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거리의 사냥꾼(4)
시에나는 천천히 주머니를 열었다. 그녀는 천 조각으로 감싼 뭉치 하나를 꺼내들었다.
천 조각을 펴자 녹이 슨 반지 하나와 동전 몇 개가 나왔다.
그녀가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이걸 나한테 준다는 걸 어떻게 해석하면 될까?”
“나는 이 도시에 어제 처음 온 사람이오. 인맥도 뭣도 없지. 내가 저 물건으로 할 수 있는 의미있는 일은, 기껏해야 장물상에게 팔아 푼돈을 만지는 것뿐이오.”
댈런은 무심한 얼굴로 턱을 긁적였다.
“하지만 그쪽은 이걸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줄 수 있겠지. 희생자의 가족들. 없다면 그들의 친구들.”
댈런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은화들을 도로 밀어냈다.
“이건 그 수고비로 내도록 하지.”
시에나의 손이 움찔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주머니를 갈무리해 바 테이블 아래 넣었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의뢰비를 이런저런 핑계로 떼먹는 정보상이 아니야. 내 몫의 수수료는 이미 챙겼어. 저건 그쪽 돈이야. 가지고 돌아가.”
“그러시다면.”
댈런은 마다하지 않고 은화를 챙겼다. 굳이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바보짓이다.
한층 더 두둑해진 돈주머니를 품에 넣은 댈런은 술집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 그가 말했다.
“내일 또 오지.”
“몇 번이나 말하는 거지만, 제발 영업시간에 맞춰서 와.”
“차 대신 술을 준다면, 생각해보겠소.”
시에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
덜컹.
문이 닫혔다. 술집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돌아온 버번이 핏자국 묻은 테이블을 닦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시에나가 입을 열었다.
“진심이었을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에나는 별 상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보상을 거절한 거. 절대 용병답지 않은 행동인데.”
물론 정의감에 도취된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에나가 느낀 댈런은 얄팍한 정의심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런 정신머리로는 은패를 달지 못한다. 이 세상은 가혹하고, 용병 같은 떠돌이들에게는 특히 더 그러했으니까.
‘···가혹한 세상이지.’
힘이 없으면 잡아먹힌다.
심지가 굳세지 못해도 추락한다.
그렇게 추락한 이 세계의 밑바닥은 끔찍이도 추악했다.
약자를 잡아먹기 위해 눈에 불을 켠 사람들. 높은 이들의 외면을 방패막이 삼아,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게 유린하는 조직들.
시에나는 그 밑바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한때나마 그녀 역시 희망을 품은 적이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를 돕는 이는 없었다.
그 누구도.
달그락.
유리잔을 닦는 소리에 시에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 무슨 상관이겠어. 진심이건 아니건.”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흐릿했던 그녀의 눈에 다시금 냉철함이 깃들었다.
그건 청동 구역의 가장 밑바닥에서 기어올라와, 10년 동안 제 입지를 단단하게 다져온 정보상의 눈빛이었다.
“능력이 좋은 용병이야. 함께 일해서 나쁠 것 없지. 정말로 믿을 수 있는지는, 앞으로 더 지켜보면 알 수 있는 거고.”
작게 요동하는 감정을 이성으로 가라앉힌다. 댈런이 그녀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긴 했지만, 그건 우연이 분명했다.
그녀의 과거를 꿰뚫고 있지 않고서야, 절대 의도할 수 없는 방식이었으니까.
“슬슬 손님들 올 시간이네. 버번, 이번에 새로 들여온 상표가 이거지?”
“······.”
“음, 향 좋네. 있다가 단골들한테 한 잔씩 돌려보자.”
시에나는 버번을 도와 잔을 닦기 시작했다.
영업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짹짹짹-
창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 사이로 동틀녘의 햇살이 희미하게 비쳐오고 있었다.
이른 새벽이었다.
슥슥슥.
