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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522화 (493/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22화

지하 958층 - [심연]의 초입(1)

희우에게는 입장하기 전부터 고민이 하나 있었다.

그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관한 고민이다.

전투를 위한 초인으로서 이어져 오는 가문의 특성상 어린아이에게 제일 먼저 선행되는 훈련은 익숙해지기다.

무엇에 익숙해지는가.

싸워야 할 온갖 기괴하고도 끔찍한 괴물들에 대해서다.

희우는 그것에 실패했었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받는가?

정씨 집안은 자식이 많다.

가주인 아버지와 친형제들 외에도 사촌에 팔촌까지 가면 모두를 외우기가 힘들 정도로 많다.

그래서 희우는 그냥 방치될 수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적지는 않았다.

하지만 많지도 않았다.

없어서는 안 될 전투원이니까 그렇게 사회의 묵인 속에서 희생되는 아이들이 있다.

희우는 본가의, 그것도 가주의 자식이었기에 상당히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저 방치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할 수 있는 것만 해라. 하기 싫다면 굳이 시키지는 않으마.

* * *

* * *

희우는 이해하고 있다.

그게 아버지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정씨의 성을 가지고 태어난 시점부터 선택지는 없다.

괴물들을 방치할 수는 없으니 그렇게 운명 지어져 희생당하는 영웅의 가계인 셈이다.

희우는 자신이 왜 실패한 정씨 가문의 영웅이 되었는지 아주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가장 처음, 적응을 명목으로 내던져진 괴물들의 한복판.

그때의 나이가 유치원생이었던가 더 어렸던가.

희우에게 과거란 불투명하고도 흐릿한 것이었다.

기억이 별로 없다.

초등학생까지도 그렇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나 기억 속에 삶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힘들었다는 막연한 인상만 있다.

다시 만나게 된 친형제들과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울면서 기절했었을걸.”

“그 뒤로 보기만 해도 기절했지.”

악몽에서나 나올 것 같은 기괴한 크리쳐들은 제법 흔하다.

짐승형이나 매끈한 인공물 같은 괴물들도 있으나 그런 것들만 인류의 적은 아니다.

그러니까 익숙해져야만 했다.

“아버지는 고지식한 사람이었지.”

“그러고도 널 계속 집어넣어서 어떻게든 적응시키려고 했으니까.”

“그게 그렇게 극복되는 게 아닌데 말이야.”

희우는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게임에서조차 그로테스크한 크리처들은 보기 싫어 따로 모딩을 하곤 했다.

그런 기억이 있었다는 것도 지금이야 알았다.

그냥 왠지 심약해서 스스로 그런 걸 보지 못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왠지 피를 보는 것까지는 잘했단 말이야.”

“사람이 죽는 것도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고 말이야.”

희우는 거기까지 듣고 스스로도 좀 질색하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으엑, 그거 되게 좀 그렇네.”

“너야. 너 임마.”

“그렇긴 하지만.

하필이면 재주는 좋았다. 요령도 있었고 곧잘 배워내기까지 했다.

“그래도 꿈틀거리고 징그러운 것들 상대로는 맥을 못 추니까 전력 외였지.”

“제한적으로 나가야 해서 기뻐했던 기억은 있는데…….”

정씨 가문의 무술은 어딘가 미신적인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성과 합리의 화신인 게이머로서의 오빠가 인정한 사실이다.

그래서 가문의 가풍조차도 미신적인 부분이 있다.

“솔직히 나도 이젠 생각하는데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야. 내 대에서는 바꾸려고 생각했었지.”

“오랜 악습이야. 나도 이제는 익숙하지만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으니까.”

희우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답한다.

“나 되게 반푼이였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건데…….”

“어린애한테는 별거 아닐 수가 없지. 난생처음 보는 악몽에서 기어 나온 괴물들인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말 할 수 없으니까.”

“그래.”

굳이 위로하거나 격려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건 바깥에서 이미 많이 했던 것이다.

희우가 처음 토벌에 나설 때는 한야와 한월이 함께 행동했었다.

어쨌건 친형제니까 사이는 좋았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며 나서는 여동생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러다가 발소리까지 완전히 멀어진 후에.

“그게 극복이 될까?”

“모르겠는데.”

