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토리얼의 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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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치안이 보장된 땅. 신분제 없는 자유민주주의 사회. 손바닥만 한 컴퓨터를 만드는 과학기술의 나라.
나는 어려서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그게 죄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게임 속 세상에, 이런 신분제와 빈곤, 살인으로 점철된 괴물 득시글한 땅에 떨어질 정도의 죄는 아닐 게 분명하다.
내 이름은 댈런이다.
사실 내 캐릭터의 이름이지만 이제는 내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원래 이름은 댈런이 아니다.
내 진짜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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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짐마차의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는 용병이 짐마차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교대 시간이오.”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펜과 잉크를 정리했다.
덜컹거리는 짐마차 안에는 자연스럽게 일어선 그는 익숙하게 장비를 점검했다.
느슨하게 풀었던 갑옷의 끈을 조이고 부츠의 끈도 다시 묶었다.
벗어두었던 장갑을 낀 뒤 등 뒤의 방패, 왼허리의 장검, 허리띠에 꽂아둔 도끼까지 잘 달려있는지 확인했다.
펜과 잉크병을 정리해 배낭에 넣은 그는, 쓰다 만 종이를 두 번 접어 봉투에 넣고 얇은 줄로 묶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한 뒤 봉투를 필기구와 함께 배낭 안쪽 깊숙한 곳에 챙겼다.
“푸후, 여긴 좀 따뜻하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군.”
그즈음 아까 전의 용병 사내가 짐마차 안으로 올라섰다.
그는 댈런과는 반대로 갑옷 끈을 넉넉하게 풀어놓고는, 널부러진 짐더미 사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댈런은 갈무리한 가방을 짐마차 안쪽 구석에 놓아두고 말했다.
“별 일 없었소?”
“그냥 조용하더군. 고블린 한 마리 안 보이던데? 미궁도시의 순찰권 안에 들어와서 그런지, 아래쪽 지방에서는 드문드문 보이던 도적 놈들도 코빼기도 안 비추더라고.”
사내는 자신의 짐에서 가죽 물주머니를 끌러 물을 들이켰다.
“다만 밖이 점점 추워지오. 슬슬 겨울이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따뜻한 남쪽 지방에 있다보니 영 적응이 안 되는군.”
그때 짐마차가 한 번 더 덜컹거렸다. 짐 몇 개가 이리저리 흔들렸고, 댈런은 그 사이에서 익숙하게 균형을 잡았다.
용병 사내는 물을 들이키다가 풉 하고 뿜었다.
그리고 상단 마부의 외침이 들렸다.
“저기! 팔시온이 보인다!”
댈런은 작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짐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말했다.
“올라가 보겠소. 쉬시오.”
“쿨럭! 컥! 그, 그래. 수고하쇼!”
***
마차 지붕 위에 올라가자 용병 둘이 전방과 왼쪽을 향해 앉은 채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좋은 아침.”
댈런은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빈 우측 자리에 걸터앉았다. 방금 교대한 수염 덥수룩한 용병 사내가 맡던 자리였다.
다그닥. 다그닥. 덜커덩.
낮은 언덕을 덜컹거리며 넘어가는 짐마차가 셋. 노새가 끄는 지붕 없는 수레가 여덟.
일꾼들은 각자의 짐을 등에 진 채 터덜터덜 걸었고, 동패 용병들은 외곽을 빙 둘러서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댈런이 이번에 호위 임무를 맡은 갈리오스 상단은 꽤 규모 있는 상단이었다.
싣고 가는 물건의 부피도 부피거니와, 상행 한 번에 동패 용병 스물과 은패 용병을 넷이나 고용한 걸 보면 견적이 나왔다.
그리고 여느 상단이 그렇듯, 이 상단 역시 비교적 안전한 대로를 따라 도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번 상행의 목표인, 저 멀리 손톱만하게 보이는 도시를 향해.
‘미궁도시 팔시온.’
댈런은 저 멀리 솟은 성벽을 보며 생각했다.
