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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35화 (508/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35화

메인 던전 - Lv.7554 [천상의 도시 - 신도심](5)

미궁의 시스템에서 이탈한 이 왕국, 더 정확히는 왕국이었던 것은 오로지 기계신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다.

기계신이라 함은 신좌라는 미궁의 일부들을 이 세계의 주민들이 해석하여 만들어낸 것.

그것을 이루어낸 찬란한 기술력은 언더그라운드 유적이 그렇듯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다.

가라앉으며 몰락하기 시작한 세상을 보며 천사와 악마들, 그리고 그들을 권속으로 거느린 고위 존재들까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여러 세력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이 세계를 구하고자 했다.

미궁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생긴 문제다. 그러니 완전히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게 되거나 다시 그 안으로 편입되면 된다.

일단 무엇을 하려고 들건 핵심은 기계신이었다.

기계장치의 신은 시스템에서 벗어나 멸망 중인 이 세계가 가진 유일한 시스템과의 접점이다.

어떤 식으로건 수단을 강구할 수 있다.

다만, 애석한 일이 있었다.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목표는 같았으되, 그 형태는 모두 달랐던 것이다.

* * *

* * *

이미 독자적으로 수만 년간 존재해 온 세계다. 갈라진 의견은 수천 년 이상을 묶어온 것이다.

그런 반목이 단지 세상의 위기만으로 쉬이 사라질 수 있었다면 이러기 전에 이미 사라졌으리라.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기계신을 이용하고자 했다.

온전히 기계신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세력은 없었다.

기계신은 결국 여럿으로 나누어져, 다양한 형태로 이 세계의 곳곳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다.

천사에게 존재하는 [세피로트].

더 정확히는 [세피로트의 나무].

그리고 악마에게 존재하는 [클리포트의 나무].

이 두 가지 역시 기계신의 일부에 근원을 두고 있는 힘이다.

기계신이 본디 신좌였던 것이니만큼 유사한 형태로 활용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세피로트]란 인위적으로 재창조된 새로운 형태의 신좌다.

하지만 [세피로트]는 세상의 질서 중 일부로 만들어진 원래의 신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이것은 섭리가 아닌 투신의 신좌다.

부여되는 것은 오로지 힘.

전투와 전쟁을 위한 힘.

신도를 보살피는 것도, 무언가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도, 세상을 구하는 것도.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오로지 힘뿐인 자리다.

로스엘은 자신에 세피로트에 처음 앉았을 때를 떠올렸다.

원해서 앉은 것은 아니었다.

천사와 악마는 본래 반목하는 존재다.

그들이 반목하는 것에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들을 그렇게 만든 고위 천사와 악마들이 이미 서로 적이었다.

형이상학에 닿아 있는 괴물들의 심리를 이해할 방도는 없다.

로스엘은 필요에 따라 세피로트에 자리를 부여받았다.

그녀를 그 자리에 앉힌 것은 조엘이다.

진짜 이름으로는 메타트론.

하지만 이젠 조엘도 메타트론이 아니다.

로스엘이 지금은 하니엘이 아니듯이 말이다.

그것은 세피로트의 천사로서 가지는 이름이다. 그 자리에서 내려온다면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

고위의 존재였던 것들은 다르다. 애초부터 자신의 진명으로 자리를 새겼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았다.

반면 한낱 필멸자 중 하나였던 로스엘이 하니엘이 된 것은 철저하게 타인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로스엘은 오래 살았다.

유배자 출신의 신조차도 그 자리를 내려놓고 싶어 하게 되는 영겁.

그리고 마침내 죽어 사라질 정도의 세월을 살았다.

가동하지 않고 언더그라운드 유적의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었던 시기까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길다.

자신의 나이는 스스로도 모른다.

하지만 유적의 보스로서 존재했던 기천사로서의 기억은 이제 희미하다. 그건 삶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왕국에 와서 지낸 기간이 그녀의 삶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메타트론은 그 점을 들어 그녀를 중용했다.

[어차피 천사와 악마는 싸우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을 구하려면 네 힘이 필요하지.]

로스엘은 그때도 딱히 아무런 직위도 가지지 않은 평범한 기천사였다.

물론 알 만한 사람에게는 유명했다.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유명해진다.

별다른 힘을 쌓아오지 않았어도, 도리어 세월에 의해 고장 나기 시작했더라도.

살아온 세월이 [위대함의 편린]에 준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것은 마법적인 의미마저 부여 가능한 수준의 역사다.

