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543화 (543/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43화

심연 2857층 - 구원자(5)

중장은 덴버 탈환의 주역 중 하나이며 그 교두보였던 겐사이 기지의 사령관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병력과 지휘관들 사이에서 중요한 자리에 올라있으며 최근에는 영웅 대접도 받았다.

사실 죄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후루룩 해야 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그래도 눈앞의 일에 집중하고 책임져야 한다.

그는 본래 중령이었다.

유망하긴 했으나 젊었고, 따라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을 당시에는 별다른 권한도 없었다.

괴물들이 그의 위를 청소했다.

빈자리가 잔뜩 생겨나고 그는 진급했다.

눈곱만큼도 기쁘지 않은 진급이었다. 능력을 입증하여 성사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 밀려 올라간 것이니 별수 없다.

하지만 개인의 꿈이나 신념은 중요하지 않은 시기였다.

중장까지 빠르게 올라간 그는 곧 대장이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아마 이 일이 잘 끝나더라도 그의 자리는 빈자리가 될 것이다.

저 아래의 원래는 소령쯤이었던 누군가가 어쩔 수 없이 장성의 자리를 다시 꿰차게 되겠지.

그렇게라도 되었으면 하는 것이 현재 중장의 희망이었다.

* * *

* * *

그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여기서 방어하다가 죽을 것이다.

아주 말단 병사들은 이 사실을 알지도 못한다.

아는 것은 그래도 지휘관급이다. 지휘자들도 대다수는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열심히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헌신에 대한 보답을 이런 식으로 밖에 할 수 없음에 슬퍼하며 중장은 지휘봉을 놀렸다.

그가 전선에 나와 있음은 벌레들에게 전술이 없는 탓이다.

오버시어를 잃은 그들에게 적은 단지 눈앞에 보이는 한 명 한 명일 뿐이다.

중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전황을 독려했다.

치트키와도 같았던 기사단장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너무 강렬하게 박혀 있다.

그 압도적인 무력이 그립다.

전장에 앞장서서 오는 대로 갈아버리던 시가단의 방진이 보고 싶어지는 날이다.

“포격!”

포병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점은 이런 시대에선 놀라울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벌레들은 정말로 인간의 무기가 뭔지 잘 몰랐고 사실 크게 관심도 없었다.

물량으로 덮어버리면 이긴다.

하이브마인드라는 군체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저 집단은 모두가 하나이며 하나가 모두이다.

사람이 손톱이 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듯 지구를 두들겼을 뿐이다.

그러니 정말 많은 옛것들이 온전히 남아 있다.

인류의 문명도 정신도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중장은 다시 악을 썼다.

이미 상황은 좋지 않았다.

북미 동부의 벌레들은 개체수가 아주 많았다.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총공세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할 일만 해서일 뿐이다.

지금처럼 통제를 잃고 최후의 명령에만 따라 돌격해 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물러나셔야 합니다!”

“전차 앞으로!”

밀려나고 있다.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부랴부랴 지원군들이 움직이고 있긴 하겠지만 그냥 여기서 끝날지도 모른다.

벌레들이 지평선을 가득 메우고 있다.

거리를 주지 않기에는 이쪽의 탄환이 부족할 지경이다.

“오, 주여. 뭐 좀 없습니까.”

중장이 마침내 그런 말을 입에 담았을 때.

그것이 일어났다.

미국의 위성들은 여러 가지 풍파를 겪으면서도 아직 많이도 살아 있었다.

물리적 충돌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일부러 파괴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극 주변에서 파손당한 것들을 제외하면 아직도 거의 전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다.

그래서 알 수 없었다.

“저건 뭡니까.”

“낸들 알겠나.”

“기사단 불러와! 기사단!”

대통령의 호통에 베르를 대신하고 있는 서늘한 인상의 여인이 달려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모르겠지만 뭡니까.”

“모르겠다.”

“이런 제기랄. 베르! 코드네임 베르 연락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통신망이 무언가에 잘려 나가듯 끊어지기 시작했다.

곧 위성으로 사방을 내려다보던 시야도 끊어졌다.

이런 세상에 누가 전파 방해 따위를 하겠나만은 체크해 본다.

“EMP 같은 것도 아닙니다만, 그저 뭔가 이상한 파동들이…….”

실존하지 않는 현상인가?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형태로 전자기파들이 얽히며 다양하게 상공에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다.

충분히 강한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아무리 봐도 이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단지 저 검은 선들의 여파라고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세상이 판타지야 아주 그냥. 어릴 때 영화나 더 많이 볼걸.”

