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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523화 (49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23화

지하 1000층 - [심연]의 초입(2)

늘 그렇지만 브리핑은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한다.

그래야 기억의 손실을 방지할 수도 있으며, 쉬거나 자기 단련을 할 때는 그것에만 집중하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내가 선행 제공하는 정보는 아주 큰 틀에서의 정보뿐이다.

“그래서 개별 전투가 존재한다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겠나?”

아서가 아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무력에만 의지해야 하는 단독 공략 구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파티원도 거기까지만 알고 자신의 약점을 메꾸기 위해 노력했다.

“[심연]은 진정한 로그라이크를 지향하는 던전이라 층마다 랜덤 기믹이 지정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우리가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시간의 흐름은 어떻지?”

“같은 층 내라면 공유하지만 다른 층이면 달라질 수도 있지요.”

“그건 아주 곤란하군.”

그래서 파티원들끼리의 시간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나는 1시간 만에 돌파했으나 아서는 1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시간의 벌어짐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 * *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 거리인가?”

“단순히 층수입니다. 상황에 따라선 스스로 판단을 내린 후에 대기하기도 해야 하죠. 너무 멀어지면 그만큼 시간의 왜곡도 커집니다.”

“그걸 왜 이제 알려주는 거예요?!”

그야 미리 안다고 뭐 어쩔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로서는 쓸데없이 걱정할 것 같은 몇몇 멤버들이 걱정을 하게 두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제니의 귀가 축 처진다.

“확실히 저는 그럴 것 같긴 하네요…….”

“그럼 파티원의 수는 안 중요한가요?”

“그건 또 아니야. 협동 구간도 그만큼 많으니까. 이 비율조차 랜덤이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게 문제지.”

고로 파티 플레이 역량과 개인의 역량이 모두 중요해진다.

“너무 앞서나가지 않도록 주의도 할 것…….”

희우는 표정이 조금 밝아 보였다.

최근 들어서는 밝은 모습보다는 심각한 표정이나 진중한 얼굴이 많았다.

잘못 보면 블랑쉐로 보일 정도다.

일단 둘은 꽤 닮은 얼굴이긴 하니까.

블랑쉐가 괜히 여동생으로 자연스럽게 오해한 게 아니지.

희우가 좀 더 어린 느낌일 때는 아니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확실히 블랑쉐를 닮아가고 있다.

미인상이란 것 자체가 어느 정도 비슷하기도 하다.

그리고 반대로 블랑쉐는.

“그렇군. 그럼 내 신앙은 어떤 식으로 활용하게 되는 거지?”

과거에 비하면 훨씬 밝은 표정으로 질문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블랑쉐는 점점 밝아지고 있다.

속이 어린애다 보니 그게 밖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최근에는 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달라지기도 했고 말이다.

“심연의 신의 신앙이 이곳을 공략하는 것에 핵심이지. 일종의 치트키로 기능하거든.”

“날로 먹을 수 있나?”

“그 정도는 아니야. 불운을 최소화해 주는 거지.”

구체적으로는 파티원 개개인에게 적용될 시간의 뒤틀림을 해소할 수 있다.

“어떻게 알고? 서로 다른 시간에 있다면 방법이 없지 않나.”

“등대가 되는 거야.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시간이 얼마나 빨리, 혹은 느리게 흐르는지 알 수 있는 지표 말이야.”

혹은 잣대다.

블랑쉐의 시간을 기준으로 모이면 된다.

“시간 흐름이라는 게 수정이 되는 거예요?!”

“사실 그거 행동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거든. 예를 들어 대부분의 구간에선 전투가 격렬하면 시간의 흐름이 느려져.”

“오, 세상에. 그럼 블랑쉐 언니가 기준이 되어주면 거기에 맞출 수 있긴 하군요.”

“그걸 위해서 개인의 무력이 필요한 거야.”

