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84화
메인 던전 - Lv.17500 [빛과 어둠의 경계](4)
로스엘은 지금 상황이 꽤나, 아니 굉장히 얼떨떨했다.
왜지?
왜 이게 되는 거지?
입으로야 매일같이 파멸! 혼돈! 공포! 지구 파괴! 세계멸망! 우주폭파! 그런 소리를 지껄이거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건 도피일 뿐이다.
그야 이루어질 리가 없는 꿈이 아닌가.
그러니 단지 유배자 애호가로서 어느 날 갑자기 또 누군가 불러들인 유배자나 뿅하고 짠 나타나주면 만족하는 나날이었다.
기계무덤을 떠돌고 세상 곳곳을 구경하며 과거를 추억하는 것도 썩 나쁜 삶은 아니니까.
로스엘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삶에 끝이 다가왔다.
너무 갑자기다.
웬 유배자들이 나타났고, 그 유배자들이 너무 비범했고, 그래서 신나서 폴짝폴짝 뛰며 쫓아다니면서 도와주고, 그러다보니까 갑자기.
그래서 로스엘은 미처 생각해볼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각오? 결심?
이미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 닥치니까 조금 어 싶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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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후다닥 처리하지 못할 것은 없다.
그냥 평소에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거다.
“어, 그. 뭐라고 할까. 좀 더 마음의 정리를 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는데.”
누가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냥 습관이 된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날아갔다.
번쩍번쩍 빛나는 구체가 형성되고 있다.
사실 로스엘은 왜 이게 이렇게 흘러가는지 모른다.
그녀가 모르는 곳에 무수한 사정과 원리와 잘 모르는 누군가들의 노력이 집약된 결과일 것이다.
잘 모름에도.
그럼에도.
기계신이 설계되고 완성되며 군림하는 과정도 모두 지켜보았던 로스엘은 이게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좌의 집합체이자 의지 없는 절대자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
어딘가 추억이면서도 반가운 그 모습.
새삼스럽게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다. [가라앉은 영광]이라는 이름의 옛 도시가 본디 있던 곳.
[기계 무덤]의 무너진 신전의 기둥들이 원래 자리하던 곳.
거대하고 또 거대하며 이 왕국을 굽어보던 신이 거하던 자리다.
그 중에서도 중심부에서 온 세상을 지탱하던 거대한 힘의 자리.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
이번에는 질문이었다.
리더가 대답한다.
“저 안으로 들어가요.”
“안으로?”
로스엘은 시키는 대로 했다.
빛나는 구체는 고향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무언가가 묻는다.
아니 사실 실제로 그러진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가 로스엘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흠.”
로스엘은 짧게 고민했다.
그러니까 지금 세계멸망을 기도하면 되는거지?
아 유배자들이랑 더 인사 할걸. 뽀뽀도 못해줬는데. 좀 더 끌어안고 부비부비할 걸.
이렇게 끝나는 건 좀 허무한데.
그래도 원하는 바는 분명하다. 일단 말했다.
“다 부숴버려. 그리고 이 세상을 끝내줘. 모두의 마음 속에 잠들 수 있도록.”
스쳐지나가는 옛 기억들.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가 좋아하던…….
생각해보면 말이다.
내가 아는 루트는 이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어찌저찌 뭔가 도달은 한 것 같은데 찝찝함을 금할 수 없다.
원래 계획은 천천히 다 쓸어 담는 거였는데 말이다.
그로 인한 파밍도 중요하다.
하지만 혹여 로스엘 엔딩 이후에도 찾아올 침공이,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내가 이 엔딩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침공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그러려고 했다.
게임 시절에 없었던 것이 갑자기 생겨나는 일이 얼마나 흔한가.
지금도 아주 찝찝하다.
그래도 저렇게 빛의 구체가 출현하고 그것이 세상의 향방을 결정짓는 것까지는 맞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후에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래 마치 미궁의 결말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몇 번인가 메인 던전을 클리어 해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맥락 없이 갑자기 우리의 왕국으로 돌려보내어지고 그걸로 끝이다.
그런 느낌이 강하다.
이후 시작되는 침공에 대해 던전 내에서 직접 알아본 적은 없다.
바깥에서 설정 끼워 맞추기와 보스들의 행보나 대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니까.
하지만 그게 모두 현실이라 생각해본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지?
많은 게임들이 디테일한 부분을 뭉개고는 한다.
그건 즐기기에 중요한 요소가 아니니까 말이다.
미궁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가 자주 지나다니는 구간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샅샅이 파악했다.
튜토리얼부터 왕국까지 모조리 말이다.
하지만 메인 던전부터는 내게도 미지의 구간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계신이 여기 시나리오 보스들의 뜻대로 움직이고 작동하는지 까진 나도 모른다.
세피로트를 뜯은 것도 동력만 다를 뿐, 결국 같은 마법이 기반이라 가능했다.
기계신 자체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다.
왕국에서 만들려고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만약 최종보스가 등장하지 않고, 게임적 특이점 없이 그냥 흘러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준비할 수 있게 해줬다.
