄 이유가 없다.
[길을 찾는 날개]의 드론이 블랑쉐의 손에서 분해되어 지원 사격을 퍼붓는다.
광선의 열량에 증발되는 물이 수증기가 되어 시야를 가렸다.
블랑쉐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신을 만들어 뿌린다.
그래도 물이란 것까진 정상적이어 다행이다.
뱀장어는 고통스러워하면서 우선 물러나려고 했다.
제니가 그걸 그냥 두지 않았다.
파편의 무기를 통해 빛의 거검이 된 쌍검이 퇴로를 차단하고 몸통을 베어낸다.
단단하고 질긴 외피 곳곳이 피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뱃속에서 터져 나오는 혈액이 어둠이 되어 자꾸만 흩어진다.
이런 경우의 제니는 든든하다.
아서나 리더처럼 지속적으로 앞라인을 잡아줄 수는 없더라도, 짧은 시간동안 넘을 수 없을 정도의 화력으로 적을 저지해낸다.
블랑쉐는 누아르를 불렀고 포격도 퍼부었다.
타겟은 주로 뱀장어가 상처를 입은 방향이다.
희우는 그간의 연습을 발휘한다. 이미 실전에서도 많이 투입해보았다.
일반적은 필살기, 유니크 스킬들로만 낼 수 있는 화력은 한계가 있다.
순간적인 위력은 몰라도 지속적인 화력은 긴 쿨다운 덕에 나락으로 처박힌다.
강제 연계를 통한 매끄러운 조합은 그걸 보조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다.
뱀장어의 옆으로 굳이 붙어서 짤딜을 추가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니의 범위에 휘말리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니니까.
허공에 긋는다.
이미 반년동안 자신만의 연계를 조합해두었다.
가장 높은 화력의 보정을 뽑아내는 레시피대로 허공을 난자한다.
마찰에 의해 검이 달아오른다. 물이 조금씩 증발하며 수증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거품 속에서 집중을 유지하기 위해 공감각의 상태로 빠져 들어간다.
이제는 익숙하다.
이것은 정교한 연계를 위해서는 필수에 가깝다.
현실이 된 미궁은 스킬난사로 뚫어낼 수 없다.
그것을 위해 97년간 최고의 고인물이 고안해둔 글리치에 가까운 방식이다.
제니는 뱀장어와 일대일을 수월하게 해내었다.
일견 혼자서 이겨낼 수도 있을 것 같다.
‘확실히 잘 싸우는 제니는 엄청나게 강하네.’
탑재된 스킬이 스킬인 만큼, 아주 이상적인 제니다.
진짜 제니가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시무룩해질 것 같다.
블랑쉐의 분신들이 제니가 위험한 순간마다 몸을 날려 막아냈다.
사방에서 퍼붓는 레일건의 포화도 뱀장어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희우는 가장 강력한 한방을 마지막으로 연계를 끝마쳤고 그 보정이 사라지기 전에 재생했다.
유니크 액티브 [섬광 재생]
동체시력은 자신 있다.
판정이 끝나기 전에 뱀장어의 요소요소에 전부 타겟 지정이 끝난다.
일제히 베어 가른다.
제니를 제외한 뱀장어의 모든 곳에 녹화된 참격들이 빗발쳤다.
뱀장어는 완전히 분해되었다.
아직 스킬 지속시간이 충분히 남아있는 제니가 남은 부분을 마저 썰어 지운다.
그리고 빛이 꺼지고 스킬이 종료되었다.
제니가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희우와 블랑쉐는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둠의 정령과 비슷한 존재라고 했지.
블랑쉐가 쥐새끼의 뺨을 후려갈겼다.
입을 딱 벌리고 있던 성배의 짐승이 놀라 소리쳤다.
[엇? 어엇!]
희우가 말한다.
[수로로 안내해!]
흩어진 어둠은 주변을 물들이고 있다.
원래 뱀장어의 모습은 아니었을 거다.
다시 어둠이 뭉친다.
뭉치는데 시간은 좀 걸릴 것이다.
[잡보스도 쉽지가 않군.]
[저것도 레벨 7천은 넘을 걸요?]
스펙으로 따지자면 파티 전원이 싸워도 제법 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기믹 보스였던 산달폰과 다르게 기믹조차 없는 잡보스는 자비가 없다.
어떤 의미로는 더 힘들 수도 있다는 뜻.
쥐새끼가 번쩍 정신을 차리고 쥐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희우가 그 궁둥이를 걷어차며 날았다.
