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60화
심연 4402층 - 요르문간드(3)
아주 거대한 누군가가 본다면 그저 첨벙일 것이다.
운석은 미드가르드라는 접시에 충분히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행성의 수준에 달하는 질량을 일개 마법사가 파괴하려고 한다면 아주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당연히 그런 준비가 없이 급조된 마법이라면 귀퉁이의 이가 좀 나가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
실제로 일어난 일도,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게 사소한 일이었다.
거대한 뱀, 이 경우에는 접시를 두르고 있는 자그마한 뱀.
요르문간드가 잠들어 있는 빙하를 돌멩이들이 두들겼다.
이 모든 질량을 감당하기 위해 아스가르드라는 접시의 형태는 중심으로 갈수록 두터웠다.
그리고 가장자리까지 간다면 얇아서 베일 지경이다.
접시의 모든 가장자리를 노리고 돌멩이가 쏟아진다.
그리고 점선처럼 보이는 상흔을 남겼다.
뱀은 그 공격에 딱히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지구로 친다면 북극의 빙하에 해당하는 요르문간드의 얼음이다. 미드가르드 전체를 감싸고 바닷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고 있다.
그러나 그 기반은 그다지 튼튼하지 않았다.
얇디얇은 접시의 가장자리가 깨어져 나간다.
* * *
* * *
그 자체만으로 붕괴를 유발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충분히 금을 가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붕괴가 미드가르드의 중심부까지 타고 흐르지 않을 정도의 방파제가 된다.
요르문간드는 그 사실을 몰랐다.
이 거대한 뱀이자 재앙은 단지 라그나로크가 왔음을 깨닫고 예언을 실행하고자 했다.
눈을 뜸과 동시에 세상은 파멸할 것이다. 재앙으로서 운명 지어진 이상 그는 죽지 않는다. 이 운명을 막을 이는 세상에 없음이다.
그리고 뱀은 눈을 떴음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도 느꼈다.
아주 고통스러웠다.
눈이 갈가리 찢겨 있다.
뒤늦게 모든 고통이 각성한 의식 속으로 파고든다.
뱀은 고통으로 몸을 뒤틀었다.
접시를 두르고 있던 거대한 몸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얇디얇은 얼음과 근해의 지반이 충분히 약화된 상태였다.
일어난 일은 지극히 물리적이었다.
약해진 접시의 가장자리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뱀은 고통으로, 그리고 눈이 멀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세상의 가장자리가 저 깊은 지저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 위에서 몸부림치는 뱀 역시 세상의 어느 가장자리에도 제 몸을 걸치지 못했다.
기나긴 추락이 시작되었다.
그 추락을 깨달았을 때, 요르문간드의 남아 있는 감각기관에는 어떤 강렬한 마력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그게 마력인지도 모르면서 요르문간드는 어떤 자취를 마치 평범한 뱀이 적외선과 냄새를 감지하듯 찾아내었다.
틀림없이 이 녀석이다.
세계의 뱀은 그야말로 분노했다.
예언의 실행을 방해한 무언가를 없애 버려야 한다.
그래야 이 분노가 가라앉을 것이다.
뱀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잃은 고통을, 그리고 그 상실을 분노가 앞서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는 죽지 않는다. 상대가 어떤 신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그가 승리하리라.
세상은 멸망하리라.
라그나로크가 왔다!
요르문간드가 왔다!
로키의 자식이 아스가르드를 파멸로 이끄리라!
소리 없는 포효가 울려 퍼진다.
요르문간드는 전혀 과묵하지 않다.
단지 아무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뿐이다.
레벨이 미궁의 전투력을 모두 온전히 표현하진 못한다.
상성관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레벨에 비해 강해지는 케이스는 있다.
유배자 설정이나 거대괴수 보정이 그러하다.
유배자 출신의 설정이 달린 몬스터들은 그야말로 유배자와 동등한 전법을 구사하는 PVP 상대기에 힘들다.
거대괴수 보정은 실제의 격과는 무관하게 물리적으로 한없이 강인하고 강력해지는 경우다.
일례로 2층에서 만났던 태양 그리폰은 거대괴수 보정을 받아 레벨보다 더 강했다.
미궁의 어보미네이션 역시 마찬가지다. 육체적으로는 드래곤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다.
하지만 그것들이 동등한 스펙의 고레벨 몬스터보다 더 강하진 않다.
일단 가장 큰 이유는 멍청하고 단순한 패턴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스펙이 낮더라도 더 위협적이고 복잡한 패턴을 구사하는 적이 힘들다.
요르문간드는 스펙으로만 따진다면 악룡보다도 높거나 비슷하겠지만, 다른 기능이 없으며 심지어 좀 머리가 나쁘다.
유인하면 쉽게 유인되고 성격도 급하다.
툭 건드리면 화나서 거기다 꼬리치기를 한다.
사실 이게 너무 당연한 게 나 같아도 저렇게 신들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체격을 가졌으면 바보로 자랐을 거다.
어쩌겠냐고.
그냥 꼬리치기 한 방에 안 날아가는 산이 없는데.
