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434화 (507/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34화

메인 던전 - Lv.7554 [천상의 도시 - 신도심](4)

희우는 어딘가 낯익음을 느꼈다. 어째서 오빠가 미궁이 현실임을 끝끝내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는지, 그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되어서다.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너무 익숙하지 않냐고.

원래 강대했으나, 그 힘을 잃고 쇠락한 아군이 있다.

그 아군의 힘을 되찾기 위해 적진의 중심부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몰려드는 적을 방어한다.

이게 디펜스로서 성립하는 이유는 시간만 벌어주면 힘을 되찾은 아군이 휩쓸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착착 맞아떨어진다.

정말로 어디서 많이 보던 게임 시나리오다.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그렇긴 하다.

오빠와 함께함 모험의 대부분은 이런 식이었다.

어딘가 현실적이지만, 어딘가 게임적이다.

이번에도 그렇다.

그리고 익숙한 상황에 기시감을 느낄 때마다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긴다.

백전연마의 아서와 에길에 비해 그녀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부분이다.

세상을 현실로 보지 않을 수 있다.

* * *

* * *

일종의 집중력이다. 온전히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만 생각하는 집중력.

다른 파티멤버들은 게임은커녕 컴퓨터도 만져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희우는 백전연마의 베테랑 파티원들 사이에서 서브 리더라는 자리에서 존중받는다.

그 존중의 값을 치러야했다.

고개 들고, 어깨 펴고, 자신만만한 미소.

퍼포먼스성으로 단검을 두어 바퀴 멋들어지게 돌린 다음 앞을 본다.

자기 암시라면 달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희우의 눈앞에 3개 통로가 펼쳐진다.

길고 긴 복도는 아니다. 모두 금방 벽이 보인다.

세피로트의 나무가 있는 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직각으로 꺾여있는 탓이다.

FPS게임이 생각나기도 하는 모습이다.

지금까지는 좁은 복도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미궁적 스케일링이 적용된 ‘좁음’이었다.

날아다니고 초음속으로 움직이는 초인들이 싸우기에 좁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버스 서너 대 정도는 지나갈만한 널찍함을 ‘좁다’라고 말해왔다.

발끝을 까닥이는 것만으로도 반대편 끝에 도달할 정도의 넓이밖에 안 되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의미의 ‘좁음’이 아니다.

정말로 좁다. 치천사가 날개를 활짝 펼친다면 통로 전체를 가로막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좁음은 다수에게 불리하며 소수에게 유리하다.

이렇게 미리 자리까지 잡았다면 말할 것도 없다.

조용히 공감각 속으로 빠져든다.

이 기능은 정말로 유용하다. 예민한 감각은 생각의 속도를 단련하는 것에도 도움이 된다.

받아들이는 정보가 많아지니 그걸 처리하는 숙련도도 생기기 때문이다.

과연 희우는 가장 먼저 그런 감각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 비현실감은 세상을 좀 다른 것으로 인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냉엄한 현실인 미궁이다. 하지만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걸 현실이라 여기지 않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 우습다.

블랑쉐는 누아르의 제어에 집중할 것이다. 제니는 아서와 에길이 나서는 순간부터 둘의 활동을 보조하는데 집중한다.

라리사는 일단은 전투원으로 데려온 것이 아니기에 뒤로 빼놓았다.

만약의 경우 오빠와 미아를 지키면 될 것이다.

리온은 조금 다르다.

[마왕]은 용사와 쌍을 이루는 유니크 스킬이다.

비록 마왕도 용사도 지닌 사명을 다해 히어로 유닛의 운명에서 벗어났지만, 그 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계산식 몇 가지가 머릿속에서 춤춘다.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산수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게임 삼매경에 빠지다보면 거의 감에 가깝게 수치를 계산 때려 맞출 수 있다.

오빠는 그런 것의 극에 도달해있겠지만 희우도 흉내는 낼 수 있다.

비슷한 감각일 테니까.

