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마녀(2)
“성기사다! 죽여!”
누군가 소리쳤다. 그 말에 흑마법사들이 와락 달려들었다.
젊은 여자의 눈에 붉은 기운이 요사스레 감돌고, 약방 노인은 몸에 숭숭 털이 돋아나더니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돌진한다.
“르카렘― 오브!”
“오투독사― 바사크!”
동시에 무형의 힘이 지하실의 흙바닥 위를 내달리고, 녹색의 벼락이 더벅머리 흑마법사의 손바닥에서 쏘아진다.
그 공세의 종점에서, 루시아는 로브를 풀어 집어던졌다.
성기사단의 문양이 수놓아진 갑옷 아래, 그녀의 드러난 피부에서 신성문신의 빛이 내뿜어지고.
스아아아―
새하얀 검신이 십자막이부터 검끝까지 신성력의 빛으로 뒤덮인 순간.
팟―
그녀의 신형이 쏘아졌다.
스가가가각!
짧은 순간 그려지는 수십 번의 호선.
짐승인간이 된 노인이 온몸을 난자당한 채 바닥을 뒹군다.
낭창거리는 채찍을 든 붉은 눈의 여자는 목과 심장에 뚫린 구멍에서 새빨간 피분수를 뿜어댔다.
방패를 들어 무형의 힘을 걷어내고, 신성력 머금은 검끝으로 녹색 벼락을 엮어 뿌리치는 루시아.
곧장 쇄도하는 그녀의 앞에서, 두 흑마법사는 다음 주문을 외워내지 못했다.
“괴, 괴물!”
“살려줘! 도망쳐!”
넓은 방 안의 흑마법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간다.
말 그대로 학살당하는 놈들을 보면서도, 댈런은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마법사라는 호칭과 주문을 사용한다는 점 때문에 세간에서는 얼핏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애당초 이 세계의 마법사와 흑마법사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흑마법사는 마법사가 아니라 사교도 쪽에 더 가깝지.’
마탑에 소속되어 대대로 전승되는 주문을 익히는 마법사와는 달리, 흑마법사는 악마와 계약을 맺고 거래를 해 힘을 얻는 이들.
악마가 인신공양 없이는 거래에 응하지 않는 족속이라는 걸 생각하면, 놈들이 얻은 힘의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는 불 보듯 뻔하다.
결국 흑마법사란 작자들이 불법 마약상 내지 인신매매범의 직업으로 음지에 숨어드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저들끼리 작은 공동체를 구성한 눈앞의 흑마법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놈들이 악마의 이름을 외며 시전하는 주문이나, 뒤틀린 육신으로 얻게 되는 초인적인 신체능력 역시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얻어낸 보상이었을 테니까.
그런 쓰레기들을 학살하는 데는 일말의 죄책감도 필요하지 않은 법이다.
“끄아아악!”
루시아의 검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흑마법사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넓은 방 안은 흑마법사의 시체로 가득했다.
남은 건 돗자리를 깐 대머리와 솥을 저어대던 산발머리 여자 두 명.
검에서 피를 털어낸 루시아가, 놈들을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푸욱!
“커어억···!”
산발머리 여자가 치켜든 단검이, 대머리 동업자의 가슴팍을 등 뒤에서부터 꿰뚫는다.
“이, 이······!”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돌려,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여자에게 뭐라 말하려 하는 대머리 흑마법사.
산발머리 여자는 그 중얼거림에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곧장 단검을 크게 비틀며 뽑아냈다.
“커헉!”
피를 쏟으며 털썩 쓰러지는 흑마법사의 시체.
쯔아아악―
그 꿰뚫린 가슴팍에서부터 음침한 마력이 꿈틀거리며 빚어지고.
뚜렷한 어둠의 형상을 갖춘 마력이 순식간에 대머리의 몸뚱이를 집어삼켰다.
“흐흐흐. 나를 이런 허접한 새끼들이랑 동급으로 생각하면 곤란하지.”
