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48화 (48/288)

상행(3)

주술사가 쓰러지자 오크들이 순간 주춤했다.

놈들은 머리에 도끼를 꽂고 죽어버린 자신의 지휘관을 멀뚱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넘들이 도끼 날린다! 오크는 덜격! 덜격한다아!”

어눌한 발음으로 거대한 오크 전사가 외치자마자.

구어어어!

그 외침에 호응하듯, 오크 무리 전체가 전의를 불태우며 고함을 질러댔다.

두두두두―

삼백의 녹색 거체들이 지면을 진동시킨다. 놈들은 칼과 도끼를 치켜들고 대로를 미친 듯이 내달렸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들은, 대로를 막아선 거구의 전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살의로 번뜩이는 시선의 중심.

댈런은 적당히 마차들에서 떨어진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스릉―

그는 검을 뽑아 양손으로 쥐었다. 르베론이 흑철과 은철을 섞어 만든 검이었다.

마치 단단한 거목이 땅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지면을 굳건하게 딛고 선 두 발.

밀려오는 녹색 파도 앞에서, 댈런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습―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어깨에서 시작된 기운이, 손끝까지 내닿는 건 한순간.

휘익―

가로로 길게 그은 검격은, 녹색의 파도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쩌저저저정―!

오크들이 들이민 무기가 산산조각 나며, 금속의 폭풍이 되어 녹색 파도의 선두를 덮쳐들었다.

그워어어어!

피투성이가 된 오크들이 땅을 나뒹군다.

아무리 오크의 육신이 단단하다 해도, 쏟아지는 화살비를 견뎌낼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의 폭풍은 화살비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대 기사왕 중 한 명이 직접 창안했다 알려진 라판텔라의 분쇄검.

최하급이라지만 악마의 육신마저 갈아버린 그 검격을, 맨몸뚱이로 받아내고도 멀쩡한 오크는 없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꽈광!

판석을 부수고 섬전처럼 날아간 댈런의 신형이, 흐트러진 녹색의 물결을 그대로 파고든다.

콰직―

거칠게 휘두른 검이 거대한 오크의 허리를 단번에 토막 내고.

좌자자자작―!

한 박자 늦게 폭풍이 몰아치며, 허리 잘린 놈의 뒤에 있던 오크들이 죄다 갈려나간다.

콰지지직!

검격 한 번에 오크 다섯이 쓰러진다. 다음 일격에는 일곱이었다.

놀 전사장을 쓰러뜨리고 계승한 라판텔라의 분쇄검은, 악마와의 싸움을 거치며 실전에서도 자유로이 쓸 수 있게 되었다.

습―

들이쉬는 짧은 호흡.

팔을 내달리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안 그래도 무거운 검을 십수 배는 더 무겁게 만든다.

팔과 손목을 짓누르는 그 무게를 내질러, 어떤 방어도 뚫어버리는 검격으로 화하는 것이 분쇄검의 근본.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치는 것만으로도, 그 무기를 깨뜨리고 그 뒤의 상대마저 부숴버린다.

방어마저 곧 공격의 일부라 여기는 분쇄검의 묘리는 그런 의미였다.

콰르르르르!

검풍에 빗겨 맞은 대로에서 판석이 우르르 깨져나간다.

살과 피의 폭풍은 날카로운 돌조각의 폭풍이 되어 더 많은 오크들을 휩쓸었다.

아직 검술의 숙련도가 부족해 영역의 힘을 접목시킬 순 없으나, 만약 가능하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되는 위력.

그 압도적인 위력의 검술 앞에, 벌써 백여 마리에 달하는 오크가 시체가 되었다.

그어어어―!

눈앞에서 동족들이 죽어감에도 오크들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오크는 싸움 그 자체를 삶의 목표 중 하나로 삼는 종족.

동족들의 피와 살점을 뒤집어쓰는 것 정도로, 그들의 사기를 꺾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잉가아아아안!”

그리고 부하들이 맥없이 죽어나가는 걸 더 지켜볼 수 없었던 걸까.

여태껏 한 걸음 뒤에서 싸움을 관망하던 거구의 오크 전사가, 어눌한 발음으로 괴성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잉간! 죽이고 먹는다!”

후웅―!

거대한 칼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어온다.

삼 미터쯤 되는 오크의 덩치에, 성인 장정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의 조합.

그 무식한 힘과 질량의 일격은, 댈런이라도 맞으면 두 쪽 날 법한 기세였다.

댈런은 그 앞에서 숨을 깊게 들이쉬고, 두 손으로 잡은 검을 올려 그었다.

꽈아앙!

격검의 충격으로 발 아래 판석에 금이 가고, 은철과 흑철을 섞어 만든 검이 출렁거린다.

그 결과는 명백했다.

하늘 높이 들어 올려진 오크의 팔과 대검. 훤히 드러난 놈의 근육질 가슴팍.

올려 긋는 것보다 내려치는 힘이 배는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오크의 근력이 댈런에게 압도적으로 밀린 것이었다.

