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마녀(4)
“마침 잘 됐어.”
마녀가 말했다. 그녀는 머리에서 도끼를 뽑아들어, 더러운 쓰레기를 버리는 모양새로 댈런의 발치에 휙 던졌다.
쩍 갈라졌던 머리는 금세 스르르 붙었다. 마녀는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올렸다.
주름지고 뒤틀린 손가락이 각각 끝과 끝을 맞대며 기묘한 문양을 그려냈다.
“안 그래도 혼자 있기 적적해서 손님을 하나 초대할 생각이었거든. 기사님을 아주 좋아할 손님이야.”
낮고 빠른 주문이 마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녀의 손이 빠르게 수인을 맺어냈다.
공터가 어둠에 덮이는 듯하고, 어떤 음산한 바람이 제단을 중심으로 휘몰아친다.
루시아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제단 위에 놓여있던 제물이 허공으로 스르르 떠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사특한···!”
그건 사람의 팔을 잘라, 나뭇가지로 왕관을 만들듯이 둥글게 엮어놓은 상징물.
백수십 개의 손가락들이 서로 엮이며, 각기 신을 모독하는 글자를 그려내고 있는 기괴한 토템이었다.
화륵!
그 상징물에 녹색 불꽃이 피어나고.
동시에 제단 위의 공간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쩌저적―!
검붉은 빛으로 일렁이는 공간의 틈.
유리처럼 깨져나가는 공간은 이내 뚜렷한 형태를 갖추고, 검붉은 타원형의 포탈을 형성한다.
크르르르···.
지옥문 너머에서 푸른 사슬을 온몸에 두른 집채만한 개 두 마리가 걸어나왔다.
두 눈이 귀화로 타오르는 지옥견들은, 루시아를 바라보자마자 침을 뚝뚝 흘리며 몸을 낮췄다.
“사슬옥좌의 주인, 칼카스가 애지중지 키우는 사냥개들이야. 너처럼 어여쁜 성기사의 살점과 피를 가장 좋아하단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었다. 악마는 아니어도 상급 마물쯤 되는 놈들이었다.
성전사 열둘과 수습기사 둘, 정식 기사로 이루어진 성기사단의 정규 전투단이 나서도 상대하기 힘겨울 법한 존재들.
물론 수습기사인 루시아 카스타챌드 역시, 평범한 성기사의 무력을 이미 한참 전에 뛰어넘은 인물이었다.
댈런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상대할 수 있겠소?”
“···금방 끝내겠습니다.”
루시아가 신성문신에서 빛을 뿜어내며 말했다.
그녀의 대답에서 가감 없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럼 이번에도 등을 맡기겠소.”
댈런은 낮게 웃으며 발치의 도끼를 집어들었다. 그는 마녀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늙은 마녀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히죽거렸다.
“끌끌, 나도 여자보다는 자네 같은 근육질 남정네랑 뒹구는 게 좋아. 북부 어느 지방 출신이야?”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가짜 마녀와 드잡이질을 해봐야, 진짜는 아무 타격이 없고 피로만 쌓일 뿐이었다.
그는 그저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눈을 반개한 채, 이제는 익숙해진 심상 너머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깎아지는 벼랑과 가파른 비탈길. 눈보라가 가라앉은 설산의 정경.
휘이이― 화륵!
오두막 주위에는 화염과 냉기가 휘몰아치며 서로의 꼬리를 잡으려 들었고.
파지직!
그 사이에서 이따금씩 스파크가 튀어오르며 작은 존재감이나마 과시하고 있었다.
두근.
심박처럼 맥동하는 지면과, 설산 곳곳에 뿌리박은 갑주처럼 매끈한 돌덩이들.
하늘 저 끝은 타오르는 듯 붉었고, 반면에 이쪽 하늘 대부분은 휘몰아치는 강풍으로 가득하다.
상단을 호위하며 그는 매일같이 이 세계를 들여다보고, 또 연구했다.
그 끝에,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영역이라는 개념은, 존재의 힘을 담아두는 그릇.
필멸자의 육신에 차마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그 존재의 의지를 통해 빚어진 세계 이면의 그릇에 담기는 기적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댈런의 영역에서 가장 큰 힘은 붉은 하늘에서 내리는 불의 비도, 모든 걸 분쇄할 기세로 몰아치는 강풍도 아니었다.
쿠르릉.
바로 하늘을 가르는 우렛소리.
