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성검(4)
“우리가 뭐 틀린 말 했소?”
테이블에 앉아있던 용병들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번들거리는 민머리의 꽤 연륜 있어 보이는 용병 탐험가였다.
“그 머저리 새끼가 다 뒈져가는 악마한테 성검을 빼앗기는 바람에 토벌이 실패한 거 아니오! 토벌대 삼분의 일이 죽었소! 삼분의 일!”
“뭐? 머저리?”
성기사, 루시아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바렛은 그래도 성검에게 인정받은 기사야. 악마에게 맞서서 쓰러질 때까지 싸운 전사라고! 너 같이 악마한테서 꼬리 말고 도망간 겁쟁이 새끼랑은 차원이 달라!”
민머리 용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허! 언제부터 성검이 용기랑 만용도 구분 못하는 코흘리개를 인정해줬는지 모르겠군. 그 정도면 내 아랫도리로 성검을 들어도 인정받을 수 있겠는데!”
“뭐 이 새끼야?”
제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소리치는 용병. 순간 루시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녀는 검을 여관 바닥에 콱 꽂아넣고,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저 버러지 같은 용병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공증인 없나?”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팔에서 금빛 문신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성기사단의 상징, 신성 문신이었다.
안 그래도 다들 이 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참이었던지라, 눈을 반짝이며 손을 드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속출했다.
“내가 하겠소! 내가!”
“6년차 탐험가 한스요. 내가 공증인을 맡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거리가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던가.
입이 걸쭉한 성기사와 용병 출신 탐험가의 싸움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관객들의 호응 또한 남달랐다.
끼익! 드르르륵!
테이블과 의자가 밀려나며 금세 원형 결투장이 만들어진다.
손님들 대부분 힘 좋은 용병이나 탐험가들이었기에,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결투! 결투!”
“자자, 돈 걸 사람 없나? 돈?”
자연스럽게 은화를 주고받으며 내깃돈을 걸고, 주먹을 치켜든 채 환호하는 관중들.
“······.”
댈런은 속으로 오만 가지 욕을 퍼부어대며, 그 인파 사이를 비집고 헤쳐나갔다.
그 사이에도 결투장은 한창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공증인으로 6년차 탐험가까지 나선 마당이니, 더 이상 걸릴 게 없었다.
“성검을 들 수 있다는 아랫도리를 햄처럼 얇게 저며주면, 더 이상 그 혀로 나불거릴 일은 없겠지. 안 그래?”
“이런 쓰벌. 그래, 한 번 죽여보자 그거지? 좋소!”
철컹.
바닥에 놓아두었던 긴 사슬추와 방패를 집어드는 용병. 사슬 끝에 날카롭게 각진 추가 메달려있는 무기였다.
용병이 평범하지 않은 무기를 꺼내들자, 루시아의 눈이 약간 커졌다.
다만 놀란 건 잠시뿐. 그녀의 분위기는 금세 착 가라앉았다.
“그래. 죽여보자고.”
그녀가 말했다. 각진 방패와 검을 들고, 낮게 자세를 잡는 루시아.
밝게 빛나던 그녀의 신성 문신도, 점차 은은하게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잘 됐군. 안 그래도 이번에 그 머저리를 보면서 생각했다고. 성기사라는 작자들이 다 이렇게 허접한 건지 말이야.”
용병은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사슬추를 휭휭 돌렸다. 그가 물었다.
“그쪽은 그 머저리보단 강한가?”
“자꾸 머저리 머저리 거리는···!”
타닥!
루시아의 말이 끝나기 전에,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민머리 용병.
블러핑에 익숙하지 못한 성기사의 자세가 순간 움찔하며 흐트러졌다.
“비겁한···!”
루시아가 외쳤다. 용병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 사슬추를 휘둘렀다.
빙빙 돌리던 관성에 몸의 가속까지 더해지자, 휘둘러진 사슬 끝의 추에서 공기를 찢는 소리가 났다.
쐐애액―!
머리통을 단번에 박살낼 위력과 속도.
피하기에는 늦었다.
방패로 막아도 과연 충격을 견딜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관중들이 모두 숨죽인 순간.
턱!
오크의 머리라도 부술 기세였던 강철 추가, 큼직한 손에 가로막혔다.
“뭐, 뭐야?”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을 더듬는 용병.
강력한 손아귀 힘으로 강철 추를 단단히 붙잡은 댈런은, 약간 피곤한 얼굴로 용병에게 말했다.
“결투는 여기서 중단하는 걸로 하지. 이쪽은 내 동료요.”
“중단? 그 여자가 나에게 어떤 모욕을 했는지 알기나···!”
댈런은 말없이 추를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끼긱.
불안하게 삐걱거리는 추의 접합부. 맥없이 두어 발자국을 끌려가는 용병의 몸.