로스엘에 선택지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녀는 실제로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단지 [세피로트]라는 자리에 앉기 적합했을 뿐이다.

“로스엘, 여기다가 손 얹어 봐요.”

“으응?”

상념에서 빠져나오게 만드는 목소리. 현실의 유배자, 그 리더가 그녀를 보고 있다. 시간이 없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고 있다.

로스엘이 서둘러 제단에 손을 얹었다.

다시 전격과도 같은 반발을 각오했지만 아까와는 다른 기척이 있었다.

안에서 거부하는 힘은 여전히 있지만 그것이 공격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지는 않다.

로스엘은 비로소 지금 자신의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제대로 목도했다.

파티의 리더와 마법사는 문외한이 보기에도 굉장한 묘기를 벌이는 중이었다.

아니, 사실 문외한이라고 할 수는 없다.

로스엘 본인은 마법을 구사할 수 없지만 사용하는 모습만큼은 누구보다 많이 보아왔으니까.

마찬가지로 신성을 다루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그녀가 본 신들만 해도 몇 명일까.

마력의 실을 다루는 것은 많이 보았다.

지금은 신성의 실이 춤추고 있다.

보통의 눈에는 그저 흐릿한 오로라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포격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기에 더욱 그렇겠지만, 그럼에도 아름답다.

“신 해본 적 있어?”

“이번 회차에선 자주 듣는 말이네요. 있죠.”

“그럴 것 같아. 저 아이도?”

“미아는 아직은 해본 적 없습니다.”

‘아직은’이라는 말에 으스댐도 특이함도 없다. 그냥 바쁜데 말 시키지 말라는 불평이 조금 담겨 있을 뿐이다.

로스엘은 새삼 이 파티에서 느끼는 생소함이 무엇인지 다시 깨달았다.

파티원 하나하나가 신좌에 앉는 것이 어렵지 않을 정도로 숙련되어 있다.

“진짜로 우리 세계를 공략하러 온 파티네.”

“그럼 가짜로 공략하러 옵니까?”

보통은…… 가짜지?

그녀의 길고 긴 삶에서도 신이거나 그 이상 가는 유배자들이 모여 있는 파티는 없었다.

베데스다의 사도들은 생각보다 많이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렇구나.”

조용히 신성의 실들을 지켜본다.

어쩐지 이 상황이 신성하고 장엄한 무언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로스엘은 이런 날을 위해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걸 위해 메타트론에게 선택받아 하니엘이 되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힘을 휘두르며 전장에서 활약했을지도 모른다.

메타트론이 실각하고 로스엘 역시 목숨만 건졌었다.

이렇게 휘두르기 위한 힘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세피로트의 반발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

신성에 의한 봉인은 마법적인 체계와는 꽤나 다른 것일 터다.

하지만 신좌에 앉아본 적이 있다면, 그리고 심지어 그 경력조차 길다면 어떻게 뚫어낼 수 있다.

이 세상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으니까.

로스엘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이 파티만 따라가면 위대함의 편린들의 모가지를 뽑아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리더에게 고맙다. 이 비루한 기천사는 점점 죽을 곳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 상상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

즐겁다.

원래라면 이런 루트는 없다.

세피로트를 점거하더라도 유배자가 그걸 사용할 수는 없다. 파괴해서 일부 보스들을 날로 먹을 수도 없다.

게임 시절에는 그랬다.

그럼 이곳에 왜 당도하게 되는가?

그냥 성배가 여기 있어서다.

성배를 지키는 미카엘과의 보스전이 이곳에서 벌어지며, 이후에 로스엘과 우리엘 보스전의 발생 여부도 이곳에서 결정된다.

사실 게임 시절의 [세피로트의 나무]나 [클리포트의 나무]는 그냥 중요한 오브젝트 이상으로는 기능하지 않았다.

그냥 중요하다는 설정을 가지고 그곳에 있는 장식물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만져본 적도 없다.

내가 현실이 된 미궁에서 이 테마를 클리어했을 때는, 주로 바알의 편을 들어서 밀었다.

단순히 클리어 난이도만 따지자면 가장 쉽기 때문이다.

바알은 나름대로 융통성 있는 성격이기에 부하 노릇을 하기도 편하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세피로트의 나무]를 만져보는 것은 나도 처음이다.

기회가 있다면 실험했겠지만 그 기회조차도 없었다.

애초에 쥐새끼도 여기까지 데려올 수 있는 그런 NPC는 아니니까.

