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85화
메인 던전 - Lv.17500 기계신의 사도 [메타트론]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그 일부만이 남아 아주 좁고 가느다란 공간을 남겨둔 지금, 저 공간 위의 기계신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이어진 선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두가 직감할 수 있었다.
기계신이 다시 그 힘의 일부를 되찾고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무언가 일어나 세상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하지만 파멸을 바라는 이는 바벨의 자식들이 생각하기엔 없었다.
결국 세상을 두고 다투는 패권 싸움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지금 이 일은 틀림없이 어딘가가 잘못된 것이다.
저 이어진 선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너무나도 분명하지 않은가.
완전하지 않은 기계신은 불완전한 성배로 부활했을 것이며, 세상이 무너짐은 그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세상의 운명이 결정되는 자리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무수한 부하들은 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실제로도 바벨의 자식들이 나서는 전장에서 권속인 천사나 악마들은 대단한 의미는 없었다.
남은 것은 힘.
오로지 본연의 힘.
신적인 존재다운 위엄을 보여야할 때.
* * *
한순간에 모든 이들이 그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위치가 나쁘군.”
미카엘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빛의 선이 가리키는 성배와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달리 말하면 기계신의 태양과는 가장 가깝다.
“뭐, 하려던 대로 되었나.”
공간 자체가 무너져 내린 상태다. 지금 바깥으로 나가는 선택은 함부로 할 수 없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애초에 나가는 것도 힘이 필요하다.
어떤 결말이 목전인 지금 낭비는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미카엘은 당초 계획대로 골인 지점에서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누가 이기던 이곳으로 오게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위치가 좋군.”
미카엘은 그렇게 가장 높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로 아래는 바알이었다.
“나헤마를 놓쳤군.”
그 자체에 유감이 있지는 않다.
흘깃 위를 본다.
“저놈도 재밌긴 하겠지만…….”
찬란히 빛나는 천상의 군주.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닌 존재다.
“일단 여기 있도록 할까.”
싸움 구경도 재미있다.
위에서 미카엘이 기다리는 건 기분이 좀 별로지만 뭐 어떤가.
맛있는 것은 마지막으로 미룰 수도 있다.
바알은 그냥 그렇게 결정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공간이 다 쏟아져 쓸려 내려가는 가운데 대충 서있더니 도달한 곳이다.
분명 아는 곳이긴 해야 하는데.
“웬 문짝이 있군.”
발로 걷어차 보았지만 튼튼하다. 굳이 부숴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거 그, 왕국의 문인지 뭔지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어디어디 있더라? 바알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가라앉은 도시가 있었나보군. 어째 모르는 곳이더라.”
많이도 뒤섞여 있다. 어딘가 낯익은 지형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맥락 없이 다른 곳과 접붙여져있다.
전체적으로 세상을 주물주물 반죽한 다음에 대충 떼놓은 느낌이다.
“오, 이건 옥수수인가.”
대체 얼마나 오래 되었을지 모르는 창고가 무너져 안에 있던 낱알들이 굴러 나왔다.
용암이 흐르는 옆으로 굴러가더니 톡톡 터지기 시작했다.
“맛있어 보이는군.”
고소했다.
바알은 용암에 털썩 주저앉아 주워 먹기 시작한다.
싸움은 언제 시작될까?
각자의 어떤 사정으로 보스들이 자기들끼리 싸우진 않을거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그랬다.
메타트론이 바로 우리 위층에서 어딘가로 도전하듯이 날아오르고 있을 뿐이다.
우리도 서둘러야 했다.
“로스엘이 없어졌으니 전력 손실이 큰데.”
“편린 하나가 아군인 건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도움이었어요.”
그 누구보다 튼튼하다는 것만으로도 로스엘의 가치는 높았다.
유사시에는 같은 [위대함의 편린]으로서 유배자는 불가능한 탱킹이란 것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로스엘이 어떻게 생각했을 진 모르겠지만 말이죠.”
유사시에는 맞아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걸로 예정되어 있었다.
일종의 보험인데 이 손실은 크다.
“날먹은 철저하게 때려막는군.”
결국 남은 것은 온전히 우리 유배자들로 이루어진 파티.
“그런데 내버려두면 메타트론이 바로 위에 있는 거에 때려 박는 거 아니에요?”
이이제이보다 좋은 건 없다는 걸 너무 잘 배우긴 했군.
