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38화
메인 던전 - Lv.????? [세피로트]
[여긴 정령계라고 부르기엔 조금 이질적이군요.]
[정령계가 아니니까.]
흡사한 환경은 실피드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아직 키가 160㎝도 못 넘던 시절의 아담한 희우와 꼭 같은 모습이다.
그런 모습의 실피드가 사방을 두리번두리번한다.
은발이라는 점만 빼면 정말 꼭 닮았다. 미아는 그래서 실피드를 아무 이유 없이 불러내기도 했다.
사용하는 정령과 친해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긴 하지.
[정령계는 실체 없이 덧씌워진 세상의 다른 위상이지만 이곳은 명확하게 실체가 존재하는 힘으로 이루어진 곳이니 사실 전혀 달라!]
미아가 어려운 말을 쓴다.
로스엘이 혼란에 빠지는 것이 보인다.
“내가 이전에 세피로트에 앉을 때는 이런 곳으로 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설명해줄 사람?”
[그건 여길 들어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지. 여긴 사실 더미데이터 같은 곳이거든.]
신좌가 존재하는 공간은 너무 당연하게도 실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신성에 의해 구축된 완전히 독립된 공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 * *
단순히 힘으로 봉인은 부수는 작업을 하면서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탐색을 거듭했다.
딱 적당한 공간이 발견되었다.
신좌로 만든 유사 신좌다보니 이게 유지되고 있는 모양이다.
실제로는 아무 기능도 없다.
그냥 형성되었고 그걸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로 이렇게 남아있을 뿐이다.
[신좌의 향상성이 이런 형태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 같은데…….]
미아가 설명인지 중얼거림인지 모를 상태가 되어 자꾸 뭔가 되뇐다. 저건 지나치게 전문적인 이야기니까 로스엘에게 듣지 말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이게 봉인을 우회해서 직접 쳐들어갈만한 루트라는 거야.]
“샛길로 이해하면 되는 거지?”
[바로 그거야!]
로스엘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우리를 본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반투명해? 불길해지는데.”
[세피로트의 좌에 앉아야하는 건 로스엘이니까.]
정확히는 우리까지 진짜로 들어오는 것은 쓸데없는 리스크다.
혹여 실패하더라도 로스엘을 잃는 선에서 끝나야한다.
물론 그런 냉정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넷이서 들어간다고 더 쉽고 간단해지는 일이 아니란 이유도 있다.
로스엘이 끄응하고 신음했다.
“좋아. 리더. 나는 뭘 하면 될까?”
[앞으로 전진 하는 거지.]
로스엘이 걷기 시작하자 우리도 그에 이끌려 따라가고 있다.
그녀만이 육신을 남겨두고 영혼 자체가 이곳에 끌려온 셈이고, 나머지는 의식만 연결해두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로스엘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다.
“여기 생긴 거 이상해.”
[정령계와 좀 다르긴 하지.]
원소가 가득한 정령계와 다르게 신성이 곳곳에 흐르며, 그것이 구조물이 되어 펼쳐져있다.
군데군데 구멍이 나있고 그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환한 심연이다.
분위기는 화사하지만 천상의 도시처럼 그렇기에 음산한 부분이 존재한다.
생활감도 현실감도 없는 깔끔하기만 한 각진 구조물들이 얼마나 이어져있는지도 모를 미로.
부분 부분이 반투명해졌다가 말았다가, 때로는 완전히 투명해졌다가.
심지어는 실시간으로 어딘가 구조가 변형되는 곳도 있다.
완전 자기 마음대로 뭉쳐두고 조립한 레고의 성 같다.
형태에는 일관성조차도 없다.
로스엘이 걷다가 멈춘다.
눈앞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신성의 웅덩이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제 어떻게 해?”
[기다려 봐요.]
미아가 바깥의 육체로 의식을 돌려 작업을 시작했다.
로스엘의 위치를 찾아내고 웅덩이를 제거한다. 곧 웅덩이가 굳어지며 지나갈 수 있는 바닥이 되었다.
“이러다간 천만년이 걸리지 않을까?”