밖으로 뛰쳐나간다. 육안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늘에 검은 선들이 그어져 있다.

양감도 없으며 입체감도 없다.

그림판 프로그램에서 아무렇게나 찍찍 그어댄 두께 없는 선에 불과해 보인다.

사방을 덮고 있다.

출처는 하늘의 일식.

태양과 달이 멀쩡히 지구를 맴돌고 있음에도 버젓하게 어둠을 감싼 빛의 띠로서 떠 있는 구체다.

방사형으로 번져 나가기에 착시마저 일으킬 것 같다.

어둠이 점점 옅어지며 사방을 둘러싸 감싸안은 느낌.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선의 간격을 넓어지고 잿빛으로 보이는 하늘이 스며난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자연의 경이?

이건 자연이 아니다.

대통령은 비슷하게 불합리하던 존재를 곧바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검은 남자.

죽었다고 하는 건 역시 뻥이었나.

인간이라고 했던 것도 역시 뻥이었다.

진실은 며칠 전의 그 대화.

어쩌면 이 벌레들이 그 남자 덕분에 여기에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

그리고 그 사실에 그가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감상이었다.

그렇게 왠지 모를 감각을 느끼고 있을 때, 통신장교가 소식을 전했다.

전선에서 날아온 마지막 통신들이다.

“정체불명의 검은 광선들이 벌레들을 찍어버리고 있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괴물들이 도망치고 있습니다!”

“모든 전선에서 같은 소식입니다!”

모든 지구에서 이 선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검은 선들은 점차 지구 전역을 뒤덮으며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살아남은 녀석들은 통제가 없어서인지 본능에 따라 도주한다.

하이브 마인드가 이미 없으니 생각보다 쉬워진다.

북미뿐만 아니라 남미와 태평양의 깊숙한 곳에서 유기생명체들을 수확하는 개체들, 그리고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모든 곳의 정보가 오르골에게 전해지고 가공되어 나에게 온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지구에 대해 잘 알았던 순간이 있나 모르겠다.

과부화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북미가 아닌 곳은 조금 더 약식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마력 탐지의 거대한 파문이 번져 나가는 족족 새로운 타깃이 지정된다.

그리고 새로운 검은 원소의 선이 뻗어 나가 그것들을 갈아버렸다.

막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함이 많은 소모다.

그러나 우주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정령사단들은 게걸스럽게 우주의 공허를 먹어치우고 자신의 힘으로 삼았다.

남은 자리에는 점점 더 큰 빛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빛의 정령을 만들어볼까 생각했으나, 어둠의 부재로 만들어지는 원소량으로는 택도 없으니 포기한다.

지구 전체가 정리되는 데는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달에서 출발한 녀석들이 다가왔음이 보였다.

사실 지구 정리보다 이번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수준의 공간적 거리가 문제일 뿐이다.

좀 이상한 말이긴 한데, 어둠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진 못한다.

애초에 빠르기보다는 묵직하고 둔중한 느낌에 더 가깝다.

그리고 저 괴물들의 군대는 그러한 어둠 속에 있다.

내 인식을 확장시킨다.

나와 연결된 오르골의 인식이기도 하다.

점점 넓게 어둠을 인지해 간다.

이 세상이, 온 세상이, 이 광활한 공허가 모두 어둠이다.

저 먼 곳에서 날아오는 태양빛이 어둠이라는 개념을 조금씩 흩뜨린다.

나는 그 방향을 보고 손을 뻗었다.

세상의 유일한 마법사라 함은 정말로 신과도 같지 않은가.

“꺼져라.”

실제로 꺼지진 않을 것이다. 그것 하려면 불의 정령왕이 필요하겠지.

단지 가려질 뿐이다.

인위적인 일식이 일어나다가, 곧이어 완전히 태양을 가려 버렸다.

모든 것이 암흑에 잠기기 시작한다. 더 멀리서 오는 별빛은 이곳을 밝히기에는 부족하다.

어둠과 하나가 되니 그 속에 잠겨 있는 포식자 함대의 의지와 뜻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하이브 마인드처럼 강력하진 않다. 산발적이고 난잡한 사고의 패턴은 두려움과 공포, 그럼에도 마지막 명령을 발한 하이브 마인드의 뜻을 따르는 충성 따위로 이루어져 있다.

혹시 포식자들이 검은색을 두려워했던 이유가 이래서인가.

그렇게 가정하면 하이브 마인드는 살아 있다는 뜻인데.

조금 더 생각을 해봤는데 미궁의 시간은 상당히 고정되어 있다.