최소한 로키가 훌륭한 아버지는 아닌 셈이다.
요르문간드의 약점이 거기서 나온다. 신의 혈통에 따라 그 거체를 제법 날렵하게 움직이는 비행 능력.
강력하긴 하지만 솔직히 나를 죽이긴 힘든 저주 섞인 독.
그냥 그 정도가 다다.
그러면 남는 것은 막대한 질량, 거대한 체격, 그걸 움직이는 굉장한 근육.
정면에서 힘 싸움? 그건 일단 체격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다.
이 거대한 뱀을 잡으려면 재주껏 피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두들겨 패야 한다.
무저갱으로 낙하하며 미리 만들어 두었던 노심을 내 주변에 고정했다.
이건 너무 편법이라 잘 쓰고 싶지 않으나, 홀로 세계급의 괴물과 싸우려면 별수 없다.
휘몰아치는 노심들은 총 10개로 급조되었음에도 안정적이다.
대충 잡아도 왕국의 열 배는 되는 마력이 굴러다니고 있으니 참 편하다.
날개를 펼친다.
기존처럼 그저 치천사의 날개로서만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노심으로 만들어진 외장을 더했다.
날개에 별들이 붙어있는 것 같다.
결국 행성 스케일의 적과 싸움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동력과 부피다.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가와 얼마나 큰 범위에 타격을 가하냐가 단순한 공격력보다 중요하다.
“원래 혼자 잡는 녀석은 아닌데. 이게 참 별수 없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의도된 4천 층대의 난이도라면 좀 더 시간을 들이도록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었을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그 어떤 시간선에서도 나는 최대한 시간을 아낄 것이 분명하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본다.
요르문간드는 메인던전에서도 동일한 스펙으로 나온다.
계속 리젠되는 보스기에 조금 약한 감이 있을 뿐, 그 스펙은 거짓 없는 메인 던전의 메인 보스급이다.
하지만 말이야.
게임 시절에는 당연하게 솔플하던 것들이다.
미카엘도 바알도, 원한다면 내 캐릭터 하나만 가지고 어떻게 어떻게 잡을 수 있었다.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게 불가능해진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미궁에서는 똑똑해진 탓일 뿐이다.
요르문간드는 꽤 멍청하다.
꼬리치기 한 방에 산이 날아가면 어떻게 싸워야 할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낙하하며 정신을 차리는 눈먼 뱀을 본다.
웃음 지어준다.
어찌 보면 현실이 된 미궁에서도 몇 없는 게임 시절의 난이도를 간직한 녀석이다.
그때의 감각을 떠올려라.
달라진 것은 가상현실 게임이 되었을 뿐인 것이다.
세팅도 장비도 충분하다. 게임 시절과 같지는 않으나 준하는 치트키가 하나 있다.
고맙다. 미카엘.
이 말도 안 되는 재질이기에 가능한 방법이 하나 있다고 생각한다.
부피를 만들어내야 한다.
에베레스트 산만한 이와 제주도만한 눈동자를 가진 저 뱀을 벨 수 있는 부피를.
그러므로 노심의 출력을 올린다.
왕국이나 서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마력이 노심에 빨려들어 간다.
블랑쉐의 세계에서는 마법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면, 에길의 세계는 그저 마력이 무한해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세계다.
미드가르드의 아래쪽조차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원소들이 머물고 있다.
그 와중에 미카엘의 검은 재질이 아주 기가 막혀서 마력전도율은 미스릴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아다만타이드에 그어도 흠집을 내는 주제에 그렇다.
그러면서 오리하르콘의 가벼움 역시 겸비하고 있다.
아직도 기능은 모르지만 깡스펙만으로도 엔드스펙 장비다.
검 주제에 어지간한 아티팩트급 스태프보다 더 마력 관련 스탯이 높다.
증폭도, 흡수도, 전도도, 방출도.
모든 면에서 최강의 스태프로서 기능할 수도 있을 정도다.
그 압도적인 재질의 검에 노심으로부터 공급된 마력이 흡수된다.
검이 흡수한 마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것은 사용자의 성향에 달린 문제다.
단순한 경도 강화에서부터 절삭력 강화까지.
절삭력에만 모든 것을 갈아 넣는다면 그게 바로 오러 블레이드다.
하지만 요르문간드는 큰 게 문제다.
그러니 다른 형태로 마력을 발현한다.
압도적 전도율이 마력의 칼날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미카엘의 무명검은 점점 그 크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오러 블레이드처럼 파르스름한 검기지만, 같지는 않다.
그냥 닿는 것을 벨뿐이며 물리적 충격량은 존재하지 않는 오러 블레이드와 다르게 이것은 검의 재질을 그대로 따른다. 단순히 무지막지한 마력을 꽂아 넣어 검을 연장했을 뿐이니까.
비할 데 없이 튼튼하며, 충분한 질량을 상대에게만 일방적으로 가하는 무기가 완성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걸 휘둘러 본 적은 없는데.”
거병이라고 부르기도 부족하다. 지금 상태라면 일격 일격이 계곡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노심들이 풍부한 이 세상의 마력을 마구 흡수하고 재생성하며 압축하여 뱉어내고 있다.
