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74화 (74/288)

추적(1)

“커헉!”

에버로크는 가까스로 숨을 토했다. 그는 컥컥 기침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친 돌바닥. 어둡고 차가운 공간. 손으로 주변을 더듬던 그는 신성 문신을 사용해 감각을 끌어올렸다.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깃들고, 칠흑 같은 어둠이 조금이나마 밝아져 보였다.

“···동굴인가.”

군데군데 돋아난 종유석과 석순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천장이 수십 미터 높이인 거대한 동굴이었다.

“여긴 어디지?”

갑자기 동굴이라니. 에버로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더듬었다.

성검 든 야만인과 싸우던 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치열한 공방 끝, 놈의 강력한 일격을 맞고 그는 부상당했었다.

다행히 성검의 능력으로 그 상처를 완전히 치유해낸 찰나, 등 뒤에서 나타난 정체불명의 괴한.

‘그놈이 날 여기로 날려버렸다.’

반사적으로 신성력을 끌어모아 저항했지만, 강력한 힘 앞에서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에버로크는 주변을 둘러봤다. 신성 문신으로 시야를 밝혔음에도 딱히 보이는 건 없었다.

거대한 동굴은 그 크기 만큼이나 깊이도 깊은지, 빛 한 점 없는 어둠이 뒤덮여 있었다.

“흐흐, 이제는 이런 어둠마저 이겨낼 수 없는 건가.”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온다.

전성기 때는 악마의 주문이 빚어낸 어둠도 꿰뚫어보던 그다.

하지만 지금은 동굴의 어둠에도 눈이 멀어버리는 신세.

소실된 신성력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흐, 흐흐.”

언제부터였을까.

기사단장 다음 가던 그의 신성력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던 건.

성물을 대가로 재의 마녀와 처음 거래를 맺었을 때였을까.

아니면 기사단의 규율을 어기고 사교도들에게 별점을 배웠을 때였을까.

그 시작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특정 사건을 겪을 때마다, 그의 신성력이 뭉텅이로 깎여나가는 것을 말이다.

성기사 바렛에게 성검을 쥐어주고 골라캅에게 죽도록 유도했을 때, 그는 신성 문신 중 특별한 비의에 해당하는 몇 개를 사용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고.

특임대와 성전사들을 세뇌해 반란을 일으키자, 성검의 능력 중 절반 가까이가 봉인되어버렸다.

마치 그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며, 신이 직접 내리는 경고와도 같은 현상들.

하지만 그 경고에도 불구하고, 에버로크는 길을 돌이킬 수 없었다.

“흐흐, 무슨 상관이겠어. 내가 신을 버린 게 아니라, 신이 나를 버린 것을. 내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야.”

에버로크는 고개를 휘휘 저어댔다. 반쯤 실성한 듯 웃음을 흘리며 쥐었다 폈다 하는 손아귀.

성검 든 야만인 전사와의 격전 이후, 그의 신성력은 전에 없을 정도로 소실되었다.

이제 성검을 제외한 역량은 고위 성기사 수준밖에 되지 않을 지경.

이대로 시간이 더 지나면, 성검의 주인 자격마저도 빼앗길 지도 몰랐다.

그때 뒤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쓰잘데기 없는 장기말이로구나.]

쿵.

나직한 발소리가 동굴 벽면을 울린다. 그리 큰 소리가 아님에도, 공기를 짓누르는 기세.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려는 턱을 억지로 악물고서, 에버로크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너를 구하기 위해 옥시키루스가 죽었다.]

다시 한 번 동굴을 울리는 전성.

목소리의 주인을 마주한 에버로크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다.

상대방의 체구는 자신보다 작았다. 기껏해야 성인 여성의 평균 키 정도 될까.

길게 늘어뜨린 탁한 청백색 머리칼과, 가늘고 긴 팔다리에 창백하다시피 한 미형의 얼굴.

그러나 세로 길게 찢어져 번뜩이는 노란 눈은, 그 가녀린 몸이 그녀의 본신이 아님을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비루한 장기말 하나와 맞바꾸기엔 아까운 녀석이었지. 마녀를 통해 에낙사구스와 맺은 계약만 아니었더라도, 그가 너를 구하러 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처, 청린용. 테데라 리울라크···.”

[언제 내 이름을 입에 담아도 된다 허락했지?]

구우우우―

반전되는 분위기.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가 살기로 전환되어 피부를 찌른다.

마력 한 줌 움직이지 않았으나, 의지만으로 생명체를 압사시킬 존재의 격.

“흡···!”

에버로크는 황급히 성검을 세워들고선, 청백색의 신성력을 몸 주위에 둘렀다.

그럼에도 그는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주저앉고 말았다. 눈과 입, 귀와 코에서 검게 죽은 핏불기가 흘러내린다.

그걸 본 여인이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리며 중얼거렸다.

[흠. 다 낡아빠진 신의 종복치곤 꽤 괜찮은 기개로구나.]

“커허억! 컥···흐으······.”

[인정하지. 이번에는 마녀의 안목이 썩 나쁘지 않았구나. 하긴 그 정도 능력이 되니 죽음에서 살아 돌아올 기회를 얻었겠지.]