이런 걸 공유한다는 점도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일까.

텐션을 높이고, 흥분을 제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뇌 속을 뛰어놓던 사고들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한다.

온전히 전투의 흥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의 적절한 고양만을 간직한 채.

온 도시에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 소리를 들었다.

[세피로트의 나무다! 나무를 지켜라! 적은 그곳에 있다!]

시작이네.

단순히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서브 리더는 아서가 하는 편이 더 옳다.

노기사는 이미 많은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날 때부터 지도자였던 인물이다.

그 생각을 누구나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누구나 접게 되었다.

아서는 유능하지만 그게 다다.

에길 역시 자기네 마을에서는 우두머리며, 브리튼을 침공할 때도 선두에 섰던 인물이지만 그게 다다.

블랑쉐는 이제야 리더의 소양을 조금씩 배워온 참이다.

그럼 지금의 서브리더 희우는 어떤가?

사실 리더의 소양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웅크린 사춘기의 소녀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리더는 그 점에 주목했던 게 아닌가 싶다.

육체적으로는 타고난 초인.

성격적으로는 사실 꽤 불안정하다.

하지만 게이머로서의 소양, 그리고 어딘가 동떨어진 현실감각.

리더가 그것 때문에 고생했음은 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미궁을 헤쳐 나가기에 필요한 자질일지도 모른다.

지휘라는 건 그랬다.

싸움은 이곳 파티원들이 더욱 베테랑이다.

희우는 천재적일지는 몰라도 경험이 많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아서도 에길도, 그리고 블랑쉐도.

미궁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일반적이지 않은 전투가 많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럴 때, 그 상황에 놀라지 않고 빠르게 파악해내는 것은 리더와 서브리더였다.

어찌 보면 광기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모르는 어떤 가상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으로 냉정하고도 당연하게 다음에 있을 일을 찾아내고, 지금 해야 할 일을 알아낸다.

그 드물다는 [게이머]는 왜 우러름 받는가.

단지 가진 정보가 많아서다.

다만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일그림 정도도 극히 드문 케이스다. 지식만 가진 자들은 보통 이곳까지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까지 도달했다면 지식을 넘어선 감각과 경험, 나아가 삶은 미궁에 걸맞은 무언가가 된다.

그 차이는 문득이지만 꾸준히 느껴졌다.

그래서 어느 순간 속으로라도 희우라는 소녀가 서브 리더를 맡고 있는 것에 의문을 가지는 이는 없게 되었다.

전장의 상식과 게임의 상식은 다르다.

전장은 이곳에서도 배울 수 있으나, 게이머로서의 상식은 그리 되지 않는 법이다.

예를 들자면.

[들어오면 최대한 끌어들여요. 바로 눈앞까지 왔을 때. 전탄 포격합니다. 휩쓸리지 않게 주의하시구요.]

리더처럼 말한다. 어느 정도 의식된 말투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아무리 전선 형성이 되지 않는더라도 담대함을 넘어선 무언가다.

바로 코앞까지 적이 들이닥치길 기다리며 응전하는 것.

전사의 상식으로는 통용되지 않는다.

그냥 싸우는 것과는 다른 효율 추구가 저곳에 있다.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합니다.]

말은 쉽다. 그렇게 생각이 흐를 수는 없다.

사람이 죽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그러니 저 수단의 비현실성을 안다.

그런데.

미궁은 비현실적인 것을 이루어내야만 클리어 할 수 있는 곳이다.

리더로부터 낙수효과를 받아 내려오는 기묘한 신뢰가 파티원들 사이에 이어졌다.

리온과 라리사만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천사들이 나타났다.

약간 세상을 화면의 모니터 너머로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미 하고 있던거다.

롤 플레이.

희우는 미궁을 플레이하는 게이머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예민해진 감각 속에서 천사들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전사에 특화된 종족답게 쏜살같이 빠르다. 그래도 이 좁은 복도에서 감지하기 힘들 수준의 속도를 낼 수는 없다.

