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71화 (71/288)

성소 전투(2)

‘야.’

댈런이 악마를 불렀다.

[옙, 주인님!]

‘저런 것도 먹어치울 수 있냐?’

[저런 것이라면···? 아아.]

부단장과 대치중인 상황. 친절한 설명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영혼이 연결된 아르보르는 그의 의도를 금방 알아들었다.

댈런이 가리킨 건 등 뒤의 검은 수정. 두 성기사가 지금도 어떻게든 해제하려고 애쓰는 중인 저주의 핵이었다.

아공간에 숨은 악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살짝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능은 합니다.]

‘그래? 잘 됐군.’

부단장을 쓰러뜨린다고 싸움이 끝나는 게 아니다.

저주의 핵이 건재한 이상, 특임대와 성전사들의 세뇌는 풀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그가 패배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수백에 달하는 특임대 성기사와 성전사들의 전력이 강력하긴 했음에도.

댈런은 이미 인간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초인이었고, 거기다 성벽 바깥에는 성기사단의 단장이 이끄는 증원군까지 있었으니까.

다만 그 싸움에서 기사단이 입게 될 피해와, 그 피해로 말미암아 멸망에 한 발짝 가까워질 미래를 피하고자 노력할 뿐이었다.

[다만 저 핵에는 몇 종류의 마력들이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며칠 전에 얻었던 힘을 죄다 써야 하는지라······.]

‘처먹었으면 일해야지. 내가 놈에게 덤벼드는 즉시 저걸 먹어치워라.’

[······.]

악마는 불편한 침음을 흘렸다. 댈런은 별 말 없이 다시 눈앞에 집중했다.

까라고 했으니 깔 것이다. 그게 성물의 능력이었으니까.

“아주 오만방자하구나, 전사. 신께서 굽어보신다한들, 너 같은 비천한 야만 혈통에 구원이 임할 거라 생각하느냐?”

부단장이 검을 들어올렸다. 수정처럼 반투명한 검에는 푸른 기운이 맺혀 번뜩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쟁의 신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건 처음 알았군. 그게 아니라면 네가 이단 나부랭이거나. 후자가 더 설득력 있는데.”

댈런은 조소를 머금은 채 오른발을 살짝 뒤로 뺐다.

왼발은 약간 비스듬하게. 오른발은 조금 더 체중을 실어서.

검을 잡은 두 손은 명치께 높이로 내밀고, 그 끝이 상대의 머리를 향한다.

어떤 검술의 묘리를 따른다기보다, 스킬과 경험이 쌓여가며 체화된 자세가 자연스레 잡아졌다.

부단장의 눈이 살짝 이채를 띄었다. 놈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호오. 나름 검술의 맛 정도는 봤다는 건가. 그렇다면···.”

쾅―!

왼발에 이동한 무게중심이, 순식간에 초인적인 각력으로 변화하며 돌바닥을 으깨버린다.

강력한 쇠뇌에서 날아간 화살의 빠르기로 쏘아진 댈런의 신형.

“···흡!”

절묘한 타이밍에 말이 끊기며, 호흡이 흐트러진 부단장이 가까스로 검을 들어올린다.

댈런은 망설임 없이 성검을 내리그었다. 동시에 악마가 아공간에서 벗어나 저주의 핵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저건 무슨!”

장정의 두 배만 한 악마가 저주의 핵을 덮치는 광경을 보며, 부단장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든 순간.

콰아아―!

성검의 궤적을 따라 휘몰아치는 폭풍이, 그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

검과 검이 얽힌다.

현란한 기술로 급소를 노리고, 그걸 힘으로 찍어누르며, 그 힘의 미묘한 균형을 흐트려 흘려내고, 흘러가는 검끝을 회수하는 대신 폼멜로 찍어버리는 공방의 연속.

한 순간에도 십수 차례의 검격이 교환되며, 서로의 목덜미와 머리, 심장, 손발목을 노리고 첨예한 다툼을 이어나간다.

그건 단순히 빠르기나 힘을 겨루는 게 아니었다.

검을 다루는 경험과 임기응변을 자아낼 기민함, 그리고 상대의 다음 검끝과 발의 위치마저 예측해내는 두뇌의 싸움이었다.

쩌저저정! 꽈광―!

쉬지 않고 이어진 열한 번의 격검.

그 끝에 얽혀낸 검로를 떨쳐내며, 댈런이 발을 뻗어 지면을 내리찍었다.

콰르르―!