시간의 흐름을 맞추기 위해서 뭘 해야 할지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전투력이 기본이 되어 있지 못하면 제대로 맞출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개인에게 요구되는 전투력은 어느 정도예요?”

미아가 조금 불안하게 묻는다.

제니 없이 전투에 참가해 본 적이 거의 없는 탓이다.

“파티 플레이보다는 훨씬 쉽지. 미아는 최근에 마법사로서의 단독 전투에 대해서 공부했지?”

“네!”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본다.

이상하게 난이도가 튀더라도 마법사는 쉽게 죽지 않는 클래스다.

“자신을 믿어. 할 수 있어. 그래서 심연부터 오지 않은 것이니까.”

그래서 [빛과 어둠의 경계]로 먼저 갔다.

기본적으로 심연의 몬스터들은 빛에 약한 것들이 많다.

이유는 그냥 비주얼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천사 장비들은 골고루 분배가 이루어졌다.

내 경우에는 없어도 이겨낼 자신이 있으므로 라파엘의 검과 메타트론의 검방도 포기한다.

“지겹다. 지겨워.”

“층수가 너무 많은 것 같긴 해요.”

“9999층을 다 지나치게 되진 않을 거야. 심연의 신은 일단 공간의 신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어디선가 건너뜀이 생기겠지.”

파티원들이 그 사실에서 곧바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깨닫는다.

“그래서 층수가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기준으로 시간의 흐름이 더 크게 괴리되는 거군요.”

“그게 심연의 핵심 맵기믹이니까.”

그리고 불안에 빠진다.

“그럼 어떻게 될지 정말 알 수 없군.”

“나이를 먹는 속도가 달라지나. 나는 노환도 걱정해야 할 판인데.”

“악마가 노환으로 죽을 정도면 이미 공략은 의미도 없지 않을까요? 아서?”

“그래도 남은 시간은 중요해지잖아요. 그건 개인이 체험하는 주관적 시간이 기준이니까.”

거기서 난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제일 적게 남았지?”

“그건 그래요.”

“난 시간 안에 도착할 자신이 있어.”

희우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아서도 70년 차고 에길도 40년 차 정도였죠?”

제니가 입맛을 다신다.

“저도 사실 30년 차 정도고요.”

블랑쉐는 25년 차고 희우는 이제 2년 차에 접어들었다. 고로 나를 빼면 문제가 없는 수준이다.

“그러니 그걸 걱정할 필요는 없어. 평균적으로는……. 3개월 이내로 해결되거든.”

“그건 좋은 소식이네요. 그런데 어떻게 낸 평균이에요?”

“심연은 공략한 적이 제법 많았지. 기믹이 이후 진행에 어려움을 많이 주는 거지 난이도 자체는 낮은 축이거든. 거기에 고정이니까.”

그래서 데이터가 가장 많은 메인 던전이다.

지겹다는 것은 너무 많이 와서 지겹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피처로서도 활용했다. 시간여행을 해버리면 내 적들이 나를 추적할 수 없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조금 도박수를 던져 파밍을 위해 들어오기도 한다.

미궁의 시스템에 빠삭하다면 심연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하게 다용도다.

“내가 왕국도 매번 달라서 안 지겨운데. 심연은 항상 지겨워.”

“지겨울 만큼 많이 공략해 봤다는 거니까 아주 든든하네요.”

“그럼. 맡겨만 줘.”

아서가 묻는다.

“멀린은 언제쯤 만날 수 있겠나?”

“좀 깊은 층으로 가야합니다. 통상적으로는 7천 층 부근에서 많이 등장하네요.”

“그렇군. 시간은 괜찮은 경우가 많나?”

“멀린이 홀로 보낸 시간이요?”

“그렇네.”

진정으로 걱정하는 말투다.

“트동트 영감님의 나이보다도 스펙트럼이 좁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서와 헤어진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죠.”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나로서도 아서가 흐뭇하게 웃을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러지 못하는 아서들도 있었다.

조바심을 못 이겨 뭔가 잘못되는 아서들 말이다.

