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41화
심연 2857층 - 구원자(3)
남극의 빙하가 녹고 있다.
아주 뜬금없는 일이었다.
커다란 섬광이 관측되었고 그것을 제대로 본 일부 사람들은 한동안 시력저하를 겪기도 했다.
뉴질랜드의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기온이 상승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여파가 미국 본토까지도 닥치리라 여겨졌다.
일부 위성들은 기능을 상실했다. EMP가 터진 것과 비슷한 효과였다.
특히 상공에 있었던 것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정확히 남극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관측되지 않았다.
대통령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누군가 무언가를 알아올 때까지 말이다.
그는 세상의 책임자였으며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
사실 조금 다르다.
* * *
* * *
결정해야만 했다.
좋건 싫건, 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정부의 수장이니까.
그리고 가장 빠르게 도달한 사실이 빙하가 녹고 있다는 관측이었다.
거대한 섬광에 이어 무수한 먼지구름들이 날아올랐기에 남극 대륙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다.
근해를 촬영하여 확인된 사실일 뿐이다.
적외선 촬영 결과 그저 녹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온수가 되어 콸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상공의 구름도 분석 결과 수증기가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럼 뭔가 터졌군. 핵이라도 터졌나?”
“외람되지만 각하. 핵으로는 저런 현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번쩍하고 끝나는 열량으로는 사방으로 온수가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군요.”
“그럼 핵 이상의 무언가로군.”
“방사선도 관측되긴 하였으나, 핵이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적었습니다.”
아직 마력이 발견되지 않은 세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광학적 관측이 필요하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그럼 결국 기다리는 수밖에 없군.”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수뇌부의 분위기는 어둡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이브 마인드가 처음 저곳에 내려왔을 때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 거대한 생명체가 빙하 위에 갑작스레 출현하여 자리를 잡는다.
막대한 질량이 허공에서 나타나자 거대한 폭발이라고 불러야 할 현상이 일어났었다.
비슷하지만 더 거대한 무언가가 일어났다면, 어찌 되었건 하이브 마인드의 신변에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성공한 걸까?”
“그걸 모르겠습니다.”
“하긴, 언제는 우리가 기사단장에 대해 뭘 알았나.”
그럼에도 모두가 비상체제로 돌입했다.
어떤 변화일지 모를 뿐, 무언가 큰 변화가 들이닥칠 것이다.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비보가 닥쳤다.
“둥지들이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째서? 휴면이 벌써 끝난다고?”
주기는 오랜 관측으로 파악했다.
어느 정도의 유기물을 흡수한 후에 둥지가 소화를 시작하는가.
그리고 소화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아직은 여유가 있어야 했다.
“소화를 포기한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군.”
좋다면 좋은 일이다.
그간 어떤 저항에 직면해도 일정하게 주기를 지키던 괴물들이다.
그것들이 추구하는 것이 극한의 에너지 효율이라는 점을 기사단장의 정보 제공으로 알게 되었다.
다른 성계, 다시 유기물질을 찾을 때까지의 비축.
어찌 보면 그렇게 생사를 걸고 지킬 만한 원칙이다.
비축이 충분하지 않다면 우주 공간에서 말라죽을 테니.
“적어도 하이브 마인드의 신변에 큰 이상이 생긴 것은 확실합니다.”
“통제의 형태가 오버시어 위주입니다. 하이브 마인드가 제어하고 있는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더 산발적이며 제멋대로다.
일제히 움직인다기보다는 각각의 그룹들끼리 제각각 따로 논다.
“동부에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방어병력 배치는 늦을 것 같습니다.”
멕시코를 뚫느라 그랬다.
전략지도를 본 대통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많이 죽겠군.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지.”
“물론입니다. 각하.”
그리고 몇 시간 후, 더 끔찍한 소식이 들이닥친다.
“각하……! 달이……! 화성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말이었다. 궤도상의 괴물들이 육안으로도 관측될 정도로 움직이고 있다.
망원경으로는 더 자세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
대퉁령은 어떤 희망적인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히는 망연자실하게 ‘오르골’이 잠든 바디백을 보고 있었다.