진각의 순간 화염의 갑주가 가죽 부츠와 정강이의 각반 위를 둘러싼다.

그 내딛음에 일대의 돌바닥이 산산조각나는 것과 동시, 부서진 석재의 틈새마다 화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흐읍!”

균형의 붕괴와 솟아오르는 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단장은 자리를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댈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도약 스킬로 지면을 다시 한 번 박살내면서 놈을 따라잡아, 우렛소리를 토해내는 검격을 흩뿌려낸다.

섬광이 번쩍이고 뇌성이 무기고를 진동시키는 순간, 성소의 지붕을 부수고 떨어지는 한 줄기 벼락.

「뇌격」.

꽈르르릉―!

순간적으로 무기고를 가득 메운 빛이 사그라들고.

땅에 착지한 댈런은 곧바로 자세를 잡고 상대의 기척을 쫓았다.

시각보다 먼저 잡아낸 감각에 따라, 섬광이 지나간 자리를 가리키는 검끝 너머.

“···크윽.”

놀랍게도 부단장 에버로크는 여전히 댈런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어떻게 야만인 따위가···신의 번개를······.”

물론 멀쩡한 몰골은 아니었다.

군데군데 새까맣게 탄 갑옷과 피부.

한쪽 눈은 섬광에 직격당했는지 감은 눈꺼풀 아래로 진물이 흘렀고, 화상을 입어 벗겨진 환부에서는 지독한 탄내가 올라온다.

갑주와 살이 터져나간 옆구리에서는, 반쯤 부러진 갈비뼈가 간신히 흘려내리는 내장을 붙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치명상을 입은 상태.

하지만 댈런은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거기다 내 성검의 능력까지 알고 있군.”

스아아아······.

부단장이 말을 맺자마자, 놈의 검이 빛을 머금으며 몸의 모든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해낸다.

콰과곽! 까각!

동시에 그 주변에 맺힌 푸른 오오라가 위협적으로 성소의 돌바닥을 긁어대는 모습.

댈런은 형형하게 빛을 흩뿌리는 부단장의 검을 바라봤다.

‘세 번째 성검, 누미스라크.’

사용자가 부상을 입은 순간, 그 어떤 치명상이든지 급속도로 회복해내는 기적.

그리고 그 상처에 비례하는 파괴력의 오오라로, 회복의 순간을 방해하는 적을 공격하는 능력을 가진 강력한 성검이었다.

“봤느냐?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야만인. 네 검이 아무리 내 살을 찢어놓아도, 신의 은총은 그 모든 상처를 씻어주시지. 나는 결코 죽지 않아.”

부단장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댈런은 코를 흥 풀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성검을 휘휘 돌렸다.

“어디 목이 잘려도 재생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고.”

댈런은 성큼 발을 내딛었다. 부단장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댈런은 그걸 보고 픽 웃었다. 당연히 쫄리겠지. 여유를 가장했지만, 놈의 몸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검의 어마어마한 회복 능력 덕분에, 겉으로만 멀쩡해 보일 뿐,

뇌격의 여파는 그의 내부를 지금도 갉아먹으며, 몸이 삐그덕거리게 만들고 있을 테니까.

‘최하급이라지만 악마의 재생마저도 무마시켰는데, 완전히 다루지도 못하는 성검으로 이겨내는 건 불가능하지.’

“사, 사라졌다!”

“악마는! 악마 놈은 어디있지! 같이 사라진 건가!”

저 뒤에서 성기사 형제의 호들갑이 들려왔다. 때마침 아르보르도 저주의 핵을 전부 먹어치운 것이다.

아공간으로 복귀한 놈이 비실거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주인님, 명령···완수······.]

힘을 너무 많이 썼는지 기절해버린 악마.

곧이어 세뇌가 풀리며 의식에 일시적으로 충격을 받은 특임대와 성전사들이 풀썩풀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 이···!”

“저도 돕겠습니다.”

당황한 부단장의 목소리. 이제 전황은 명백히 뒤집어졌다.

세뇌당한 기사들이 쓰러지자, 그들을 견제하던 루시아도 댈런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이런······.”

부단장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놈은 계속해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댈런은 사납게 미소 지었다.

그때였다.

[참으로 어리석고 하찮구나. 청린께서 힘을 빌려주셨음에도, 한낱 인간에게 패배해 빌빌거리는 모습이라니.]

물러나던 부단장의 등 뒤.

두건를 깊게 뒤집어쓴 누군가가, 겁에 질린 뒷걸음질을 턱 막아세웠다.

