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19화
왕국 - [심연] 탐사 준비(4)
희우는 다시 배운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얼마나 어려운가, 얼마나 힘들까, 혹은 부끄럽지는 않은가.
그런 것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여기까지 오면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되는 것이 미궁을 너무 얕보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녀가 서브 리더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게임 경력에 따른 직관 때문이다.
메인 던전은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단지 그때문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전력으로서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과연 거기서 만족할만한가?
오빠가 바라는 것은 언제나 각 포지션의 자기자신이다.
이번에 새삼 모두가 느끼고 있다.
그것은 단지 주어진 포지션에서의 역할만을 다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단독으로 미아를 대체할 수는 없더라도 미아가 없을 경우의 유틸리티를 보완할 수 있어야 한다.
파티가 언제나 모두 함께일 수는 없다.
가뜩이나 [심연]은 선형적이지 않은 메인 던전이다.
특정 층들은 고정적으로 무언가가 나온다는 게 정해져있다.
* * *
* * *
하지만 대다수의 층들은 그야말로 로그라이크에 바치는 헌사다.
일종의 작중작 로그라이크인 셈이다.
미궁 자체는 온전한 로그라이크라고 부르기에는 장르가 뒤섞인 감이 있기에 존재하는 곳.
이전에도 가본 적이 있지만 거기서 스케일이 이번에 겪은 미카엘과 기타등등의 수준으로 치솟는다면…….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부족함을 느끼는 수밖에 없다.
그간 희우의 공부는 미궁의 게임성에 대한 공부였다.
이제는 그녀가 태어난 근본에 대한 공부다.
가족들을 다시 만난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마스터리를 떼고 할 수 있는 것도 다행이군.”
“주력 마스터리 무기만 들지 않으면 능력치 평준화가 되는 것도 미궁의 의도일까?”
“그럴지도 몰라.”
그런 대화를 하며 친오빠와 마주선다.
희우가 든 무기는 장검이다.
이전에는 조금 작게 나온 단검 위주로 사용했다.
평범하게 손이 작아서다.
지금 다시 고르라면 역시 단검은 고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 전법에 대해서는 들었지. 보너스를 중복으로 누리는 대신 정면 승부에서 리치 손해를 보는 거였지?”
“오빠도 게임처럼 말하는 걸 잘하게 되었네.”
“미궁에 적응해야했으니까.”
미궁을 정말로 게임으로 아는 [게이머]가 아니더라도 게임 경력이 시스템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평범하게 게임을 취미로 가졌던 유배자라면 얼마건 존재한다.
그런 이들은 자신들의 해석을 여러 사람들에게 퍼뜨린다.
“지금은 시스템 바깥에서 하는 거니까.”
마스터리를 포기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보정이 사라진다.
그래도 훨씬 고레벨인 희우의 스탯이 더 높겠지만 미미한 차이다.
생사결도 아니고 그리 중요하진 않은 정도.
무기가 달라진다면 사용하는 법이나 동작부터 달라지겠으나.
“잘하는데?”
“실전으로 단련했거든.”
만류귀종이라는 불교의 사자성어는 거짓이 아니다.
무기를 어떻게 다루는가는 결국 끝에 가까워질수록 비슷한 곳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 사이에서 차별점을 가지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친오빠의 동작이 변한다.
대인전을 위한 미궁에서 익힌 기술들이 아니다.
상대를 괴물로 상정하는 일종의 무술.
향수마저 느껴지는 정씨의 가전무술이다.
희우도 그에 대응하여 대인전이 아닌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사람과 싸울 일이 많았다.
블랑쉐의 대인기술을 겪은 후 따라하려고 노력도 했다.
하지만 메인 던전에서 마주치는 상대는 대체로 괴물, 괴물이 아니더라도 스펙상으로는 괴물인 존재들이다.
크고 강력하게, 사소한 일격 하나라도 더 큰 딜 누적을.