일어난 일을 바꾸는 것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진짜 [은하의 포식자]를 겪어버린 이 괴물들을 여기서 멸종시킬 수는 없다.

인과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전력을 다하더라도 놓치게 되기는 하겠지.

어떻게 이것들을 하나도 안 남기고 다 제거해.

그래도 꽤 박력 있는 상황이긴 하다.

다시 손을 뻗는다. 빛이 사라지자 당황하고 있는 오버시어들의 정신이 느껴진다.

어둠은 정신에 관여하는 속성이기도 하지.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래보아야 아직 대기권 근처도 아니다.

하지만 문제없다.

한계까지 확장된 인식 속에서 나는 달에서 출발한 길게 늘어진 벌레들의 함대를 눈에 담고.

손을 쥐었다.

어둠이 한순간에 응축된다.

지구는커녕 태양보다도 더 거대한 영역의 태양이 수백 수천은 들어갈 수준의 어둠들이 한순간 그곳에 자리했다.

그리고 SF구간에서 가장 큰 난관을 선사하는 어둠 원소의 오브젝트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출현한다다.

한순간이라고도 부르기 힘든 시간동안만 존재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뿐만 아니라 지구도 위험하니까.

“이런, 달이 끌려 들어왔네.”

압도적인 중력에 달의 궤도가 살짝 틀어졌다.

지구에 추락하진 않을 것 같다. 저걸 부술 수 있을지언정 바로 할 능력은 없으니 그냥 두고 가자.

중력의 검은 구멍이 잠깐이나마 출현했던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영원히 늘어지는 시간 사이의 어딘가에 갇혀 소멸했겠지.

블랙홀 반대편에는 뭐가 있으려나.

체험해 보고 싶진 않은데.

그리고 화성을 보았다.

솔직히 좀 각오하고 있었다.

자릿수가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위험부담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천사도 일단은 생물이다.

나도 무한히 우주공간에서 유영할 수 있진 않으니 귀환도 염두에 두고 여러모로 피로도 고려하는 중이었다.

“이건 좋은데 좀 허탈하네.”

그냥 흐흐 하고 웃었다.

도망치고 있다.

거대한 우주항행용 괴물들이 오버시어들의 통제조차 듣지 않고 도망친다.

거기에 오버시어들도 상당수는 자의적으로 도주하고 있다.

“이래서 놓치는 거구나.”

혹은 블랙홀의 너머에서 저것들이 [은하의 포식자]를 만든 신들의 눈에 띄는 곳으로 갈지도 모르겠다.

그 왕국은 그렇게 멸망했나 보다.

블랑쉐의 등불을 켜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입맛을 다시며 가려진 태양을 다시 되돌렸다.

지구에 빛이 다시 돌아온다.

포격으로 구름이 모두 날아간 상태라 광명이 비치듯이 물결치며 행성의 전부를 감싸 안았다.

이제 푸른 행성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다시 돌아오겠지.

그리고 응축된 노심들을 우주의 저편으로 쏘아 보내주었다.

“계단을 내려가 볼까.”

그 너머에 뭐가 있을지 모르겠군.

그리고 아직 자아가 불분명한 정령을 본다.

정령계조차 형성되지 않았기에 돌아갈 곳도 없는 녀석이다.

“여기에 두고 가봐야 이상해질 텐데.”

주인 없는 자연의 권화는 재앙이 될 소지가 농후하다.

하지만 데려갈 수도 없다.

이곳이니 감당할 수 있는 것이지 유지할 수가 없는지라.

“블랑쉐에게 가져가라고 해야겠군.”

블랑쉐가 이 세계로 귀환한다면…….

“가까운 시일 내겠지?”

남극으로 갔다. 얼음들이 녹아 흘러내리고 있다.

여긴 안 될 것 같다.

차라리 바닷속에 넣어둬야겠군.

마리아나해구를 찾아갔다.

그 안쪽 깊숙한 곳에서 블랑쉐를 기다리며 대기하도록 명했다.

이름부터가 오르골이다.

지구를 지키는 수호신 같은 느낌으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이러면 마리아나해구가 정령계가 되어버릴 텐데.

“그것도 나쁘지 않나?”

여기서 살 사람은 없을 거 아냐.

좋아, 완벽하군.

떠나는데 정령왕의 흐릿한 형체가 나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았다.

마법에 이름은 큰 힘을 가진다.

어쩌면 ‘오르골’이라는 이름을 붙인 내 인식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손을 흔들어주었다.

“딸내미한테 좀 잘해.”

블랑쉐는 질색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엔 진짜로 계단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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