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03화
왕국 - 빛을 죽일 준비(1)
미카엘은 바알이 돌이킬 수 없는 수세에 몰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행동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저 상태를 본 적이 있다.
저 파티의 마법사가 저것을 보여주었다. 저것에 대한 이론도 일부 그에게 남아 있다.
긴 세월 들여 익혀갈 생각은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으나 그래도 개요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저 유배자 리더의 손에 저런 힘이 있는 것은 위험하다.
지성의 천사는 언제나 철저하고자 노력해 왔다.
움직일 때다.
이곳은 아마도 그를 위한 보스룸이겠으나 여기서 싸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바알은 아마 자신을 위한 보스룸에서 싸웠다면 더 유리했으리라.
더 넓고 광대하지만 동시에 벽도 존재하고 있었으니 거체의 이동속도를 이용하기 더 좋았을 것이다.
미카엘은 우선 쥐새끼호를 노렸다.
아래는 바알과의 전투에 정신이 없다.
저것이 포격하는 것을 보았다.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위험한 것이다.
빛의 천사는 빛이 되었다.
* * *
바알을 위해 존재했던 콜로세움 위로 순식간에 도달하고 그 전함의 중심을 노린다.
다만, 방주는 견고했다.
“흠, 메타트론은 이상한 걸 만들어뒀군.”
충격적인 모습이긴 했다. 그는 기천사를 굉장히 무시해 왔던 자니까.
하지만 동시에 기계신의 숭배자였다.
그 말로는 결국 저런 것이다. 자기모순의 어딘가에서 멈춰서 버린 결말.
미카엘은 자신이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고 여겼다.
그는 언제나 특별한 목적 없이 세상을 유지하고자 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검술이라면 미카엘은 조예가 있다.
마법에서는 범재다 못해 둔재였으나 검을 쓰는 것만큼은 천재라곤 못해도 재주가 제법 있었다.
시간이 아득히 많고, 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노력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면, 누구나 어딘가에는 도달하는 법.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을 깨닫고도 그것을 접목하는 수도 있는 법이다.
저 파티의 마법사는 놀라운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놀라운 것을 마법적으로 구현할 수 없을 뿐, 검으로는 흉내 낼 수 있다.
권능이 한 점에 집약된다.
영역을 펼치는 대신 검 끝에 담는다. 이건 마법적인 요령으로 해내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마법적 지식과, 이미 어떤 영역에 도달한 검의 사용법으로 해내는 것이다.
하나의 세상을 담은 검이라는 것이 어떤 위력을 내는가.
붉게 타오르던 유배자 악마가 보여주었다.
미카엘은 그때 정말로 고전했다.
기계신의 힘이 수호하고 있는 보호막이 쉽게 뜯어진다. 으드득하고 박살 나고 그 내부까지 여파가 미친다.
함체가 비틀리고 일그러지며 제 기능을 잃는다.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아니야! 나가지 마! 저건 못 이겨!]
뭐 그런 식의 외침, 성배의 짐승인가?
안에 어둠의 정령왕들이 탑승하고 있었지.
그것들까지 마저 처리를…….
“너무 빠르군.”
바알이 지나치게 압도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다.
영역마저 사그라진다. 사방으로 날아가는 검들은 경이로울 정도다.
“쯧.”
미카엘은 자신에게 여유가 없음을 느낀다.
유배자들의 수단 하나는 무력화했다.
곧바로 리프트를 찾았다.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
다시 회복하고 돌아오는 것보다는 이대로 연전으로 이어가는 것이 맞다.
차라리 바알의 편을 들어야 했는가.
다시 빛이 되어 쏘아진다. 그리고 그대로 수색을 해낸다.
그리고 상대방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바알과의 싸움이 격화되고 있는 와중에도 누군가가 이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검은 날개를 지닌 악마가 깃털을 날리며 갑작스럽게 출현한다.
그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기천사와 요정 마법사, 그리고 데빌이면서 마법을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또다른 유배자.
“그건 곤란하지!”
미카엘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리프트는 파괴해야 한다. 반드시.
그리고 나아가 왕국의 문까지도.
이후에는 라파엘을 찾아야 한다. 아래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 그 힘을 활용하는 유배자 리더는 너무 위험하니까.
빛의 영역을 담은 검이 루시의 창과 부딪혔다.
쉴 틈은 한순간도 없다.
이미 다음 보스전이 시작된 참이다.
메시지가 언제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미카엘과의 보스전은 바알이 쓰러지기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라파엘의 화염을 두르고 그대로 추진하여 위로 솟구친다.
막아내야 한다.
미카엘이라면 틀림없이 우리가 다시 재정비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바알이 좋은 예시를 보여줘 버렸지 않은가.