아니지, 딜 누적이 아니지.
문득 다시 게임처럼 생각하고 마는 자신을 바로잡으며 다시 충돌한다.
동작이 큰 공격들은 좀 더 화려해진다.
오빠의 간결하고 실리적인 공격 대신 군더더기가 많은 것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에 따라서는 군더더기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타격을 가할 수 없는 적들을 상대로 고안된 동작이다.
제대로 마스터리를 사용하지 않기에 스펙이 낮음에도 부딪힐 때마다 대기가 울린다.
쩡쩡하고 연속적인 충돌이 이어진다.
그 와중 조금씩 가속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따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희우에게 먼저 한계가 왔다.
“으, 졌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나은데? 거기에 정말 생사를 걸고 싸우는거면 내가 졌겠군.”
“그런 건 저쪽 오빠한테 배웠으니까?”
희우는 당연하게도 친형제들을 이기지 못했다.
천재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으나 게으른 덕분이다.
그리고 당연히 가족들도 천재는 천재다.
특히 친오빠는 무협처럼 말하자면 후기지수의 선두에 서있던 사람이었다.
전세계에 호칭은 달라도 하는 일은 같은 초인들이라면 얼마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성과를 내는 젊은이 중 하나가 희우의 형제들이다.
“나아지긴 해야지……. 아마 여기서 연습한 게 밖에서 한 것 열배는 될 걸.”
“많이 노력했구나.”
“그래서 난 어디가 부족했던 걸까?”
방금의 대련에 대해 생각한다.
친오빠가 아니라, 그녀의 연인인 오빠가 가르쳐주는 것들은 한없이 직관적이었다.
게이머스러운 극한의 효율 추구에는 남에게 가르치기 쉽다는 것도 포함된다.
하지만 언제나 단순함만이 정답일 수는 없다.
만류귀종은 진실이지만, 공유하는 거대한 줄기가 아니라 각각의 개성이자 차별점인 가지들은 무수한 파생을 가지게 된다.
그 어떤 천재도 때로는 오랜 세월 다듬어진 역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유배자 동료가 아니라 사범님에게 묻는 거지?”
“으……. 네. 사범님.”
문득, 집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험이 끝났다?
그것은 아니다.
더 큰 모험을 위해.
무기를 다루는 것에는 너무 다양한 방식이 있다.
그리고 우리 파티원들은 이미 어떤 식으로건 완숙한 이들이다.
그건 사실 제니조차도 그렇다.
제니는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생각보다 재능 있는 이였다.
동료던 로건과 의견이 달랐던 것도 무의식 중에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제니가 짐승형의 적을 상대할 때의 노련함을 보면 알 수 있다.
뭔가가 다르다.
무엇이 다른지 나는 명확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결과론적인 분석으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완전히 납득되는 것은 아니다.
내 것으로 할 수 없는 어떤 무언가.
세상의 모든 것에 존재하고 있는 재능의 단면이다.
“어, 그러니까. 리더는 스스로 검을 다루는 재능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고요?”
“크크크, 그건 좋은 소식이군. 난 내가 천재라고 생각한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래서 그대로 말했더니 제니와 바알의 반응이 저랬다.
“아니, 진짜임. 나는 누구나 나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좀…….”
제니의 경멸하는 표정은 귀한데.
“물론 액면 그대로 아무나 다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 나처럼 살았으면 나랑 똑같은 곳에 도달할거라는 정도의 의미야.”
실제로 그렇다. 자기객관화는 확실하게 하고 있다.
내가 약하거나 어디 가서 꿇리는 것은 아니다.
나만의 장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그게 미궁의 시스템을 떼놓고 보아도 장점이냐고 하면 그게 아닐 뿐이다.
“아주 특화된 케이스지. 내 검술은 사실 검술이라기보다는 전법이라고 불러야 하거든. 제니는 그 왜 만화 같은 건 잘 안 봤나?”
“아주 안 보지는 않았지만……. 어릴 때나 가끔?”
