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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44화 (44/288)

정산(2)

“···이런.”

짧게 토막친 한 마디와 함께, 남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흥미롭다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수백 년에 달하는 세월에서 묻어나오는 여유는, 예상치 못한 반응 하나에 깨어질 만큼 얕지 않았다.

“과연, 이 역시 신들이 주시하고 있는 전사답다고 할까요.”

“대사도도 그렇고 악마 놈도 그렇고 자꾸 그놈의 신들을 언급하는데, 이 동네 신들은 무슨 관음증이라도 있소?”

남자의 표정이 다시 미세하게 굳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입가에 맺힌 웃음은 조금 전보다도 더 뚜렷해져 있었다.

‘역시.’

댈런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깨어지기 힘들 정도로 두꺼운 초월자의 평정을, 일부러 조금씩 더 흔들어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에버론 라크탈라.

흔히 ‘천변만화의 얼굴’이라 불리는 초월자는,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일에 흥미를 느끼는 인물이었기 때문.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선에서, 초월자조차 예단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줄수록 호의를 끌어내기 쉽지.’

그리고 초월자쯤 되는 인물이라면, 그 호의만으로도 금화 수백 닢 이상의 값어치를 가지는 건 당연한 일.

댈런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관리청부터 찾은 건, 단순히 포상금으로 받을 금화 수백 닢 때문만이 아니었다.

“북부 서리고원을 넘어온 대전사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상당히 불경한 어조로 들리는데요.”

에버론은 잔잔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댈런은 가벼운 어조로 그 말에 대꾸했다.

“내가 신앙심이 그리 깊지는 않아서.”

“글쎄요. 그보다는 신앙 자체가 없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에버론은 잠시 간격을 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애당초 당신은 서리고원을 넘어온 적도 없잖습니까?”

눈매가 완만한 호선을 그린다. 입꼬리는 조금 더 끌어올려졌다.

마치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쓴 듯한 표정과 어조.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나는 당신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

그러니 할 수 있다면, 어디 내 예상을 한 번 빗나가 봐라.

제아무리 비범한 사람이라도, 초월자의 저런 태도 앞에서는 백이면 백 눌리는 게 당연한 법이다.

남자의 몸에서는 어떠한 힘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지만.

그 표정과 몸짓, 말투 하나하나에는 수백 년의 세월에서 녹아나는 압박감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압박감 앞에서.

“푸흐.”

댈런은 참지 못하고 픽 웃음을 터뜨렸고.

“···뭐가 그리 재밌으시죠?”

남자의 웃는 얼굴에 미세한 감정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오.”

댈런은 웃음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어느새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반응해줄까.’

짧은 순간, 머릿속에 수십 가지 선택지가 우르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고작 몇 마디가 오갔을 뿐이지만, 이 문답은 곧 초월자의 호기심과 흥미에서 비롯된 시험.

그렇다면 그 기대감에 충분히 부응해줘야 할 테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끝에서.

댈런은 웃음기가 여실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서리고원을 넘어온 적 없다고, 그쪽 선각자가 그리 말했소?”

“예?”

“백안의 선각자. 그 천 년 묵은 점쟁이가 나에 대해서 말해주었냐는 이야기였소.”

그 한마디에.

지금껏 유지하던 초월자의 평정심이 산산이 부서진다.

커피잔으로 향하던 손이 정지화면처럼 멈추고, 흔들림 없던 표정이 처참할 정도로 무너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요. 선각자를 아실 줄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에버론이 말했다.

스물여섯 초월자 중 하나이자, 그 초월자들 중에도 가장 베일에 싸여진 존재.

세간에서는 그 이명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 존재에 대해 너무나 당연한 듯 언급하는 댈런의 말.

이백 년 이상 살아온 천변만화의 얼굴이라도, 그 말 앞에서 여유롭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존재로군요.”

여전히 살짝 떨리는 동공. 그 안에는 흥미와 당혹감, 더 큰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 앞에서 댈런은 여상스러운 태도로 커피를 홀짝일 뿐이었다.

“당신에게서는 마치 당신들이 초월자라 부르는, 내 친우들을 대할 때의 느낌이 듭니다.”

그 솔직한 감상에 댈런은 낮게 웃었다. 에버론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예상 밖의 상황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만남은 모니터 너머에서 숱하게 겪어온 상황.