그 우렛소리가 심장을 저릿하게 울리고, 마치 당장 던져달라는 듯이 손안의 도끼가 부르르 떨린다.
“노인의 질문에 입을 꾹 닫고 있다니. 밥상머리 예절부터도 그랬지만, 예의가 단단히 부족한 놈팽이구나.”
“예의는 개뿔. 초면에 패드립부터 박은 새끼가.”
“패···뭐?”
댈런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반개한 눈을 완전히 떠, 잿빛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숲 위의 하늘을 뒤덮은 희뿌연 회색빛의 향연.
약에 절여진 산 제물들은 하나같이 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마녀의 분신체 역시 저곳에서 빚어져 떨어졌다.
달과 별을 가린 저 하늘의 그림자는, 단순히 밤하늘에 칙칙하게 낀 구름 같은 게 아니었다.
저건 혈통의 힘과 주문의 집약체이자, 물질계에 실체화된 마녀의 영역.
동시에 마녀가 스스로의 몸을 숨긴 은신처였으니까.
우우웅―
댈런의 검은 눈동자가 마치 짐승의 눈처럼 번쩍인다.
마침내 처음으로 숙련도 백 퍼센트를 찍은 야간 시야가, 영역의 힘을 빌려 그 눈동자에 짧은 순간 깃든 것.
단순한 능력치나 스킬을 초월한 시선이, 잿빛 하늘 사이로 꾸물거리는 음영을 포착해낸다.
[마녀를 스토킹한 성전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힘 없는 약초꾼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정의롭고 용감한 전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소리 없는 암살자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 형태를 명확하게 인식한 순간, 하늘 저편에서 주르르 나열되는 알림창들.
댈런은 꿈틀대는 음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심상 속 우렛소리에 맞춰 손 안의 도끼를 떠나보냈다.
“아, 안 돼!”
가짜 마녀가 외쳤다. 때늦은 외침이었다.
번쩍―!
댈런의 주변에서 뒤틀린 마력이, 손을 떠난 도끼에 휘감기며 거대한 빛줄기로 화하고.
우르르릉!
한 발 늦게 따라온 뇌성이, 공터 주변의 나무들을 뒤흔들었다.
***
잠시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화는 땅에서 하늘로 쏘아올려진 빛줄기와 우렛소리의 여파가 가라앉을 즈음 나타났다.
잿빛 하늘이 꿈틀거리더니, 그 품에서 작은 덩어리를 스르륵 흘려낸 것이다.
철퍽!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 곤두박질친 잿덩어리.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하늘거리는 잿빛의 천으로 온몸을 몇 겹씩 두른 젊은 여성이었다.
“쿨럭! 컥!”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하며 비틀거리는 여성. 어깨부터 골반까지 길게 그어진 상흔에서 왈칵이며 피가 솟구쳤다.
그녀의 머리 위에 고정된 알림창들을 보며 댈런은 어깨를 휘휘 풀었다. 이거 보스몹 본체 한 번 보기 힘드네.
“흐으, 방심했구나. 설마 영역을 일궈낸 전사일 줄이야.”
재의 마녀는 작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분신체였던 노파가 한 줌 먼지가 되어 가느다란 손끝으로 빨려들어갔다.
곧이어 잿가루가 스르르 상처를 뒤덮어 일시적으로 봉합했다.
작은 우렛소리와 스파크가 끊임없이 튀어올랐기에, 단순한 봉합일 뿐 완전한 재생은 아니었으나.
“후우.”
힘겹게나마 탄성을 내뱉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운 마녀의 모습을 보니 임시방편 정도는 되는 모양이었다.
“에낙사구스여. 약속대로 힘을.”
주름 하나 없는 얼굴로 악신의 이름을 읊조리는 마녀.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 부릅뜬 노란 눈에서, 녹색의 불꽃이 번들거린다.
저건 마녀가 이미 악신의 힘을 일부 하사받았음을 내보이는 증거였다.
거기에 하늘의 일그러진 마력과 그녀의 주변으로 기이하게 뒤틀리는 공간은, 마녀 역시 스스로의 힘을 갈고닦아 영역을 이뤄낸 존재이기에 나타난 현상.
패래래랙―콱!
뒤늦게 공터 한 귀퉁이에 떨어진 도끼가 서서히 재로 변하는 걸 확인한 댈런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검을 뽑아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바가 아니다.
힘을 온전히 깨우치지 못했어도, 재의 마녀는 최하급 악마 정도는 뛰어넘는 강적.
