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마녀(5)
쩌저적―!
지면이 얼어붙는다. 그 위에 자라던 풀과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살을 에는 듯한 냉기를 품은 사슬.
칼카스의 사냥개를 휘감은 사슬들은, 훑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생기를 지워내고 차가운 죽음만을 남겼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이 씨발 개새끼들아 좀 뒈져!”
쌍욕을 뱉어대는 성기사,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검을 내리그었다.
쨍강―!
신성력 머금은 검이 칼카스의 사슬과 부딪친다.
짧은 순간, 냉기와 새하얀 빛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그 끝에 승리한 건 신성력 쪽이었다.
차르르르!
사람 팔뚝보다 두꺼운 굵기의 사슬이 토막 난 채 멀리 날아간다.
그러나 루시아는 찌푸린 미간을 펴내지 못했다.
이렇게 잘라낸 사슬이 벌써 몇 토막이나 되었는지.
그러나 사냥개를 뒤덮은 사슬의 갑주는, 아직까지 반의 반도 채 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으르릉!
침을 뚝뚝 흘리며 달려드는 지옥견.
쩍 벌린 아가리 안으로, 시퍼렇게 번뜩이는 이빨들이 날카로운 첨단을 들이댄다.
다리의 신성문신이 순간 강렬한 빛을 내뿜고, 루시아는 미끄러지듯 걸음을 밟아내며 그 무식한 육탄돌격을 피해냈다.
쿵!
제 속도를 못 이기고,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에 고개를 처박은 사냥개.
스가가각!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번뜩이는 성기사의 검.
유려하게 휘어진 십수 갈래의 검로가, 사슬 몇 가닥을 끊고 사냥개의 눈을 찌른다.
크아아아!
검붉은 피를 줄줄 흘리며 사냥개가 물러섰다. 루시아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신성문신의 기세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만만치 않아.’
칼카스의 사냥개.
냉기 머금은 사슬을 두른 이 집채만 한 지옥견에 대해서는, 그녀도 기사단에서의 공부를 통해 알고 있었다.
놈은 ‘사슬 옥좌의 칼카스’라 불리는 악마가 키우는 하수인.
그리고 칼카스는 악신 에낙사구스 휘하에 있는 아홉 옥좌 중 하나의 주인으로, 그 옥좌의 서열은 아홉 번째였다.
물론 가장 낮은 아홉 번째라고는 해도, 그 순위는 악신의 직속 악마 중에서만 따진 것.
악신을 직접 보좌하는 그 힘은 결코 얕볼 게 아니었다.
‘놈의 옥좌 주변에는 저런 사냥개가 수천 수만이나 있다지.’
사냥개의 비틀거림에 따라 흔들리는 사슬을 보며 루시아는 생각했다.
저 사슬 하나만 해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닿는 순간 동상으로 피부를 잘라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놈들이 수천, 아니 수만이라니.
꽈악.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순간 흔들리려던 마음을 다시 부여잡는다.
신성 문신의 빛이 은은하게 잦아들고, 검에 맺힌 신성력이 하얀 불꽃의 형태로 타오른다.
그녀는 피륙을 입은 인간.
신성 문신의 힘으로 저항하고 있지만, 저 지옥의 한기 앞에서 오래 버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필요한 건 단 한 번의 공격이었다.
푸른 냉기를 머금은 사슬을 죄다 끊어내고, 사냥개의 목줄기를 끊어놓을 단 한 차례의 일격.
으르르르.
그러나 그녀는 쉽사리 발을 뗄 수 없었다.
다른 사냥개 한 마리가 부상당한 동족의 곁을 맴돌며, 그녀가 덤벼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르르······.
사냥개의 푸른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린다.
놈은 동족을 지킬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그저 루시아가 동족의 목을 잘라내는 순간만을 기다렸다가, 그 뒤를 쳐서 성기사의 살점과 피를 씹어삼키려 할 뿐.
그건 사슬의 한기만큼이나 냉혹한 마물의 성정이었고, 동시에 지금 이 순간 루시아의 발목을 붙잡는 원인이었다.