댈런은 탁자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쓰는 중이었다. 바닥에는 이미 그런 종이가 수북하게 몇 더미씩 쌓여 있었다.
칼과 방패 여관. 412호.
댈런이 여기 머문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일주일간 그는 기억하고 있는 게임의 정보들을 모조리 종이에 받아적었다.
갑자기 그러기 시작한 건, 첫 의뢰에서 겪은 일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재앙이 됐어야 할 존재를 일찌감치 처리하고, 그 존재에게 죽었던 시체마저 회수했다.’
이번 일로 댈런은 확실히 느꼈다.
고작 현질 하나에 게임의 양상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까지 그가 플레이해왔던 전략은 천천히 레벨업을 하며 차근차근 종말을 대비하는 방식.
어떻게 보면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수동적인 전략이었다.
하지만 추가 능력치와 계승자 옵션을 구매한 지금, 댈런은 누구보다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게 가능해졌다.
이전의 전략은 비효율적인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우선 시체를 최대한 많이 회수해야 해.’
지금까지 댈런이 회수한 시체는 고작 둘.
하지만 그 둘만으로도, 댈런은 레벨업을 몇 번이나 한 효과를 얻었다.
지난 2년간 용병 생활을 하며 올린 레벨이 기껏해야 세 개뿐이라는 걸 생각했을 때, 근 일주일간 댈런의 성장속도는 폭발적이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모든 시체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아는 건 불가능하긴 해.’
댈런이 이 게임을 붙잡고 있던 세월은 무려 5년.
그동안 죽어나간 캐릭터의 숫자는 자그마치 수백에 달한다.
원래부터 자유도가 어마어마한 오픈월드 게임이다보니, 수백 구의 시체는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대략적인 추정 위치는 추려낼 수 있었다.’
지구에서의 그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의 육신을 입게 되며, 댈런의 지능 수치가 초인적인 경지에 다다른 바.
18이라는 지능 수치는, 이미 몇 년 전에 무의식 속에 파묻어뒀던 기억까지도 생생하게 끄집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 생각해야 될 게···멸망 시나리오들.’
댈런은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 묶음들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거기에는 이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수백 가지의 요인들이 적혀 있었다.
노예들의 반란, 마을을 불태우는 마녀 집단, 도시에 암약한 사교도들, 4백년 만에 제국을 침공하는 뱀파이어 백작······.
“시발.”
적어놓고 보니 절로 욕이 나올 정도로 개판인 세계다. 이딴 세계를 구상한 제작사가 미쳤나 싶을 정도로.
심지어 저 모든 것들을 운 좋게 극복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아예 균열이 열리고 땅끝에서 악신의 군세가 직접 쳐들어온다.
‘···악신에 대해서는 지금 생각하지 말자.’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게임에서도 극복하지 못한 재앙이다.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댈런은 종이 묶음을 촤르륵 넘겼다. 머나먼 멸망을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넘어가던 페이지가 어느 순간 딱 멈췄다.
‘이놈들이 딱 좋겠군.’
댈런은 미소를 지었다.
미궁도시 팔시온에 암약한 사교도 집단. 큰 입 가면을 쓰고 다니는 악마 숭배자들.
아직까지 수면 아래에서 힘을 키우고 있는 모양이지만, 놈들의 저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당장 댈런이 첫 의뢰에서 죽인 괴인부터가 그들의 작품이었으니까.
그리고 댈런은 놈들이 더이상 힘을 키우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팔다리를 하나씩 자르다보면 몸통이 드러나게 되는 법이지.’
쿵.
큼직한 종이 더미를 바닥에 내려놓은 그는, 수련용 천옷을 걸치고 길게 자란 머리를 끈으로 묶었다.
커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아까보다 한결 더 따뜻했다.
몸을 움직일 시간이었다.
***
높은 능력치로 들끓는 육신은 매일같이 격한 움직임을 요구했다.
1층에서 빵과 소시지, 맥주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운 댈런은, 곧장 여관 뒤쪽에 마련된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는 허수아비가 곳곳에 세워진 연무장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후웅―. 파앙!
