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20화
왕국 - [심연] 탐사 준비(5)
라파엘과 가브리엘은 왕국에 정착했다.
정착했다고는 하지만 둘은 그 사실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다.
기본적으로 바벨의 자식들은 아무 생각도 없어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
도리어 생각이 있다면 바벨의 주변을 떠도는 영겁을 견딜 수 없으리라.
그런 의미에서는 인간에게 물들지 않았던 순수한 천사라고 봐야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다. 듣고 본 것이 있으니 경제라는 개념도 존재한다.
필멸자의 삶에는 돈이 필요하다.
거기까진 알았다.
“하지만 돈을 번다는 게 뭐지?”
의지할 것은 여기로 기꺼이 데려와준 유배자들 뿐이다.
“레미에게 가봐.”
“레미? 필멸자의 이름인가.”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 되었다.
집이 주어졌고 식료품이 지급되었다.
지원금도 주어졌다.
“흠, 이게 돈을 번다는 것인가. 필멸자들은 이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징징대는지 모르겠군.”
* * *
* * *
세상의 절대다수가 피를 토할 것 같은 헛소리를 하면서 라파엘은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우선 가브리엘의 방에는 물과 달빛이 가득하도록…….
혼났다.
아주 크게 혼났다.
파라켈수스라는 요정이 직접 찾아와서 하나하나 교육하기 시작했다.
라파엘은 그걸 특별히 귀찮아하지는 않았다.
필요하다고 하면 그저 들을 뿐이다.
그러니 미카엘의 아래에서 그렇게 오래 별 탈 없이 지내온 것이다.
여러 도움을 받아 필멸의 삶을 살아갈 준비를 마쳤다.
가브리엘은 방에 틀어박히지는 않았지만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떠냐. 가브리엘. 필멸의 사고방식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잘 모르겠어.”
가브리엘은 여전히 멍하다.
원래 그랬다. 라파엘은 그래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편이지만 가브리엘은 아무 지시도 없다면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평소의 가브리엘이었다.
평소.
그 단어에 위화감을 느낀다.
껍데기로서 살아가는 지금이 평소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릴 귀찮게 할 미카엘은 없다.”
“그건 좋네.”
가브리엘이 정말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걸음마를 떼듯이 천천히 삶이 무엇인가를 배워가고 있다.
식사의 존재를 잊어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가 병원에 실려 간다거나, 플레이어블 천사 종족의 이론상 최대 수명이 겨우 10만년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기겁하거나.
이웃들이 그들을 굉장히 불쌍한 눈으로 보며 잘해준다거나, 그 이웃들을 권속 대하듯이 대하다가 다들 그러려니 납득해버린다거나.
여러 가지 해프닝은 있었다.
라파엘과 가브리엘이 동네의 명물이 되고 있다는 건 좀 우스운 일이었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거만한 주제에 뭐 제대로 아는 것은 없는데 종족은 누가 봐도 천사라는 고위 종족이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다들 그런가보다 하고 떠받들어주고 있다.
진지하게 하인처럼 군다기보다는 익살스럽게 라파엘 폐하, 가브리엘 전하, 하면서 노는 것에 가깝긴 하다.
“재밌는 일이네. 심지어 인기도 많다고?”
“그렇다더라고요. 일단 잘생기고 예쁜 건 맞으니까? 역시 우상에게는 외모가 필요한가 봐요. 요즘 길을 다니면 악수요청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투덜거리더라고요.”
“우리 파티원들은 이제 안 그러잖아.”
“우린 실제로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니 거리를 두는거고 저쪽은 재밌는 사람 취급인거겠죠.”
그 본질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하면 좀 거시기한 일이다.
메인 던전 시나리오 보스들이었다고?
뭐, 이런 식으로 껍데기를 왕국으로 데려오는 일은 나도 처음이다.
그럴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흘러가지도 않는다.
이번 회차는 여러모로 잘 모르겠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이젠 이걸 희우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전체적으로 뭔가 다르다.
갑작스럽게 DLC가 적용된 것도 아닐테니 더 근본적으로 뭔가가 다르다.
“그리고 이 칼도 용도를 아직 모르겠단 말이야.”
내가 쥐고 있는 검을 본다.
[어느 천사의 검]
너무 심플한 이름에 심플한 외형이다.
미카엘이 의도해서 어떤 힘을 깃들이지도 않았고 그저 오래 사용해서 아티팩트화되었을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따로 명칭이 떠오를 정도면 뭔가 기능이 있어야하는데 도통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의 실험으로 알아낸 것은 일단 튼튼하고 재질적으로는 아다만타이드보다 우월하다는 정도다.