여기까지 침투한 것은 정답이다.

수상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응사한다.

거대한 전함이 무엇인지 천사들은 어차피 알지 못할 것이다.

복도 너머로 쏟아져 나오는 천사들은 다급해보였고 정신없어 보였다.

기습의 우세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아서와 에길, 그리고 제니가 투척용으로 가지고 있던 보조 무기들을 내던진다.

날개로 감싸며 막고 그대로 돌진해오려고 했다.

지뢰가 터진다.

열매가 그 충격에 파손되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천사는 마법에 강하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열매는 더 특이하다.

미궁의 권능 그 자체가 열매의 형태로 결정화된 것이나 다름 없는 열매의 효과들은 모든 종류의 내성과 면역을 무시한다.

물론 지속 시간이야 줄어들겠지만 말이다.

몇몇 천사들이 양으로 변했다.

천사였기에 날개 달린 양이 되어 메에에하면서 구른다.

몇몇 천사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빙결이 풀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고블린의 지뢰 자체는 단지 바닥에 설치된 열매를 기폭하기 위한 트리거다.

몇 개는 분홍빛 기류를 피워올렸다.

혼란에 빠진 천사들이 비틀거리며 서로를 겨눈다. 적으로 보이고 있을 것이다.

마비를 일으키기도 하고 온갖 종류의 움직이기 힘들게 만드는 트랩들이 작동하며 달려온 천사들을 그 자리에 멈춰 세웠다.

개중에는 물론 묶이지 않고 당도한 천사들도 있었다.

몇몇은 대천사였다. 푸른 기사단이라 불리는 푸른 복장의 대천사들은 강력한 마법을 구사하려고 한다.

블랑쉐는 사수답게 정확히 그런 마법사들을 견제해내며 캐스팅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맹렬하게 울부짖는 디스트로이어의 탄환은 도무지 캐스팅이 성립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든다.

1초만 주더라도 발동할 마법을 블랑쉐가 최대한 지연시키는 가운데 전사들은 붉은 갑옷을 걸친 천사들과 응전하기 시작했다.

천사들은 당황했지만,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고 있다.

소수 정예의 장점.

대부분의 경우에 얕보인다.

소수가 다수를 압도하는 경우는 잘 없으며, 그런 일을 상정하는 것도 멍청이다.

언제나 상대보다 한 발짝 앞서기.

그 일환이다.

에길과 아서, 그리고 제니는 그 연기에 충실하게 강력한 스킬을 구사하지 않았다.

대신 충분히 위협이 될 만큼 무기를 휘두르며 더 전진하기 께름칙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설치된 트랩에 의해 돌파력을 잃은 천사들은 세 전사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한계의 한계까지 그렇게 쏟아지는 천사들을 묶어둔다. 어떤 놈들이 날 기미를 보였다.

섬광 같은 기천사가 출격한다.

초가속과 함께 날아오르는 녀석들을 그대로 밟고 후려치며 떨어트렸다.

물론 모두 임시방편이다.

천사들은 제거되지 않았고, 점점 쌓이고 있다. 기사단급 천사들은 이미 감당할 양이 아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수에 짓눌리게 되리라.

어느 정도에서 가속을 멈추고 생각을 계속 한다.

언제일까?

지금?

아니. 아직.

아직 조금 더.

조금 더 많이.

그리고 신호한다.

아서가 물러난다.

에길도 도끼를 쥐고 준비한다.

약 50개체 정도가 되었다고 공중에서 판단한 순간 희우는 지금이라고 소리쳤다.

[블랑쉐! 쏴!]

[전탄 발사.]

전함포가 일제히 불을 뿜는다.

우주전을 상정한 위력이 천사들을 으깨며 뒤덮었다.

[세피로트]가 존재하는 신전 건물 내부가 그대로 밀려나며 뚫리다가 말았다.

지나치게 단단하다.

