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99화
메인 던전 - Lv.17500 왕관을 쓴 거미 [바알בַּעַל](10)
바알은 사실 정상적으로 싸움이 붙는다면 이런 식으로 싸우는 보스는 아니다.
지옥의 성채 내부의 복잡한 환경 전체를 이용해야하는 보스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개활지에서 사방에 검을 든 팔이 솟아 있는 끔찍한 광경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엄폐물이 전혀 없는 이런 개활지라면 바알은 그 물리 화력을 유감없이 투사할 수 있다.
[클리어하지 말라고 만들어둔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물리계열은 아무래도 현실적이니까 답도 없다는 느낌은 좀 적지.]
그런데 그게 또 기분 탓이다.
압도적인 힘의 권능, 스치면 사망하는 권능에만 시달리다가 보니까 갑자기 괜찮아 보이는 것이다.
보스들도 마법사형이냐 전사형이라는 것이 나뉜 이유가 있다.
마법사 클래스의 단점이 무엇인가.
지속력이다.
[패턴에 텀이 없을 거야.]
[메타트론은 있었잖아요?!]
[그건 탱커형에 더 가까운 전사형이라 그렇고…….]
방패를 든 시점에서 그렇지 않은가.
* * *
* * *
* * *
그래도 파티원들 모두 디테일한 패턴의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하나하나 다 이해하고 나처럼 습득하는 것이 처음부터 될 리가 없다.
원래 보스전이란 암기하는 것이다.
어둠에 잠긴 검의 숲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참격이 날아든다.
말은 참격이지만 그 날이 날카롭지는 않다. 바알의 공격 형태는 타격이다. 검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크지 않은가. 빌딩만한 팔이 빌딩만한 검을 휘두른다.
동시다발적으로 사방에서 물리적 충격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바알은 본디 처음부터 각자도생, 피지컬적인 기합회피가 중요하다.
물리 보스인 주제에 그렇게 된다면 발생하는 일은 멀쩡한 딜타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합리.
시나리오 최종보스에 걸맞은 불합리하고 피곤한 구조의 보스전이다.
방어할 수 있는 것은 방어하고, 쳐낼 수 있는 것은 쳐낸다. 파티는 뭉치기보다는 흩어져서 바알의 공격이 집중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무수히 많은 팔을 직접 제어하는 것은 결국 바알의 의식이다.
모이면 더 힘들어진다.
드문드문 통신이 들려온다.
[이거 언제 끝나요?!]
[쓰러트릴 때까지!]
[말이 돼요?!]
[그래서 원래 보스전하는 맵이 여기가 아닌 거야!]
숨을 곳이 존재한다.
일부 안전지대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나설 수 있다.
바알의 본체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돌아다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나는 파티원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내가 바알의 본체와 마주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방패를 들고 전진한다.
메타트론의 방패는 빛을 뿜어내며 바알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네가 이 파티의 리더였지! 인간형일 때 마주하고 싶었는데! 아쉽군!]
열혈 넘치는 헛소리와 함께 거대한 거미, 그리고 그 위의 창백하면서도 뒤틀려있는 인간의 얼굴이 웃는다.
바알의 팔 대부분은 어둠 속에 잠겨있으나 상당수가 아직도 몸통에 남아있다.
버프의 쿨다운을 고려해본다.
바알의 본체에 유의미한 타격을 단독으로 주는 것은 쉽지 않다.
공격에 치중되어 있더라도 전사는 전사.
나헤마처럼 물렁하진 않다.
그래도 전부 켜고 불태운다면 순간적으로나마 따끔하긴 하겠지.
그리고 한 가지 문제를 더 고려한다.
시간을 움직이는 것 같은 행동. 권능을 동원하여 하던 것이니 막을 방도도 없고 마법전을 걸 여지도 없다.
그렇다면 적당히 생채기만 내고 빠져야겠다.
버프를 모두 작동 시켰다.
몸에 힘이 깃든다. 기간제의 힘이지만 원래 미궁은 순간적으로 얼마나 강하냐가 가장 중요하다.
발을 바닥에 딛고, 그대로 방패를 세운 채로 돌진했다.
바알의 얼굴이 웃고 있는 듯이 나를 본다.
리더와 인간형으로 마주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검사로서의 그가 검사인 리더와 마주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거미의 하체는 아주 빠르다.