당장 한 놈의 목을 따면, 다른 놈에게 팔 하나는 내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지구전으로 들어가자니, 사슬의 끔찍한 냉기 때문에 패배할 게 눈에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정신 차려, 이 썅년아. 댈런은 악신과 손잡은 마녀에게 홀로 맞서고 있어.’
루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팔 한 쪽 정도야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성기사의 인생은 투쟁의 연속.
그 끝없는 굴레의 끝은, 언젠가 마물의 이빨과 발톱으로 맺어지지 않던가.
그리고 기왕 끝맺는 거, 대륙의 위협인 재의 마녀를 처치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보다 영광스런 피날레가 어디 있겠어.’
콰지직!
그녀의 발 아래.
꽝꽝 얼어붙은 대지가 쩌적 갈라진다.
부상당한 사냥개가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놈의 동료 사냥개는 탐욕스럽게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끼잉?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냥개의 고개가 숲 저편으로 동시에 돌아갔다.
‘뭐지···?’
마음 한 켠에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주의를 돌릴 여유는 없었다.
결단의 순간, 두 눈을 둘러싼 문신은 이미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
그리고 아무리 그녀라 해도, 두 눈의 문신을 발현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십수 초가 고작이었다.
문신의 힘이 일깨워지며, 머리 전체에 청명한 기운이 스며든다.
후우.
반복적으로, 작게 호흡을 내쉰다.
다른 문신들로 몇 배나 확장된 힘과 감각의 크기가, 이 순간만큼은 명확하게 머릿속에 인식된다.
두 눈을 둘러싸고 새겨진 이 문신은, 백여 종에 달하는 성기사단의 신성 문신들 중에서도 극히 드물게 새겨지는 종류.
이건 신성력으로 뇌를 강화시켜, 세상을 인지하는 정교하고도 복잡한 능력을 직접 끌어올려주는 기사단의 비기였다.
후우.
사실 성기사단의 신성 문신도 한계점이 있었다.
힘과 감각을 아무리 강화시키더라도, 결국 일정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범인을 초월한 지성과 의지가 필요했기에.
두 눈을 둘러싼 이 신성 문신은,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성기사단의 해답이었다.
뇌에 직접 신성력을 때려 박는 특성상, 신성 문신과 어지간히 적성이 맞지 않고서야 새길 엄두조차 낼 수 없었지만.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그 특별한 문신을 열다섯 살에 새길 정도로 독보적인 재능의 보유자였다.
차르르르―
위협적으로 흔들리는 수백 가닥의 사슬. 거기에서 뿜어지는 냉기의 흐름.
얼어붙은 지면의 미끄러운 정도와, 사냥개가 가진 두 심장의 펄떡임.
증폭된 감각이 수용해내는 정보는 마치 바다와도 같았고.
머릿속을 각성시킨 신성력의 힘 아래, 그 모든 정보는 하나의 반죽이 되어 뚜렷한 검로와 발걸음을 제시한다.
쩡―!
그녀의 발이 지면을 박찼다.
화르르륵!
검신에서 흰 불꽃이 타오른다.
화살처럼 쏘아진 성기사의 잔영이, 지옥견의 모든 사슬을 끊어버리고 두 개의 심장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를 훑어낸다.
그리고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건, 단마의 백염이 그려내는 길고 곧은 직선.
쩌저저정―!
지옥의 마기로 빚어진 냉기는, 신성력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이겨내지 못했다.
우수수 떨어지는 사슬.
백염에 휘말려 터져버리는 두 개의 심장.
깨애액―!
단말마의 비명조차 길지 못하다.
집채만 한 사냥개를 동강내버린 루시아는, 곧장 아름드리나무를 박차고 방향을 틀었다.
크르르!
뒤늦게 동족의 죽음을 알아차린 사냥개가, 고개를 돌려 성기사를 물어뜯으려 하지만.
스각―!
성기사의 검은, 이미 놈의 몸뚱이를 반으로 가른 뒤였다.