팔시온은 이 판타지 중세 대륙의 정 중앙에 위치한, 이 땅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들 중 하나였다. 그 위명도 휘황찬란했다.
대륙의 심장.
일곱 개의 성벽이 둘러싼 도시.
영웅과 초인들이 가득한, 살아있는 전설의 전당.
‘···그리고 미궁으로부터 올라오는 마물을 막아내는, 인류의 보루.’
차곡차곡 쌓여 있는 도시의 일곱 성벽은, 저 멀리서부터 압도적인 위엄을 뿜어낸다.
게임 일러스트로 볼 때보다 더 생동감 있고 아름다운 장면. 인류의 보루라는 이름이 가히 아깝지 않았다.
댈런은 그걸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드디어 도착했군.’
이 년.
이 빌어먹을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진 지 이 년만에, 드디어 튜토리얼의 종점이라 할 수 있는 도시가 눈앞에 있었다.
‘이 년동안 튜토리얼이라니.’
이 지난한 여정의 시작은, 게임 오프닝 씬에 나오는 외딴 산골 오두막이었다.
댈런은 이 년 전, 그 오두막에 가진 것 하나 없이 맨몸뚱이로 떨어졌다. 자신의 육체가 아닌 댈런이라는 캐릭터의 몸을 입고서.
캐릭터 만들 때 추가 능력치를 최대한으로 넣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 산골 오두막이 여정의 시작이자 끝이 될 뻔했다.
오두막이 있던 외딴 산에는 살쾡이와 늑대, 심지어는 곰까지 출몰했으니까.
어쨌든 수십 번이나 해본 게임이어서 초반부는 익숙했다.
특출난 육체능력에 기대 어찌저찌 마을로 내려왔고, 좀 더 큰 마을을 거쳐 도시로 향했다.
튜토리얼에서 항상 하던 것처럼 미등록 용병으로 잡일 몇 번 하다보니 용병 길드에서 동패를 발급해줬다.
다만 게임과 현실은 달랐다.
원래 튜토리얼은 용병 길드에서 동패를 받으면 끝이었다.
청동패를 받기 위해 잡일 몇 번 하고, 전투 두 번쯤 하면서 게임 시스템에 적응하는 게 목적이니까.
거기까지 했으면 바로 미궁도시에 도착해서 본편 시작이었는데, 여기서는 이후의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해내야 했다.
‘일 년은 밑바닥에서 굴렀지.’
동패를 받은 뒤 용병일을 일 년쯤 했다. 비인간적으로 강인한 육체능력 덕에 실적이 꽤 괜찮았고, 은패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 후 모아둔 돈을 털어 제대로 된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여정을 떠난 게 반 년 전 일이었다.
게임의 본편이 시작되는, 미궁도시 팔시온으로의 여정을.
“이야, 멀리서 봐도 장관이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용병이 입을 열었다.
“저번에 왔을 때 며칠밤 같이 보낸 여자도 침대 위에서 장관이었는데 말이야. 가게 이름이 뭐였더라?”
“난 창관은 모르겠고, 저번에 잃은 돈이나 다시 따련다. 이번을 위해 내가 의뢰 때마다 은화를 하나씩 모아뒀지. 그 때 잃은 돈을 두 배로 되받아주겠어.”
음, 도박장이라. 그거 창관 여자보다 더 위험한 건데.
반 년 전에 떠난 댈런의 여정은, 생각보다 순탄치 않았다.
위험한 건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것도 칼이 아닌, 카드패와 나무 칩으로 승부를 보는 사람.
‘썩을. 분명 게임에서는 도박장이 쉽게 돈 불리는 장소였는데.’
어느 중견 마을에서 도박장 딜러의 손목을 자르고 감옥에 갈 뻔한 댈런은, 남은 가산을 싸그리 털어 마을 장로들을 구워삶은 후에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도박에 뇌물로 빈털터리가 된 그를 고용한 것이, 마침 그 마을을 지나가던 이 갈리오스 상단이었다.
‘어쨌든 무사히 도착하긴 했군.’