전투 중에 점차 부하되어 노심으로서의 기능을 못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날개 주변에 고정되어 빛나는 별과도 같다.
온몸에 비상식적인 수준의 마력이 흐르면 그 모든 것을 손실 없이 운용할 수는 없다.
천사의 마법저항력에 저항당하는 것들은 빛이 되어 흩뿌려진다.
내가 광원이기에 망정이지 눈이 멀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미드가르드의 아래가 보이는 가운데, 눈부신 광량이 저 아래까지 닿을 것처럼 보이고 있다.
하늘의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간다.
태양은 미드가르드 아래에서 다시 떠오를 것이다.
검을 신중하게 쥐었다.
신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조금만 각도를 틀더라도 수백 ㎞로 뻗은 검극은 수천 ㎞를 움직인다.
별 생각 없이 치켜든다면 미드가르드를 긁어버릴 것이다.
요르문간드도 나도 낙하중이지만 아직 미드가르드로부터 충분히 멀어지진 않았다.
세상이 커도 너무 크다.
뱀이 정신을 차리려는 기미가 보인다.
마침 준비가 모두 끝났다.
현재 할 수 있는 한계까지 검의 길이를 연장했다.
이제는 신중하게.
미드가르드를 긁어버리지 않도록 눕힌 검을 그대로 횡으로 벤다.
거대한 뱀의 거죽에 불길과도 같은 상흔이 남았다.
하지만 부족하다. 수백 ㎞ 정도로는 이 거대한 뱀을 효과적으로 베어낸다고 할 수 없다.
그래 봐야 가죽을 좀 긁는 정도다.
거기에 길어도 너무 길다. 검이라기보다는 이미 몽둥이.
사실 무슨 몽둥이야. 그저 마력으로 이루어진 산을 들고 휘두르는 것에 가깝다.
절삭력을 기대하긴 힘들다. 생채기를 겨우 만들 뿐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는데도 노심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폭사했다.
결국 미궁은 속전속결의 땅이다. 다시는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행성만 한 뱀을 다져둬야 한다.
죽일 필요도 없다.
회복 전에 전쟁을 끝내면 그뿐이니.
오딘은 자신이 큰 오산을 범했음을 깨달았다.
“지하에 태양이 떠올랐구나.”
그것이 검이라는 것을 한쪽 눈으로, 오딘의 지혜로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그랬기에 믿을 수 없었다.
“저 검을 덴마크에 놓으면 끝이 잉글랜드에 닿겠군.”
격렬한 검무가 보인다.
아득히 먼 공간에서도 보일 만큼 거대한 싸움이다.
길고 다시 또 긴 뱀은 하늘을 유영하며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쉴 틈 없이 베이고 또 베인다.
비록 껍질만 좀 까질 부상이겠으나,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갉아 먹힌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저주가 된 피가 흐른다. 출혈이 점차 늘어난다.
그 와중에도 어쩌면 빛보다도 더 빠를지 모르는 검의 끝부분은 어지러울 정도로 흩날렸다.
그리고 점차 그 끝부분이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오딘은 허허롭게 웃었다.
요르문간드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저걸 유지할 수가 없다.
사과를 깎는 것보다도 얕게 베고 있지 않나.
폭을 최대한 줄이고 줄여서 깊이 찔러넣을 생각만으로 만들어냈을 빛의 검날, 수백 ㎞에 달하는 길이의 날도 결코 요르문간드의 내장에는 닿지 못한다.
하지만 저 체격의 뱀이 이런 출혈을 겪어본 적이 있었을까?
발악하듯 독기와 저주를 사방으로 뿜어내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태양 앞에 뱀의 독기는 무력하다.
눈부신 마력으로 타오르는 날개 달린 인간은 모든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례로 세계의 뱀을 벗겨 나간다.
끝까지 볼 수는 없다.
전투의 어느 시점에 보물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제 원래 주인이 있다는 듯이 어디론가 향했다.
오딘은 그 끝에 로키가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토르는 묠니르가 없어도 천둥의 신이다.
오딘은 궁니르가 없어도 만물의 아버지다.
수르트를 홀로 대적하고 있는 토르를 도우러 갈 차례다.
오딘은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저 아래에서 뱀과 싸우는 남자를 흉내 내긴 힘들겠으나, 그에게도 그 나름의 전법은 있는 법이니.
“주먹질은 오랜만이야.”
불길의 거인 수르트가 보인다. 자세를 낮추었다가, 힘차게 뛰어올랐다.
한달음에 불길의 거인의 머리통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레바테인이 외눈의 노신에게 쏘아지듯 찔린다. 오딘은 한쪽뿐인 눈을 희번덕이며 그것을 왼손으로 붙잡았다.
불길이 팔을 타고 흐른다. 힘을 일으켜 떨친다. 레바테인을 그대로 밀어버렸다. 수르트의 거체가 조금이나마 물러난다.
“날 죽이는 건 펜리르야. 그렇지 수르트?”
오딘이 탄생한 이래, 최초로 운명이 그의 편을 드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