“그럼 알지 모를지는 모르겠는데, 제대로 배운 게 아니라 자기류로 갈고닦은 싸움 잘하는 용병 같은 거 있잖아. 기사 말고 용병.”
“개념은 알겠네요.”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하건대, 나는 그저 어떻게 하면 이기는지를 열심히 추구했고 그래서 도달했을 뿐이다.
미궁의 모든 보정을 떼고 검을 얼마나 잘다루냐로만 따진다면 아서는 커녕 에길도 이길 수 없다.
희우는 케이스가 좀 다르긴 하다. 그건 처음부터 대인 기술이 아니니까.
그쪽의 지구는 사람 잡는 거보다 괴물 잡는게 중요했던 모양이야.
어쨌건 그런 것도 어느 정도 상성관계로 물리는 것이지 순수하게 검을 얼마나 잘 다루냐로 가면 나는 잘 다루긴 하지만, 정상급은 아니다.
“미카엘 같은 게 진짜로 검을 잘 다룬다고 하는 거야. 수 만년의 세월동안 어떻게 하면 더 칼질을 잘할까 궁리한 거니까.”
시스템적 보정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나였기에 미카엘을 상대로 기술적 우위를 약간이나마 지닐 수 있었던 거다.
사실 우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의 동등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사실 나도 어떻게 이겼는지 모른다.
미카엘이 했던 말들 일부만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 일이 다시 있으면 이젠 정말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지. 그러니 난 지금 스스로가 발전할 방향을 찾고 있는 모습들이 아주 좋다고 봐.”
제니는 입을 삐죽였다. 원래 저런 몸짓을 하는 친구는 아니었는데.
희우나 미아에게 물들었군.
“다들 더 멀리 가버리겠네요.”
“제니도 멀리 가려고 생각 중이잖아?”
“공감각인지 뭔지 너무 어려워요…….”
“다시 말하지만 내가 했으니까, 제니도 할 수 있어.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야.”
“전혀 위로가 안 되는데요.”
옆에서 바알이 자신만만하게 웃는다.
“크하하. 제니. 내가 더 빨리 하게 될지도 모른다!”
“진짜 그럴지도.”
바알의 껍데기님은 대충 싸움에 관한 거라면 뭐건 배우려고 하는 습성을 가졌다.
따라서 유배자가 아니라 마인드맵의 그 감각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것을 하고자 굉장히 노력중이다.
나도 완전한 NPC가 이걸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것도 사실 시스템 허점 노리는 거니까 뭐…….”
한없이 글리치 직전의 무언가인 셈이다.
일종의 신경가속.
그래도 미아가 한 일에 직접 나타나 금지 시킨 대신격이 이런 걸로는 한 번도 뭐라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허용 범위 내겠지.
허용 범위라는 것도 우습다.
그냥 제 힘이 남용되는 것을 막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자, 어쨌건 지금은 마인드맵 여닫기야. 계속 열고 닫으면서 그 감각을 붙잡아. 마력도 곧잘 사용하고 있잖아? 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전사라고 마력을 전혀 활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전사들은 어느 정도 수준 이상에선 마력을 활용한다.
무협 소설 같은 곳에서 내공내지 기라고 부르는 식의 활용이다.
제니는 그걸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수준의 전사다.
그렇다면 할 수 있다.
이게 거의 나만의 필살기술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나를 빼면 이딴 게 가능할거라고 아무도 생각조차 못해서일 뿐이다.
“내 강함이란 건 사실 다 그런 거에서 나오는 거거든.”
“그래서 서브 리더를 항상 높이 평가하는군요.”
“현대인의, 그것도 미궁 같은 시스템에 더 경험이 많은 겜창 출신들은 기본적으로 포텐이 높아.”
다만, 현대 겜창들이 미궁에서 살아남을 리가 없다.
일그림도 아주 드물고 다시 또 드문 케이스다.