산발머리 여자는 음산하게 웃으며 단검을 세우고, 마치 기도하듯 두 손으로 모아쥐었다.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사람을 희생물로 바쳐버린 그녀는, 단검을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칼카스― 쎄 글램!”
콰자작!
허공이 마치 유리가 깨지듯 이지러진다.
불길한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그 일그러짐 사이로 새어나온다.
산발머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흑마법의 길은 손쉽게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만큼, 어중이떠중이들이 수없이 많은 것 또한 사실.
그런 어중이떠중이와 진짜 흑마법사의 차이는, 지옥문의 편린만이라도 열어젖힐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
지옥문의 아주 작은 편린이었으나, 그걸 열어내는 데 소요된 제물은 고작 한 명의 목숨.
그것만으로도 이곳에 모인 흑마법사들 중, 그녀를 따라갈 실력자가 없다는 말은 사실이리라.
스으으······.
박리된 공간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건 푸른빛의 사슬이었다.
음침한 냉기로 둘러진 사슬 가닥들은, 살아있는 뱀처럼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칼카스의 사슬이시여! 저 성기사를 휘감으소서!”
산발머리 여자가 소리쳤다.
댈런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가까스로 도끼를 뽑지는 않았다.
저 주문쟁이의 머리에 당장 도끼가 자라나게 할 수 있음에도, 그가 멈춘 건 루시아 때문이었다.
‘지금 루시아 카스타챌드에게 가장 부족한 건 실전 경험이다.’
루시아 카스타챌드.
미래에 악마 살해자라 불릴 영웅.
떡잎부터 남다른 그녀는, 수습기사임에도 심문관의 자리에 임명될 정도로 재능이 출중한 인재였다.
그리고 미궁에서부터 수많은 실전을 겪으며, 그녀의 검술과 능력은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는 바.
지금 그가 끼어드는 건, 먼 미래를 내다볼 때 오히려 패착이다.
루시아 카스타챌드가 악마 살해자로 빚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난관을 돌파하는 경험이 더 많이 필요할 테니까.
“그냥 어쩌다 흑마법에 빠진 애송이들인 줄 알았는데, 악마까지 불러내는 흑마법사였어?”
그리고 수습기사는 댈런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거 완전 씨발년이었잖아?”
화르륵!
루시아의 검에 맺힌 신성력이 불꽃의 형태로 타오른다.
신성문신에서 거세게 뿜어지던 빛이 은은하게 잦아들고, 백염으로 타오르는 검은 각진 방패 위에 비스듬히 뉘어졌다.
“곱게 죽을 생각은 마.”
두 눈을 둘러싼 신성문신이 빛을 발한다.
발 아래 돌바닥에 쩌적 하고 금이 갔다.
쐐애애액―!
푸르른 사슬이 그녀의 코앞까지 다다른 순간, 그녀가 있던 자리에 흐릿한 잔영만이 남았고.
쩌어엉!
지옥의 냉기를 흘려대던 사슬 가닥들이, 굉음과 함께 잘려나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 어떻게 칼카스의 사슬옥좌에서 나온 사슬을···캬아악!”
산발머리 여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쩍 갈라진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어느새 화살처럼 쏘아진 루시아가, 산발머리를 지나치며 백염을 품은 검으로 그 가슴팍을 길게 그어버린 것.
갈비뼈가 잘리고 그 안의 폐와 장기가 다 드러나는 상처.
상흔을 따라 타오르는 백염이, 그 안으로 파고들며 희생자의 몸뚱이를 안에서부터 태워갔다.
“꺄아아아아아!”
넓은 지하실에 비명이 울려퍼졌다. 하얀 불은 곧 흑마법사의 전신으로 번져갔다.
간악한 사교도나 흑마법사, 혹은 기사단의 배신자를 처벌할 때나 쓰이는 단마의 백염.
