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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41화 (512/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41화

메인 던전 - Lv. 12500 달의 눈물 [가브리엘](3)

로스엘은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들을 들었다.

처음 이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줄곧 들어오던 소리다.

온 세상에 조각나 퍼져있는 신좌들의 목소리.

로스엘은 가장 처음에 그 목소리가 무엇인지 몰랐다.

의미 없이 웅얼거리는 잡음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점차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기계장치의 신.

신좌였던 것들의 목소리다.

의지도 자아는 없는 것이 무언가 알리고 싶다는 듯 속삭여 온다.

로스엘은 결국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적은 없다.

다만 이 신좌라는 것들이 자신과 동족임을, 어떤 식으로건 같은 존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 순간부터 하니엘이라는 이름의 천사는 메타트론과 대등한 힘을 가진 천사로 이름 높은 존재였다.

에덴이 번져나간다.

신전을 탈환하기 위해 덤벼들던 천사들도 그 안에 휘말렸다.

물이 고인 달빛도, 사막의 삭풍도 모두 스러져 싱그러운 자연으로 돌아간다.

신전의 건물도 사라지지 않았다. 넝쿨이 뒤덮이고 꽃이 피어난다.

* * *

* * *

하늘에는 다시 구름이 생겨나고 대지에는 강이 흘렀다.

이윽고 천상의 도시 전체가 신록으로 뒤덮였다.

누아르의 포격에 파괴된 모습 그대로 그리되자, 마치 천사도 악마도 그리고 인간도 모두 사라진 후의 세상 같다.

쇠락한 문명 속에서 새가 지저귀며 작은 동물들이 달린다.

[가라앉은 영광] 필드와도 흡사하다.

멸망했으나 다시 꽃피는 자연의 순환 속으로 흘러들어간 도시.

로스엘은 눈물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

“이렇게 될 수도 있었겠지.”

이미 늦었다. 다시 이런 곳으로 복구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여전히 귓가에는 하니엘일 때 늘 듣던 그 목소리들이 속삭였다.

로스엘은 갑자기 그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아졌다.

[죽여……. 줘.]

산발적으로 뒤섞여있는 어떤 의미를 가진 말.

문득 그렇게 들렸다.

사실은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 같다.

세월이 더 흐르고 조금 더 공고해진 의지일 것이다.

정령은 원소에서 태어난다.

그렇게 자연 발생한 것은 자아가 없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인간을 보고 배우며 모방하여 비슷한 것을 형성해간다.

어쩌면 이 [세피로트의 나무]라는 기계신의 파편은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이제 이용당하는 것에 지쳐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의 동족과 만났을 때, 같은 시대 같은 이들의 손에 만들어진 이들과 만났을 때.

꾸준히 소망을 전해온 것이리라.

“해줄게.”

로스엘의 의지는 그랬지만, 그와 대비되게 세상을 재생시키는 듯한 영역, 에덴이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하니엘로서의 무기인 활을 든다.

오래간만임에도 얼마나 손에 익는가.

그리고 쏘아낸다.

수십 발의 무지갯빛 줄기가 쏘아져나가 신전을 날려버렸다.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지형이 그대로 아작나 평탄화되었다.

무너지는 가운데 나무들이 솟아나 파티원들을 지켰다.

천사들이 생매장되는 가운데 퍼져나간 무지갯빛 화살들이 다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뿐이었다.

이제 활동하는 천상의 병력은 없게 되었다.

아직 진입하지 않은 자들은 라파엘과 가브리엘의 손짓에 따라 후퇴하기 시작한다.

세피로트의 천사와 싸우는데, 동급의 존재가 아닌 이들은 의미가 없다.

손짓 한 번에 쓸려나갈 뿐이다.

“라파엘 때려주고 올게!”

“기왕이면 찢어버리죠.”

“노력한다! 로스엘!”

“메시지 안 뜬다. 하니엘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군.”

“재수 없을 경우 보스가 하나 더 생겨서 삼파전이라 그랬죠?”

“그래도 결국 라파엘과 싸웠을 거라 생각하니까 나쁠 건 없지만, 우리가 연전을 치러야 하잖아.”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긴 했다.

로스엘은 충분히 우리 파티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목표하는 엔딩도 같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로스엘이 하니엘이 되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을 것이다.

[달의 눈물, 가브리엘]도 충분히 한숨이 나오는 메시지지만 [기쁨의 동산, 하니엘]은 아예 소름이 끼친다.

패턴이 좀 많이 과하게 너무 더럽다.

게임 시절에도 그랬고 현실이 된 후에는 더하다.

“깔끔하진 않았지만 계획대로는 되었어. 문제는 가브리엘인데.”

어우, 정말 큰 위기였다. 오랜만에 멘탈도 좀 흔들릴 뻔 했다.

하지만 이제 지나간 위기다.

새로운 위기에 눈을 돌릴 때다.

다 무너져 평탄화 된 가운데 로스엘이 날아올라 불타는 태양과 맞부딪친다.

우리를 배려해 저 멀리 밀어낸다.

