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6화 (26/288)

침묵의 밤(3)

수백 회차의 플레이동안, 댈런이 꼭 게임 클리어에 목숨을 걸었던 건 아니다.

가끔씩 그도 소위 말하는 ‘즐겜’을 하기도 했으며.

그중 몇 번은, 그동안 쌓였던 분노를 터뜨리기 위해 아예 멸망의 주동자들 측에 가담하기도 했었다.

‘역행의 사도들이 첫 번째였지.’

플레이 초반, 아직까지 게임에 적응하지 못했던 시절.

대계를 일으켰다 하면 청동 구역의 반 이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교도들에 질려, 아예 자신이 사교도가 되기로 마음먹은 적이 었었다.

사람을 괴인으로 만들고, 악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놈들의 행위는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뭐 어떠랴.

그저 게임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가볍게 즐기는 정도였으니까. 이 세계가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리고 당시의 댈런이 예상하지 못했던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대사도는 말 그대로 미친 놈이었다는 것.

악신의 광기에 오염된 놈은, 대계의 끝에 은가면 사도들마저 제물로 바쳐 청동 구역을 완전히 전소시켰다.

팔다리가 잘린 채 제단에서 제물로 바쳐진 댈런의 은가면 사도 캐릭터.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댈런은 펄떡이는 심장을 들고 광기에 물든 미소를 짓던 대사도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쩌적―

대사도가 촉수를 움직여 얼굴에 박혀있던 도끼를 뽑아냈다.

놈은 도끼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흥미를 잃었다는 듯 시체더미 곁에 툭 던져놓았다.

“주문이 새겨진 물건은 아니군. 순수하게 힘으로 던졌을 리는 없으니, 어떤 비기를 사용한 건가.”

두 갈래로 쪼개져있던 놈의 얼굴은, 거미줄 같은 진득한 액체가 좌좌좍 이어지더니 순식간에 붙어버렸다.

그 어디에도 뭉클거리는 진액은 없었다. 사교도들의 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악마의 힘이라는 이야기.

댈런은 천천히 놈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하급 악마 아라크네인가. 제물의 부담을 줄이고자 소환자와 한몸을 이루는 편법을 썼군.”

“호오, 악마학에도 조예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대사도는 음험한 마력이 번쩍이는 눈으로 댈런을 응시했다.

악마의 피에 오염되어 보랏빛이 된 혀가, 마찬가지로 보랏빛으로 물든 입술을 핥았다.

“하긴, 뭘 알아도 이상할 게 없지. 그대만큼이나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영웅도 많이 없으니. 어디서 솟았는지 모를 은패 용병이, 거인의 힘과 짐승적인 감각, 제국의 격투술에 그 모든 걸 담아내는 지혜의 그릇까지 가지고 있다니.”

뭐라 씨부리는 거여.

댈런은 말없이 계속 걸었다.

공동은 넓었고, 도끼를 던진 이상 남은 원거리 공격 수단은 불꽃 화살뿐이었다.

하지만 악마를 몸에 받아들인 대사도씩이나 되는 놈이, 고작 주문 하나에 당하지는 않을 터.

대사도 역시 기본적으로 원거리 공격에 능한 마법사이기에, 댈런은 어떻게든 이 싸움을 육탄전으로 끌고 가야만 했다.

저렇게 혼자 떠들어준다면야, 그 입장에서는 고마울 따름.

“거기에 엉덩이 무겁기로 유명한 엘가이아 마탑의 지원을 이끌어내고, 낮은 거리와 하수도 전역에 눈과 귀를 심어둔 까마귀 마녀의 도움을 받는 데다, 넝마쟁이들이 맹목적인 추종을 바치기까지.”

대사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댈런은 계속 다가갔다.

그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찰박. 찰박.

제물로 바쳐진 시체의 언덕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의 발 아래 찰박거리며 튀어오른다.

피와 살점으로 만찬을 벌이던 쥐들이, 그의 발걸음에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대사도 역시 눈치가 없는 건 아닌지라, 놈의 등에서 자라난 촉수들이 허공에 천천히 수인을 맺어갔다.

놈이 비릿하게 웃었다.

“허나 그 영웅의 여정도 여기까지겠군. 역행의 질서가 발아하는 이―”

콰아앙!

흙더미가 폭발했다.

그 폭발 속에서, 댈런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 석궁에서 쏘아낸 화살의 속도로 날아가는 댈런의 몸.