쿵―!
동시에 쓰러지는 두 지옥견의 사체.
“후우! 하아.”
뻐근한 뒤통수와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루시아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황급히 사냥개들이 바라보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옥의 마물들이 반응했다는 건, 소환사에게 어떤 이변이 생겼다는 의미.
곧 마녀와 댈런의 싸움에서 무언가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어?”
그녀는 순간이지만 눈을 의심했다.
마녀의 마력으로 뒤덮인 잿빛 하늘에서, 단 한 군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우르르르릉!
하늘에 뚫린 구멍에서부터 뇌성이 울려퍼진다.
그 공기의 떨림은, 멀리 떨어진 루시아의 몸마저도 울릴 정도로 강렬했다.
“저, 저게 대체······.”
루시아는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천기는 그녀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길 기다려주지 않았다.
숲 전체에 요동치는 공기.
하늘을 일그러뜨릴 정도의 신성력.
그 절정을 장식한 건, 푸른 눈동자에 비친 하늘을 쪼개는 한 줄기 벼락이었다.
***
“시발.”
댈런은 욕했다. 그리고 움찔했다.
이거 신이라는 작자가 지켜보고 있을 텐데. 욕 해도 되나?
하지만 생각해보니 성검에 힘을 돌려준 걸 보면, 지금까지 그가 했던 행동들 역시 다 지켜보고 있었단 이야기였다.
댈런은 그래서 그냥 한 번 더 욕했다.
“쿨럭! 시발! 컥!”
뿌옇게 피어오른 재가 입과 코, 폐부를 파고든다.
기침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상을 강타한 벼락, 아니 벼락이라 부르기에도 뭣한 빛의 기둥은 반경 십여 미터가 훌쩍 넘는 구덩이를 만들어버렸다.
거의 뭐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광경 안에서, 성검을 든 댈런을 제외하고 모든 게 다 검은색이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는 뜻.
조금만 움직여도 휘날리는 새까만 재의 향연에, 댈런은 손사래를 치며 구덩이 밖으로 나갔다.
“쿨럭! 두 번 썼다가는 폐렴 걸려 뒈지겠네.”
마녀의 저주 때문에 옷가지가 죄다 사라져서 천 쪼가리 하나 남지 않았다.
결국 구덩이 밖에서 이끼를 널찍하게 긁어내, 코와 입을 두르고서야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어이가···없구나.”
그때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구덩이 한가운데, 근육이며 뼈까지 죄다 으깨진 채 검게 변해버린 마녀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심장은 멈췄고, 폐도 제 기능을 잃은 상태.
그럼에도 마력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마녀의 생명력이 질기기는 했다.
“뭐가 어이가 없냐.”
“너 같은···이가, 골라캅을 죽였다는 것도. 그리고 전쟁의 신이 이토록 첨예한 운명의 갈림길에서, 흐윽, 너 같은 무신앙자를 선택했다는 것 역시도······.”
“남의 신앙 폄하하지 마라. 이렇게 생겨먹었어도 전생에는 어릴 때 나름 교회 오빠 소리 들었다.”
“······뭐?”
뜬금없는 외계어에 마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 그래도 찢기고 부서진 피부가, 그 표정의 변화에 후두둑 떨어지며 검게 탄 뼈와 속살을 드러냈다.
댈런은 성검을 휘적대며 구덩이를 내려갔다. 그는 마녀의 목에 성검을 겨눴다.
“하긴, 다 뒈져가는 놈 앞에서 할 소리는 이게 아니지.”
“나, 나를 죽이면 후회할 것이다. 신의 전사야. 왜 그런지 아느냐?”
댈런은 픽 웃었다. 웃기는 년이네. 무신앙자랬다가 신의 전사랬다가 지멋대로야?
마녀는 댈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이 숲에는 이천에 달하는 만드레이크 씨앗이 뿌려져 있다. 그리고 그중 오백은 이미 다 자랐고, 천은 싹을 틔워 꽃을 피워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날 죽여봤자 그것들이 자라는 건 멈추지 않아.”
