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56화
메인 던전 - Lv.17500 하나님의 오른쪽 자리 [미카엘](1)
비교적 강 건너 불구경이었던 이쪽에서는 희우가 얼른 대응하려고 했다.
각자 비장의 수 하나 씩은 쟁여두고 있다. 소모하면 오랫동안 다시 사용할 수 없는 강력한 필살기.
희우에게는 시간의 천사로서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다.
“구해올게요.”
“소모가 너무 커.”
“블랑쉐 언니가 죽는 게 훨씬 큰 소모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죽어.”
희우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확신해요?”
“응.”
미카엘이 굳이 우리를 먼저 잡아 죽일 이유? 전혀 없다.
가브리엘의 복수를 외칠 수 있는 녀석은 아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행동 원리 자체는 가장 알기 쉬운 녀석이다.
필요한 것은 승리,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한 지배.
미카엘은 철저하게 합리적으로 움직인다.
* * *
* * *
그런데 지금 우리를 먼저 치는 것에 합리가 있는가?
한 가지 있다.
“라파엘을 버렸어.”
“과연, 그런가.”
아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이나마 패닉에 가까운 상태였던 희우도 그 침착함이 전염되듯이 정신을 차린다.
“아……. 그럼 혹시?”
“미카엘도 우리랑 같은 생각을 한 거지.”
이건 좀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미카엘은 우리의 가치를 내 생각보다 높게 판단했다.
그리고 아마 그 가치에는 우리 파티의 무력뿐만 아니라 정보도 포함되어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단 말이지?
확실히 대신격들의 메시지가 떠오른 후부터 모든 것이 더 능동적이게 변하고 있다.
너무 오래 그리 살아와서 이젠 수동적인 것이 오히려 더 개연성에 맞을 것처럼 엉덩이가 무거운 존재들조차 말이다.
“과감한 친구야. 처음부터 우릴 손에 넣으러 온 거야. 아주 적극적이군.”
“경우에 따라서는 악마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걸아는 거군. 우리가 게임 체인저가 될 거라고 여기는 건가.”
“단순 전력 격차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하물며 로스엘도 이쪽에 있다.
우리엘의 단서도 이쪽에 있다.
과연, 미카엘은 면밀한 고민 끝에 라파엘을 버리기로 한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저쪽에서는 바알의 어둠이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긴 시간을 버틸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소모한 힘은 세월 이외의 방법으로 되찾을 수 없는 손실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며 나는 강렬한 불길함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보스들을 상대하는 일은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내가 아는 것과 더 크게 달라지기 전에, 새로운 패턴이 더 탑재되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한다.
명확하게 시간이 정해져있는 타임어택보다 몇 배는 더 악질적인 컨셉이었다.
이 정도는 쉬어도 되겠지 하는 순간 어디선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언니는 안 죽는 거죠?”
한 번 더 확답을 바라듯 희우가 나를 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생포지.”
하지만 나는 한 가지 더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저래 봬도 블랑쉐는 굉장한 노력가다.
날 때부터 친부로부터 주입받은 목표를 스스로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나.
많은 것을 보고 배웠을 거고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간혹 보이는 맹하고 멍청한 모습은 단지 그 부분이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취사선택의 결과.
첩보원으로서의 블랑쉐는 오히려 지금이 전성기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블랑쉐가 친부에게 배운 것은 몸을 쓰는 방법과 몸을 쓰기 위해 머리를 쓰는 법 뿐이었다.
그녀의 친부는 능동적인 부하를 바라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지도 모르는 완성작인 그녀에게도 말이다.
기가 막힌 일이다.
그 정도는 알아서 해내야한다는 뜻이었을까?
이젠 그 의중을 알 수 없다. 알 필요도 없다.
블랑쉐에게는 대신 더 훌륭한 스승들이 생겼으니까.
블랑쉐라고 어디 사회성이 없고 싶어서 없었겠는가.
미카엘의 얼굴을 보며 떠올린다.
누군가의 마음을 읽으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부하들이 생기고 리더를 찾아가, 그리고 뜻하지도 않게 서브 리더에게도 많이 배운 것이다.