이제 다들 그런 식으로 꼼수부터 떠올리기 시작하고 있다. 너무 좋은 현상이다.
“아마 막아뒀을거 같은데. 저기 뭔가 비어있지 않아?”
여기선 현실로 세상을 보면 안 된다.
이렇게 무너지면서 딱 맞게 스테이지가 형성된다?
솔로몬이 간섭했다는 설정이 분명히 들어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위화감은 있다.
지금부터는 미궁의 ‘게임’부분이다.
“저긴 누구 자리지?”
그것부터 생각해야한다. 내가 보기에는…….
“맨 위가 미카엘에게 어울리는 장애물이 많은 필드고, 그 다음이 바알에게 어울리는 광대한 평지로군. 그럼 남은 것은 사탄과 나헤마다. 그러면 나헤마부터일 것 같군.”
블랑쉐의 의견은 몹시 타당하다.
메타트론이 성배를 지니고 있었다는 특수성 때문에 기수로 설정된 것이라면, 나머지는 난이도 순일 터.
그럼 엔딩의 분기점을 가진 녀석들 중 제일 약한 나헤마가 아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블랑쉐, 그건 무른 생각이야.”
“그런 것인가?”
“내 생각엔 마음대로다.”
랜덤 배치야 말로 X같음의 정수.
보통 마지막은 가장 난이도가 높다. 그러니 배치도 뒤틀려있다고 보는 게 옳다.
그냥 최선을 다해야할 뿐이다.
도리어 미카엘이 가장 위에 있는 것은 제일 원본과 달라진 인물이라서가 아닐까?
나는 이번 메인 던전이 내가 알던 것과 다른 것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다.
미카엘이 어쩌면 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급박하게 돌아가는 와중 메타트론이 바로 위에 때려 박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 날거야. 메타트론의 필드에서 싸우는 게 옳아.”
원하건 원치 않건 메타트론이 비행중인 저 공간은 그를 위한 곳일 테니까.
그 다음으로 갔다가는 상황이 나빠질 것이다.
“가브리엘과 라파엘이 동시에 적으로 나오는 경우와 같은 것이겠군요.”
“에길, 일단 멀리서 준비하시죠.”
“좋아. 맡겨두게.”
에길을 처음부터 노출할 필요는 없다. 그는 언제나 결정적인 일격을 준비한다.
전방에서 나서기엔 스킬의 구조가 어울리지 않기도 하다.
에길은 어떤 의미로건 일방적으로 때리기 위한 세팅을 했다.
아서가 전열에 나선다. 마법사의 복장으로 쌍수 대검을 뽑아들었다.
엑스칼리버는 여전히 등에 있다. 광대의 지팡이도 등에 있다.
쌍수 대검 마법사 비주얼은 또 참 기묘하다. 힘 찍은 사루만인가.
“일단 스킬 분배는 전혀 생각하지 말아요. 진짜로 연전은 아닐 겁니다.”
그건 그냥 불가능하다. 정말로.
그러니 사이에 무언가 있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사용하지 않은 리프트들이 저기 어딘가에 박혀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이미 벌였던 많은 것들이 여기서 좋건 나쁘건 돌아오게 되리라.
메타트론은 시작에 불과하다.
“희우야. 붙잡아.”
“알겠습니다!”
폭발적인 가속.
공감각을 동원한 비상식적인 속도는 공간마저 가르는 느낌을 준다. 그 자체가 이미 에너지 덩어리인 탄환이나 다름없다.
메타트론은 날개에서 부스터를 뿜으며 비행중이지만 희우는 순식간에 따라잡아간다.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유배자인가!]
육성이라면 도플러 효과로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까 하지만 영적인 음성으로 소리를 지른다.
메타트론은 희우를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희우는 그렇게 두지 않는다.
[슈퍼 히어로 랜딩]
이제는 좀 많이 강력한 평타 수준의 위상까지 내려간 천사 강림이 메타트론의 등짝에 꽂힌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드롭킥 같은데?
메타트론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아뜨뜨뜨거!”
희우의 비명이 도플러효과를 일으키지만 알아는 듣겠다. 부스터에 발이 박혔군. 저건 엄청나게 뜨거울거 같은데.
그리고 그대로 단검으로 퍽퍽 내려쳤다.