“이, 잉간, 거인의 힘···!”

“시끄럽다.”

콰직―!

댈런은 검을 비스듬히 내리그었다. 사선으로 쪼개진 오크의 상반신이 쿵 하고 지면에 떨어졌다.

구으······.

단 한 차례의 공방으로 죽어버린 지휘관. 오크들은 그제야 벌건 눈을 큼직하게 뜨고 주춤대기 시작했다.

댈런은 놈들을 보고 씩 웃었다. 그의 발이 피투성이 판석을 즈려밟았다.

그리고.

꽈아앙!

주춤거리는 녹색 물결 안으로, 전사의 신형이 다시금 파고들었다.

***

전투는 머지않아 끝났다.

댈런이 삼백에 달하는 오크를 몰살할 동안, 상행 앞쪽의 용병들 역시 방어선을 구축해 오크와 고블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막 정신이 맑아지고 힘이 솟고 하는 거! 그것도 성기사님이 가지신 문신의 능력인가요?”

“아니. 그건 전투기도의 힘이야. 성기사라면 누구나 전쟁의 신께서 내려준 신성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돕는 기도를 익히거든.”

댈런은 오크 시체를 뒤적이다 고개를 돌렸다. 마차 사이로 돌아나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하나는 파른이라는 소년 용병, 그리고 다른 하나는 루시아였다.

루시아 곁에서 신나게 떠들던 소년은, 댈런을 발견하고선 움찔하더니 입을 꼭 다물었다.

댈런은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덩치 큰 용병 삼촌보다는 예쁜 성기사 누나가 더 좋다 그거냐?

실없는 생각을 하는 그에게 루시아가 다가왔다.

“이 많은 오크들을 혼자 처리하신 겁니까?”

“오랜만에 몸을 풀 기회였소. 나쁘지 않더군.”

“···오크 수백 마리가 몸풀기라니. 댈런도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루시아는 어이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용병들 말로는 그쪽의 활약이 컸다고 하던데.”

“방어선을 지켜내는 전투는 성기사의 특기 아니겠습니까.”

오랜만에 자신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상단 앞쪽에서 벌어진 전투는, 사실상 루시아의 활약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성문신으로 스스로를 강화한 데 이어, 그녀의 전투기도가 용병들의 사기와 능력 전반을 끌어올린 것.

매번 댈런의 페이스에 휘말려, 고작 둘이서 강력한 다수의 적을 상대해야만 했던 미궁에서와 달리.

방금의 싸움은 그녀의 전투기도가 빛을 발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전투기도의 결정적인 장점이, 바로 대상 범위니까.’

전투기도의 기본 효과 자체는 약간의 사기 진작에 활력 회복 정도가 끝이었다.

그러나 다른 스킬들에 비해 조금 뒤떨어지는 효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대상 범위는 성기사의 전투기도가 사기 스킬 소리를 듣게 하기 충분했다.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에서 수천까지.

성기사의 능력에 따라 그 범위는 끝을 모르고 확대되곤 했으니까.

약간의 사기 진작 효과라도, 그 범위가 수백 이상이 되는 순간 효용성은 차원이 달라지는 법이다.

“성기사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성기사님.”

때문에 용병들은 루시아와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곤 했다.

루시아는 살짝 웃어보이며 그들의 인사에 답했다.

그때 오크 시체를 툭툭 발로 차보던 소년이 물었다.

“왜 대로에서 이런 마물들이 날뛰는 거죠?”

“음, 일단 오크는 마물이 아니야. 이들이 키우는 고블린만 마물이지.”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시아는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물들과 달리 오크의 고향은 대륙 북동쪽의 세계의 이빨 산맥이란다. 오크는 원래부터 악한 종족이 아니야.”

“하지만 사람을 죽이잖아요! 말도 어눌하게 하고요.”

“오크들은 원래 싸움을 좋아해. 그리고 이 오크들은 고향을 너무 오래 떠나있었어. 그 때문에 여러 부분이 퇴화했고,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습격하는 거지. 세계의 이빨 산맥에 사는 오크들은, 이들과 달리 능력뿐 아니라 지성도 더 뛰어나단다. 동부의 스타파 왕국이랑 무역을 할 정도로.”

스륵. 스륵.

부드럽게 머리를 문지르는 손길과,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고운 목소리.

쌍욕을 입에 달고 지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댈런은 무심코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을 들은 루시아가 푸른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봤다. 댈런은 뭐 어쩌라는 듯 뚱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봤다.

그렇게 잠시 있자, 루시아는 먼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마물의 활동이 정말로 확장되고 있기는 한가 봅니다. 오크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대로를 점거했다는 건, 원래의 세력권에서 밀려났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런가 보군.”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턱을 긁적이며 생각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해.’

사실 튜토리얼이 끝난 시점부터 몇 달간은, 대륙 곳곳에서 마물이 한 차례 준동하는 시기다.