일격에 처치할 수 있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다행히 폭증한 체력 능력치 덕에, 영역을 사용했음에도 그 여파는 팔다리가 살짝 뻐근한 정도였다.
스릉.
댈런은 검을 뽑아들었다. 짧게 호흡을 들이쉬고, 양팔에 분쇄검의 기운을 둘러낸다.
그 사이 마녀도 재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낮고 빠른 단어들로 주문을 외며, 몸을 공중에 붕 띄워 순식간에 거리를 벌려낸다.
댈런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대사도와의 결전 이후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싸움이었다.
저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담아, 통나무 같은 다리가 지면에 발을 쿵 구른 순간.
콰아아앙!
있던 자리의 땅을 폭발시키며, 전사의 신형이 사라졌다.
***
와지끈!
장정 두 명의 품을 넘어서는 아름드리나무가 팽그르르 넘어간다.
꽈르릉!
우렛소리와 함께 몰아친 광풍에, 이끼 덮인 커다란 바위가 산산히 부서져 흩어졌다.
우르르 튀어오르는 돌조각과 먼지. 댈런은 검을 고쳐쥐었다.
제단이 있던 공터는 영역을 이룬 두 초인이 싸우기에 좁은 전장이었다. 싸움이 숲 속까지 이어진 건 필연적.
그리고 사방에 뿌리내린 덩굴과 나무들은, 마녀가 스스로의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장애물이 되어주었다.
‘어디 있나.’
심상 너머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영역의 힘을 끌어와, 번뜩이는 두 눈으로 사방을 훑어낸다.
전방위로 뻗어가는 그의 감각이,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 마녀의 기척을 쫓았다.
스륵!
나뭇가지에 천자락이 스치는 소리.
댈런은 곧장 검을 휘둘렀다.
콰르르르―!
광풍과 함께 땅의 흙이 우르르 솟아오르고, 경로에 있던 나무들이 와지끈 부서졌다.
“이런 무식한!”
그 끝에 있던 사람의 신형. 하늘거리는 잿빛 천으로 온몸을 감싼 여인은 빠르게 수인을 맺고 몸을 던졌다.
슈르르륵―
그녀가 손을 뻗자 하늘에서 잿가루가 쏟아진다.
분쇄검의 여파로 밀려오는 돌과 나무의 파편이, 그 잿가루의 파도와 충돌하며 원래의 방향에서 빗겨나갔다.
땅바닥을 구르며 그 남은 여파마저 피해낸 마녀는, 다시 공중에 몸을 띄우며 댈런을 돌아봤다.
“···어디?”
북방인 전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시야에 담긴 건, 분쇄검의 여파로 쓰러진 나무들과 땅에 파인 고랑뿐.
콰득!
문득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그제야 전사가 보였다.
몸을 거꾸로 뒤집어, 높게 솟은 나무에 발을 디딘 채.
당장에라도 이쪽으로 쏘아질 것 같은 기세로.
“이런 씨발!”
콰지직!
마녀가 몸을 날렸다. 나무를 박살내고 쏘아진 댈런의 신형이, 곧바로 그녀가 있던 땅에 처박혔다.
꽈르릉!
우렛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섬광.
영역의 힘이 방출되며 마녀가 있던 자리에 수 미터 깊이의 구덩이가 파이고, 뿌연 돌가루와 먼지가 연막처럼 구덩이를 덮었다.
“크으···!”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낸 마녀가 손끝을 까딱인다.
이곳은 공터 주변의 숲속. 그녀가 안배해둔 온갖 함정과 주문으로 가득한 공간.
쉬쉬쉭!
별다른 영창도 필요없이, 그녀의 의지와 작은 손동작만으로 가시 돋친 넝쿨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바윗덩이가 제 몸을 일으킨다.
쐐애액―
쿠르르르!
뿌연 먼지 속에서도 뚜렷한 전사의 존재감을 향해, 수십 가닥의 넝쿨과 집채만한 바위덩이가 제 몸을 굴려내고.
꺄아아아아아―
미리 마력을 심어두었던 만드레이크가, 땅에 박혀있던 고개를 스스로 내밀고 전사를 향해 비명을 질러댔다.
“크읏!”
악신에게서 만드레이크의 비명에 대한 내성을 얻었음에도, 잠깐이지만 눈앞이 어지럽다.
마녀는 눈을 녹색으로 번뜩이며 중심을 잡았다.