바알의 껍데기가 뭐라 지껄이는 걸 무시하고 그대로 날아갔다.
아서와 에길이 바알의 전리품을 수습할 것이다.
추진력과 마법 모든 것을 동원하여 속력을 냈다.
다른 파티원들도 마찬가지로 움직이고 있다.
쥐새끼호가 격침된 것을 보았다.
천천히 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면 수리 자체는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쏘아져 올라가는 도중에 루시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자의로 날고 있지 않았다. 튕겨 날아온 것이다.
그 주변에 무지개처럼 피안개가 번지고 있다. 큰 부상이다.
경로가 일치했기에 그대로 받아든다.
루시가 말했다.
“포션 있나?”
“아직 남았죠.”
뿌리지 않았으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게이트는 지켰나요?”
“파라켈수스가 억지로 버티는 중이다.”
루시가 전투에 돌입한 지 얼마나 지났지?
바알 때보다 빠르게 무너졌다.
“안 죽어서 다행이군요.”
“죽을 수는 없지. 빨리 가서 파라켈수스나 구해줘라.”
루시는 회복한 직후 날개로 날아오르며 손을 흔든다.
그대로 쏘아진다. 정언 명령의 힘으로 미카엘의 공격을 무력화하며 겨우 버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희우도 노력 중이지만 이미 거의 배제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날개가 멀쩡하지 않다.
마법사를 먼저 제거한다는 기본 원칙에 따라 파라켈수스가 목숨의 위기였다.
블랑쉐가 미카엘의 뒤편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인다.
암습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블랑쉐는 그대로 빛에 불살라졌다.
죽었나? 죽진 않았을지도.
악마인 시점에 너무 상성이 나쁘다.
천사 중에서도 빛의 천사니까 말이다.
바알처럼 오로지 물리적인 공격만 하는 녀석도 아니다.
문무겸비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보스다.
소리치지 않고 그대로 권능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미카엘을 위협했다.
먹히지 않는다.
지금 파라켈수스의 숨통을 끊어두는 편이 훨씬 이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음 순간 파라켈수스가 죽었다.
그대로 빛의 참격에 반토막이 났다.
부활 스택은 있겠지.
나는 간신히 도달했다.
미카엘은 검을 들고 나를 보았고 그대로 충돌한다.
한순간 다섯 합을 겨루고 느낀 바는 미카엘이 이미 달인 중의 달인이라는 것.
인간이었다면 소드 마스터, 오크였다면 전쟁군주, 평범한 천사였다면 그것만으로도 메인 던전 보스급.
그러나 이 천사는 바벨의 자식이며 위대함의 편린이다.
동작 자체에 시스템의 보정을 구겨 넣기 시작한다.
쌍수니까 더 자유롭게 기본기들의 공격력 보정을 축적해 나간다.
처음의 충돌 순간에는 이길 수 없었다.
보정이 조금 쌓인 후에야 겨우 버틸 만해진다.
미카엘은 표정 변화 없이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영역이 피어났다.
미아에게 들어 안다.
미카엘은 미아가 생각해 낸 ‘그 방식’을 알고 있다고.
본능이 회피를 종용한다.
그래도 여기서 회피했다간 후퇴가 불가능해진다.
날 떨쳐내고 파티원들부터 사냥할 생각이겠지.
마주 충돌했다.
[은빛 섬광]도 이제 없다.
순수하게 피지컬로 사력을 다해, 모든 권능을 다해.
필살기의 부재는 결과가 좋지 않았다.
기술이 아니라 그 모든 기술을 깨부수는 순수한 힘으로 검이 밀려난다.
그리고 반대 손으로 비슷하게 라파엘의 태양을 모아 후려친다.
겨우 길항할 수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필살기의 부재가 아쉬운데.
버프도 꺼져가고 있다.
어떻게든 후퇴해야 한다.
미카엘은 내 소모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단숨에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곧바로 빛이 되어 쏘아진다.
위치는…….
여유가 생긴 희우와 파라켈수스가 확보 중이었던 리프트가 보인다.
바알의 보스룸에도 존재했다.
[은빛 섬광]이 새로이 작렬함이 보였다.
미카엘은 순간 비틀거렸지만 치명적인 공격은 제 검으로 쳐냈다.
저걸 반응한다고?
이건 경험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까?
미카엘이 얼마나 많은 스킬들을 경험해 왔을까.
불현듯 소름끼치는 상상이 떠오른다.
일단 뒤로 미루고, 왕국으로 일시탈출을 해야 할 필요가 크다.
직진, 또 직진.
미카엘을 따라잡아 그 덜미를 붙잡는다.