희우가 처음 실패 판정을 받았던 날.

아직 미취학 아동인 여자아이를 뒤틀린 형상의 괴물들 사이에 던져 넣고 견디게 했던 날.

눈이 텅 비어버린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거기서 그것들을 다 죽여 버리고 나와야만 정씨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모두가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무기를 들지 못하고 떨어뜨리는 아이들도 많다.

가주의 딸이 그래서는 안 되었을 뿐.

그러니까 계속 다시 반복했고 또다시 반복했다.

그들의 부모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영웅이 그렇게 해주기를 원하니까. 이 영웅의 가계는 그리해야만 하니까.

그리고 아마 그때 어딘가가 무너졌을 것이다.

“너도 요즘 그 꿈꾼다며.”

“미궁에 와서도 종종.”

“나도 그래.”

오히려 희우를 포기한 후에 가족들은 그녀에게 자상할 수 있었다.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나이를 더 먹고 나서나 이상하다고 깨달았지.

“그래도 서방님은 좋은 사람인 것 같지?”

“어딘가 약간 망가진 거까지도 좋은 것 같아.”

“묘하게 어울린단 말이야.”

여동생이 만난 남자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편안해진다.

“잘하겠지.”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을 대신 해주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건 항상 우울하고, 기쁨이 뭔지 모르며, 불안에 가득 차 있던 가련한 여동생은 미궁에서 구원받았다.

지금의 모습이 원래 가졌을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막내답게 제멋대로인 점까지도.

“여전히 확실히 기억이 안 난단 말이죠.”

“일단 정확하게 못 견디는 것을 꼽으라면 뭉개진 형태인거지?”

“좀 그, 녹아내린 것 같거나 기형적인 것들? 인간이었던 흔적도 느껴지면 정말 못 봐요. 바로 구토하고.”

“일단 여전히 혐오체는 힘들겠군.”

그래도 거기까진 지장이 없다.

혐오체들은 여기까지 오고나면 잡몹에 불과하다.

꾸준히 등장하지만 희우가 전력이 되지 못하더라도 문제없이 제거가 가능하다.

드래곤도 이제 필요에 따라 대량으로 남획할 수 있는 지경인데, 육체적 스펙만 드래곤과 동급인 멍청한 고기 슬라임들은 어려울 게 없다.

“그래도 미안한데…….”

“시무룩해하지 마. 다들 별 신경 안 쓰니까.”

“그럼요. 서브 리더가 지금까지 해온 게 얼만데.”

“엄마! 내가 두들겨 패줄게.”

“부 부끄러워!”

뭐 그런 화기애애한 가운데 아서는 표정이 평소보다 굳어 있다.

“멀린, 멀린이라.”

“아서는 기대하고 있나요?”

“그렇긴 하지. 결국 내가 미궁에 와서 가장 오랫동안 찾아 헤맨 이가 그녀니까.”

“그래도 담담하시군요.”

“무서운 일이야. 감정이란 세월이 흐르면 결국 마모된다는 것 아니겠나.”

“이제 멀린이 그립지 않나요?”

“그립지.”

아서는 조금 생각해 보더니 말을 잇는다.

“하지만 그 그리움조차도 관성이 아닐까 두렵네. 멀린의 얼굴도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는걸.”

헤어진 지 40년이면 그럴 수 있다.

미궁의 시간 스케일은 수십만 년에 이를 만큼 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몇십 년도 너무 긴 시간이다.

유배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딱 100년이라는 현실적인 수치인 것도 그렇다.

겨우 1년도,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긴 수십만 년도, 다 제각기 할 말이 있는 셈이다.

“그래도 만나야지. 멀린을 다시 보는 것이 내 목표 아니겠나. 그래서 말인데…….”

“멀린과 아서의 만남이 보통 어떻냐는거군요.”

“자네는 남의 마음을 너무 잘 아는군.”

“많은 나이든 아서들이 그걸 물어보거든요.”

노기사는 씁쓸하게 웃는다. 그 사실 자체가 자신이 가진 불안을 증명하는 것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실제로 미궁에 온 후에 아서와 멀린이 만나는 것을 본 적은 몇 번 없지만, 대개 잘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거면 되었네. 내 참, 내 개인적인 사정으로 별 질문을 다하는군.”