라파엘의 검이나 메타트론의 검방처럼 권능을 띠고 있는 것도 아니란 말이지.
“아이템 액티브 사용횟수를 다하고 몸만 남은 케이스가 아닐까요?”
“하지만 첫 획득부터 그러면 의미가 없잖아.”
“충전할 수 있다거나?”
“어디서?”
“그러게요.”
이런 대화만 주고받고 있을 뿐이다.
“일단 한 번 붙어볼까?”
“그 검 쓸 거에요?”
“고럼.”
자주 쓰다보면 뭔가 알게 되겠지.
희우는 [아카샤의 눈]을 든다.
저것도 이젠 기능은 없으되 압도적 재질과 내구도로 승부하는 무기다.
“쌍수는 안 해?”
“안하더라고요.”
확실히 최근 쌍수를 사용하는 빈도가 줄어들긴 했다.
효율과는 다른 어떤 기술, 기예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은 기술의 특이점.
그런 것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간결한 움직임과 형태에서 위배되는 경우가 많다.
근본은 같되 어디선가 달라서 그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니까.
최근에 희우와 같이 경험치를 벌러 다니기는 했으나 대련은 오랜만이다.
“그런데 그거 대인전 기술 아니잖아. 괜찮겠어?”
“문제없어요. 전 여러 사람에게 배울 수 있잖아요? 일단 한 번 완성하면 그걸 개조할 수도 있는 거죠.”
“오…….”
아마도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추구할 수 있는 검술은 지금 탑재하고 있는 이것뿐이다.
애초에 나는 심리전과 다른 가용 수단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검술이니 검술보다는 전법이지.
“제니, 신호 좀 줄래?”
“코인 던질게요.”
튀어 오르는 코인을 보며 그 개꿀잼 DLC가 뭐였나 생각해보았다.
대신격들 셋이 나타나서 코인을 튀기는건 그럴 수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놓고 보여주는 이펙트상으로 보이는 것은 담당하는 메인 던전을 정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RPG의 근본은 주사위고 코인은 2면 주사위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의식이라면 의식이군.
느낌상 무언가 각 메인 던전에 대신격들의 특성이 입혀져 있을 것 같다.
맵기믹이 아니라 던전기믹처럼 말이다.
이건 쉽다.
그런데 뜬금없는 그 목소리는 무엇일까?
마지막에 행운을 빌어주던 4번째의 누군가.
그건 신격도 무엇도 아니라는 느낌이라 도리어 위화감이 들었다.
비범한 것들 사이에 평범한 게 섞여있다면…….
사실 그게 제일 비범한 건데.
“딴 생각 하지 마요.”
그리고 희우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검을 들었다.
결과는 무승부였다.
짜고 쳐도 나오기 힘들 정도로 깔끔한 무승부.
서로가 서로의 급소에 겨눈 채로 멈춰서는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확실히 그거 대인전용 기술은 아니네.”
“괴물 상대로는 어떨 것 같아요?”
희우의 기술이 완성이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자유롭게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천재라고 되는 것이 아니다.
완성은 동시에 하나의 굳어짐이다.
그러니 희우는 제 가문의 기술조차 제대로 다루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속성으로 능숙해질줄은 몰랐으나, 이제는 어딘가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동작 대체 뭐야? 어떻게 똑같이 팔힘으로 휘두르는데 충격량이 이렇게 다르지?”
“음, 그렇게 이과적인 접근이랑은 다른 것 같아요. 좀 더 미신?”
“마법적으로 접근해야해?”
“그러게요. 의외로 바깥에도 마법은 있단 말이죠.”
몸을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물리라고 생각했는데.
마력을 동원하건 뭘 하건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출력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 자체를 하나의 엔진으로 만드는 형태다.
그건 지극히 과학적이긴 하지.
“이건 좀 더 마법? 신앙? 뭐 그런 거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비과학적인 힘이란 건 알겠다.
“나도 혹시 배울 수 있나?”
“가르칠 수는 있어요.”
흥미롭다. 정말 흥미롭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할 수 없었다.
“아닌 것 같으니까 그만하자.”
“역시 그렇죠?”
“태생부터가 초인인 인자강들 용으로 만들어진 기술 같은데.”
이론적인 분석으로만 끝내야겠다. 그런데 이거 에길에게도 가르치고 있다고 들었는데.
“오히려 저보단 에길에게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어요…….”
“설득력 있어.”