***

누구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두건 쓴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 정확히는 그 입을 열어 첫 마디를 내뱉기 전까지도.

그야말로 갑자기 등장한 존재는, 부단장의 등에 얇고 가는 손을 무심하게 얹었다. 그리고 말했다.

[청린께서 마녀를 통해 에낙사구스와 거래를 맺지 않으셨더라면, 네 하찮은 목숨 따위를 구하러 올 릴도 없었을 것이거늘.]

“누, 누구···.”

부단장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그러나 고개를 반쯤 튼 순간, 기이한 마력이 일렁이며 그의 몸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 깨끗하게 사라진 존재감.

순식간에 벌어진 기현상에 루시아가 눈을 부릅떴다.

“네놈은 누구냐!”

[쯧. 하찮은 벌레 같으니.]

두건 쓴 존재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놈은 루시아에게서 시선을 돌려 난장판이 된 무기고와, 세뇌가 풀린 채 비척이며 일어나는 성기사들을 둘러봤다.

여전히 희미한 그 존재감.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루시아가, 검신에 흰 불꽃을 타올렸다.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성기사단의 영토에 무단으로 침입한 죄를 묻겠다.”

“아니. 물러나시오.”

그녀를 막아선 건 댈런이었다.

“이건 아직 그쪽이 상대할 수 없소.”

부드럽게 어깨를 잡아당기는 두껍고 큰 손.

그 손길에 머뭇거리며 물러난 루시아의 앞으로, 댈런은 성검을 앞세우며 성큼 나섰다.

그는 알고 있었다.

두건 쓴 존재가 누구인지, 그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도.

놈이 그야말로 갑자기 나타난 존재였고, 이 자리에 있던 누구도 그 등장하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푸른 비늘 아룡에게 먹힌 전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머리 위에 떠오른 반투명한 글자들은, 놈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나타내주고 있었으니까.

‘아룡.’

진짜 용은 아니다.

신비 그 자체인 생물이자, 날갯짓 하나만으로 불과 번개를 불러오는 존재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열화된 종족.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댈런 자신을 제외하고 이 자리에서 놈을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누군가를 지켜줄 여유 없이, 전력을 다해 상대해야만 하는 존재였으니까.

[흠.]

댈런을 본 놈이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였다.

두건 아래의 세로로 죽 찢어진 눈동자가 옅은 마력광을 흘렸다.

[다시 보니 넌 벌레 치고는 좀 크군.]

놈이 말했다.

[그렇다면 더 크기 전에 밟아두어야겠지.]

공기가 반전됐다. 없는 듯 희미하던 존재감이 뚜렷해진다.

넉넉한 소매 아래로 엿보이던 비쩍 마른 손이, 거대한 비늘과 발톱 달린 앞발로 변하고.

평범한 두건 달린 로브로 보였던 것이 마치 착시였던 듯 팽팽한 피막이 되어 있었다.

존재감 자체가 공포가 되어 성소 안을 덮친다.

세뇌가 풀려 쓰러졌다가 막 일어난 특임대 성기사들이, 다시금 비틀거리며 의식을 잃고 무너졌다.

“크읏···.”

루시아마저 신성력으로 타오르는 눈을 찡그리고 몇 걸음 물러나는 존재감.

포식자와 피식자를 가르는 그 뚜렷한 격차 앞에서, 댈런은 호승심 가득한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그가 말했다.

“벌써 드래곤 슬레이어 타이틀을 딸 생각은 없었는데.”

[···뭐라?]

용이 반문했다. 놈은 천장에 닿은 머리를 천천히 아래로 숙였다.

번뜩이는 노란 눈. 그 뒤에 일렁이는 용 특유의 타는 듯한 마력.

댈런은 거기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심장에서 맥동하는 용혈의 인자는, 비록 일부임에도 놈을 상회하는 존재의 흔적이었기에.

“마침 백 퍼센트 찍은 스킬이 하나 더 생겼거든. 너 정도면 딱 적당한 시험 상대일 것 같아서.”

[못 알아듣겠군. 그런 저열한 언어 따위···.]

용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꽈릉―!

우렛소리와 함께 머리를 쪼갤 듯, 작은 손도끼가 거대한 섬광이 되어 날아오고.

떠어어엉!

그 섬광 너머.

세로로 찢어져 번들거리는 노란 눈에, 지면이 폭삭 내려앉으며 날아오르는 전사의 신형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