신성한 천상의 도시의 상징이 으깨지고 부서지다가 마침내 탄환의 돌파를 저지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당연하게도 뒤쪽으로 뿥어져 방을 가득 채웠다.

밀폐된 공간은 아니다. 신전은 위로도 뚫려있다. 나무가 솟은 상공으로까지 포연이 뿜어, 아니 분출된다.

위에서 날아들려던 천사 몇몇이 거기에 쓸려나갔다.

나무가 솟은 구멍으로 뛰어들려던 천사 몇몇이 그대로 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

신전 전체가 쩌저적 갈라지고 벌어지며 위력을 분산하여 감당했다.

단 한번에 너덜너덜해짐이 느껴진다.

하지만 너무 가까운 곳에서 사격한 여파로 블랑쉐의 가상 전함도 무너져 내린다.

공간의 균열이 닫히기 직전에 이미 포신이 손상되고 녹아내렸다.

애초에 물리적 탄환의 크기만 해도 이 공간에는 너무 크다.

완전히 증발하지 못하고 남은 탄환의 잔해는 아수라장이 된 신전 내부의 통로에서 멈춰선 다음, 그곳을 막아버렸다.

파티원들은 모두 이미 리온의 곁에, 그리고 세피로트의 제단 앞으로 뛰어든 상태였다.

리온의 모든 힘을 다 짜낸 검은 마력이 흔들리며 사라진다.

“으어어…….”

리온이 기절해서 엎어졌다. 전신의 모든 마력을 한순간에 짜낸 탓이다.

“역시 마왕, 성능 확실하네! 마법사가 하나 더 있으니 좋아!”

블랑쉐가 리온이 형성한 마력 반벽을 이어받았다.

비스듬한 각도 구성된 방벽이다.

뚫린 천장으로 충격을 흘리는 형태지만 그래도 곳곳이 깨지고 수복되는 것을 반복한다.

블랑쉐도 신음하기 시작했기에 아서도 거에 한팔 거든다.

악마인만큼 마력 용량에는 여유가 넘치는 탓이다.

소리도 어느 정도 차단되어

“라리사! 치유!”

반사적으로 리온에게 하려고 했으나 그 쪽이 아니다.

리온은 전투원이 아니니까.

에길도 아서도 희우도 모두 꽤 크게 다친 상태였다.

마지막 순간에만 빠져나왔으니 당연하다.

라리사가 서둘러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신성이 천천히 부상을 치유한다.

“이렇게 개판을 쳐뒀으니 입구로 진입할 생각은 못하겠지?”

“그럼 위겠군.”

“필드 보스들이 등장하겠죠.”

그 말이 사실이었다.

금속 증기와 암석 가스들로 시야가 없는 가운데 마력과 신성이 뒤섞인 절규가 상공에서 들려온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렇게……!]

“어, 울먹이는 것 같지 않아요?”

“소중한 곳이 개박살 났으니 울고 싶겠지.”

“미카엘한테 조인트 까일까봐 그럴지도?”

아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태연하게 농담을 하고 있지만, 좀 더 현실적인 전장에서 평생을 보내온 그로서는 이런 전술을 지휘할 자신이 없다.

항상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지 않나.

희우가 기침했다. 그대로 피였다. 뭔가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이 묻어나온다.

“쿠훽. 아, 내장 많이 상했나보다.”

몇 번 더 기침하면서 입으로 피와 내장 조각을 뱉어낸다.

그러면서 태연하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아서와 에길은 입맛을 다셨다.

이쯤 되면 아무래도 전사다운 게 아니다.

그냥 미친 사람이다.

리더도, 서브리더도 말이지.

그리고 어쩌면 제니도.

방글방글 웃으며 ‘미아양’의 안부를 살피는 고양이 천사도 어쩐지 섬뜩했다.

그리고 블랑쉐는 걸레짝이 된 누아르를 생각하며 울적해졌다.

“언니 이름을 붙였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