2미터 20센티미터의 근육 몬스터. 키와 체중이 비슷한데도 체지방률은 보디빌더급이겠지.
인간일 때도 피부만 녹색으로 칠하면 모두가 너무 당연하게 오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죄다 압도적인 기초 스탯으로 귀결된다.
계수 자체가 다르다.
“후, 내가 생각해도 정말 파티원은 잘 모았어.”
“그 중 최고는 저죠?”
“물론이지.”
그렇지만 실제로 다들 능동적으로 더 나아질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전이라고 안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로서는 짚어줄 수 없는 자기 자신만의 강점을 찾아 노력 중이다.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자 미아가 샤워하고 나오는 길이다.
“또 키 컸어?”
“그래요?”
“그런 거 같은데.”
미아가 제 머리를 슥슥 문지른다. 언데드일 때 멈춰있던 신체활동이 재개되며 당연히 성장도 재개되었다.
의식적으로 잘 먹고 운동도 하니까 체력만 향상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옆에서는 아서가 입맛을 다시고 있다.
“이거는 이거고. 저거는 저거고.”
아서는 내게도 조언을 많이 구했기에 알고 있다.
그는 일단 모조리 외우기 시작했다.
이해보다 먼저 암기.
그게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속성으로 뭔가 하려고 한다면 감행해야하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학장이 말하는 아서의 마법적 능력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좋은 편이라고 보아도 좋다.
문제는 전사뇌라고 하던데 무슨 소린지 알 것 같아서 슬프다.
사고방식의 문제다.
학장도 나도 본인도 동의한 것이, 일단 다 기억해두고 실전에서 응용해가며 스텝업하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란 것이었다.
아서는 그래서 일단 전부 머릿속에 집어넣어두기로 했다.
때때로 미아의 도움을 받아가며 암기에 암기를 더하는 중.
실전에서 저 기억들이 꽃을 피우기를 빈다.
에길은 그 옆 소파에 드러 누워있다.
“에길은 무슨 문제 있어요?”
“멀미가 조금.”
“그 아다만타이드 달팽이관에 어지럼증을 주다니. 뭘 한 겁니까?”
“곡예비행을 시도했더니.”
그러고 보니 지금 에길의 종족은 하피다.
볼 때마다 종족이 달라지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비행은 잘 되어가요?”
“아무래도 나는 몸이 무거운 편이라 비행이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 같더군. 자유자재로는 못하더라도 무기를 제대로 휘두를 만큼은 했다네.”
에길의 경우는 누군가 조언을 주기 참 힘든 문제였다.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하며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난 석 달간 소비한 카드만 네 자리수라고 들었다.
조금 익숙해지고 나서는 연속적인 종족 변환에 적응하는 것마저도 연습한 모양이다.
“우리 서브 리더가 가르쳐준 건 어때요?”
“요령은 파악했다네. 제대로 사용하냐만 그건 다른 문제지만 이것도 실전에서 갈고닦아야겠지.”
확실히 실전만큼 좋은 훈련은 없다.
그리고 블랑쉐가 뛰어 들어왔다.
활짝 웃는 블랑쉐라니 잠시만, 좀 소름끼쳤어.
“성공했다! 오르골!”
“뭘 또?”
이젠 완전히 익숙해진 때 묻은 작업복의 차림이었다.
“블랑을 수납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 [병기창]이 아니라 [격납고]라고 부르기로 했지.”
나는 일단 눈을 다섯 번 정도 깜빡인 다음에 입을 벌렸다.
“그거 이론 좀 설명해줄래?”
무조건 알아둬야 한다.
그런 규모의 물건을 수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차원 수납 주머니의 혁명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혹여 이번 회차에서 실패하더라도 널리 퍼뜨려야하는 중요한 발견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러갔다.
슬슬 실전이 더 중요해질 정도로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진척되고 있다.
[심연]은 변수는 많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단순하기도 하다.
경험치도 충분히 벌었으니 슬슬 다시 재진입을 생각해봐야겠는데.
그리고 레미를 통해 소식이 전해졌다.
“트동트 영감님이 위독하다는데요?”
“병이야?”
“단순한 노환이래요.”
“하긴, 그냥 병이면 못 고칠 수가 없지.”
오크의 수명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대주술사는 처음부터 노인이었다.
내가 아는 트동트라는 NPC가 등장할 수 있는 나이 중에 가장 많은 나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너무나도 익숙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익숙할 수 없다.
개소리 같지만 실제로 그렇다.
이번 회차에서는 더더욱 각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