사람의 기분을 읽을 때, 그러니까 적어도 인간형을 취하고 인간처럼 행동하는 상대의 기분을 볼 때는 먼저 눈을 볼 필요가 있다.
미카엘의 입가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서늘하다.
똑바로 마주보면서 어딘가 빨려 들어갈 것 같다고 느끼는 눈이 있다.
바깥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이런 존재를 상대로는 어떤 결의를 나타낸다.
마력이 크게 부각되는 세상에서 눈은 마음의 창이기도 하겠으나 마력의 창이기도 하다.
블랑쉐는 미카엘이 이미 무언가 결심하고 자신을 붙들었음을 깨달았다.
그 결심이 무엇일까?
제 집을 더럽히는 벌레의 제거일까?
그렇다면 돌려놓아야한다.
블랑쉐는 심호흡을, 속으로만 하고 말했다.
“전력이 필요할거라고 생각하는데. 악마들을 모두 밀어버리고 이 세상의 지배자로 우뚝 서는 게 네 목표 아닌가?”
“흠,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군. 메타트론이 말했나? 그가 너희에게 그런 말을 할 것 같은 인물은 아닌데.”
되네?
왜 되는 거지?
블랑쉐는 언제나 자신만만하지만 그것은 이미 도달한 영역에 한해서다. 마법이 그랬고 친구 사귀가 그랬듯 잘 모르는 분야에서는 꽤나 소심하게 굴 자신이 있다.
그런데 미카엘이 너무 쉽게 덥석 물었다.
이렇게 대화가 성립한 것만으로도 이미 성공이다.
적어도 시간은 끌 것이며 하다못해 정보를 얻을 것이다.
가장 최악으로 잡더라도 개죽음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유배자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궁금하군.”
“유배자라, 알 만큼은 알지.”
블랑쉐는 필사적으로 리더가 말하는 방식을 떠올렸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려고 노력했고 상대의 마음에 들고자 노력했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은 티 나지 않아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필요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은 나와 같군.”
아서는 말에 권위를 부여할 줄 알았다. 지도자로서 긴 경력을 가진 그에게 블랑쉐도 이것저것 많이 배웠다.
에길은 말이 가진 감정의 힘을 잘 사용할 줄 안다.
전체적으로 블랑쉐에게는 없던 것들이었다.
블랑쉐는 무감각하고 감정이 뭔지 모르는 암살자가 되기를 기대 받으며 길러졌으니까.
“그쪽의 전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지?”
“적어도 가브리엘을 쓰러뜨릴 정도. 그리고 라파엘도 그대로 두었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어느 순간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 어떤 스킬의 보조도 없이 미카엘의 날개가 살짝 움직이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 것 같아졌다.
눈꼬리가 살짝 변하는 것도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 법해졌다.
일종의 무아지경 속에서 블랑쉐는 미카엘과 대화했고, 서로의 정보를 교환했다.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블랑쉐의 사고력이 일을 하기 시작한다.
얻은 정보로 퍼즐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며 블랑쉐는 어느 순간 미카엘이 라파엘을 버리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처음부터?”
“가브리엘도 라파엘도 편리하지만 열정적이지는 않지. 내게 필요한 것은 그보다는 좀 더 야심만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천사들은 죽고 없었거든.”
천상의 군주는 처음부터 그들을 영입할 생각이었다.
설령 총알받이일지라도 최소한 우군의 자리에 세워두고 싶은 말이었던 것이다.
블랑쉐는 그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리더가 예측한 미래에 이런 일은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미카엘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대충 우리 뜻이 같음이 확인 된 것 같군. 그렇다면 싸울 필요도 없다. 인간끼리는 악수라는 방법으로 친교를 나눈다던가.”
“아, 그. 그렇다.”
“좋군. 그 몸은 악마지만, 본디는 인간이었을 터. 내 너를 거부하지는 않도록 하지.”
블랑쉐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잘 된 것 같아 이상하다.
“그럼 네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블랑쉐는 얼른 생각해야했다.
이게 맞나? 지금 당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 내가 당했나?
“네가 리더가 아니라고 들었다. 그럼 리더와 이야기해봐야 하지 않나.”
“그. 그렇다.”