물의 저항이 거세지만 무시하고 전진한다. 뒤편의 어둠이 뭉클뭉클 커지고 있었다.
[위대함의 편린] 같은 메시지는 없는데도 13층에서 만난 그 어둠의 정령왕 정도의 힘은 느껴진다.
어떻게 되어먹은 곳인가 싶다.
[여기입니다! 누님!]
쥐새끼가 서둘러서 뛰어들려고 했다.
수중 깊숙한 곳에 어느 성당 같아 보이는 건물 위에 뚫린 구멍이 있다.
본디는 아래쪽에 있었겠지만 중심부가 이상할 정도로 솟구치면서 단층이 만들어진 것 같은 모양새다.
수로 입구라기보다는 그냥 지진으로 드러난 지하통로의 입구 같다.
[안 잡아도 되는 거는 잡지 말기.]
클리어를 위한 방침이다.
소모는 최소한으로 줄인다.
수로 안으로 뛰어들고 정신없이 진행한 후, 수면이 보였다.
다 같이 첨벙하고 솟아오른다.
넓고 커다란 저수조 같은 곳이었으며 물이 차있지는 않았다.
“여기가 입구로 들어오면 베이스캠프 차리기 좋은 곳이라고 했던 거기구나.”
“어둠의 정령이 따라올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까지는 들어오지 않는다고 들었어. 쥐들의 왕이 있는 영역이니까.”
[제가 그 녀석들과는 또 좀 친하죠! 저만 믿으십쇼!]
희우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베이스캠프를 차리는 것을 지시했다.
여기까지 돌파했으면 잘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엄청나게 많은 서버에서의 연습과는 다르다.
온전히 실전이 아닌가.
예상보다 더 강력한 제니의 덕분이겠지만 그래도 뿌듯해도 될 일이리라.
뻔뻔하게 나대던 시절보다 깔끔하고 좋았기에 머릿속으로 만세를 하며 코샤크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나아가면 흩어진 멤버들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숏컷 쪽은 단독으로 뚫긴 힘드니까. 일단 사람들부터 찾은 후에.”
미소 지으며 손가락을 들고 그렇게 말한다.
나 좀 서브리더 같았어.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하수로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라? 설마 쫓아오나?”
지식을 모두 믿으면 안 되는 곳이다. 여기는 오빠도 다 알지 못한다고 했다.
우르릉하는 소리에 블랑쉐가 마법의 불빛을 만들어 수로 아래로 날렸다.
한참을 날아가도 어둠은 감지되지 않는다.
“그럼 뭐지?”
대답은 물리적으로 제시되었다.
갑자기 펑 하고 희우와 블랑쉐, 그리고 제니가 있는 구획이 솟구쳤다.
“뭐야 이건!”
* * *
로스엘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건 도시를 부상시키는 기능이었네?”
화면에 떠오른 옛 도시 유적 전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전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곳곳에 어딘가에 걸려서 솟아오르지 못하고 힘만 가해지고 있는 블록들이 있다.
일부 블록들만 하늘 높이 치솟고 있는 것이다.
* * *
“왜 이렇게 큰 걸 누르는 거야. 그냥 문 닫고 열고 하는 거만 좀 건드리지.”
어떻게 어떻게 도시의 블록 구조가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가를 볼 수 있는 지도를 찾아냈다.
그리고 지도를 찾아내자마자 구획들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다.
제니가 화면을 보며 걱정했다.
“이거 다시 내려보내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거 맞아요?”
“아닐 거 같은데.”
억지로 뚫고 뭔가 부수며 솟아오르는 구획도 있다.
공중에 떠오른 무수한 구획들과 떠오르지 않은 구획들 사이에서 아주 입체적인 형태로 도시가 재배열되기 시작한다.
“이걸 다시 가라앉히면 그냥 다 개박살이 날 거야. 그럼 몬스터들이 다 미쳐 날뛸 거고, 우린 길도 잃겠지.”
다행스럽게도 지도를 찾은 후에 각 블록을 움직일 수 있는 기능도 찾아냈다.
게임 시절에는 그냥 선택지로 제시되던 건데 조작을 직접해야 하다니.
“지도가 완전히 퍼즐 게임처럼 되어버렸네요.”
“일단 우리 파티원들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고 블록의 위치를 조절해야겠어. 로스엘 제발 아무것도 만지지 마.”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도시 내부를 감시하는 기능은 아직 살아있다.
각자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