“그래서 그 포텐셜이 나타날만한 수준까지 도달하기 전에 포기해버리지.”
“리더도 특이케이스고요?”
“난 엄청나게 특이케이스지. 그 정도는 인정하는 바이다.”
제니는 조금 한숨이 나올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한숨을 내쉬지는 않았다.
대신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하기 시작한다.
한때 희우도, 아서도, 에길도 했던 연습이다.
그때의 제니는 아직 이걸 연습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젠 가능하다.
각자의 발전에 몰두하고서 몇 주가 더 지났다.
희우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정씨 가문의 가전 무술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음을 인정해야했다.
“흠, 사실 네가 처음부터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면 나보다 더 잘했을지도 모르겠구나.”
사범님이 결과물을 보고 말한다.
단순한 공격력.
얼마나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타격을 쥐어짜내는가.
정씨 가문의 기술은 그런 쪽으로 집중되어 있다.
거대한 체급의 괴수들을 상대로 인간의 몸으로 승리해야하니 방법이 없다.
물론 미궁 기준으로 강력한 괴수들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길거리에 흔한 잡몹에 불과하다.
그래도 바깥에서는 희우의 집안 사람들도 미궁에서만큼 강하지 않았다.
초인이라고 한들 총구 방향을 보고 반응하거나, 화살을 손으로 붙잡는 정도다.
랭커급만 되어도 평범한 총탄은 맞아봐야 생채기도 안 날것이며, 평범한 화살은 하품 한번 한 다음에도 잡아챌 것이다.
하지만 비율이 달라졌을 뿐이다.
조금 더 로우 파워의 기술이 서로 하이 파워가 되었다고 무력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빠……. 나, 팔이 너무 아픈데…….”
“그렇게 혹사했으면 그럴만하지. 가서 쉬렴.”
“쉴 수는 없어. 에길한테도 알려줄 거야. 면허 개전했으니까. 괜찮지?”
“그래, 너도 이제 사범이니까. 전수는 자유다.”
처음부터 그런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원래 알던 여동생에 비하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가.
희우의 친오빠, 미궁에서는 한야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정희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천사가 꾸물꾸물 사라졌다.
한야는 남은 상흔을 보면서 다시 감탄한다.
“진짜로 하면 되는 아이라는 게 실존하긴 한단 말이야.”
땅이 패여 있다.
아주 길게.
정말로 길게.
그리고 깊게.
물론 스킬로 그 정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왕국의 대지도 메인 던전이나 일부 지역들처럼 단단하게 강화되어 있지 않다.
전력을 다했을 때, 이 정도를 해내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본다.
“아주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군. 요령은 완벽해.”
오의라거나 필살기라고 부를 그런 기술은 아니다.
그냥 이쪽 지구에서도 괴물을 상대로 약한 인간이 어떻게든 승리하기 위해 갈고닦은 요령이다.
실제로 그렇기에 두꺼운 비늘이나 가죽을 다진 녀석들의 심장에 닿을 수 있다.
겉만을 치면서도 저 깊숙한 곳까지 분쇄하는 게 가능하다.
“미궁의 보정을 받으면 이렇게까지도 되는 거였군.”
마스터리를 떼고 보더라도 희우는 한야보다 상당히 고스펙이다.
그리고 마스터리를 제대로 쓴다면 합을 겨루기도 힘들 정도로 스펙 차이가 난다.
“액티브도 안 썼는데.”
갈리진 틈 앞에 꽂혀 있던 단검에 다가가서 뽑았다.
그리고 틈으로 던져본다.
깊이 떨어진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대체 어디까지 패여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흔해빠진 강철 단검으로.”
일단은 화강암 지형이다.
마스터리만 있는 평타가 이렇게 깊고 날카롭게 파고드는 게 말이 되는가.
“그리고 그래도 아직 이게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이러면 한야도 메인 던전에 흥미가 생기 시작한다.
“뭐 하는 곳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