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밤(4)
대사도에게 이름은 없었다.
사도들은 그를 대사도님이라 칭했다. 하위 사교도들이나 건달들은 감히 그를 부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정적들이 좀 다채롭게 부르긴 했으나, 저주 섞인 그 호칭들 사이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으니까.
이십 년 전, 대사도는 힘을 얻기 위해 악신에게 자신의 이름을 바쳤다.
‘이십 년이 흘렀음에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순간이지.’
잊을 수 없었다.
스스로의 전부를 바치는 의식의 현장.
존재감이 잿빛으로 탈색되는 듯한 영혼의 고통은, 그가 겪어본 그 어떤 것보다도 끔찍했으니까.
하지만 그날을 잊을 수 없는 건, 비단 그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이유는 궁금증이었다.
‘나는 누구였는가.’
고통과 함께 그의 존재가 바쳐지며, 의식 이전의 기억은 불타 재로 휘날리듯 사라졌다.
왜 이리도 이 도시를 증오하게 됐는지.
어떤 과거의 치욕과 아픔이 있었는지.
그를 구석으로 몰아 악신과 계약까지 하게 만들었던, 치 떨리는 기억은 전부 사라졌다.
남은 건 팔시온의 일곱 성벽을 향한, 그리고 금강궁을 향한 맹목적인 증오와 분노뿐이었다.
‘운명을 엮는 난쟁이’의 대사도.
그를 이룬 정체성은 단 하나였다.
‘···만약 그때의 청동 구역에, 이런 전사가 있었다면.’
대사도는 문득 생각했다.
다채로운 이름을 지닌 다른 필멸자들의 삶이, 부러워질 때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만약 눈앞의 대전사가 그의 과거에도 존재했다면, 그의 삶은 지금과 달랐을 것인가.
이십 년이 지나서도 머릿속을 좀먹는 망각의 고통은, 그의 유일한 선택지가 아닐 수도 있었을까.
‘뭐, 이제 와서는 다 상관없는 일이다.’
난세에 영웅이 준비된다던가.
신의 대사도인 그가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품게 할 정도로, 눈앞의 대전사는 영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존재였다.
홑몸으로 은가면 사도를 전부 죽이고, 십 년이 넘도록 준비한 그의 대계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초인적인 육체와 달인의 격투술을 익혔으며, 근원을 알 수 없는 비밀의 지식들과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예지에 가까운 판단력마저 지녔다.
신들이 그를 주목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은 영웅의 편이 아니지. 이 대전사의 길도 이곳에서 끝나는구나.’
대사도는 아스라이 흩어지는 감정 속에서, 무감각한 눈으로 전사를 바라봤다.
쩌정―
휘둘러진 주먹에, 촉수가 으스러진다.
콰광!
전사의 발이 촉수를 짓밟고 끊어낸다.
순식간에 몇 개의 촉수가 무력화됐으나, 그 뒤에는 수십 개가 더 되는 강철 촉수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부서지고 깨진 그 몇 개마저도, 전사가 다른 것들을 두들기는 사이 회복되어 다시 달려들었다.
후우.
전사의 숨소리가 거칠다.
그는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에 선하게 보이는 그 결말에, 대사도는 고개를 흔들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음?’
불현듯 공기가 바뀌었다.
스으으―
지옥문을 중심으로 흐르던 마력의 흐름이, 전사의 주변에서 기이한 굴절을 만들어낸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어떤 압이 그 공간을 내리누르는 듯.
일그러지는 흐름을 관측한 대사도의 눈이, 이내 전사의 몸을 꿰뚫어보았다.
두근.
심장이 거세게 맥동한다.
용의 인자가 담긴 끓어오르는 피가, 사지 육신의 근육을 빈틈없이 채워간다.
겉으로 보이는 전사의 모습은 정적이었다.
마치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듯, 대지에 뿌리박은 바위와도 같은 기세.
‘···이런.’
그러나 대사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정적인 공기는, 어떤 거대한 폭발의 전조라는 것을.
‘악마의 육신이시여, 나를 지켜주소서!’
황급히 공세를 멈추고, 아라크네의 촉수를 전부 불러모았다.
악마의 육신이 몇 겹으로 방벽을 쌓아올리고, 남는 대여섯 개는 빈틈을 노려 전사를 향해 찔러들어갔다.
그러나 부족했다.
본능이 그렇게 외쳤다.
“에낙사―오브!”
대사도는 황급히 수인을 맺으며 마지막 주문을 외워냈다.
바로 그때.
쉭―
바위 같이 서 있던 전사가 주먹을 내뻗었다.
어떤 마력의 폭발이나 신성력의 파도가 아닌, 그저 한 번의 권격.
그리고 잠시 후.
꽈르르르릉―!
천둥이 신전을 뒤흔들었다.
콰과과과과―
파도처럼 몰려오는 압력에, 마탑의 주문도 막아낼 악마의 육신이 갈갈이 찢어져 비산했다.