함정들이 벌어놓은 여유가 그녀의 마지막 기회였다. 얇고 길다란 손가락들이 가까스로 수인을 맺어냈다.
“에낙사구스여―!”
잿빛 하늘을 향해 마녀가 손을 뻗었다.
그 손길에 따라 하늘에서부터 녹색의 잿바람이 휘몰아치고.
나뭇가지 사이를 타고 내려온 잿바람이 지면 위를 낮게 내달린다.
파스스스―
그 지나간 자취에 있던 나뭇가지와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가 전부 재로 변해 흩날렸다.
‘이겼다.’
마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진짜 힘은 주문보다는 이능에 가까운 혈통의 힘.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리는 재의 저주야말로, 그녀가 타고난 힘의 진가라 할 수 있었다.
후르르르!
잿바람이 연막 안으로 파고든다. 전사는 여전히 그 안에 있었다.
가시덩굴과 바윗덩이가 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내, 짧은 순간이나마 전사의 발을 붙들어놓은 것.
“···좋은 싸움이었다. 전사야.”
잿바람이 구덩이를 뒤덮는 것을 확인한 마녀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나무에 기댔다.
아무리 영역을 일궈냈다 해도, 성기사나 사제의 신성력이 아닌 이상 저주를 이겨낼 수는 없다.
그리고 원래라면 재의 저주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직접 목표의 몸에 징표를 새겨야 했으나, 악신의 힘으로 그 한계를 부순 결과물이 바로 저 녹색 잿바람이었다.
말하자면 이 힘을 사용할 여유가 생긴 순간부터, 이 싸움의 승패는 갈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흐흐흐. 만드레이크의 비명마저도, 시련을 극복한 순간에는 마치 축가처럼 들리는구―”
그 순간.
휘이이이― 콰직!
구덩이에서 날아온 큼직한 방패가, 비명을 지르던 만드레이크를 두 동강내고 땅에 박혔다.
마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가라앉아가는 먼지 너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천천히 가라앉는 먼지구름 너머, 전사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존나 시끄럽네. 밥상머리 예절 운운하더니 먹는 산삼으로 장난치는 건 뭐 하자는 거냐?”
“···어떻게?”
후웅―
난데없는 바람이 뿌연 먼지를 쓸어간다.
드러난 구덩이 안쪽, 덩굴의 잔해와 바위 조각은 지금 순간에도 서서히 재로 변해 사라져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우뚝 선 전사는 저주 따위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보였다.
아니, 재의 저주는 분명 전사에게도 먹히고 있었다.
녹색 잿가루들은 그의 갑옷을 부식시키고, 그 안의 피부에까지 들러붙어 갉아먹는 중이었으니까.
치이이······.
전사는 저주를 피해간 게 아니었다.
반대로 그의 피부와 근육, 점막 조직들 모두 파괴되는 즉시 재생되고 있었을 뿐.
마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필멸의 인간이···불멸하는 용의 피를 품은 거지?”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뻐근한 목을 휘휘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푸후.”
“아, 아니야. 아무리 그렇다 해도 버틸 수는 없다. 한낱 필멸자에게···용의 피는 허용되지 않는 힘. 그 피는 네 기력을 급격히 소진시키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만들 것이야.”
마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댈런은 픽 웃었다.
어벙한 어조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원래라면 그랬겠지. 질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재의 마녀는 강력했다.
그리고 그런 마녀의 능력 중에도 가장 까다로운 게 바로 재의 저주.
인간을 향한 마녀의 원한이 담긴 이 저주는, 마녀가 징표를 새긴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최악의 능력 중 하나였다.
‘심지어 마녀를 죽이거나 신성력으로 저주를 몰아내는 게 아니라면, 해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그리고 그 저주는 마녀가 악신 에낙사구스의 힘을 얻은 뒤, 한층 강화된 형태로 재탄생한다.
인장을 새길 필요도 없이, 닿기만 해도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녹색 잿바람의 형태로.
재의 마녀가 중반부 최악의 보스 중 하나로 이름을 떨치게 된 데에는, 이 정신 나간 능력의 영향도 막대한 바.
사실 댈런의 원래 계획은, 그녀가 이 능력을 손에 넣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었다.
‘설마 벌써 악신에게 이 정도까지 힘을 얻어낼 줄은 몰랐지. 아니, 사실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기는 하다.’
지옥의 존재들은 대가 없이 힘을 내주지 않는다.