배는 이 주변을 선회하다가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보낸 후, 이 사람이 세상을 구했노라 그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베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조직이 어떻게 되어야 할지 모르겠네. 이대로 여기서 자리 잡아 세상의 일각으로 설 수 있긴 하겠지만…….”
“베르, 얼굴 한 번 더 봐도 될까?”
“마음대로 해.”
그리히는 지퍼를 열었다. 생전과 다름없을, 하지만 본 적은 없는 얼굴이 나타난다.
차가운 추위 속에 꽁꽁 얼어있다.
“좋아했었는데.”
“그랬어?”
“응.”
“아주 배덕감 넘치는 사랑이었네.”
베르의 담담함에 그리히는 대꾸한다.
“알고 있었어?”
“너만 그런 것도 아닐 거야.”
“하긴, 그렇겠지.”
그러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너도?”
“아니. 나는 아니야. 하지만 다른 아이들 중에서는 그런 경우도 있었지. 우린 어려.”
“성인이야.”
“사회도 무엇도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람 죽이는 법만 배운 어른아이들이지.”
베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해가 있는 곳을 본다.
“이렇게 할 거였으면 끝까지 책임졌어야지.”
“그러게.”
그리고 섬광이 번쩍였다.
아직 뉴질랜드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많이 남은 때였다.
파도가 몰아친다. 바다가 거칠어진다.
“속력을 더 내야겠네.”
“그 사람 가짜였잖아.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었어?”
“신.”
베르는 그렇게만 말하고 그냥 그대로 키를 잡고 질주했다.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위험한 구역을 빠져나가야 했다.
가는 길에 위협은 없었다.
이 벌레들에게 기존 병력으로서 해군은 없었지만, 드넓은 바다의 유기체를 무시할 리도 없다.
급조된 녀석들이 저인망처럼 바다를 싹싹 긁어모으고 있다.
하지만 어쩐지 이 요트 하나를 습격하는 것들은 없다.
공중 괴수들도 이쪽으로 오지 않는다. 하이브 마인드가 충분한 위기를 마주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히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중에 더 자세하게 알려줘야 해.”
“모든 일이 끝나면 말이야.”
가장 먼저 지구 내에 있는 것들을 청소할 필요가 있다.
착각하면 안 된다.
이런 되다만 우주포식자들은 무슨 수를 써도 나를 죽일 수 없다.
내가 저들에게 승리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건 바뀌지 않는다.
제아무리 숫자의 폭력이 두렵다곤 해도 흠집조차 나지 않고 내 소모만이 문제라면 두려울 것도 없어진다.
쉬고 싶으면 어디 아공간을 생성해 들어가 쉬면 될 것이고, 저들이 나를 추적할 방법은 그냥 없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순노동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 내 승리 조건은 나의 생존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존속.
블랑쉐가 돌아와 이 지구의 몇 안 되는 생존자가 되는 것은 재미없지 않은가.
그보다는 과거를 딛고 일어서는 곳이어야 한다.
이건 지키는 싸움이다.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하다.
순간이동 포인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는 것이 효율적인가.
날개를 펼치고 음속의 10배를 가볍게 낼 수 있다면 지구 하나를 정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력 탐지로 생존자들의 위치를 파악한다.
생각보다는 많았지만 생각보다 위험한 곳도 많았다.
막연하게 미국에게 맡기고 빠져나갈 생각이 위험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마다가스카르는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다. 생존자도 많았으며 한번 휩쓸고 지나간 후 다시 돌아오지도 않았다.
둥지까지 설치하기엔 이미 깨끗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문제도 생긴다.
식량난이다.
우선 비가 좀 필요해 보였다.
기후는 이상해질 대로 이상해져 있다.
천사의 모습을 숨길 생각은 없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강림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의 위치와 물의 원소들을 탐지하고.
기후를 조작한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사하라 사막 역시 굳이 벌레들이 휩쓸지 않은 곳이다.
생존자들은 대체로 유기물이 적은 곳이나 바다로 고립된 섬 같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어딜 가나 물자가 부족했다.