애초에 대화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이미 대화의 흐름과 주도권은 그에게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눈앞에 앉은 사람이 누구라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어떤 비밀스러운 존재라 해도, 모니터 밖의 관찰자였던 댈런에게는 이미 수없는 접점과 공략을 거쳤던 존재일 뿐이기에.

“커피가 맛있군. 한 잔 더 없소?”

동이 난 주전자를 기울이던 댈런이 말했다. 에버론은 약간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딱딱 튕겼다.

방 밖에 대기하던 직원이 들어와 빠르게 다과를 교체했다.

테이블 위에는 그렇게 한동안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멤돌았다.

달칵.

에버론이 다시 입을 연 건, 직원들이 나가고 그가 새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였다.

“악마의 정수를 가져오셨다고 했죠?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혼란스럽던 감정은 어디 가고,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건네는 말.

그러나 잔잔하게 깔린 미소는, 댈런이 그의 시험을 통과하고 호의를 얻어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

철컹. 철컹.

단단하게 잠긴 궤짝이 묵직한 소음을 낸다.

댈런은 손 안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장서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궤짝이 들려 있었다.

그건 악마의 정수를 넘기고 받은 포상금, 금화 백팔십 개가 담긴 궤짝이었다.

사실 원래라면 백오십 닢 정도에서 그칠 포상금을, 웃돈을 한참이나 얹어 받은 것.

초월자의 호의는 아무리 못해도 금화 수십 닢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댈런은 궤짝을 슬슬 쓰다듬었다.

‘거의 금화 이백 닢이라니.’

왠지 감개가 무량해지는 순간이었다.

은화 몇 푼 더 벌기 위해 하수도의 프로그맨 독침을 주워담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두 손을 넘칠 정도의 금화가 그의 손에 있었다.

이 정도면 암시장에서 마법시대의 유물이나 전설적인 장인들이 만든 무구를 한두 점 정도 살 수 있는 돈.

‘어떻게 쓸 지는 차차 생각해봐야겠군.’

어쨌든 미궁을 나온 뒤 가장 중요한 업무는 이로써 마무리됐다.

댈런은 마탑에 들러 금고와 그밖의 전리품들을 챙긴 후 곧장 청동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까마귀 둥지였다.

아직 영업시간 전이라 홀은 한적했다. 바텐더 버번만이 바 테이블 뒤에서 홀로 잔을 닦고 있었다.

댈런은 자연스레 테이블에 앉아 주문했다.

“멜론드 하이랜더 한 잔.”

버번은 닦던 잔을 내려두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댈런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 문득 물었다.

“시에나는 안에 있소?”

끄덕.

작은 고갯짓이 돌아온다. 그리고 댈런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느낄 수 있었다.

철저하게 방음 처리가 된 사무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오는 두 기척을.

두 기척.

선객이 한 명 있었다.

“···아무튼 잘 전해주시길 바라네.”

“걱정 마세요. 미궁에서 나왔다는 소식이 있으니, 아마 며칠 안에 여기 들를······.”

뒷문을 열고 나오던 시에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시선은 바 테이블의 댈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댈런은 피식 웃으며 방금 받은 술잔을 들어올렸다. 시에나가 외쳤다.

“댈런!”

“거 귀 떨어지겠네. 나도 반갑소.”

“아하하하, 미안해. 내 생각보다 더 빨리 왔길래.”

기분 좋은 경쾌함을 담은 웃음.

댈런은 마주 낮게 웃다가, 그녀의 뒤에서 나오는 인물을 보고 술잔을 한 번 더 들었다.

“댈런? 자네, 정말 자네인가?”

“오랜만이오, 상단주.”

“맙소사 시셀라시여! 미궁에 내려갔다고 들었는데, 자네 멀쩡하구먼!”

갈리오스 상단의 상단주, 볼크마 갈리오스는 거의 술집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외쳤다.

하여간 목청 한 번 좋은 사람이라니까. 댈런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사지 중 하나라도 어디 놓고 올 줄 알았소?”

“으하하! 그럴 리가 있나! 자네처럼 대단한 전사라면 미궁을 휩쓸고 다녔겠지!”

볼크마는 얼굴에 반가움을 한가득 담고서 손사레를 쳤다.그는 자연스럽게 댈런 옆에 앉았다. 버번은 익숙하게 술 한 잔을 더 내어주었다.

댈런은 그 사이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오?”

“그게 말일세···.”

“내가 이야기할게.”