블랑쉐는 혼란에 빠졌다. 일단 동료들이 이제 어디 있을지 알지를 못한다. 그래서 얼을 탈 수밖에 없었다.
이 다음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될 거라고 애초에 큰 기대를 안 했다.
정 안된다면 여기서 그냥 흘려보내줄 삶이었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꼭 그런 판단이었다.
블랑쉐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일단 움직였다.
동료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아무 방향으로나 말이다.
‘오르골이 어떻게든 하겠지.’
이 정도 했으면 노력했지 않은가.
블랑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MISSION COMPLETE…….’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석연치 않은 컴플리트였다.
컴플리트가 맞긴 한가?
파티의 사수 겸 암살자가 보스와 독대하고 있을 무렵 우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설사 미카엘이 그들을 전멸시키려는 의도가 있더라도 그렇게 버리고 가는 것은 이 파티의 철학에 걸맞지 않다.
제일 먼저 전투를 불사할 각오로 움직인다.
가까운 곳에 바알과 다른 악마들이 와있다.
그들의 시야에 포착되더라도 좋다.
무슨 불상사가 생겨난다면 즉시 블랑쉐를 구출해 이탈할 필요가 있다.
이후가 어려워지더라도 어떻게 살아만 있으면 또 활로가 있는 법이다.
“미카엘과의 전투는 시기상조지만, 그렇다고 그냥 당하라는 법은 없지.”
몇 가지 돌이킬 수 없는 소모를 각오한다면 어찌 해낼 수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그냥 악마들을 이쪽으로 유인할 수도 있어.”
천상의 군주와 지옥의 성채의 주인이 맞붙는 상황이라면 유배자 파티 정도는 누구도 신경 쓰지 못하겠지.
미아도 초조한 표정으로 메모라이즈 구슬을 만들어 띄운다.
그리고 빛나는 날개를 펼친 눈부신 빛무리를 멀리서 목격하게 되었다.
“1페이즈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대형을 갖추고 있자니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런데 블랑쉐는 어딘가 무표정한 가운데 노골적인 떨떠름함이 드러난 모습으로 비행해오고 있었다.
“음, 파티원들. 천상의 도시의 군주 미카엘님이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인질로 잡혀 있나 싶어 노려보고 있던 희우의 눈이 흐리멍텅해진다.
“네?”
블랑쉐가 고개를 돌리자 눈부신 빛을 줄이며 인간형의 모습을 드러낸 천상의 군주가 쇼맨쉽 가득한 제스쳐를 취하며 날개를 펄럭였다.
“좋아, 유배자들. 내 밑으로 들어와라. 밑이라고는 해도 나는 그리 나쁜 윗사람은 아닐 것이다.”
늘 오만하고 당당한 사대천사의 수좌,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을 사대천사의 수장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내 친구 블랑쉐의 얼굴을 봐 보장해주도록하지.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였어. 리더가 누구지? 더 말이 잘 통할 거라고 하던데.”
나는 어이가 없어서 보고 있다가 앞으로 먼저 나왔다.
“나요.”
“우선은 천상의 도시로 돌아가도록 할까.”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미카엘에게 영입 당하는 식의 이벤트는 본디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루트에서 이런 식으로 등장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해봤는데.
적어도 블랑쉐가 인질로 붙잡혀 있는 채로 우리를 불러내는 것을 생각했다.
그 편이 미카엘 입장에서 우리를 다루기는 더 편하지 않겠나.
“너무 겁먹지는 말도록. 손을 잡자고 불렀는데 우리 전력을 상하게 만들 수는 없지.”
이번 테마가 점점 개판으로 꼬여가는 느낌이 든다.
쾅하고 이제는 멀어진 곳의 폭음이 들린다.
라파엘이 죽어가고 있는 소리였다.
미카엘의 눈이 문득 미아가 끌어안고 있는 지팡이에 가서 닿았다.
“그건 가브리엘이로군. 너희들이 더 잘 쓸 수 있겠지.”
나는 결정해야했다.
여기서 굳이 싸움?
혹은 한번 따라보기?
이 경우에는 싸워서 얻을 것이 없었다.
어디까지 굴러가는지 한번 봐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