대사도는 촉수와 손을 앞으로 뻗어내며 주문을 외었다.

“에낙사―오브!”

터엉―!

보이지 않는 힘이 댈런을 측면에서 후려친다. 방패로 막았음에도 밀려난다.

대사도가 시전하는 악마의 주문은, 과연 범상치 않은 위력이었다.

콰지직!

제단 근처에 쌓인 시체더미 중 하나에 처박힌다. 댈런은 주저하지 않았다.

갈기갈기 찢긴 육편들 사이에서, 그의 발이 다시 한 번 바닥을 디딘다.

그리고.

퍼버버벙―!

시체더미가 폭발하며, 댈런의 몸이 다시 쏘아졌다.

“놀랍구나! 도약 그 자체가 비기였던 건가!”

대사도가 수인을 맺으며 외쳤다. 댈런은 충격파가 쏘아지기 전, 땅에 발을 딛고 내달렸다.

후웅!

밀려나는 공기는 곧 충격파의 전조. 피부를 두드리는 그 흐름을 읽어내며, 방패를 비스듬하게 들어올린다.

텅―

굳이 정면에서 받아낼 필요 없었다.

방패로 주문을 받아낸 직후, 슬쩍 방향을 틀며 충격량을 흘려낸다. 다리로 땅을 굳세게 디딘다.

우웅―

악마의 주문으로 빚어진 충격파가 피부를 훑으며 지나가고.

콰광!

댈런의 뒤에 있던 시체 더미가 꽝―하고 터져나갔다.

“···호오.”

댈런은 다시 달렸다.

바닥을 미끄러지며 불덩이를 피한다. 쏟아지는 용암을 훌쩍 뛰어넘고, 촉수가 토해내는 산성 용액을 방패를 휘둘러 받아낸다.

주문의 전조를 예민한 감각으로 잡아내고, 주문마다 묻어나는 살기를 육감으로 읽어낸다.

초인적인 지능과 반사신경이,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계산해 회피와 동시에 전진하게 만들었다.

대사도는 열 번째 주문을 채 외우지 못했다.

“에낙사―”

주문을 외우려는 그의 눈앞에, 댈런의 검이 들이닥쳤기 때문.

콰직―

촉수 두어 개가 잘려나간다. 댈런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짧은 순간, 그의 검이 현란한 곡선과 직선을 그려내고.

쫘좌좌좍―!

그 경로에 있던 가죽과 살점들이 후두둑 찢겨나간다.

“끄아아악!”

대사도가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놈에게 덧입혀진 악마는, 비명 지를 시간에 다른 길을 택했다.

촉수 열 개쯤이 순식간에 잘려나가자, 악마의 일부분인 촉수가 주문으로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꽝! 꽈광!

촉수가 다시 댈런의 검에 맞선다.

이번에는 강철만큼이나 단단해진 촉수였다.

쩌정―

댈런의 검이 번쩍였다. 그의 등을 노리던 촉수가 반으로 쪼개졌다.

터어엉!

날카롭게 쏘아드는 뾰족한 촉수들이, 방패에 튕겨나며 저들끼리 충돌한다.

촉수들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댈런의 검을 붙잡고 휘감으려 했다.

댈런은 신경쓰지 않았다. 힘에서는 그가 우위였다.

하급 악마라고는 하지만, 이 촉수들은 놈의 파편일 뿐.

완전한 소환이 아니라, 소환자의 몸을 빌어 현현한 존재들이다.

본신의 힘을 채 1할도 내지 못하는 것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댈런은 지옥문을 슬쩍 바라봤다. 문제는 놈의 재생력이었다.

잘려나가도 금방 돋아나는 강철 같은 촉수들. 본체마저도 약점이 아니었다.

악마의 재생력은 대사도의 본신에도 적용되어, 검끝에 찢겨나간 놈의 팔은 어느새 다시 자라나 있었다.

치이이이―!

댈런의 육신 역시 용혈의 재생 인자로 끊임없이 회복되고 있긴 했다. 그러나 그가 불리했다.

용혈은 그의 체력을 잡아먹는 데 비해, 악마의 힘은 열려있는 지옥문에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었으니까.

꽈광!

내리친 검을 촉수가 몇 겹으로 겹쳐져 막아낸다. 검이 반으로 뚝 부러지고, 남은 부분을 놈들이 뱀처럼 휘감았다.

쉬익―!