빛이 터져 나왔다.
그 자체에 무언가 힘이 있지는 않았다.
보스는 출현하지 않았다.
출현할 시기를 지나쳤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로스엘의 소원대로 기계신은 이 왕국을 유지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서 세상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잠식당하고 있던 모든 부분부터 천천히 저 아래의 심연으로 급격하게 쏟아져 내린다.
이제 막 시작되었으나 그럴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런 무너지는 부분은 어떤 루트에도 보여주지 않는 장면인데?
파티원들 역시 내게서 그럴 수 있다는 경고를 받은 적은 없으나 그럼에도 움직였다.
누가 보더라도 보스전을 할 상황은 아니었으니 당연하다.
누가 보더라도 보스맵이 생길 것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어떻게 된 거죠?”
“몰라!”
“확실히 이해했어요!”
콰드드드하는 소리가 고막을 잠식한다. 마법으로 통신을 연결해야했다.
세상이 울부짖고 뒤틀린다. 심연으로 가라앉는 서든데스에 휘말려 죽어본 적은 있다.
정확히 이랬다.
어떻게 하면 생존률을 높일 수 있지?
아무리 그래도 서든 데스에서 살아남는 법을 연구해본 적은 없다. 그건 할 필요가 없다.
피할 수 있는 시스템 적 재난을 대체 왜 마주하냔 말이다.
미아가 무언가 하기 시작했다.
나도 동참해서 마법을 엮어낸다.
우선 모두들 비행을 시작했다. 리온과 라리사도 제자리에서 떠올라 호버링한다.
하지만 단순한 비행은 한계가 있다.
공간 자체가 무너져 내려 심연의 거름이 된다면 비행할 공간도 없으니까.
[왜 우리를 돌려보내주지 않는 거죠? 보스전도 없으면 끝난 거잖아요!]
그리고 내 눈에 문득 황금빛이 들어왔다.
라리사의 품속에서 나는 빛이다. 거기에는 쥐새끼가 있었다.
[라리사아아아! 그거 뭐야! 어떻게 된거야!]
비명을 지르다시피 날아가서 묻는다. 쥐새끼는 멍하니 의식을 잃고 있다.
[예?! 선생님 뭐가 말이죠?! 저희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상황이 급박하면 소리를 지르게 된다. 그럴 필요가 없는 정신적 통신이더라도 마찬가지다.
하얗게 질린 라리사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윽박지르는 것처럼 말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쥐새끼가 왜 살아있어?]
[네?]
[그 녀석이 죽어서 성배로 돌아가서 이렇게 된 거 아냐? 안 그러면 엔딩이 나오지 않는데!]
[그런 적 없어요! 저희는 그냥 여기 도달한 후에 앞으로 나갔을 뿐이에요!]
[쥐새끼가 뭐라고 안 했어?]
라리사가 눈을 깜빡인다.
[여기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라고 했어요!]
[그건 맞지! 여기가 기계신의 중심이니까!]
말하자면 신좌가 있는 공간 그 모든 공간이 뭉쳐 만들어진 그런 곳이다.
[그리고 쥐새끼가 조용해져서 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었어요!]
[오래 걸렸어?!]
[아뇨! 여기 도달한지 얼마 안 되었어요!]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흔적을 쉽게 못 찾았던 것도 있나보군.
[진짜 그냥 갑자기?!]
[네!]
리온도 모터가 달린 것 마냥 고개를 끄덕인다. 더 높은 곳부터 세상이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다.
세상의 바깥,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곳이다.
거기서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우리는 비행고도를 유지할 수 없다.
가라앉는 공간과 함께 다같이 강하한다.
추락하는 공간 속에 남아있기 위해 보조를 맞추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자, 생각하자.
생각해.
쥐새끼가 살아있다고? 왜?
저건 성배가 아니다. 성배가 자의식을 가지게 된 짐승일 뿐이지.
그럼 안 되잖아!
저 녀석을 트리거로 이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쥐새끼는 성배라는 이름의 아이템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기능은 하지 않는다.
나름 귀엽게 생겨서 저걸 살리려는 시도는 많이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코딩 되어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군.
그럼 쥐새끼인 채로 성배라는 판정을 내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그대로 끝나야하는데.
왜 안 그렇지?
저놈은 왜 살아있지.
고민을 시작하니 절로 정좌한 자세가 된다.
공중에 떠서 그러고 있는 건 우습지만 이런 게 편할 때가 있다.
그리고 아까부터 느끼던 다른 찝찝함과 쥐새끼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연결되었다.
저 녀석은 조력자이기도 하단 말이지.
[그렇네! 안 끝났군!]
[그게 뭐죠?!]
안 끝났다.
이 메인 던전은 전혀 끝나지 않았다.
보스도 없이 이렇게 날치기로 가져다뒀는데 끝이라고 그럴 리가 없지.
이미 우리 파티가 발을 들인 것은 DLC라도 발매된 것 마냥 뒤틀린 히든 루트 비슷한 것이다.