[확실히 그건 그렇네. 여기 너무 넓어.]
역할을 나눈다. 미아와 실피드는 로스엘 눈앞에 나타나는 장애물들을 치운다.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든다.
나는 좀 더 전체적인 지도를 확보하기로 했다.
이곳이 어떻게 형성되어있는지를 보아야겠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
[뛰어.]
“죽는 거 아닐까?”
[그게 두려워?]
로스엘이 피식 웃었다.
“그건 전혀 아니지.”
딱 그 순간부터 로스엘의 러닝 액션 이 시작되었다.
나는 일단 그걸 온전히 맡기고 이 미궁 속 미궁 전체를 파악하는데 집중한다.
물리적으로 구현되어 있다는 것만 빼면 데이터로 이루어진 곳이나 다름없다. 해커가 된 기분이다.
세피로트와 이어지는 곳과 이어지지 않는 곳, 심각하게 위험한 곳과 그렇지는 않을 곳을 찾는다.
애초에 다니라고 만든 곳이 아니라 그저 생성된 지역이다 보니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내가 그렇게 하나하나 확인하는 동안 로스엘은 지나가던 찌그러진 드래곤 비슷한 것에게 머리가 뜯겨나갈 뻔하고, 난데없는 폭발에 바깥으로 튕겨나가 낙하하다가 미아가 만든 발판을 딛고 돌아왔다.
그럼에도 로스엘은 느리지 않았다.
확실히 멍청한 로스엘이란 말은 어폐가 있지. 오래 살아서 조금 고장이 났을 뿐 고성능 기천사다.
언더그라운드의 보스였지 않나.
[아빠, 이 방향이 맞을까요?]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아. 실피드 잠시만 이쪽으로 붙을래?]
[그럴게요.]
“나만 너희들 무슨 말 하는 지 우아으아아악! 모르겠어!”
실피드가 붙자 탐색의 속도가 달라진다.
구조물이 형성된 형태에서 일관성을 찾아내야한다.
너무 제멋대로 구성되어있다.
현실의 육체로부터, 그리고 쥐새끼로부터 신성을 더 짜낸다.
실피드는 순간적이나마 신성한 정령왕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온 사방으로 뻗어나간 쥐새끼의 신성력으로 마력 탐지 같은 것을 한다.
무언가 걸려들었다.
[이거 방사형 구성이네. 다행이다. 핵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중심이 하나 있다. 거길 기점으로 완전 멋대로 증식해버린 공간이다.
그럼 거기에 닿으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다.
방향이 정해졌다.
[로스엘! 비행 준비!]
“뭐? 여기선 못 날아!”
[기다려 봐요.]
현실의 미아의 육신에서 체렌코프광이 발해지기 시작한다. 막대한 마력이 쥐새끼의 신성과 뒤섞여 영역을 침범했다.
로스엘은 그 마력이 깃드는 것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외부의 힘이잖아. 이렇게 막 퍼부어도 되는거야?”
[당연히 안 되지.]
“어?”
마력이 로스엘에게 흘러들어 날개가 되었다.
[그러니까 빨리 날아!]
“어으아아아악?!”
쾅하고 로스엘이 있던 곳이 접히며 찌그러졌다.
미아가 구멍을 뚫었다.
로스엘은 그 사이로 솟으며 비명을 지른다.
“어느 방향?”
[가이드 띄워줄게.]
중심부는 물리적으로도 중심부에 존재하지는 않았다.
사방으로 뻗어나가지만 워낙 제멋대로 증축되다보니까 의외로 전체 덩어리 기준으로는 가장자리에 더 가깝다.
애초에 길을 찾다가 이곳으로 온 것이다 보니 생각보다 근처였다.
[최대한 현실 로스엘의 스펙에 가깝게 조정할게요!]
실피드가 다시 저쪽으로 붙는다. 로스엘의 등에 기천사의 핀이 제대로 붙어 가동한다.
이질적인 마력의 침투에 이 공간을 구성하던 신성들이 배제하기 위해 닥쳐들기 시작했다.