죽 늘어난 놈이 댈런의 등을 노리고 달려든다.

휘감긴 것들을 떨쳐내고 반쪽짜리 검을 휘두르기에는,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왔다.

상관없었다. 댈런은 검을 놓아버렸다.

콰직!

주먹에 맞은 촉수가 으깨진다. 강철마저 우그러뜨릴 힘의 발현이었다.

댈런은 방패마저 던져버리곤, 맨손과 맨발로 촉수의 파도를 쳐내기 시작했다.

쩌정! 쾅! 꽈광!

더 빠른 속도로 촉수들이 터져나간다. 그리고 더 빠른 속도로 재생되었다.

댈런의 팔다리 역시 끊임없이 증기를 뿜어대며, 무리한 충격으로 손상된 피부와 근육 조직을 회복시켰다.

달인의 경지에 접어든 데하만의 갑주격투가, 그의 몸을 마치 하나의 살육기계처럼 움직였다.

보병을 학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사의 격투술이, 악마의 파편을 찢어발기는 데 사용될 줄 그 창시자라도 예상했을까.

허나 그 수많은 촉수들을 으깨고 부수면서도, 댈런은 직감했다.

이대로 가다간, 저 괴물보다 자신이 먼저 지쳐 쓰러질 게 분명하다고.

‘대전사의 시체도 힘이 부족했던 게 아니다. 회복력이 문제였어.’

대사도가 제물로 바쳐 죽인 두 번째 시체, ‘사로잡힌 대전사’.

저건 의외로 댈런이 게임에 완숙해졌을 때 만든 캐릭터였다.

힘 위주의 초기 능력치 배분. 높은 숙련도의 양손검술 스킬과 흑철 판금으로 만든 갑옷.

정석적인 전사 빌드로 성장한 캐릭터에, 댈런은 이미 역행의 사도들을 수십 번씩 쓸어버렸던 경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의 난관에 부딪힌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 회차에서도 대사도가 악마를 소환했었으니까.’

악마들 특유의 가공할 재생력은, 대전사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캐릭터 빌드를 착실하게 쌓았어도, 당시 댈런의 대전사는 기본 캐릭터에서 출발한 바.

한계가 명확한 육체로 악마와 맞서는 건, 컨트롤이나 기술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네 시간동안 보스전만 하다 죽었지.’

댈런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개 같은 게임.

다행히 그 이후 악마를 소환한 대사도와 맞붙는 일은 없었다.

어찌보면, 지금이야말로 그때의 패배를 만회할 기회.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넘치는 힘의 육신을 입게 된 이후, 이상하게 늘어난 호승심이 댈런의 몸을 끓어오르게 한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으면서도, 댈런의 근육은 꿈틀거리며 제 힘을 쥐어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괜찮겠지.’

능력치는 당시보다 확연한 우위다.

26에 달하는 근력은, 기본 캐릭터라면 게임의 중반부 이후에 접어들어서야 얻을 수 있는 수치.

육체에 돌아오는 반동만 걱정할 필요 없다면, 댈런의 승산은 충분히 점쳐볼 만했다.

‘필요한 건, 한 번의 공격.’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게임의 최후반부에 다다르면, 악마를 사냥하는 게 일상이 되는 시점이 온다.

그리고 끝없는 재생력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그 재생력을 압도하는 일격이었다.

별 수 없었다.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체력 수치와, 숙련도가 40퍼센트에 가까워진 용혈의 재생 인자를 믿어보는 수밖에.

후우.

숨을 그러모은다. 깊게 들이쉰 숨이, 온몸으로 뻗어나가며 새 활력을 불어넣는다.

맥동하는 심장이 뜨겁게 달궈진 혈액을 전신으로 운반하고.

증기를 줄기줄기 흘려대는 근육이, 이 땅에 발을 디딘 이후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낸다.

쉬이이익―!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대사도가, 촉수를 그러모아 벽을 세운다.

몇몇은 댈런의 정면에서 쏘아지며, 빈틈을 노려 저지하려 했다.

댈런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온 신경을, 말아쥔 주먹 하나에 집중할 뿐이었다.

쏘아진 촉수의 날카로운 끝이, 그의 흉터투성이 피부에 닿기 직전.

쉭―

댈런이 주먹을 뻗었다.

그리고 잠시 후.

꽈르르르릉―!

거대한 천둥소리가 공동을 뒤흔들어놓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