흔히들 1차 침공이라 부르는 이 시기는, 제국과 왕국들이 각자 마물의 침공을 대비해 철저한 방비를 하는 기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각 나라들이 긴장감을 느슨하게 풀 즈음, 놈들의 대대적인 2차 침공이 전 대륙을 강타하지.’

마치 큰 지진 전에 작은 지진이 오는 것과 같은 모양새.

그러나 수백 회차에 이르는 댈런의 경험은, 오히려 지금의 준동이 작은 지진보다 큰 지진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1차 침공 때 이 오크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댈런은 이 오크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오크 주술사와 전사가 이끄는, 오백 정도 규모의 오크 부락.

도시연합 남서쪽의 산지에 자리 잡은 이 부락은, 본디 2차 침공 전까지는 한 번도 제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다.

그래서 플레이 초중반에 용병 길드 토벌 퀘스트 중 하나가, 종종 상인들을 털어먹는 이 부락에 쳐들어가 아예 씨를 말려버리는 것일 정도.

‘거기다 두 오크 대장의 능력을 봐도 절대 만만한 놈들은 아니지.’

비록 지금의 그에게 순식간에 목숨을 잃긴 했지만, 보통의 플레이에서 이 오크들은 만만찮은 강적이었다.

고인물인 댈런조차 토벌 퀘스트를 하다가 각각 한 번씩 목숨을 내어줬을 정도니까.

[어리숙한 용병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감각 +1]

[벼락을 부르는 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지능 +1, 마력 +2, 쏘아지는 번개(D)]

심지어 계승 보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마법사의 경우 꽤나 잘 성장한 캐릭터였다.

이런 존재들이 제 터전을 잃고 쫓겨났다는 건, 지금 마물의 준동이 댈런이 익히 알던 1차 침공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시사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군.’

댈런은 슬슬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일찍 활동을 시작한 건 재의 마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라는 변수의 파급력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전 대륙에 스며들고 있을지도 몰랐다.

“댈런! 다시 출발합니다!”

그때 루시아가 외쳤다. 그녀는 어느새 마차에 타는 중이었다.

댈런은 고개를 슬쩍 털고는 마차로 향했다.

대륙의 정세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는 차차 알아가면 되는 일.

당장은 눈앞의 일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

상행은 계속해서 대로를 따라 남하했다.

이들이 르비바흐에 도착한 건, 오크 습격이 있고서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아침부터 성문 앞은 수많은 인파들로 바글거렸다.

만드레이크에 대한 소문이 슬슬 퍼져나간 터라, 이 기회를 통해 한몫 잡고자 하는 상인들이 대륙 각지에서 몰려온 것이다.

덜컹덜컹! 쿵!

히히히힝―

때문에 성문 앞은 짐수레의 덜컹거림과 노새의 울음소리, 사람들의 고함이 끊이지 않고 울려퍼졌다.

그 시장통 분위기에 경비대는 검문을 반쯤 포기한 듯, 짐 검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사람들을 들여보내고 있었고.

물론 저들 독단으로 그러는 건 아닐 테였다.

아마 검문 자체보다 원활한 교통 흐름을 우선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겠지.

만드레이크에 대한 소문은 상인들뿐 아니라 도시 차원에서도 한몫 크게 챙길 수 있는 기회.

모여든 상인들에게서 걷히는 세금만 계산해도, 이 작은 도시 재정은 작년의 몇 배쯤 늘어날 전망이 보였으니까.

그렇게 갈리오스 상단의 호위 의뢰가 마무리된 곳은, 도시에서 가장 좋은 여관 1층의 주점이었다.

루시아와 함께 앉아 식사를 주문한 댈런은, 큼직한 맥주잔을 기울이며 주점을 둘러봤다.

여관 술집이 붐비기에는 조금 이른 점심때.

그러나 주점의 공기는 벌써 왁자지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륙 곳곳에서 온 상인들이 작은 술잔을 앞에 놓은 채 돈이 될 만한 정보를 교환하고.

그들의 호위로 온 용병들은 보수금으로 받은 은화를 털어서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해 떠들어댄다.

“으차, 늦어서 미안하네. 생각보다 정산이 오래 걸렸지 뭔가.”

그때 볼크마가 땀을 닦으며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그는 허리춤에서 주머니 두 개를 풀어 댈런과 루시아 앞에 각각 내려놓았다.

“여기 보수금일세. 두 사람 모두 2플로린 50실링. 원래 계약은 2플로린이지만, 오크와의 전투에서 두 사람 덕에 목숨을 건졌으니 조금 더 넣었네.”

“고맙소.”

댈런은 주둥이를 슬쩍 벌려서 주머니 안을 확인해보았다. 은화가 수북한 가운데 금화 두 개가 섞여 있었다. 그는 주둥이를 잘 묶어서 품에 넣었다. 루시아도 주머니를 챙겼다.

그 사이 볼크마는 도수 낮은 맥주 한 잔을 주문해 한 모금 마시고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자네들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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