산들바람 부는 마차 지붕 위. 댈런은 용병들의 잡담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겼다.
미궁도시 팔시온은 수백만이 사는 거대한 도시였다.
그리고 동시에, 땅 위에서 지하의 미궁으로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미궁에서 올라오는 마물들의 침공을 받지 않으면서, 동시에 미궁의 수많은 보물들을 꺼내올 수 있는 하나뿐인 통로.
‘그리고 게임 설정에 따르면, 가장 밑바닥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있다고 하지.’
고대에 봉인되었다는, 소원을 이뤄주는 돌.
그걸 얻으면 게임의 엔딩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얻어본 적 없지만.’
빌어먹게 어려운 난이도 탓이었다. 소원의 돌을 얻기 전에 죽거나 세계가 멸망해 버렸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든 얻어야 될 처지가 됐다. 소원의 돌이 진짜라면, 그를 지구로 돌려보내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만약 가짜라면?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얻기도 전에 신 포도겠거니 하는 건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원의 돌을 얻건 말건, 강해지기 위해서는 미궁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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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4
[근력 : 22] [기량 : 11] [체력 : 11]
[감각 : 13] [지능 : 18] [마력 : 8]
스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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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런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상태창의 힘에 추가 능력치까지 얻은 육신이 비정상적으로 강했기 때문.
원래도 강했던 이 육체는 2년 동안 레벨업을 세 번이나 하며 더 강인해졌다. 이제 길에서 마주치는 고블린이나 오크 따위는 두렵지도 않을 정도로 말이다.
미궁에는 고블린이나 오크보다 강한 적이 많았다. 더 강한 적을 처치하면 더 많은 경험치를 얻는다.
그리고 그 경험치로 레벨업을 하면 이미 초인적인 육신은 더 강력한 힘을 얻을 테였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는 그렇게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지.’
그저 빈말이 아니었다.
이 세상은 지금도 충분히 험악하지만, 앞으로 더더욱 험악해질 것이니까.
이 세계는 지금도 멸망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고, 그건 게임을 해봤던 댈런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이 형씨! 형씨도 이번에 한 탕 하쇼! 마을 도박장에서 죄다 잃었다며. 복구해야지!”
“···난 됐소.”
어쨌든 당장은 내일 먹을 스튜부터 걱정해야 하는 빈털터리 신세.
소원의 돌이니 세계의 멸망이니 하기에 앞서, 우선 돈부터 벌어야 했다.
“원래 처음에는 다 털리면서 시작하는 거요! 그러다 또 따고 하는 거지!”
“진짜 됐다니까.”
물론 도박장에는 다시는 발끝도 들이밀지 않을 거고.
***
팔시온에 도착한 건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청동 성문의 간단한 검문을 통과한 상단은, 상인 길드 옆 여관에서 용병들과 정산을 했다.
“이건 댈런 자네 몫. 15실링이네. 주머니는 보너스야.”
은화 열다섯 개가 잘그락대는 주머니를 받아들고서, 댈런은 의문이 서린 표정으로 상단주에게 물었다.
“내 의뢰비는 10실링 아니오? 중간부터 합류했으니 적게 받기로 했던 것 같은데.”
“그것도 보너스라고 생각하게.”
“보너스로 반 배나 더 준다고?”
상단주는 멋드러지게 기른 콧수염을 씰룩이며 말했다.
“그럼 투자금이라고 해 두지. 고블린을 맨손으로 두동강내는 전사와 친분을 다지고자 하는 의미로 내는 투자금. 자네 같은 사람이 언제 또 상단 호위 일 같은 걸 하겠나?”
글쎄. 돈 급하면 당장 내일에라도 할 수 있는 거지.
물론 저 말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은화 다섯 개면 침묵을 지키기에 충분한 무게니까.
상단주는 격양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자네는 정말 대단한 전사가 될 거야! 미궁도시에 날고 기는 초인들이 많다지만, 자네도 몇 년 안에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신성이 될 거라고!”
크흠.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자각했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헛기침을 한 번 한 상단주는 손을 내밀었다.