그는 남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슬슬 문지르며,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내 동료이니, 여기까지 해주면 참 고맙겠소. 아니면 나랑 먼저 한 판 붙던지.”
“···알겠소.”
“고맙군.”
댈런은 추를 놓았다. 묵직한 강철 추가 쿵 떨어지며 여관의 마룻바닥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았다.
두려움과 분노가 섞인 오묘한 표정의 용병을 뒤로 하고, 댈런은 눈을 동그랗게 뜬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좀 늦었소. 그쪽이 의뢰를 맡긴 사람이오.”
“그, 그럼 당신이 이번에 사교도들을···!”
“거기까지.”
루시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합 다물었다. 댈런은 허리띠에 손가락을 꽂고선, 주변을 한 번 슥 둘러봤다.
끼익. 드르륵.
관객들은 갑자기 막을 내린 결투에 뭐라 불평하며 테이블을 되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개중 몇몇은 이채 어린 눈빛으로 댈런과 루시아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댈런이 말했다.
“보는 눈이 많군. 따로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할 것 같소.”
***
조용한 장소를 부탁하자, 여급은 그들을 3층의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댈런은 테이블 위에 도끼를 올려놓고, 검과 방패를 풀어 벽면에 기대두었다. 그가 말했다.
“이제 검은 넣어도 되지 않겠소?”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좀 진정됐는지, 떨림이 어느정도 잦아든 목소리였다.
루시아는 아직까지도 뽑아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꽂아넣었다. 좁고 곧은 날이 하얗게 빛나는 명검이었다.
“그래서.”
끼이익.
의자에 몸을 묻은 댈런은 운을 띄웠다.
“내막을 좀 말해보시오.”
“의뢰 내용을 전달받고 온 것 아니었습니까?”
“의뢰서에 안 적힌 이야기도 많더군.”
사실 의뢰서에는 별다른 내용이 적혀있지 않았다.
정식 성기사가 된 동료가, 수행차 미궁에 내려갔다가 악마에게 성검을 빼앗겼다는 전말.
그리고 그 성검을 되찾기 위해, 의뢰주인 루시아가 이 도시에 오게 되었다는 것 정도가 끝.
내건 보수마저도 ‘성기사단이 해줄 수 있는 거라면, 금화 쉰 닢이든 신성 문신이든 뭐든지 다 해주겠다.’였다.
시에나가 초장에 한 번 걸렀던 이유가 있었다.
“일단 좀 앉으시오. 뭐가 그리 급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미궁은 내일 정오가 되어야 내려갈 수 있소.”
“···그러죠.”
루시아는 천천히 댈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즈음 여급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주문을 받았다.
음식을 이것저것 잔뜩 시키는 댈런과는 달리, 루시아가 주문한 건 하얀 빵 한 덩이와 버섯이 들어간 스프.
여급이 맥주 두 잔을 놓고 나가자, 루시아는 그제야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하아. 이런 바보 같은 년. 그렇게 성질 좀 죽이라고 교육을 받았으면서······.”
뭐야. 왜 갑자기 자아비판이야?
댈런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그녀를 멀뚱히 쳐다봤다.
“우선 고맙습니다. 아까 그 용병의 철퇴, 생각 이상으로 매섭더군요.”
“별말씀을.”
댈런은 반쯤 비운 잔을 내려놓고 거품을 닦아냈다.
낮에 마셨던 르베론네 맥주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품질이 괜찮았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저는 대륙의 균열을 수호하는 성기사단의 수습기사, 루시아 카스타챌드라고 합니다.”
“댈런이오.”
한 마디로 끝나는 그의 대답에, 루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끝인가요?”
“뭐가 더 필요하오?”
“도시에 암약한 사교도들을 물리친 용병이라던가, 악마와 하나가 된 악신의 사도를 처치한 신의 전사라던가······.”
“어떻게 그 이야기를 아는지는 차치하고, 그런 미사여구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군.”
끼이익.
댈런은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
흠칫 뒤로 물러서는 루시아를 향해, 그는 무감정한 눈으로 말했다.
“나는 댈런이오. 우리 둘은 지금 처음 만났고,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지. 과거를 수식하거나 미래를 포장하는 건 확신이 아니라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만을 더할 뿐이오.”
그러니 이름 하나면 족하오. 댈런은 그렇게 덧붙이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루시아는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고개를 살짝 털고 말했다.
“제가 생각했던 전사의 모습과는 좀 다르군요.”
“보시오. 벌써부터 그러지 않소. 사람은 떠도는 소문이 아니라 경험으로 서로를 알아가야지.”
“오히려 마음에 듭니다. 이제야 숨기는 것 없이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댈런은 말없이 잔을 마저 비웠다. 그리고 루시아는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
팔시온은 미궁으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들 중, 유일하게 마물이 올라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 말인즉, 미궁으로 연결된 통로 자체는 미궁도시 외에도 더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성기사단이 자리한 대륙의 균열.