“당신이 우리 파티의 일원이 되어준 것은 멀린을 찾기 위해서였으니까요. 저는 책임질 겁니다.”

“고맙네.”

에길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제 수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발할라에 대한 고민이라도 하는 걸까?

쿠오오오옹

웅장하고도 거대한 소리가 울린다.

희우는 새삼스럽게 그 모습을 보면서 눈을 비볐다.

“진짜 오랜만에 본다. 심연의 신전.”

“그리고 그 위의 골렘.”

처음 보았을 때는 2층에서 긴급탈출을 했을 때다.

그 이후에 보았을 때는 드라간과 우주전을 한바탕하고 나서였다.

“이제 올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지.”

“처음에는 저길 올라가는 것 자체가 말 같지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애초에 처음 봤죠. 저런 구조물이 움직이는 건…….”

“하긴 그리폰 보고도 놀랐었지.”

“지금은 식후 간식거리도 못 된다니. 그게 더 신기하네요.”

희우에게 단검을 건네받았다.

“이걸 회수해야 했던 제일 큰 이유지.”

심연의 신의 성물, 아티팩트형 성물은 그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다.

심연의 신이 아니라면 크게 의미가 없는 시스템이긴 하다.

시간의 신전이나 행운의 신전은 애초에 발견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다.

심연의 신이 그나마 신전도 성물도 접근성이 높다.

블랑쉐에게 방법을 알려주고 들려 보냈다.

이블은 날개를 만들어 날아올랐다.

“……날갯짓이 아주 깔끔하군.”

에길이 부럽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블랑쉐가 심연의 신의 전갈을 받아왔다.

“혼돈이 자신의 영역을 들여다보는 것을 허가한다는군.”

“좋아. 뭐 이상하게 뒤틀린 부분은 없군.”

[아아, 들리나? 친구들?]

아직 혼돈의 신도인 나와 아서, 에길과 제니, 그리고 미아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루시가 신언으로 말하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다.

“루시도 이번엔 우리 파티의 일원으로서 공략하는 겁니다. 즐거워요?”

[제기랄. PTSD 올 것 같은데.]

“잘 인도해 주십쇼.”

[그래. 여신 무전기 오랜만에 가동이군.]

“경우에 따라선 화신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이제 와서? 내가 뭐 도움이 될 수 있나?]

“되는 친구들도 있지요.”

제니나, 기타 등등 말이지.

[세상에. 신앙이 왜 이렇게 많이 쌓여 있지? 헨리는 대체 뭘 한 거냐.]

“온 세상이 혼돈 아닙니까.”

왕국은 이미 혼돈의 신앙이 먹었다고요. 신좌에서 내려오더니 정말 세상에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레미가 루시가 게으르다고 투덜거렸던 것이 기억난다.

정말 철저하게 게으르게 늘어져 있었나 보군.

[그런데 심연의 신에게 성물을 다시 바칠 수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게 이런 효과가 있다는 것도 말이다.]

“바벨탑에 가 보면 적혀 있어요. 거긴 공략할 필요는 없지만 공략하면 알게 되는 특전들이 있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파티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바벨탑이면 그……. 녀석들이 맴도는 곳이잖아요.”

“우리 왕국 위에도 있다는 그거 공략해야 해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 내가 말한 적 없나? 반드시 공략해야 하는 건 아닌데, 바벨도 공략해야 할 수도 있어.”

“전 정말 하기 싫은데요.”

“진짜 싫은데.”

“나도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네.”

이런이런. 다들 호들갑이 심하네.

“괜찮아요. 우리 왕국의 바벨탑을 공략할 일은 없을거니.”

“그러면?”

“마지막 메인던전은 그래야 할지도 몰라요.”

거기라면 바벨탑을 좀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

그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

“걱정 말라니까. 거기 천사들이랑 악마들 다 때려잡아야 공략되는 것도 아니야…….”

제니의 창백함은 좀 오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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