기계신의 파편 중 하나인 성배의 짐승이 의지를 가지고 우리 편을 들어준다.

신성을 다루는 요령은 미아가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마법에 그리 많은 스탯을 투자하지 않았다.

미궁의 보정까지 포함한 단순 정밀도는 미아가 나보다 낫다.

그렇기에 합동 작업이다.

내가 밑그림을 대충 휘갈기면 미아가 그 나머지를 빠르게 채운다.

실피드는 나와 계약한 정령왕이지만 이미 미아의 것이나 다름없다.

좀 더 어린 시절의 희우를 꼭 닮은 은발의 소녀가 언니처럼 미아를 안아 들고 있다.

제니는 가끔 실피드를 질투하곤 했지.

기계신이 봉인이라는 것은 일종의 방화벽과도 같은 것이다.

두텁고 엄중하게, 일반적인 마력으로는 범할 수 없는 상위의 힘인 신성으로 지켜지고 있으나 그뿐이다.

저쪽은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대응할 누군가가 없다.

그럼 단순한 시간 문제가 된다.

그 시간마저도 줄여야 하는 게 지금 상황이지만 말이다.

로스엘의 표정이 시시각각 기묘해지고 있다.

쥐새끼가 통제하기 편하도록 힘을 흘려내면 그것으로 로스엘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패스를 따라간다.

방화벽을 우회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철거하고, 신성의 실들을 계속하여 세피로트라는 시스템 내부로 침투시킨다.

그 과정을 로스엘은 정확하게는 몰라도 몸으로 느끼는 중일 것이다.

“로스엘, 정령이랑 계약해 본 적 있어요?”

“있어.”

“정령계 가 본 적 있어요?”

“있긴 한데…….”

오래전에 죽었겠지. 이곳은 어둠이나 빛의 정령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세계다. 다른 원소는 거의 사멸했으니.

“그럼 잘하겠네.”

“어? 잠깐만 설마?”

“이제 들어갑니다.”

피잉 하고 로스엘의 의식이 제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함께 미아와 나, 그리고 실피드도 빨려 들어갔다.

누아르의 거의 영거리 사격에 의한 피해는 막대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

그런 식이라면 마법과 포격의 화력투사만으로 천상의 도시가 붕괴했을 것이다.

서버에서라면 지반을 내려 앉혔을 위력의 포격이 좁은 공간에 집중되었음에도 도시는 조금 뒤틀리는 선에서 거쳤다.

사실 그뿐만 아니라 [세피로트]가 있는 이 신전조차도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지옥 같은 환경 다들 익숙하시죠?”

“나는 계속 이 방벽을 유지하겠다.”

마법사가 모두 이탈한다.

이번 작전의 최종 목적을 위해서 마법 자원이 모조리 저쪽에 분배되었으니 별수 없다.

“몸이 낫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건 되게 어색한 일이네요.”

“유배자 생활을 너무 오래 하면 그렇게 되지. 몸조심하게.”

“고마워요. 아서.”

실제로 그렇긴 하다. 포션을 아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잘 와닿지가 않는다.

일반적인 미궁에서는 팔다리가 날아가는 것조차도 생채기에 불과하니까.

“슬슬 올 텐데.”

입구는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탄이 신전을 완전히 으깨고 뛰쳐나가지 못했다는 것까지만 안다.

리온은 쓰러졌고 라리사는 여기서 의무병 겸 블랑쉐의 호위 비슷한 것을 해야 한다.

남은 전력은 희우, 제니, 아서, 에길.

깔끔하게 전사에 가까운 멤버만 남아 있다.

“제니랑 제가 푸른 기사단장 맡을게요.”

“마법사는 민첩 트리가 맡는 것이 옳지. 그럼 우리는 전사 대 전사로 싸우면 되겠군.”

“그쪽에서 제단 한 번씩 봐주세요. 그럼 시선 끌릴 테니 제가 암습 노릴게요.”

곧 기다리던 것이 왔다.

아직도 자욱하던 온갖 것들이 기화된 증기들이 위로 빨려 올라가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명백한 마법의 행사다.

블랑쉐가 밀폐하는 보호막을 더 강하게 유지한다.

“입구는 잘 막혀 있나 본데요. 위쪽으로 들어올 모양이네요. 갑시다.”

선제공격은 항상 중요하다.

이 안에서 웅크리고 버틸 거라 생각하는 적들의 허를 찌르자.

네 명은 방벽 밖의 지옥 같은 환경으로 발을 내딛고, 곧바로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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