자신의 팔이 잔뜩 돋아난 어둠의 광야를 질주하여 순식간에 상대와 마주한다.
메타트론을 좋아했던 적은 없으나 그의 힘만큼은 진짜라 인정하고 있다.
그렇게 빛나는 검과 방패가 다시 눈앞에 나타남에 기쁘다.
그간 어디에 있었던가.
바알은 다시 먼 옛날의 싸움을 떠올린다.
같이 검을 맞댈 적수는 흔치 않았다.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 시절부터 갈고 닦은 힘을 선보인다.
바알은 검끼리 서로 방해하지 않는 위치를 잡는다. 무수한 팔이 달려오는 리더를 향해 몰아치기 시작했다.
횡으로 베고 세로로 쪼개며 비스듬히 올려친다.
절도 있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바알은 제 검격에 제법 만족했다.
검은 그의 본질이다.
어둠이 아니다. 날 때부터 쥐고 태어난 이 무수한 검들은 결국 그의 이빨이자 무기다.
주먹은 유배자의 방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히 바알이라는 악마의 방식임에, 자부심을 가진다.
검은 그의 삶이요, 전부다.
한순간에 수십번의 참격이 가해진다. 횟수가 적어보일 수는 있으나 모두 각기 다른 검에 달려있다.
쌍수와도 비교할 수 없다.
정말로 시간차 없는 단일 공격이 이루어지는 횟수다.
그리고 상대 유배자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았다.
동시에 들어간 공격이란 것은 동시에 판정을 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알은 자신이 가한 힘이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벡터를 바꾸는 것을 느꼈다.
[뭣이?]
바알은 그게 방패를 든 유배자가 단골로 활용하는 [패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연히 알 수가 없다.
누가 이 거검 앞에서 방패를 들 생각을 했겠는가.
그 기나긴 세월에도 이런 압도적인 연격을 방패로 받아낼 생각을 했던 누군가는 없다.
스킬의 조화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로는 어떤 기묘한 기예를 통해 튕겨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바알은 충격을 받았고 그렇기에 즐거웠다.
[어떻게 한 것이냐! 유배자!]
그런데 보이지 않았다.
바알은 당황했다.
미궁에선 보스 심리전에도 능통할 필요가 있다.
바알은 본래 유배자에 무관심한 녀석이다.
그냥 태어난 김에 살고 그 김에 싸우는 미치광이다.
그러므로 스킬의 구성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저 반응을 보니 패링을 잘 모른다는 것은 알겠다.
그럼 다른 부분도 그렇겠지.
이건 난이도에 변경이 없는 부분이다.
아주 좋군.
그리고 바알은 어리둥절하게 나를 찾고 있다.
그렇다곤 해도 곧바로 발각될 것이다.
덩치가 큰 보스를 만나면 그걸 이용할 수 있을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지만 바벨의 자식이나 미궁에도 한계는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에 만능일 수는 없다. 묘하게 현실적으로 허술한 부분.
바알이 제 몸의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패링으로 튕겨내고, 증폭된 신체능력과 마력으로 순간적인 단거리 공간이동을 했다.
튕겨나가는 바알의 검 위로 말이다.
내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 바알의 표정만으로 확인 된다.
튕겨나가며 붙잡고 있는 것 역시 버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바알은 덩치를 활용하기 위해 검을 치켜드는 버릇이 있으며, 그것은 약점인 머리의 바로 위다.
거미 부분은 너무 튼튼하다.
바알을 노린다면 인간의 부분, 그것도 팔이 너무 많아 가려지지 않은 인간의 얼굴, 그 위에 씌워진 왕관이다.
[왕관을 쓴 거미]라는 의미심장한 이명이 암시하는 약점.
바알의 본질은 사실 저 왕관이다.
바알이라는 이름 역시 히브리어로 주인을 뜻한다.
자잘하고도 쓸데없는 암시다. 게임의 기획자들은 언제나 그런 귀찮고 피곤한 텔링을 좋아했다.
방패를 집어넣는다. 메타트론의 검과 라파엘의 검을 함께 든다.
쌍수는 딜링만 보자면 언제나 옳은 선택이다.
다룰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검의 개수가 많은 바알도 턴제 게임이던 시절에는 턴당 공격 횟수가 아주 많은 식으로 끔찍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그 시절이라면 내가 저 공격력을 이길 수는 없겠지만, 지금이라면 약간 다르지.