무지개와 별빛의 화살들은 가브리엘도 동시에 견제했다.

최소한의 시간을 벌어주는 눈치 좋은 플레이다.

우리가 하는 것을 보고 뭔가 느낀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가브리엘로서도 갑작스럽게 잊고 있던 대천사가 나타나자 당황하긴 한 모양인지 우선은 응전 중이었다.

“점검. 빨리. 라리사는 치유하고.”

신의 목소리는 이곳까지 닿지 않으나 그 힘만은 여전히 닿는다.

정화의 신의 권능을 통해 증폭된 성기사의 기도가 파티원을 감싼다.

라리사는 창백해보였지만 어쨌든 노력하고 있다.

다들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포션 남은 게 하나도 없네요.”

“노히트 클리어 해야겠군.”

“까짓 거 하면 되겠죠.”

그리고 소모품도 남은 게 없다.

열매가 블랑쉐에게 열댓 개가 남아있긴 하지만 지속적으로 활용 가능한 개수는 아니다.

“바리케이드도 다 썼지?”

“하나도 남김없이 다 털었어요!”

“지효성 회복약도 일단 다들 더 먹어두고…….”

지금 제일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스킬들 쿨다운은 다들 어떻게 되시나?”

파티원들의 표정이 어둡다.

당초 계획은 디펜스를 좀 더 잘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는 않았고 로스엘이 눈을 뜬 타이밍도 너무 극적이었다.

서브 리더로서 큰 기술을 모두 체크하고 있던 희우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도는 대로 모조리 소모하는 바람에 당장 전력은 부족해요.”

“[은빛 섬광] 녹화는? 그건 아직 켜져 있고?”

“그건 안 썼어요.”

이 악물고 아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사실 대인전에서나 강력하지 광역기라고 부르기엔 손색이 넘치는 스킬이다.

일격에 처리가 가능한 적들이라면 모를까 천사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잘했다고 머리카락을 만져주며 계속 브리핑을 받는다.

“다른 사람은?”

각자 자신의 스킬 쿨다운 정도는 재게 되어있다.

하나하나 빠르고 간략하게 보고한다.

아서는 [나이트 오브 카멜롯]을 정말 아낌없이 퍼부었다.

[엑스칼리버]는 좁은 곳이라 사용하지 못했다.

더 무너졌다간 큰일이 날 테니.

에길은 난전이 시작된 순간 [아수라파천무]를 휘둘렀다.

쿨다운이 이제 막 돌기 시작했으니 한참이 걸릴 거다.

블랑쉐는 그래도 온존하고 있다.

[검은 날개]나 [삶과 죽음의 경계] 따위의 스킬은 다수의 잡몹을 상대로 활용될만한 성능 따위는 없으니까.

제니도 [파편의 무기]와 [무오의 광휘]를 비롯한 모든 쿨다운이 다 돌고 있었다.

리온과 라리사는 애초에 보스전을 상정한 스킬셋 자체가 아니니까 제외.

후방에서 원래 제니가 하던 의무병 역할이면 족하다. 쥐새끼도 당장 전력은 아니고, 중요한 순간 라리사와 함께 활약할 수는 있을 것이다.

총평하자면 파티는 전혀 만전이 아니며 아예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우선 쿨다운부터 벌어야겠는데. 에길의 쿨다운이 와야 해요. 결국 마지막에 대가리 깨는 건 에길이랑 희우니까.”

“면목 없군.”

“안 쓰고 죽는 거 보단 나아요. 다들 살아남았죠? 한 번 더 하면 됩니다.”

페이즈 스킵은 무리다.

1페이즈의 인간형 가브리엘은 까다로우니까 빠르게 페이즈 스킵을 하고 본체를 드러낸 후에 쿨다운을 벌 생각이었는데, 인간형으로 오래 보게 될 것 같다.

“나도 녹화 켜져 있고.”

스킬 의존도가 가장 낮은 것은 나와 희우, 그리고 미아다.

다른 멤버들은 어떤 식으로건 스킬셋에 의존하는 세팅이니까.

어디보자. 1페이즈를 그냥 때려서 넘기고 2페이즈에 쿨다운이 오면 바로 다음으로 넘겨야 하나?

3페이즈는 너무 위험한데.

본래 계획은 1페이즈를 가능한 빠르게 보내고, 2페이즈에서 쿨다운을 버는 것이었다.

1페이즈는 피곤하고, 3페이즈는 진짜로 누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비교적 정직한 2페이즈에 최대한 오래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스킬쿨이 동시에 돌아오는 타이밍에 3페이즈로 넘긴다.

즉시 모든 스킬을 퍼부어 최대한 3페이즈를 짧게 보고 끝내는 것.

이게 최선이었다.

스킬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1페이즈를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딜 사이클이 엄청나게 꼬인 경우다.

만전의 상태에서도 실패하는 일이 많은 것이 레이드.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다들 기합회피로 어떻게 잘 해봅시다.”

“무책임하네요.”

“그러려고 파티 만들었어. 나 혼자 다 하는 건 파티가 아니잖아.”