메타트론은 더 이상 제대로 비행하지 못했다.
충격파와 함께 희우가 튕겨나간다. 죽음에 달할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다.
조금 너덜해진 희우가 포션을 한모금 마셨다.
[이 건방진 것들! 누가 너희들을 불러들였다고 생각하느냐! 여기서 처리해주지! 죽어라!]
그리고 갑작스럽게 메타트론의 위로 무언가 출현했다.
나는 입을 벌렸다.
“저딴 패턴 전혀 모르는데?”
희우도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 멀어진다.
상공에 출현한 것은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었으나 그 용도만큼은 분명한 무언가였다.
“기계신이라 기계에요?”
“좀 그런 느낌의 보스전은 맞는데……. 저렇게 본격적인 건 없었는데.”
강철 달팽이 게임을 연상케하는 제멋대로 뒤틀려 이어진 거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에 떠있는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인 거대한 전함 같은 것이었다.
아니 저걸 전함이라고 불러도 되나? 그냥 공중에 떠있는 포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럼에도 천사다운 깔끔한 디자인인 것은 당혹스럽다.
그린스킨의 고철더미도, 고블레타리아의 매끈한 쇳덩이도 아니다.
저건 천사 양식의 우주전함이라고 봐야하나?
“블랑쉐! 일단 갈겨! 엄호해!”
오랜만에 레일건을 꺼내든다.
아티팩트 단검이 무수히 장전된 미친 총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블랑쉐는 단검 마스터리다.
사수는 본래 스킬의 보정을 받지 못한다.
이건 다르다.
일단은 투척 판정이다. 블랑쉐가 단검을 든 채로 불편하게 사격해야한다는 문제만 뺀다면 최선의 꼼수중 하나다.
하나로 이어져 기묘하게 들리는 연속 사격음이 울렸다.
미칠듯한 속도로 날아간 아티팩트들이 그대로 메타트론의 전함에 날아가 부딪힌다.
폭발이 일어났다.
“보호막?”
“미아는 빨리 저 보호막 원리 분석해봐.”
“알겠어요.”
메타트론은 독립적으로 기동한다.
그리고 심지어 쫄을 뽑아대기 시작했다.
노천사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기계적인 뼈대들이 일어난다.
“이런 제기랄 지가 무슨 네크로맨서야?”
날개의 형상이 갖추어지고 되다만 천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이건 아니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패턴이 지나치게 과하게 뒤틀렸다.
이건 가능한 난이도가 아니다.
희우의 회피기동이 시간을 어떻게든 벌고 있다. 전함의 포격은 드롭킥을 날린 천사만을 노리는 와중이다.
희우가 격추되면 그 다음은 우리다.
누구도 저렇게 회피기동을 할 수는 없다.
[이건 기믹 보스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설명할 수 없는 불합리한 패턴의 난무다.
전멸하기 전에 무언가 다른 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로소 필드에 눈이 돌아간다.
실마리는 이 맵에 있다.
그렇지. 역시 메타트론을 놓치면 안 되었다.
많은 것이 이상해졌으리라.
“앗. 저거!”
“저건 것 같다!”
제니와 블랑쉐가 동시에 무언가 발견했다.
필드의 구석탱이에 잘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
무너져 내린 공간에 휩쓸려 얼기설기 부서져있으나 그럼에도 형태의 일부만은 남아있다.
저것은…….
“라지엘! 라지엘 찾아!”
기계무덤의 캠프 일부다.
서로 순간적으로 아이 컨택을 한다.
버티기에 더 용이한 나와 아서가 희우 쪽으로 갈라진다.
블랑쉐는 우리를 따르며 사격을 유지하고 제니와 미아가 리온과 라리사를 데리고 움직였다.
빠르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쥐새끼의 친구들인 어둠의 정령왕들도 저곳에 있다.
과연, 그런 식이군.
이 테마 내에서 서둘러 결말을 보려고 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이것저것 많이 해두고 많이 알고 있었다면.
바로 그만큼 최종전의 난이도가 내려가는 형식이다.
다행스럽게도 라지엘은 메타트론이 아닌 우리 편일 것이다.
한 마디만 더 했다.
“유리도 챙겨!”
우리엘도 아직 살아있을 것이니.
이 계층은 아니되, 분명히 세피로트와 클리포트도 아직 살아있다.
나아가, 어쩌면 솔로몬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