대륙 중앙의 미궁도시에서 남서쪽으로 한참을 가면 나오는, 지하로 내려가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골짜기였다.
“성기사단의 주 임무가 균열에서 올라오는 마물들을 막는 겁니다. 그래서 기사단은 주기적으로 이곳 팔시온에 성기사와 성전사들 수행차 보내곤 하죠.”
“안전한 실습장소 같은 느낌이군.”
“예. 적어도 한 명의 실수로 인해 방어선이 돌파되고, 마물의 군세가 대륙을 침공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니까요.”
바꿔 말하면, 성기사단이 균열에서 수백 년간 벌이고 있는 싸움은 그만큼 팽팽한 줄다리기와 같다는 뜻이었다.
“제 동기, 바렛 스트리먼도 두 달 전 정식 기사가 되어 수행을 떠났습니다.”
동기 중에 누구보다 출중했던 아이인지라, 당연히 잘 해낼 줄 알았죠. 그녀는 덧붙였다.
하지만 미궁은 들어가보기 전에는 결코 짐작할 수 없는 마경이다.
정식 기사 하나와 수습 기사 둘, 그리고 성전사 열둘로 구성된 그의 일행은, 약속했던 때에 돌아오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성기사단은 모두 언젠가는 패배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그녀가 동기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 팔시온에 도착했을 무렵, 성기사단 본부에서 새로운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바로 성기사단의 열두 성검 중 하나가 도난당했다는 것.
그리고 그 범인이, 다름아닌 바렛이라는 소식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걸 훔쳤는지, 아니 애당초 성검의 선택을 받았으면 사실대로 보고하면 될 것을, 왜 그걸 몰래 훔쳐가서 이렇게 일을 키운 건지······.”
반쯤 흐느끼다시피 하며 테이블에 힘없이 엎드리는 루시아.
댈런은 소갈비 하나를 우물거리며 그걸 쳐다봤다.
“결론은 그 애송이가 모종의 영웅심으로 성검을 훔쳤고, 영웅이 되기는커녕 미궁에서 객사하는 바람에 악마를 퇴치하려던 공격대까지 피해를 봤다는 소리군.”
“애송이라니···!”
“제 분수를 모르고 덤벼들었으면 애송이지. 그 성검을 당신네들이 지키는 대륙의 균열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해보시오. 그걸 되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성기사가 죽었을지 상상이 가시나?”
발끈하며 고개를 쳐들었던 루시아는, 댈런의 무미건조한 눈빛과 말에 다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다시피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그저···아직도 믿기지 않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믿기지 않는 일들이 많지. 소설 같은 일들도 많고.”
시발, 나라고 내가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질 줄 알았겠어?
댈런은 갈빗대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성검을 되찾는 걸 도와달라는 거군. 나와 동행하는 성기사단 병력은 어떻게 되오? 순은 구역에 지부가 있는 걸로 아는데.”
“···이곳 지부에는 가용 가능한 병력이 얼마 없습니다.”
댈런은 다음 갈빗대를 향해 뻗던 손길을 멈칫했다.
설마 지금 수습 기사 하나랑 둘이 성검 찾으러 가라는 거야?
“근 몇 개월간 균열의 마물들이 심상치 않은 기세를 보이고 있어서, 최소한의 행정 업무가 가능할 정도로만 남겨두고 전부 본부로 귀환했거든요.”
댈런은 뒤늦게 게임 초반의 설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튜토리얼이 끝날 시점은, 대륙 곳곳에서 마물들이 조금씩 준동할 시기였다.
그러다 한 몇 달쯤 있으면 천천히 기세가 줄고, 폭풍전야의 잠잠함을 지나면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된다.
‘그리고 진짜 위기가 다가올 무렵에는, 오히려 사람들의 경각심이 둔해져 있게 되지. 바로 얼마 전에 마물의 침공이 일어날 거라고 곳곳에서 외쳐놓고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어쨌든 시기가 참 공교로웠다.
악마를 때려잡고 성검을 되찾으러 가는 의뢰에서, 성기사단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게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지.’
가까운 미래에 영웅이 될 인물을 포섭할 수 있는 의뢰다.
지원이 없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거기다 성검을 빼앗아간 악마 역시, 지금 시점에서는 최하급 악마 수준.
훗날 성검의 힘을 통해 중급 악마로 성장하는 놈이니, 차라리 지금의 무력으로 어떻게든 밟아놓는 게 낫기도 했다.
물론 확실히 해야 할 부분은 있었다.
“보수는 제대로 지급되길 바라지.”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인장이 찍힌 공문도 있으니까.”