이건 화학반응 같은 거다. 의지가 있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되어 있는 것.
이질적인 힘이다 보니 별 수 없다.
연금술사가 포션을 제조할 수 없는 게 괜히 그럴까.
[이제 다 무너질 거야.]
“그거 맞아?”
[어차피 시간은 없으니까. 시간 내로 탈출만하면 이게 맞아.]
마력으로 간섭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게 더 많아진다.
정령마냥 우릴 꼬리에 단 로스엘이 비행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앞을 가린 구조물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끠에에엑!”
[공간이 망가지고 있어서 그래. 조심해.]
“그렇게 쉽게 말하지 므에에에엑!”
[에이, 엄살은.]
“엄살 같. 꺄아아아악!”
미아와 실피드가 열심히 뭔가 만들어 막아내고 터져 나오는 폭발을 중화한다.
촉수가 뻗어 나오기도 한다. 막아낸다.
공간이 뒤틀리며 제자리를 맴돌게 되자, 한 바퀴를 마저 돌기 전에 원래대로 복구한다.
과거의 어떤 흔적 같은 것이 재생되는 느낌이다.
한때 기계신의 원본이었던 신좌와, 그 신좌의 방에서 있었던 전투가 다시 보이는 느낌.
로스엘은 가이드를 따라 계속 날았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날개의 추진이 벌어진 뒤는 공간이 접히고 찌그러지면 쾅쾅 젖혀지고 있다.
“이거 편법이지?! 이렇게 하는 거 아니지?!”
[세상은 원래 그래 로스엘. 사실 우린 처음부터 편법이었어.]
그래도 해보니까 이게 정규 루트라는 확신이 들었다.
원래 같으면 이 미로 찾기를 따로 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디펜스를 파티원에게 맡겨두고 시간 내에 성공해야한다.
그치만, 미로를 좀 박살내고 달려버리면 훨씬 빠른걸.
로스엘은 찌그러지는 공간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기 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무로 돌아가요.]
[무로 돌아가지.]
“죽는 거보다 훨씬 무섭잖아!”
우지끈하면서 무언가 새로 박살나고 재조립되고 어지럽게 뒤틀린다.
로스엘은 이제 눈앞을 보는게 아니라 가이드만 보기 시작했다.
로스엘의 눈앞에 떠오른 증강현실 같은 방향 지시는 내가 조작하고 있다.
[100미터 앞 우회전.]
“개소리하지 마! 여기 공간이 이상한데!”
[어허, 로스엘. 날 믿고 따르시오. 몸에 익은 감각 그대로 환산해서 말해주는 거니까.]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았우에엑?!”
닫힌 구조물이 나오면 미아가 구멍을 뚫는다.
공간이 무너지며 이상하게 뒤틀리고 있으니 나는 최선을 다해 가이드의 방향을 바꾼다.
로스엘은 제자리에서 마하3으로 서른다섯 번 회전했다.
그러자 새로운 길이 열렸다.
“나 이제 여기 이해하기 힘들어.”
[원래 물리적이라는 말은 허상이야.]
[맞아요. 로스엘. 마법은 원래 이래요.]
“변태들아!”
[슬슬 다와가는 것 같은데.]
핵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다가갈수록 괴이쩍고 수상쩍은 광경들이 보인다.
“혹시 저거 중간 보스들이야?”
[그런 것 같은데요. 신들이네. 우려 먹는 거 봐.]
[저거 그때 아후라 마즈다가 변신했던 엘프 궁수같이 생겼는데요.]
말이 끝나자마자 사격이 날아왔다.
다행스럽게도 거리가 멀었다.
로스엘은 팔 하나만 잃었다.
“아파파파파!”
[팔 복구해줄게요.]
마력이 채워져 그 자리에 다시 팔을 만들어낸다. 로스엘은 마침내 모든 것에 대해 전면적으로 이해를 포기했다.
[우로 돌아.]
“우로 돌앗!”
[거기서 30미터 후퇴한 후에 옆차기. 왼발로 왼쪽.]
“30미터……. 아으악?”