“그때 되어서 나, 볼크마 갈리오스를 무시하지만 말아 주게나. 우린 한 때 괴물이 득시글한 숲을 함께 돌파한 전우잖나.”
득시글한 괴물이 고작 고블린에 오크 몇 마리라. 그가 경험한 상단주는 그 정도로 경험 없는 바보는 아니었다.
결국 그냥 입 발린 소리라는 게 눈에 뻔히 보였지만.
“좋소.”
어쨌건 돈은 죄가 없는 법. 댈런은 상단주의 손을 맞잡았다.
“그렇지!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틀리지 않는다니까! 다음에 또 보세, 북부의 용사 댈런!”
댈런과 힘차게 악수한 상단주는, 필요하면 상인 길드에서 자신을 찾으라는 말을 남기고는 여관을 나섰다.
쿵.
시끄러운 여관 소음 사이로 문이 닫혔다. 이제 테이블에는 댈런 혼자였다.
다른 은패 용병들은 이미 정산을 받고 자신의 용병대 지부로 떠난 뒤였다. 은패쯤 되면 각자 소속된 용병대가 있는 게 일반적이니까.
댈런처럼 혼자 활동하는 게 오히려 드문 경우였다.
“맥주 한 잔 더 주시오.”
테이블에 혼자 남은 댈런은 종업원을 붙잡아 술을 한 잔 더 시켰다. 그리고 무덤덤한 눈으로 여관 안을 둘러봤다.
큼지막한 여관 1층 주점은 수십 개의 테이블에 손님들로 붐볐고, 그만큼 시끌시끌했다.
댈런은 혼자만 조용한 테이블에서 맥주 한 잔을 더 시켜 마시고 나서야, 느지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완전히 밤이었다. 하지만 대로변은 곳곳에 걸린 횃불들 덕에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댈런은 한숨 한 번 쉬고, 그 사람들 사이를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자박. 자박.
길은 점차 좁고 복잡해졌다.
길바닥에 깔려있던 판석은 어느새 뜸해지더니 아예 흙바닥이 되었고, 횃불의 개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길에 다니는 사람들도 갈수록 적어졌다. 그나마도 정상적인 사람은 많이 없어 보였다.
“······.”
댈런은 계속 걸었다.
먼발치에서 탐색하듯 이쪽을 훑는 건달을 무시하고, 알아들을 수 없게 웅얼거리면서 주저앉아 벽을 긁는 여인을 지나쳤다.
음험하게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이도 몇 명 있었다.
가까이 올수록 뚜렷하게 보이는 댈런의 덩치와 갑옷, 허리춤의 검과 등 뒤의 방패를 보고 꼬리를 말고 도망가긴 했지만.
그렇게 10분쯤 더 걸은 끝에, 댈런은 허름한 여관을 찾을 수 있었다.
끼익- 끼익-
바람에 떨어질 듯 삐걱거리는 간판. 삭아서 듬성듬성 구멍까지 뚫린 문짝.
의뢰비를 받았던 곳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작은 여관이었다.
그러나 댈런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으하하하! 그래서 내가 그놈을 말뚝에 묶어다가 그대로-”
“씨, 씨부럴! 좆 같은 세상 다 죽어버려!”
“어머, 처음 보는 얼굴이네? 자기, 나랑 같이 하룻밤 어때?”
후덥지근한 공기가 훅 하고 얼굴에 부딪혀온다. 댈런의 예민한 오감에 수많은 자극들이 쏟아졌다.
독주 냄새.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 더러운 뒷골목 특유의 악취와, 그걸 가리는 싸구려 분 냄새. 약인지 술인지 모를 것에 절어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
‘드디어 찾았군.’
댈런은 그것들 사이에서, 그가 찾던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등에 단검이 박히고, 온몸이 난자당한 채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몸뚱이를.
[초라한 용병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TIP : 시체를 회수하면 능력치의 일부와 스킬, 아이템을 계승할 수 있습니다.]
저건 그가 게이머였을 시절, 그의 분신이었던 캐릭터의 시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