다른 파티 멤버들은 비교적 담담하다.

[심연]은 굳이 따지고 든다면 난이도 자체는 낮은 편이다.

그러나 그 난이도가 낮음은 좀 더 개인적인 영역이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물량으로 공략할 수 없는 곳이 이 메인 던전이다.

파티 플레이보다는 개개인의 무력이 더 중시되기 쉬운 곳이니까.

진행에 따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일 것이다.

전체적인 난이도는 낮을 지라도 결코 쉽다고 할 수는 없다.

천천히 층을 내려간다.

지하 미궁을 탐험한다는 것은 이런 던전 게임의 근본과도 같은 일이다.

9999층까지 있지만 않으면 더 좋을 텐데.

“대략 3000층쯤부터는 본격적으로 메인던전 판정이 나올 겁니다. 갑자기 [빛과 어둠의 경계]로 들어갔을 때처럼 뭔가 시작될 거예요. 그때부터가 문제죠. 그전까진 소풍이나 다름없으니 느긋하게 가자고요.”

갈고닦을 것은 아직 남았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인 것은 저층을 천천히 진행하며 갈고닦기 위함도 있다.

희우는 어보미네이션이 나타날 때마다 곁눈질로 그것을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안색이 너무나도 창백해졌기에 그냥 눈을 가려주었다.

희우는 굳이 그 손을 치우지는 않았다.

루시는 최근 다시 키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굽이 있는 신발은 신는 편이다.

전투에는 도움이 전혀 되지 않겠으나 전직 혼돈의 여신으로서의 위엄을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된다.

“제길, 현대인지 하는 곳에서 온 녀석들은 왜 다 이렇게 크지?”

투덜투덜하지만 사실이다. 루시의 시대에는 오히려 그럭저럭 큰 축이었다.

남자들과 비교해도 작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사의 딸이었지 않은가.

“그래도 쪼그말 때부터 귀여워하던 꼬마한테 추월당하는 건 슬픈데.”

미아 이야기다.

최근 들어 부쩍 커지고 있는데 시시각각 눈에 들어오는 머리의 높이가 올라오고 있다.

어느 샌가 턱을 미아의 머리 위에 올릴 수 없게 되었다.

유치한 자존심인지라 누구에게 의논할 수도 없는 부끄러운 마음이다.

지금도 입으로 중얼거려놓고 누군가 듣지 않았나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다.

사실 누가 있을 리가 없다.

현위치는 신좌.

혼돈의 신좌다.

다시 여기에 앉을 일은 없을 줄 알았지만.

“루시가 필요해요.”

“끄으으응.”

어쩔 수 없었다.

혼돈의 신좌는 확실히 심연과 깊은 연관을 가진 곳이다.

그리고 혼돈의 여신으로서 가장 오래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루시는 혼돈의 권능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존재다.

저층까지는 심지어 직접적인 소통과 모니터링도 가능하다.

“하지만 메인 던전 구간부터는 어차피 내 시야도 닿지 않는데.”

“그건 또 꼼수가 있지요.”

그리고 더 자세하게 들은 후에는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심연]의 시간은 뒤틀려 있다.

왕국과 시간의 흐름이 전혀 다르다.

서버와는 또 다른 형태기에 신들은 그곳을 제대로 관측할 수 없으며 왕국은 심연에 들어간 공략 파티의 현황을 알 수 없다.

운이 나쁘면 갑자기 침공이 시작되는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침공보다도 먼저 클리어 후의 파티가 왕국으로 귀환하는 수도 있다.

그게 당장 내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혼돈처럼 심연과 연관이 깊은 계열의 신이 모니터링하며 조율할 필요가 있다.

“꼭 그게 아니어도 전력으로서도 필요하고요.”

“알았다…….”

짧은 자유를 누린 후에 다시 신좌로 돌아오게 된 사유다.

파티는 곧 네 자릿수 층으로 돌입한다.

오랜만에 대전사 놈의 시선으로 세상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그 꼼수란 걸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두고 보자.

심연의 깊숙한 곳은 루시도 몇 번 발을 들여보았을 뿐, 잘 모르는 곳이다.

그걸 라이브로 볼 수 있다면 또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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