[이제 왼쪽으로 나는데 오른쪽으로 가기.]
“그걸 어떻게……. 되네?”
포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때 신좌에 앉았던 데이터들이 우수수 나타나 배치된 몬스터들처럼 공격해온다.
그러나 우리는 맵 밖을 날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공간이 쫓아온다. 지나간 곳의 공간은 블랙홀에 빨려들 듯 일그러지며 몬스터들도 집어삼켰다.
[할 만한데? 이거 정석일지도.]
[적으로 등장하는 몬스터들이 다 보스급이에요. 잠입 액션 아니었을까요?]
“나만 죽으려고 해! 너희들도 좀 힘들어 하란 말이야!”
아니, 충분히 힘든데.
길도 우리가 열고, 방어도 우리가 하고, 로스엘이 하는 건 사실 앞으로 날아가는 것뿐이다.
그 날개도 미아가 만들어주고 있다.
실피드는 정말로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정령왕을 과열 시키려고 하다니. 여긴 어떻게 되어먹은 곳이람.
“혹시 핵이 저거야?!”
[미아야 준비해. 저기 잠깐만 접촉해보면 될 거 같은데.]
눈부시게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
로스엘이 힘차게 날아 접촉했다.
그와 동시에 세상이 바뀌었다.
“어, 잠시만. 나 튕겼다.”
“아빠? 저도요.”
옆을 보니 실피드도 마찬가지다.
미아가 사색이 되었다.
로스엘은 아직도 의식이 없다.
“그거 핵 아니었어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지. 잠시만 문인가?”
문.
마지막 순간에 보인 것을 되짚어본다.
마법을 비롯한 힘을 다루는 행위의 결과는 지 마음대로인 것 같지만 그것만의 일관성이 있다.
이 점은 미궁의 의지와도 비슷하다. 마지막 순간 보인 것의 질감은 어딘가 목재였다.
그래 마치 나무뿌리.
그런데 엄청나게 빛나는.
“아.”
고개를 돌린다. 제단 방향으로 뻗은 세피로트의 나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아까는 이렇게 빛나지 않았다.
쥐새끼 파워로 빛이 난다 기에는 작업을 시작할 때도 이렇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것 같은데?”
핵이 아니라 세피로트 그 자체였다.
그럼 그곳에 빨려 들어간 로스엘은 정확히 도달했을 것이다.
“조금 있으면 눈 뜰 거야.”
그리고 라리사가 끼어들었다.
“끝났어요?! 선생님 그럼 빨리 도와주세요!”
“상황은?”
“전멸하기 직전이요!”
슥 고개를 돌려보니 블랑쉐가 방어막을 유지한 채로 사격 중이었다.
아서는 그 옆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다.
팔이 없다.
“포션 없어?”
희우가 비명처럼 소리친다. 어딘가 목 쪽을 다친 듯 신음하고 있다.
[다 썼어요!]
내 허리춤에 있던 병은 아직 남아있다. 여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한 모양이다.
일단 던져서 깼다. 아서가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누아르가 만들어낸 참상은 거의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더 이상 금속증기나 암석가스가 연막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고개를 들자 좀비떼 마냥 짓쳐들어오고 있는 비둘기 떼가 보였다.
에길이 한손에는 방패를 들고 밀어내며 도끼로 쳐내고 있었다. 날개가 이미 두 쪽 다 성하지 않다.
제니가 껙 소리를 내더니 무언가에 맞아 툭 떨어져 내렸다.
[여기다 붙어! 포션 던져서 깨놨어!]
검을 뽑는다. 미아가 가속 관문을 만들어 뒀다.
일단 큰 걸로 밀어내야 한다.
가속을 받으며 에길 옆으로 달려갔다.
[잠깐 맡겠습니다. 포션 마르기 전에 회복해요!]
스킬 사용의 각을 볼 필요도 없다. 천사들은 지금도 쏟아지고 있다.
[최후의 전쟁]
좁은 통로를 향해 카베의 광역기를 쏟아내었다.
잠깐이나마 밀어내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