강철 같은 육편의 폭풍이 충격파를 집어삼키고, 대사도의 육신을 한 줌의 핏물과 고깃조각으로 찢어발겼다.
그 폭풍의 발원지.
북부에서 온 듯한 큰 키와 덩치, 덥수룩한 머리털의 전사는.
제 힘을 못이겨 뒤틀린 팔을 내뻗은 채,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폭풍 속 대사도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한낱 인간의 힘으로······!”
콰직!
그리고 강철 촉수의 파편이 대사도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
“······후우.”
댈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슬쩍 눈을 돌려 내뻗은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치이이이―
으스러진 뼈. 위치를 이탈한 근육들.
왈칵이며 쏟아지는 피는 증기를 마구 내뿜어대고, 바깥으로 밀려난 혈관과 신경들은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시발. 존나 아프네.
근육과 뼈가 우드득거리며 제 위치를 잡아간다.
댈런은 주먹을 내뻗은 자세 그대로 한동안 서 있었다.
뭔가 만화 속 주인공이 악당을 처치한 후, 분위기를 잡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광경.
“······썩을.”
허나 실상은 그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고통이 배가 되기 때문이었다.
치이이이······.
이윽고 바스라졌던 뼈가 다시 중심을 잡았다.
근육들도 제 자리를 찾았다.
댈런은 거친 피부가 그 위를 덮는 걸 보고서야, 후들거리던 팔을 내릴 수 있었다.
“···후우.”
짧은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그 한숨에 증기가 무슨 기관차 뺨칠 정도로 새어나온다.
당연하겠지만, 탈이 난 건 팔뿐만이 아니었다.
내장도 이미 진탕이 될 대로 되어, 속에서 울렁거리며 회복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도박이었군.’
댈런은 객관적으로 방금 전의 싸움을 복기해봤다.
용혈의 재생 인자의 숙련도가 어느 정도 올라가지 않았다면.
혹은 최소한의 체력 수치가 이를 뒷받침해주지 않았더라면.
댈런은 주먹을 내뻗은 순간,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쿨럭!”
한 움큼 피를 토해내며, 댈런은 다시금 마음먹었다.
어떻게든 체력 수치를 올려 몸의 균형을 맞춰야겠다고.
저벅.
댈런은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마무리를 할 차례였다.
용혈도 괴물 같은 회복력을 자랑하긴 했지만, 악마의 회복력은 그보다 더했다.
거의 산산조각나다시피 한 대사도의 육신은, 심장과 몇몇 중요 기관끼리 이어붙으며 다시금 재생하고 있었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펄떡이며 뜨거운 피를 내뿜어대는 심장.
저것만 짓밟아 뭉게면, 이 싸움은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댈런은 심장 위에 발을 올렸다. 가죽신 다 찢어진 맨발 아래 뜨겁고 물컹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대로 내리누르려는데,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왜 우리들 중 최하계급이···검은 가면을 쓰는 지 아나?”
댈런은 잠시 멈췄다. 그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난 방향을 살펴보았다.
산산조각 난 촉수 파편 사이, 대사도의 머리가 남아있었다.
온전한 머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두 눈을 포함해 코 위쪽으로는 바스라진 얼굴에, 삼분의 일쯤 날아가버린 뇌와 두개골.
기도에 연결된 폐도 반쪽밖에 남지 않았다.
놈이 바람 새는 소리로라도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건, 그저 악마의 피가 머금은 마력 때문이리라.
“검은 가면은···금강궁을 뜻하지. 가장 높은 궁전이 가장 낮은 곳 되고, 가장 낮은 청동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그것이 우리가 신의 뜻 아래 새로이 세워가는 역행의 질서임이야.”
댈런은 심장에서 발을 슬쩍 내렸다. 그는 뚱한 표정으로 이빨 다 날아간 입을 바라봤다.
대사도가 뒈져가면서 유언을 남기는 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컷씬이었기 때문. 뭐라도 얻어갈 정보가 있겠지.
“내 마지막 유언을 들어주고 있으니···내 특별히 신께 전해들은 진리를 하나 말해주겠다. 검은 가면이 금강궁을 뜻하는 것은, 사실 금강석이 흑필과 다르지 않음에서이니.”
대사도는 뭉개진 입술을 우물거리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가장 고귀한 것이, 사실은 가장 천한 잿더미와 다르지 않다는 게 얼마나 모순적인가. 허나 세상은 그만큼 모순적이며, 운명 역시 그렇게 정해진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는 걸 알아두도록 하거라. 대전사···네 운명 역시 말이야.”
“지랄. 그게 왜 모순적이냐.”
댈런은 코를 흥 풀었다. 비강에 고였던 핏물이 쫙 빠져나갔다.
“다이아몬드나 흑연이나 결국 둘 다 탄소결합물 아니냐. 거기서 왜 운명이고 자시고가 나와.”
“···뭐?”
대사도의 입이 바람빠진 소리를 냈다.