희우는 그 발언이 정말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머리를 기울여 내 어깨에 툭 부딪친다.

“오빠 이제 그런 말도 할 줄 아네.”

“자주 했어.”

“후후후.”

와, 그래도 하니엘이랑 안 싸워도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저건 4페이즈까지 있다.

그때 달빛이 날아 우리 곁을 지나간다.

그대로 물기가 스몄다가 다시 에덴에 잡아먹혀 사라졌다.

“오……. 이렇게 되면 장판이 먹혀서 좀 줄어드나?”

불행 중 다행.

“일단 더 내버려뒀다가는 로스엘이 쓰러질 테니까 다 같이 돌입합니다. 1페이즈는 저와 희우, 그리고 미아만 딜할테니 다른 분들은 가능한 회피에 집중해주세요.”

[은빛 섬광]이 아직 살아있다. 둘 다 말이다.

그럼 그걸로 1페이즈를 최대한 평타딜 많이 우겨넣고 스택 쌓아서 한 번에 꽂아 넘겨야 한다.

사실 거의 묘기에 가까운 짓인데, 항상 하던 건가 싶기도 하다.

괜히 희우와 미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정신안정에 도움이 된단 말이야.

“출발합니다.”

그다지 격정적이지도, 비장하지도 않은 평범한 어조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들 피식 웃었다.

좋은 분위기였다.

[하니엘]이라는 것은 본래 그렇게 강력한 자리로 설계된 자리가 아니다.

위험하고 강력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전부 필멸자 출신이 아닌 고위의 천사들이었다.

자프키엘, 자드키엘, 카마엘 등의 자리가 주인 없이 남는 자리였다.

그래서 그 자리를 채울만한 누군가가 필요했다.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당시 천사 측의 지배자였던 메타트론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제는 로스엘을 제외한 다른 필멸자 출신의 천사는 이미 죽고 없다.

애초에 너무 빨리 죽어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정도의 인상뿐이다.

영원한 전쟁의 초기는 지금보다 훨씬 격렬했고 쉴 새 없었다.

세상의 몰락 초기였으니 아직 지킬 것도 더 많았고 얻을 것도 더 많았다.

서로 잃을 만큼 잃은 후에야 교착 상태가 되었음이다.

“사랑의 빔!”

콰아아 하고 분홍빛 기류가 쏘아져나간다.

라파엘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태양을 움직였다.

기류는 불타 흩어진다.

“그 거지같은 소리 좀 전투 중에는 안하면 안 되나? 어떻게 수천 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거냐.”

“그것이 나니까! 좀 더 자신에게 당당하도록 해! 너 아직도 가브리엘한테 고백 안했지?”

“닥쳐라.”

우스운 일이다.

로스엘은 하니엘이 어딘가 원래의 자신과 다른 존재라고 느꼈다.

고위의 존재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시스템에 속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에 동화되는 것과도 같은 일인 모양이다.

그러나 동시에 고위의 존재들을 조금 더 형이하학적 존재로 끌어내리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인간의 거죽을 쓰고 있는 지금의 라파엘은 제법 인간처럼 사고한다.

여전히 희미한 존재인 가브리엘과 달리 아주 인간적이다.

옛날에 짓밟은 적이 있어서 그 격정과 분노가 저런 것을 싹틔웠을지도 모르지.

사랑의 천사다운 일을 해냈다며 뿌듯해도 좋을 것 같다.

“사랑의 이온 에너지 충격포!”

“제발!”

어린애 같구나. 라파엘.

하지만 로스엘은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옛날 같은 힘은 없다.

그때 같았다면 이미 껍데기를 홀딱 벗겨놓을 만큼 두들겨 팼겠지만 기껏해야 대등한 정도다.

하지만 로스엘은 벗을 껍데기가 없다.

그럼 전략적으로 어떻게 상대하는 게 옳을까? 약간의 열세를 연기하며 라파엘이 껍데기를 벗어던지지 않을 정도로만 하는 게 좋겠다.

눈치를 보니 이미 하니엘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저렇게 덤벼들었겠지.

타당한 추론이다 얼마 만에 여기 돌아왔는데. 힘을 다루는 것도 어색하다.

그래서 언어로 공격 중이다.

“야 가브리엘!”

“닥쳐어엇!”

태양이 폭발했다.

로스엘은 얼른 밑으로 떨어져 폭발의 반경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멀어지자 라파엘이 씩씩대며 따라온다.

가브리엘과 멀어져야 로스엘이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오, 계획은 아니었지만 계획대로야.”

가브리엘은 저쪽에서 처리할 것이다. 로스엘은 이 불타는 천사와 열심히 놀아만 주면 된다.

죽지 않는 선에서.

“로스엘 크리스탈 파워! 사랑의 이름으로 에너지 파!”

일단 이런 아무 말을 지껄이는 건 항상 즐겁다.

어느 새, [천상의 도시] 가장자리까지 날아가 온 사방에 별빛과 무지개를 흩뿌리고 있다.

라파엘의 불길도 더욱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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