그리고 마녀가 지금까지 바친 제물들은, 채 수백도 되지 않는 숫자.
원래 마녀가 악신의 힘을 얻고 재의 저주를 강화시키는 건, 만드레이크의 비명을 이용해 수천의 제물을 바친 뒤였다.
때문에 지금 마녀가 가진 힘은 정황상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에서도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났으니까.’
댈런은 손을 들었다. 손잡이만 남은 검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잿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갑옷의 팔 부분이 스러지고, 파괴와 재생을 거듭하는 살갗이 공기에 노출되었다.
우웅―
그렇게 들어올려진 손이 움켜쥔 것은, 등 뒤에 메인 채 작게 울리는 검의 손잡이.
마녀의 녹색 잿바람이 그를 덮친 순간, 잠잠하던 성검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사삭―
성검을 감쌌던 천이 바스라지고.
검집 대신 검신을 두르고, 댈런의 등허리에 메어졌던 사슬이 잿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두터운 손이 성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자마자, 청명한 기운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저주의 마력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서, 성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마녀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우르르릉.
녹색 재를 완전히 떨쳐낸 댈런이, 심상 너머의 우렛소리를 들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우르르르―
댈런은 문득 눈을 들었다.
우렛소리는 심상 저편에만 있지 않았다.
잿빛으로 꾸물대던 하늘 한가운데.
잿빛 기운이 꿈틀대며 물러나고, 구름 덮인 밤하늘이 그 구멍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르릉.
내면의 우뢰가 진동한다.
우르르르!
그에 화답하듯, 밤하늘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울려퍼졌다.
댈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몸의 사지 말단부까지 청명한 기운이 내달리며 생기를 채워낸다.
두 손으로 검 손잡이를 쥔 그는, 머리 위로 성검을 가만히 치켜들었다.
쉬익―!
그가 내면의 우렛소리와 함께 마녀를 향해 검을 내려친 순간.
꽈르르르르!
밤하늘의 먹구름도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천둥이 숲으로 쏟아내고.
번쩍―!
동시에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거대한 빛의 기둥이, 하늘에 뚫린 구멍을 비집고 마녀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작가의 말
“댈런. 이제 와서 말하기 좀스럽게 느껴지지만,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모닥불을 앞에 두고 루시아가 말했다. 막 노릇노릇 구워진 노루 다리를 베어물려던 댈런은, 군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뭐요?”
“성검을 향해 귀신같다고 했던 말, 성기사 앞에서 굉장히 무례한 발언입니다.”
···내가 그랬나?
머리를 긁적여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재의 마녀를 처리하러 가던 르비바흐 숲속에서. 진동하던 성검이 루시아가 손을 대는 순간 멈춘 걸 보고 그렇게 말했더랬다.
빌어먹을 지능 수치. 그런 건 또 왜 기억하고 있는 건데.
“엄연한 신성모독입니다, 그거.”
루시아는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댈런은 괜히 코를 문질렀다. 그는 노루 다리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미안하게 됐소.”
“진심을 담은 사과를 원합니다.”
댈런은 코를 긁적였다. 그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러나 눈앞에서 기름기를 뚝뚝 흘리는 노루 다리와, 지금껏 먹어온 루시아의 요리, 그리고 앞으로 남은 여정동안 그녀의 손을 거쳐 탄생할 수많은 진수성찬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사과하겠소. 내가 잘못했소.”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루시아는 표정을 풀고는 후추통을 들었다.
그녀는 기름과 버터를 두른 노루 가슴살에 후추와 향신료로 범벅을 하더니, 불 위에 얹어진 노루 다리를 슬쩍 밀어내고 한가운데에 가슴살을 얹었다.
치이이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익기 시작하는 노루 고기. 루시아는 그걸 불 위에서 천천히 돌리다가, 문득 댈런을 보고 물었다.
“···혹시 눈앞에 먹을 게 있어서 사과한 건 아니겠지요?”
댈런은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하고는, 입에 있는 고기를 마저 꼭꼭 씹어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그럴 리가. 이래 봬도 성검의 인정을 받은 전사 아니오. 믿어주시오. 우린 같은 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시발, 맛있는 밥 한 번 먹기 힘드네.
“방금 속으로 욕하셨습니까?”
“···무슨 소리요. 고기가 참 맛있다고 생각했소.”
“다행이네요. 많이 드세요.”
***
어제 올리려던 외전인데, 오늘자에 대한 스포가 다소 포함되어 있어서 하루 늦게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