댈런은 머리를 긁적였다. 손끝에 피딱지가 묻어나왔다.
피와 악마의 체엑이 굳은 게 온몸에 튀어 있었다. 찝찝했다.
“둘 다 탄소라는 원소로 구성되어, 미세한 구조만 다른 거잖냐. 흑연은 뭐 원자가 무슨 판처럼 쌓여 있고, 다이아몬드는 단단하게 얽혀 있다던가. 아무리 악신이라도 신이라 불리는 새낀데, 그런 것도 안 알려주던?”
“······.”
터진 입술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댈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니 이 세계가 막장인 거지. 마법으로 산도 날리고 강도 뒤엎고 하면 뭐해. 과학이 없는데.
“모순적인 운명이고 자시고. 니가 말한 건 다 물리라고, 물리. 정해진 운명이니 뭐니 하는 건 개소리라는 거야.”
댈런은 찝찝한 머리를 털었다.
처음 보는 장면이라 뭐라도 얻어갈 게 있을까 싶어 지켜봤는데, 결국 그런 건 없었다.
그는 발을 다시 올렸다. 심장은 펄떡이며 이 순간까지도 대사도의 머리통에 혈액을 공급하고 있었다.
마지막 한 마디 정도는 괜찮겠지. 댈런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창조주가 인간에게 준 건 자유의지다. 운명 따위에 예속된 삶이 아니라. 네 운명은 네가 선택한 거야. 금강궁에서 쫓겨난 자, 대사도 탈레비노 사이칼.”
“내, 내 이름을 어떻게···!”
콰직!
답은 없었다. 댈런의 발끝에서 대사도의 심장이 터져나갔다.
경련하듯 열리던 입술은, 그대로 덜덜 떨더니 혀를 빼물고 축 늘어졌다.
댈런은 괜스레 머리를 한 번 더 긁적였다.
‘게임 사이드 설정에서 본 NPC 이름 한 번 읊어줬다고, 저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괜히 저승길 가는 놈한테 충격을 줬나. 거기다 개똥 철학까지 한 숟갈 올려버려서 그런지 괜히 찝찝했다.
까놓고 말해 그가 창조주도 아니고, 인간에게 뭘 줬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어쨌든 이걸로 하나 끝났군.”
댈런은 괜히 입밖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큰 시련을 이겨내면 혼잣말이 많아지는지 이해가 됐다.
스스로 한 일에 인정을 주고 싶은 것이다.
멸망의 한 줄기를 이겨냈다고.
수만 명이 학살당하는 미래를, 자신의 힘으로 막아냈다고.
“쯧.”
댈런은 혀를 한 번 차고 걸음을 옮겼다.
괜히 존재하지도 않는 독자가 보면서, 왜 혼자 중얼거리냐고 악플을 달 것만 같았다.
***
대사도가 죽고 나타난 시체는 총 두 구였다.
하나는 근육이 우락부락한 전사의 형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은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쓴 로브 차림의 시체였다.
둘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제단 위에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팔다리가 죄다 절단당한 상태라는 것.
둘 다 산 채로 제물이 되어, 대사도에게 흡수된 시체였기 때문이다.
댈런은 씁쓸한 기분에 침을 퉤 뱉고는, 두 시체를 회수했다.
[여섯 번째 은가면 사도의 시체]
- 빙결 주문을 사용하는 암살자의 시체다. 냉혹한 살해자라는 이명이 붙었으며, 피살자를 꽁꽁 얼린 채 팔다리부터 깨뜨리는 잔혹한 손속으로 유명해졌다. 그 악명으로 인해 역행의 사도들의 영입 제안을 받아 은가면 사도가 되었다. 대계 끝에 대사도의 제물로 바쳐졌다.
첫 번째는 은가면 사도의 시체.
설명을 읽은 댈런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완전 사이코 새끼였네.”
아무리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때라지만, 사람 팔다리를 얼려서 부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라니.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 생각하기에는, 미친 놈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잘 뒈졌다, 새꺄.
댈런은 과거의 자신에게 진심어린 덕담을 건네며 시체 위에 손을 올렸다.
[여섯 번째 은가면 사도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1, 마력 +1, 급속 빙결(D)]
보상은 괜찮았다.
다른 계열의 주문 하나에, 부족했던 능력치들을 얻었다.
댈런은 다음 시체 위에 손을 올렸다.
[사로잡힌 대전사의 시체]
- 번쩍이는 흑철 갑옷과 파괴적인 양손검술로, 순은 거리에까지 명성을 떨친 금패 용병의 시체다. 악마를 소환한 대사도에게 패배해, 산 제물로 바쳐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부릅뜬 대전사의 시체.
팔다리가 잘린 처참한 몰골의 잿빛 시신이, 빛무리로 화해 그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온다.
[사로잡힌 대전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4]
미친. 근력?
보상을 본 댈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미친.”
우드드득!
그리고 전신의 근육이 뒤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