“주술은 이럴 때 쓰려고 배웠지.”
생명력이란 것은 사실 몸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다.
강제로 활성화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는 있으나 굶는 것보다는 낫다.
사막에 비를 뿌리고 생명력을 뿌린다. 씨앗은 다른 곳에서 조금 챙겨왔다.
대자연을 움직인다. 주술사는 서버 내에서 드루이드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근본적으로 같은 형태로 마법을 발현하는 것이다.
누구도 사용하지 않아 길들지 않은 원소들은 처음에는 조금 저항하다가 이내 움직인다.
활기와 힘을 가득 담아 흩뿌렸다.
다친 이들에게 치유를, 슬픈 이들에게 행복을.
사막에 싹이 트고 나무가 자란다.
꽃이 피고 씨가 생겨난다.
몇 번 반복하자 국지적인 테라포밍이 일어났다.
가는 길에 둥지들도 여럿 발견했다.
둥지보다는 오버시어를 노린다.
다들 어딘가 흥분해 있었다.
하이브 마인드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본래라면 그대로 제각각의 군벌이 되어 내분이 일어나거나 영역 다툼을 하게 되겠지만, 지금 경우에는 하이브 마인드가 마지막으로 남겨둔 명령이 문제다.
모든 벌레들이 모든 인간들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수가.
심지어 저 우주에서는 지구에 있는 것들보다도 수백 배 많은 벌레들이 다가온다.
내가 살아남아 마지막 한 마리까지 처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방을 돌아다니며 눈앞까지 닥쳐온 위협을 제거하고, 미래의 씨앗을 뿌린다.
그 행동 자체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에 있는 것들은 물리적 비행으로 이동해 오고 있다. 하루 정도면 도착할 모양이다.
첫 번째 웨이브가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디펜스를 만들어주네. 솔로 디펜스인가.”
파티원들이 있으면 너무 쉬울 것이다.
루시가 했던 이게 어쩌면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약간의 근거가 더해진다.
지극히 게임적이지 않은가?
“시험해 볼 게 있겠는데.”
마법은 정신적인 것.
고로 그 세계 주민들의 인식에 달린 부분이 꽤 크다.
어둠의 원소란 중세 판타지 월드의 서버에선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게 실체화되는 것은 우주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는 근 미래 구간부터다.
여긴 어떨까?
우주로 올라간다.
천문학이 발달하고 우주여행과 패러테라포밍까지 발전한 이 세계의 우주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면 일이 좀 더 쉬워지지.”
모두 우주의 먼지로 만들어야 한다.
저게 상륙하면 내가 아무리 강해도 인류는 끝이다.
그러려면 이 어둠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데, 천사가 어둠을 다루는 것은 어색할 수 있지만 의외로 잘 어울리기도 한다.
그야 뭐 악마랑 한 세트니까.
동시에 어둠의 부재는 곧 빛이다.
무한한 순환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곧 영구기관이 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영구기관은 아니지만 핵융합 이상으로 초월적인 효율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개념기관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 작업은 시간이 좀 필요하다.
아래쪽에 북미 대륙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더 자세히 보면 교전이 시작된 곳도 있어 보인다.
동부쪽의 오버시어는 없으나 하이브마인드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지성 없는 돌격과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멕시코 쪽도 잠깐은 상실할지도 모르겠다.
아마존이 수확하기 가장 좋은 지역 중 하나였기에 남미에는 대량의 병력들이 머물러있다.
그 모든 것들이 북상하는 것이 보인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려나.”
우선 어둠을 그러모으기 시작한다.
노심이라고 부르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블랙홀이란 것은 사실 지나치게 응축된 어둠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적어도 미궁에서는 그렇다.
광대한 영역의 어둠이 걷힌다. 태양빛이 닿지 않는 모든 곳의 어둠이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자리는 잠깐 동안 비어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가, 이내 다른 것으로 채워진다.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도리어 마법사가 되면 쉬이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부분적으로 빛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더 크게 만들어 굴려 나갈 것이다.
“빛이여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