미궁의 섭리가 이런 걸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다들 보스전 준비! 뭔진 몰라도 뭔가 옵니다!]
[서든데스에 휘말렸는데 보스전이라고?]
[제 생각엔 무너지다 말겁니다!]
그래야 보스전 할 공간이 생길 테니까.
그런데 그럼 뭐랑 싸우지?
히든 오브 히든 보스 사탄인가?
뒤늦게라도 YHWH가 등장하나?
그것도 아니면 미카엘 바알 합동 보스전?
여러 가능성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언가도 스쳐 지나간다.
그건 정말로 직감이었다.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해주지는 않겠지.
보스가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그냥 지나가게 해줄 리가 없지 않나.
미카엘도 바알도 모두 이 세계에 살아 숨 쉬던 녀석들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와 함께 추락 중일 것이다.
내가 미궁이라면…….
미카엘은 이동 중에 세상이 갑작스레 무너지는 것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침착하게 날개를 펴고 자세를 잡았다.
무너진다면 그것을 따라가면 된다.
그는 심연을 모른다.
가본 적도 없다.
하지만 무엇인지는 안다.
미궁의 쓰레기통이다.
이 세계가 마침내 멸망하여 스러지는가.
그렇더라도 그는 살아남을 수도 있는 것이다.
메타트론은 흔적을 쫓다고 그대로 추락했다.
품안의 성배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어딘가로 이어졌다.
거대한 빛의 구체가 보인다.
세상이 무너지는 가운데도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태양은 아니지만 태양처럼 모든 것을 비춘다.
메타트론은 전율했다.
그리고 제 품속의 성배들이 저곳을 향해 도달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여……. 제가 바치겠나이다!”
나헤마와 바알은 전투 중에 속절없이 미끄러져 추락하기 시작했다.
지옥의 성채가 무너지는 수준의 일이 아니다.
왕국이라는 공간이.
지금껏 무수한 유배자들의 요람이었으며 끝내는 몰락하여 바벨의 자식들이 지배하던 좁은 공간이었던 이 세상에 무너지고 있다.
토사에 휩쓸리듯 조각난 공간에 쓸려 내려가자 당연하게도 바알과는 거리가 벌어졌다.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르게는 그 안도에 분노하며 나헤마는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심연으로 서든데스로 심연에 떨어지더라도 사망률은 100%가 아니다.
나헤마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는 도중 근처까지 떨어진 다른 무언가가 보였다.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날개를 편다.
이형의 짐승 형태는 어딘가 낯이 익다.
‘릴리트?’
그러고보면 그 요새 옆이었다.
정신도 없어보인다.
나헤마는 단검을 꺼내들었다.
힘은 언제나 다다익선이다.
권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바알은 허공을 가른 주먹의 손맛이 아쉬운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가장 냉정한 것은 솔로몬이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신 그가 분노한 것은.
“아니! 제자 녀석! 나를 속였구나!”
어째서 보내주지 않고 세상을 절단 내는가!
마법사의 삶 최후의 불꽃!
빛나는 재능에게 모든 것을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구나!”
기계신이 부활했음은 느끼고 있다.
그는 세피로트와 클리포트의 창조자.
모든 신좌의 집합인 기계신의 힘을 빌어 그런 공간을 새로 창출해낸 위대한 마술사왕.
그리고.
기계신이라는 신좌에 앉아있는 자.
“신이 불완전하군. 이대로는 뭐 어차피 제대로 기능도 못했겠어. 그러나 뭐. 문제없지.”
무덤이 그야말로 개박살 나고 있는 와중에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기계신은 그의 명령에 복종했다.
[파괴를 유예하라!]
붕괴가 멈췄다.
거의 대부분의 공간이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극히 일부만이 남아서 가늘게 이어진 길을 만든다.
마치 계단과도 같은 형상이었다.
그 끝에는 눈부신 태양과도 같은 새하얀 구체가 있다.
우리는 그 가장 아래쪽에 떨어졌다.
붕괴가 멈출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여기쯤일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형태만큼은 의외다.
얼마 남지 않은 공간들이 얼기설기 뒤얽혀있다.
이번 공략에 가본 곳도 있고, 가보지 않은 곳도 있다.
길은 일방통행이다.
골인지점은 아마도 저 드높은 태양과도 같은 기계신.
그리고 길게 이어져있는 저 신호는 틀림없이 메타트론이 가진 성배.
직관적인 상징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다.
“결국 돌고 돌아 보스 러시 맞잖아. 젠장.”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하늘과 이어진 성배들의 선이 있다.
그 선은 맹렬한 속도로 하늘과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공간의 한계로 인해 길게 이어진 통로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저 저게 뭔지 알 것 같아요. 잡아야 할 놈 위치 표기 해주는 거죠?”
“성배가 저기 도달하면 누군가 다시 세상을 복구하거나 어쩌거나 하겠지.”
“우린 마저 부숴야하고요?”
“맨 처음은 메타트론이군.”
에길과 블랑쉐가 차라리 편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간단해졌군.”
“다 죽이면 되겠군.”
제니와 라리사, 리온만이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