루시아가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성기사단 지부의 인장이 찍힌 두루마리에는, 악마를 퇴치하고 성검을 회수해올 시 금화 쉰 개나 그에 준하는 수준의 다른 보상을 주겠다고 적혀 있었다.
이러면 걱정할 것 없지.
댈런은 소갈비를 마저 뜯으며 말했다.
“미궁은 매일 정오에 문이 열리오.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니, 일단 밥이나 먹지. 든든하게 먹어야 키도 크는 법이니까.”
“지금 키가 작다고 놀리시는 겁니까? 동기 여기사들 중에는 제가 가장···.”
“나보다는 작지 않소. 더 드시오.”
갈빗대 두 개와 스튜 한 접시를 밀어주자, 루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스튜가 담긴 솥을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
고기와 곡물을 듬뿍 넣은 스튜의 향이, 감미롭게 코끝을 간질였다.
***
겨울 밤공기가 찼다.
댈런도 그게 차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핏줄 속에 흐르는 용혈의 인자 때문인지, 춥다는 감각은 느끼지 못한 지 오래였다.
그는 엘가이아 마탑의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미궁에 내려가기 전, 꼭 확인해봐야겠다 싶은 의문들이 있었기 때문.
공교롭게도 오늘은 펠버 발렌티노의 야간 수업이 있는 날이어서, 댈런은 야심한 밤에 옥상을 거닐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일이면 드디어 내려가는군.’
댈런은 저 멀리, 중앙광장의 결계탑을 보며 생각했다.
저 결계탑의 1층에는, 매일 정오에 미궁으로 내려갈 수 있는 포탈이 열린다.
‘이로써 조금 더 가까워진 건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미궁 밑바닥에 잠든 희망을 향해서.
물론 이번에 갈 곳은 소원의 돌과는 전혀 무관한, 미궁 1층 저 구석의 동굴이었다.
그러나 댈런은 마음만큼은 벌써 소원의 돌에 한 발짝 더 다가간 것만 같았다.
아니, 다가간 게 맞긴 했다.
그는 이미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수많은 갈림길들 중 하나를 깔끔하게 없애버렸고.
이번에도 갈림길 하나를 지워버리려 가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마음 한켠에 잔잔하게 내려앉은 불안감은, 그의 비범한 육체와 이뤄낸 업적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종류였다.
앞으로 이 땅에 닥쳐올 멸망의 가능성들은, 그가 극복해온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갈 테니까.
그리고 그것들 중 몇몇은, 댈런이 단 한 번도 이겨내본 적 없는 시련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자.’
댈런은 고개를 털었다.
이겨내지 못한 과거는, 지나간 그림자일 뿐.
다가올 미래는 동시에 다가오지 않은 환상이다.
그가 해야할 일은 그림자를 딛고 일어나,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
곧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허허, 뭘 그렇게 세상 다 산 노인같은 얼굴을 하고 있나?”
그때 누군가 옥상 정원의 문을 열고 나왔다.
“기다리느라 고생했네. 아이고, 밤늦게까지 강의를 하기에는 체력이 부칠 나이야 이제.”
등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걸어오는 갈색 수염의 노인.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 펠버 발렌티노였다.
“안녕하십니까. 너무 늦게 인사 올리게 되었습니다. 토미 발렌티노라고 합니다.”
그의 곁에는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금발의 젊은 마법사, 토미 발렌티노도 함께였다.
댈런은 청년의 기세가 이전보다 한층 단단해졌음을 느꼈다.
“사교도들이랑 싸우며 얻은 게 있긴 한가 보군. 스승님을 잘 뒀어.”
“가, 감사합니다.”
“늙은이가 한 게 뭐가 있겠나. 저 혼자 전쟁터로 따라왔고, 유혈 낭자한 싸움에서 살아남아 성장했는데. 알아서 잘해낸 거지.”
펠버는 고개를 슬슬 저었다. 그 능숙한 능청에 댈런은 마주 낮게 웃었다.
“그럴 기회를 만들어준 게 노인장 아니오.”
“난 마탑에 돌아오기 전까지, 이 녀석이 따라온 것도 몰랐네.”
펠버는 끌끌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묻고자 하는 게 있다 들었네. 밤이 너무 늦었으니, 괜찮다면 짧게 이야기하고 들어가서 쉬세나.”
그는 난간 앞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깊이 하품을 했다.
댈런은 난간에 등을 슬쩍 기대고는 입을 열었다.
“용혈과 영역에 대해서 말해주시오.”
쩍 벌렸던 입이 곧장 닫힌다. 펠버는 곧바로 댈런을 돌아봤다.
피로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흥미와 기대감이 한가득 담겨있는 얼굴.
그가 물었다.
“자네, 벌써 작은 영역을 이뤘나보군?”
작은 영역을 일궈낸,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
댈런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마법사 특유의 마력광으로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