수십 합을 겨루면서 미궁적 보정 없이 검사 대 검사로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거의 동수다.
그리고 지닌 힘은 저쪽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아놓을 정도는 된다.
아서와 에길이 도달한다.
루시와 파라켈수스가 탈출한다. 희우도 나머지도 다들 빠져나가고 있다.
라파엘의 검과 메타트론의 검에 잠재된 모든 권능, 그들이 남기고 간 파편을 모두 불살랐다.
아주 잠깐 미카엘이 담은 빛의 영역과 서로 다른 두 영역이 충돌한다.
공간이 물리적으로 조각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이거 다음 메인 던전에도 못 들고 가나? 진짜 진지하게 방법을 찾아봐야겠는데. 미아와 함께 고민해 봐야겠다.
이플릭셔스랑 레베카까지 다 모아서 마탑의 과제로 만들어야겠군.
미카엘은 밀려나지 않으려고 했다.
나만이라도 붙잡아둬야 한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곧 생각을 달리한다.
나를 붙잡아두더라도 어차피 이미 탈출한 파티원들이 있다.
그들은 3일간 푹 쉬다가 돌아올 것이다.
미카엘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음이 느껴졌다.
내 공격을 아예 허용할 생각으로 노리는 곳을 바꾼다.
라파엘을 찾나? 그게 가장 확실하겠지.
막을 수도 없고 막을 생각도 없다.
일단 돌아온 다음에 전력으로 라파엘을 지킬 생각을 강구하는 것이 옳다.
나 역시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한 와중이다.
미카엘은 라파엘의 위치를 모른다.
미아가 조치했을 것이다.
그것을 믿고 그대로 왕국으로 향하는 리프트로 뛰어들었다.
세상이 번쩍하고 점멸하며 일순간에 세피로트의 힘이 사라짐을 느꼈다.
그런데 너무 빠르다.
왕국의 풍경이 보이고, 드라간이 보였다.
“흐헙!”
거대한 트롤의 육체가 맨땅에 충돌하는 것을 막아낸다. 전쟁의 신이었던 자 다운 유려한 충격분산으로 내 목숨을 지켜냈다.
“휴우. 이제 좀 쉬겠군.”
“흥.”
털썩 엎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라간의 덩치가 가린다.
좀 비켜달라고 하니 순순히 비켜주었다.
왕국의 하늘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맑다.
저 위의 바벨탑 주변에도 바벨의 자식들은 있겠지.
미카엘 같은 놈은 없을 것이다.
자, 이제 그걸 어떻게 잡지?
생각을 좀 많이 해봐야겠다.
3일은 너무 짧다.
그리고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크크크크. 여긴 아주 좋은 왕국이군. 저쪽에서 내가 처음 내려왔을 때 못지않아. 거기다 앞으로 더 발전할 것 같군.”
누더기를 걸친 덥수룩한 중년의 남자가 게이트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웃고 있다.
“바알?”
바알의 껍데기가 그 말에 나를 본다.
앞머리가 얼마나 긴지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로 눈빛만 비칠 뿐이다.
“왜 하던 말을 다 안 듣고 가나. 자 빨리 내게 검술을 가르쳐라.”
이 녀석은 다른 바벨의 자식들과 달리 자신이 죽었다는 거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군.
대체 바알이 누군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왕국의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서둘러 레미를 불렀다.
그리고 미아에게 물었다.
“바알가지고 클리포트에서 똑같은 거 할 수 있을 거 같지?”
“안 만져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될 것 같아요!”
“근데 그거 왜 되는 거야?”
미아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더니 동의했다.
“사실 되는 게 이상하긴 하죠. 그래도 저절로 문을 여는 것 같았으니까……. 솔로몬이 도와준 게 아닐까요?”
“흠, 하긴 널 반드시 만나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이건 지금에야 드는 생각인데 솔로몬이 아니라면 저런 형태로 세상의 파괴를 유예할 수 있을 인물이 없다.
그는 기계신의 신좌에 앉아 있는 인물이니까.
그건 전투력과는 별개의 권한이다.
“다 보고 있었나.”
생각해 보면 죽었을 리가 없지. 이대로 심연에 가라앉으면 가라앉은 대로 크크크 하면서 연구를 할 미친 사람이다.
“바알의 힘은 라파엘보단 훨씬 미카엘 상대로 유리하지.”
“우리에겐 악마 검사도 한 명 있고요.”
레미가 교단 기사들을 불러 바알을 연행해 가고 있다.
바알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기사에게 한판 붙어보자고 시비를 트고 있다.
“누가 데려왔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주워왔네.”
에길이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정말 잘했어요. 에길.”
벨페고르도 살려둘 수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