이길 수는 없더라도 버금갈 수는 있다.
나 역시 세팅 자체는 누킹에 가까운 순간 지속 딜링에 투자했다.
어디까지 딜찍누가 될지, 가능하면 부활 스택을 하나 버릴 생각으로 가보자.
폴짝 뛰어 오른다.
거창하게 내려찍어봐야 들키는 것만 빨라진다.
바알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할 필요가 있다.
그럴수록 더욱 즐거워하며 불타오르겠지만, 동시에 내게 모든 시선을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보스전은 모두가 각자 바알과 1대1을 하는 것과도 흡사하다.
그러니 그 부담을 내가 줄인다.
검에서 권능조차 발하지 않은 채로 바알의 왕관 위로 내려앉았다.
그 순간 바알이 내 존재를 깨달았다.
바알이 공격을 당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배자에게 공격을 허용한 경우는 제법 많다.
심지어 그의 왕관이 치명적인 곳이라는 것 역시 안다.
그렇지만 그게 다였다.
왕관이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은 전체에 비해서 그렇다는 정도.
정말로 치명적인 타격이라고 여길만한 것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
없다.
하지만 지금 바알은 그것을 겪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머리를 믹서기에 처박은 듯한 느낌이었다.
거미의 다리가 꺾이며 거대한 하반신이 어둠 속에 잠겨든다.
팔이 고통에 허우적거린다.
검을 든 팔의 숲들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그리고 몸에 온전히 남아있는 팔들이 다급하게 검을 내던지고 뻗어 위를 해결하려고 했다.
왕관에 실금이 가고 있다.
메타트론에게 정타를 얻어맞았던 과거 이후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바알은 수십의 손으로 머리를 쥐었고 간신히 유배자를 붙잡는데 성공했다.
애초에 도망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크으으, 이건 좀 아픈데.]
하지만 붙잡은 팔이 거의 분해되다시피 찢겨져나간다. 바알은 검을 휘둘러 그 팔을 날려버리고 공격했다.
그러나 다시 튕겨나간다.
[하하하, 어이가 없군. 정말 좋아. 아주 훌륭해. 넌 내가 본 유배자 중 최강이다. 미카엘도 내 머리에 금을 가게 만들지는 못했는데!]
꺾였던 거미 다리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유배자는 공격을 튕겨내고 그 반작용으로 아주 멀리 날아가는 중이다.
체공은 좋은 선택인가?
바알은 아니라고 본다.
거미는 아주 빠르다.
바알도 아주 빠르다.
이렇게 거대하더라도 말이다.
체공중인 유배자 리더를 향해 질주했다.
그 앞에 뻗어 나온 그의 팔들이 일제히 길을 비켰다.
[하지만 이제 슬슬 검을 좀 맞대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신이 나서 달려가는 순간, 뒤통수에 천사가 꽂혔다.
[끄헙!]
바알은 다시 다리가 꺾였다.
그러나 벌떡 일어난다. 천사는 빠르게 이탈 중이다.
[이거 슬슬 짜증나는데.]
상대를 해주지 않는군.
화가 난다.
[어둠이여, 내 또 다른 본질이여!]
짙은 어둠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바알은 아직 몸에 남아 있는 감각에 순응했다.
어둠이 몰려들며 권능적인 시간 마법이 발현했다.
시간 정지는 아니되 세상의 시간이 요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바알은 알지 못했지만 유배자 리더는 이것을 턴이 뒤틀린다는 개념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마법사부터 처리해야겠군.]
인간형일 때 새겨진 교훈으로서, 리더가 아닌 다른 것을 먼저 노린다.
이상한 수작을 부렸던 요정 마법사를 향해 움직인다.
세상이 기이하게 느렸다.
바알은 그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유배자들은 재빠른 파리지만 이번에는 느렸다.
잔뜩 인상을 쓴 꽃잎 요정 마법사가 보인다. 그대로 달려가 걷어 차버리려고 했다. 그 후에 짓뭉갠다.
검은 창과 성검이 다시 그 앞을 가로막는다.
[흠, 바로 이거지!]
도망칠 여유가 없으니 저들도 무기를 맞대게 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느리니 몸을 다루는데 더 고민할 시간이 많다.
바알은 기분이 좋아졌다.
모두와 각자 하나씩 싸우는 듯한 고양감이 차오른다.
그의 검을 보여줄 때다.
[죽어랏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