팔다리가 훑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거센 바람 소리가 뒤따른다.
콰직! 쿵!
단단한 나무 위에 무두질한 가죽을 덧대 만든 허수아비가 부서질 듯 휘청거린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파괴력이 담긴 동작들에, 며칠 전에 새로 산 수련용 천옷은 이미 끝자락이 너덜너덜했다.
“후우.”
한바탕 몸을 푼 댈런은,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힌 뒤 상태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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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5
[근력 : 23] [기량 : 13] [체력 : 12]
[감각 : 15] [지능 : 18] [마력 : 8]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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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런이 지난 일주일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있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오전에는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오후에는 시에나에게 의뢰를 받아 현상범을 잡았다.
훈련과 실전을 거치며, 데하만의 갑주격투는 숙련도 50퍼센트에 거의 근접했다.
의뢰를 수행하며 몇 달만에 레벨도 하나 올랐다. 댈런은 비교적 부족했던 기량 능력치를 1 올렸다.
그렇게 상승한 기량은 갑주격투를 능숙하게 소화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원래 무술이라는 게, 머리로 아무리 이해했다 해도 몸이 따라줘야 제 효과를 내는 법이니까.
‘확실히 요즘은 숙련도가 더디게 오르는군.’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갑주격투의 숙련도 성장은 더뎌졌다. 며칠 전부터는 아예 49퍼센트에서 멈춰 있는 상태였다.
‘다른 자극이 필요한 모양이지.’
이른 아침에 시작한 훈련이 마무리된 건 정오가 넘은 뒤. 점심을 먹은 댈런은 씻고 갑옷을 걸친 뒤 여관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대장간 거리였다.
깡- 깡-
아침부터 밤까지 끊이지 않는 망치질 소리가 가득한 대로변. 댈런은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천천히 물건을 구경했다.
지금의 낡은 무기와 갑옷은 그리 오래지 않아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 가서 급하게 아무거나 사는 것보다, 이렇게 미리 물건을 눈에 익혀 두는 게 마음이 편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안면을 튼 대장장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댈런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뒷골목에 들어선 건 슬슬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시에나의 까마귀 둥지에는 손님이 없었다. 영업 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아있었기 때문.
댈런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손님은 없어도, 술을 따라줄 바텐더는 있었으니까.
“멜론드 하이랜더 한 잔.”
달그락. 달그락.
버번이라고 불리는 바텐더는, 댈런의 주문에 말없이 술을 따랐다. 그러면서 테이블 곁의 종을 한 번 울렸다.
딸랑- 하고 청명한 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퍼졌다.
청동 거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얼음까지 동동 띄워올린 유리잔. 댈런은 그 안의 갈색 내용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뒷문을 통해 가게로 들어온 시에나는, 그걸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독한 걸 그렇게 마시고도 멀쩡하다니. 사람이야?”
“병나발을 분 것도 아니잖소.”
댈런은 소매로 입을 슥 닦고 대답했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에도 술은 잘 마시고, 또 좋아했다.
거기다 이 몸뚱이의 체력 수치는 평범보다는 비범에 가까웠기에, 한 잔 정도는 전혀 무리가 없었고.
“영업 시간 전에 오지 말라는 말은 대체 언제까지 무시할 거야?”
“바텐더가 있고 손님이 있으면 영업 시간인 거지.”
“하여간 입만 살아서는.”
“야만인에게는 칭찬인 듯하군. 고맙소.”
시에나는 포기했다는 듯 휘휘 손을 내저었다. 댈런은 그걸 보며 낮게 웃었다. 그가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누굴 잡아 족치면 되오?”
시에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들어와. 할 이야기가 좀 있으니까.”
“이야기?”
시에나가 짖궂은 미소를 지었다.
“낮은 거리의 사냥꾼님에게, 지명 의뢰가 하나 들어왔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