시에나였다. 그녀는 바 테이블의 반대편, 버번의 곁에 의자를 끌고 가 앉았다. 두 사람을 마주보는 방향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살짝 모아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이 알아봐달라고 한 것들 기억해? 체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비약이나 의식, 혹은 주문.”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들은 지명의뢰를 선별할 때 그가 조건으로 내걸었던 보상이었다.

아직까지 체력 능력치가 심각하게 뒤떨어지던 시점.

한시라도 체력을 올려야 했기에, 그는 시에나에게 의뢰와 무관하더라도 따로 알아봐 달라는 말을 남겼었다.

“개인적으로 주문이나 의식 쪽을 알아봤지만, 큰 성과는 없었어. 대부분 얻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거나, 부작용이 너무 극심한 종류였거든.”

“그렇군.”

하긴 성기사단의 신성문신이 특이한 케이스일 뿐, 능력치를 올려주는 대부분의 의식이나 주문은 과도한 대가를 요구하곤 했다.

사실 신성문신의 경우도, 이번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궤짝 단위의 금화를 바쳐야 받을까 말까 한 물건이었으니까.

“그래서 약초 쪽을 주로 알아봤지. 필로폰네 과수원이나 서부 지구의 약초 재배자들, 그리고 상인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거기서 내가 한 건을 했다, 이 말이네.”

잔을 반쯤 비운 볼크마가 붉어진 얼굴로 껄껄 웃었다.

뭐야, 벌써 취했어?

“도시연합 남서부의 르비바흐라는 소도시를 아나?”

“들어본 적 있소. 근처 산지에서 질 좋은 약초가 나기로 유명한 곳 아니오?”

르비바흐.

미궁도시 팔시온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연합에서도, 남서쪽 저 끝에 붙어있는 작은 도시였다.

인구가 오천이 좀 넘는 동네이지만, 게임에서 한 번 중요한 사건으로 부각되는 곳.

댈런의 말에 볼크마는 거나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맞네! 거길세! 지리에까지 정통하다니, 역시 자네는 특별한 전사야. 아무튼, 이번에 내가 그 도시에 대한 귀한 정보를 들었다네.”

“뭐요?”

댈런은 버번에게 술 한 잔을 더 받으며 물었다.

상단주는 뭔가 음흉한 표정을 짓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을 이었다.

“흐흐, 놀라지 말게나. 무려 르비바흐 근처에서, 만드레이크가 수십 단위로 서식하는 군락이 발견되었다고 하네!”

죽어가는 노인도 벌떡 일으키고,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도 없어서 못 먹는다는 그 전설의 약초 말일세!

혼자 신이 나서 외쳐대는 볼크마에게, 댈런은 약간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이오?”

“정말이고말고! 나, 볼크마 갈리오스! 돈에 대한 소문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앞선다 자신할 수 있네!”

취기가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외치는 볼크마. 댈런은 살짝 굳은 표정으로 술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그걸 본 시에나가 관자놀이를 슬슬 문지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댈런, 헛소문일 수도 있어. 아니, 헛소문일 확률이 높아.”

“하지만 사실이기만 하면 일확천금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겠지! 알아두게나, 모든 기회에는 위험이 공존하고, 강력한 위험이 도사릴수록 더 달콤한 보상이 따른다는 걸 말일세!”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비운 술잔을 천천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그는 술잔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르비바흐의 만드레이크 군락이라.’

댈런은 알고 있었다.

취기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볼크마의 말대로, 이건 단순한 헛소문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사실 소문의 진위만 따지자면, 실상은 지금 퍼진 소문마저도 축소된 경향이 없지 않았다.

소문의 만드레이크 서식지에는, 수십 단위가 아니라 천에 가까운 만드레이크가 자라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댈런의 초점은 사건의 진위 여부에 있지 않았다.

‘이건 벌써 일어날 이벤트가 아닌데.’

이 사건이 단순히 만드레이크 풍년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

만드레이크는 체력과 마력을 증진시켜주는 전설의 약초.

그러나 동시에, 사람의 심장을 파괴하는 비명을 지르는 마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만드레이크가 천 가까이 모여서 만들어진 마경이, 저주받은 비명의 숲.’

대륙 한복판에 느닷없이 이 마경이 생겨나는 건, 게임이 중반부로 접어들어간다는 신호였다.

이건 천에 달하는 만드레이크의 비명이 근방 일대를 뒤덮고, 그 여파로 르비바흐라는 도시가 하루 아침에 주민들의 무덤으로 변해버리는 사건이자.

게임의 중반부 최악의 적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재의 마녀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는 전조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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