흐읍.
이야기를 멈추고 고통스럽게 숨을 들이쉰다. 다 뭉개진 입술이 파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해진 날과 시가 되면, 내 안배에 따라 그 모든 만드레이크들이 스스로 지상에 뽑혀 나와 비명을 지를 거다. 그러면 르비바흐는 죽음의 도시가 되겠지. 날 살려둬야 그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겠나?”
말을 마친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의기양양해 보였다.
마치 이래도 네가 날 죽일 수 있을까? 라는 듯한 얼굴. 댈런은 그 앞에서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만드레이크는 공기에 민감하지.”
“······.”
“르비바흐 숲은 물과 공기가 좋아, 약초들이 자라기 최적의 환경이고.”
마녀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숲의 지하수에 독이라도 타겠다는 건가? 아니면 이 숲에 불이라도 놓으려고? 아무리 네가 빠르고 은밀하다 해도, 약초꾼들의 눈을 피해 숲 전체에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댈런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성검을 바닥에 꽂아놓고, 두 손을 하늘 위로 활짝 펼쳤다.
마녀가 쓰러지며 숲속의 주문은 죄다 깨어졌고, 하늘을 뒤덮던 잿빛 기운 역시 전부 걷혀나갔다.
먹구름 드문드문한 밤하늘 아래.
댈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숲속에 흘러가는 마력의 바람을 느껴내며, 높아진 마력 수치가 작동해 그 바람을 붙들어 세운다.
머릿속에 그려내는 건, 온 하늘을 뒤덮는 붉은 열기.
심상 너머의 영역에서 보았던 붉은 하늘을 눈앞에 그리며, 그의 입이 짧은 영창을 외워냈다.
“이그넬― 셀티데오 라그레타.”
쿠르릉.
하늘이 변화한다.
검은 먹구름이 서서히 붉은 기운을 머금고.
간헐적으로 들리던 우렛소리가 기이한 음색으로 변화한다.
쿠르르르릉.
그 소리는,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이 내는 것과 같은 울부짖음.
댈런이 두 손을 서서히 내릴 즈음, 하늘을 가득 메운 붉은 구름은 숲 전체에 불꽃의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전대 이그넬라 마탑주의 주문을 네가······.”
마녀가 턱을 덜덜 떨었다. 댈런은 별다른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꽂혀있던 성검을 높이 치켜들고, 부드러운 호선을 내리그었을 뿐.
부들거리던 마녀의 머리가 두 쪽으로 갈리며, 간신히 이어지던 생명력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푸후.”
댈런은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풀었다.
마녀와 싸우며 영역을 몇 번이나 사용한 건지. 못해도 스무 번은 훌쩍 넘은 게 분명했다.
거기다 만드레이크의 비명과 온갖 주문을 받아내며, 이번 싸움에서도 용혈의 덕을 꽤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남은 건 뻑적지근한 몸과, 눈에 띄게 무뎌진 감각.
어쨌건 그 대가로 잿빛 시체를 네 구나 얻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댈런은 자연스레 시체를 회수하려 손을 뻗었다.
부스럭.
그때 뒤에서 어떤 기척이 들렸다.
댈런은 무뎌진 감각을 한껏 세워내며, 성검을 앞세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했다.
“이, 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그 어느 때보다도 검을 꽉 붙잡고 있는 성기사를.
그녀는 덜덜 떨리는 왼손으로 방패를 들어, 파란 눈을 반쯤 가렸다.
댈런은 그제야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갑옷이며 옷가지까지 죄다 타버려 훤히 노출된 그의 몸뚱이가 보였다.
“음. 싸움이 좀 격렬했지.”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자 부들거리던 루시아의 입술이 열리며, 마침내 걸쭉한 욕설을 뱉어냈다.
“이런 씨발 격렬하고 자시고! 그 덩치에 밖에서 홀딱 벗고 뭐 하는 짓거립니까! 천 쪼가리라도 갖다드릴 테니 당장 걸쳐주시길 요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