죽는 그 순간까지 작열의 고통을 약속하는 불꽃은, 흑마법사들이 성기사를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파스스······.
산발머리 흑마법사는 검은 재가 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술사가 죽자 이 세계와의 연결고리가 사라진 지옥문 역시 스르르 사라졌다. 푸른빛의 사슬도 한 줌의 먼지로 화해 증발했다.
“후우.”
루시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녀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댈런에게 고개를 돌렸다.
댈런은 그제서야 도끼머리에 얹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가 말했다.
“검이 늘었군.”
루시아는 말없이 배시시 웃었다.
***
르비바흐의 흑마법사, 한스 징글러는 머리가 아팠다.
마치 전날 독주를 병째 위장에다 들이붓고, 아침까지 찬바람을 맞으며 홍등가에서 곯아떨어진 느낌이었다.
“신성력으로도 치유가···몸속에 스며든 악마의 마력이······.”
“···필요 없소. 어차피······.”
그런 그의 귓가로 어떤 목소리들이 들렸다.
심금을 울리는 여자의 미성과, 낮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한스는 흐릿한 눈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왠지 입안 전체가 욱신거리면서 묘하게 허전했다.
“으음, 무, 무르 조므······.”
“마침 일어났군. 아가리 벌려라, 새끼야.”
“우읍···!”
입에 병 주둥이가 거칠게 틀어박힌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입안으로 어떤 액체가 왈칵이며 쏟아졌다.
한스는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입이 왜 허전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호구 손님이라 생각했던 거한의 손찌검에, 그의 입안이 터지고 이빨이 죄다 빠져버렸던 것.
그리고 방금 입안에 쏟아진 액체의 냄새는, 옆집 약방에서 노인이 허구한 날 만들어대던 싸구려 재생 포션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흑마법사는 지하실이 떠나갈 듯 비명을 질러댔다. 댈런은 그걸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보시오. 효과 직방이지 않소.”
“······그게 재생 포션이 아니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러면 뒈졌겠지. 뭐 어떻소. 흑마법사 하나 편하게 처리한 셈 치면 되는 거지.”
루시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댈런은 낮게 웃었다.
물론 마지막 이야기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노인의 약방에서 재생 포션이 몇 번째 칸에 있는지, 그 약병이 어떤 모양인지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다 이야기하는 건 오히려 설명할 거리를 더 늘릴 뿐이다. 이럴 땐 대충 넘어가는 게 편했다.
“끄으으······.”
그 사이 찢어진 입안을 다 회복한 흑마법사가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턱을 죄다 부수고 치유했음에도, 놈의 치열은 여전히 뻐드렁니였다. 이거 포션 가지고는 교정이 안 되나 보군.
“혹시 서, 성기사단에서 보내셨소?”
뻐드렁니는 시체가 된 동업자들과 루시아의 갑옷을 흘끔거리며 물었다. 처음보다 훨씬 공손해진 말투였다.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체 무슨 일로···.”
“마녀를 만나러 왔다.”
뻐드렁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분은 여기 안 계시오.”
“어디 있는데?”
“르비바흐 숲에 계시오. 그, 약초 많기로 유명한 그 숲 말이오.”
“숲이라. 거기에 아예 자리 잡았다는 거군.”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숲에 있는 것 정도는 반쯤 예상하고 있었다.
만드레이크가 대량으로 발견되어 상인들이 몰려드는 시점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악신과의 거래를 진척시키고 있을 무렵.
지금쯤 그녀는 숲 한가운데 있는 악신의 제단 곁에 머물며, 주기적인 인신제사와 함께 악신과의 협상을 이어가고 있을 터였다.
댈런은 뻐드렁니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가 말했다.
“마녀가 숲에서 안 나온 지 얼마나 됐지?”
“보름쯤 되셨소.”
“그럼 그동안의 제물은 너희들이 공급하고 있었겠군.”
뻐드렁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동자가 순수한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한때 동업자였던 그마저도 그 노파가 마녀라는 걸 알게 된 건 한 달이 채 안 되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온 것인지. 눈앞의 야만인과 성기사는 뭘 하는 사람들인지.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들이 오갔다. 죽어버린 동업자들의 시체와 아직 욱신거리는 입안 때문에 그 혼란은 배가 되었다.
“제물. 어떻게 공급하지?”
그러나 야만인의 낮은 목소리와 무감정한 검은 눈을 마주한 순간, 그 질문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죽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살고자 하는 갈망.
그 갈망이 뻐드렁니로 하여금 입을 열게 만들었다.
“···우리뿐 아니라 몇몇 공동체들이 순번을 돌아가며 매일 산 제물을 데려가고 있소. 약으로 절이거나 돈으로 꿰어서. 용병이면 호위 의뢰라고 포장해서 숲 깊은 곳으로 이끌고 들어가오.”
“마녀의 결계가 있을 텐데.”
“마녀가 우리에게 준 징표가 있소. 일종의 토템인데, 그걸 가지고 정해진 길을 따라 들어가면 숲에 걸린 주문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소. 만약 길을 잘못 들거나, 징표를 몸에서 떼어놓는 순간 그 사람은 주문에 공격받아 갈가리 찢겨나가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그렇군.”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허리춤에 걸린 도끼에 손을 턱 얹고는 말했다.
“살아나갈 기회를 주지. 우리를 제물로 위장해서 그 숲으로 안내해라.”
***
뻐드렁니 흑마법사의 제물 상납일은 마침 다음날이었다.
댈런과 루시아는 하루 동안 놈을 잡아두고, 다음날 밤 함께 르비바흐 숲으로 떠났다.
슬슬 늦겨울로 접어드는 계절. 남쪽 지방은 벌써부터 밤공기가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전날 밤에 내린 눈은 쌓이기는커녕 순식간에 녹아들어, 숲의 초입을 약간 질척이는 늪지 비슷하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흙과 썩은 낙엽이 습기를 머금고 발 아래서 부스러진다. 가죽 부츠는 순식간에 발목즈음까지 흙투성이가 되어버렸다.
뻐드렁니는 숲 안쪽으로 한 시간쯤 걸어들어간 끝에 멈춰섰다. 놈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마녀의 주문 안으로 들어갈 거요. 미리 준 토템···잃어버리지 않게 주의하시오.”
뻐드렁니는 혼란스런 표정이었다. 사실 그는 이제 자기가 뭘 하는지도 헷갈릴 지경일 테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작은 도시에서 평범하게 사람들 등쳐먹고 사는 애송이 흑마법사였던 그다.
느닷없이 마녀의 하수인이 되어, 자기가 평생 죽여본 사람보다 더 많은 숫자를 제물로 끌어다 바친 게 한 달 사이 일이었고.
그런데 이제는 그 마녀를 죽이겠다는 야만인과 성기사를, 마녀의 심처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어 있었다.
“눈을 왜 굴리지?”
“아, 그, 그게.”
물론 댈런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흑마법사의 사정 따위 고려해줄 마음이 없었다.
그는 멍하게 선 뻐드렁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앞장서라.”
“아, 알겠소.”
뻐드렁니는 한숨을 푹 내쉬고 걸어나갔다. 댈런과 루시아는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원래 르비바흐 숲은 그렇게까지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숲이 아니었다.
때문에 오늘처럼 달이 밝은 날이면, 숲 안쪽으로 들어가도 그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밤하늘에서 달과 별들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 대신 하늘을 가득 메운 건, 탁한 잿빛의 어떤 음습한 기운.
미세먼지 가득하던 서울의 하늘을 떠올리던 댈런은, 문득 느껴지는 진동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댈런은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그의 등에는 천에 감싼 채 사슬로 매어둔 성검이 있었다.
악마에게 신성력을 상실한 성검.
그 성검이 희미하게 진동했다.
“성검이 떨리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