전신을 짓누르던 살기가 사라졌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존재감은 어디로 간 것인지, 처음 동굴에서 눈을 떴을 때처럼 고요해진 공기.

[이제 가거라. 나는 알을 품어야 할 시간이니. 계약대로 네게는 비루한 옛 힘을 버리고 새 힘을 얻을 기회를 주겠다. 내 종자들이 너를 안내해줄 것이야.]

여인은 등을 돌렸다. 그녀는 동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등을 향해, 에버로크는 비릿한 혈향 섞인 숨을 토해내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마녀···라펠리가 살아 있었습니까?”

[음?]

여인이 멈칫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감정 없는 눈으로 성기사를 쳐다봤다.

[죽었다.]

“···역시.”

[하지만 에낙사구스가 지옥으로 떨어지던 그 영혼을 받아갔지.]

바닥을 응시하던 성기사의 눈이 거칠게 요동했다. 여인은 슬며시 웃었다.

미색의 얼굴임에도, 아름답다기보단 잔혹하다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는 버무리고 장난질치는 걸 좋아하니, 마녀의 영혼 역시 솥구덩이에서 뭔가 새로운 걸로 만들어지겠구나.]

아하하하.

여인의 모습이 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녀의 작은 웃음만이 남아 동굴에 메아리쳤다.

***

치이이이······.

댈런은 코를 흥 풀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양의 수증기와 함께 비강에 쌓인 핏물이 쫙 뿜어져나왔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증기를 보며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무슨 증기기관차 토*스인가? 아니면 쿠*밥솥?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거리고 있자니, 증기 너머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천천히 검을 꽂아넣고 내미는 오른손.

반쯤 녹았다 굳은 바위에 걸터앉아있던 댈런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보시다시피.”

씩 웃으며 건넨 대답에 증기가 후욱 뿜어진다. 기사단장 에드거는 그걸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니, 바라봤다기보단 감각으로 느꼈다 표현하는 게 맞을 테였다. 기사단장의 푸른 눈은 초점이 없었으니까.

“용의 피라니. 나름 오래 살았다 생각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군요. 특히나 화룡의 피는 인간이 받아들이기 가장 어렵다고 알려져 있죠.”

그런가? 이런 류의 설정에는 약한 댈런은 턱을 긁적일 뿐이었다.

그동안 에드거는 목이 잘린 용 시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왈칵이며 피를 뿜어대는 목의 단면. 부릅뜬 채 굳어버린 노란 눈동자.

성소 안에서 모든 이를 압도하던 존재감은 어디 가고, 뜨뜻한 김을 피워내는 용의 모습을 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의뢰를 완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살자 댈런.”

체력을 많이 소진하셨을 테니 잠시 쉬십시오. 그렇게 덧붙인 에드거는 곧 자리를 떴다.

제 3성소는 개판 오분전이었다.

반역을 저질렀던 특임대는 세뇌가 풀리며 혼란에 빠졌고, 특임대가 무력화된 틈을 타 진입해버린 기사단 병력에 의해 그 혼란과 긴장감은 배가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난데없이 등장한 용에 의해, 성소의 서쪽 성벽 주변은 그야말로 박살이 난 상태.

반역의 주체인 부단장은 아예 자취조차 감춰버렸으니, 기사단장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었다.

스릉―

에드거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지고 난 뒤.

댈런은 땅바닥에 꽂혀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선 용의 머리 곁에 널브러진, 갈기갈기 찢겨 속이 다 드러난 잿빛 시체에 손을 내밀었다.

[푸른 비늘 아룡에게 먹힌 전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기량 +1, 마력 +1]

시체를 회수할 때마다 전신에 충만하게 깃드는 고양감.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능력의 증가가 느껴진다는 건 그 자체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잠시 그 고양감을 음미한 댈런은, 이내 성검을 들고 용의 몸통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는 머지않아 그 가슴팍 깊은 곳에서 사람 상반신만 한 결정을 꺼내들었다.

두근. 두근.

몸에서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느리게 맥동하는 결정 덩어리.

아룡의 육신 중 유일하게 신비의 산물인 부위, 용의 심장이었다.

‘잃어버리면 죽을 줄 알아라.’

[켁! 갑자기 어디서 날개 달린 도마뱀 심장을 가져오셔서···!]

아르보르의 아공간에 용심장을 던져놓은 댈런은 바쁘게 발을 움직였다.

그의 머릿속에 저주의 핵을 소멸시키고 뻗어있던 악마가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넵.]

***

댈런은 곧장 성소 안쪽으로 향했다.

성소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상자를 수습하는 기사단원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댈런의 덩치와 이곳에 몇 없는 외부인이라는 점 때문에, 당연하게도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이목이 집중되었다.

다만 외부인이 기사단의 주요 무기고인 성소 안을 활보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걸음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단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용기와 힘에 경의를 표합니다.”

오히려 열에 한둘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에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하늘에서 용에 맞서 벌이던 싸움은 대부분의 기사단원들이 목격한 바.

하늘을 날며 용을 추락시킨 전사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해도, 그가 들고 있던 푸른 검신의 성검은 다들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성기사단의 무기고를 털던 도둑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댈런이 찾아간 곳은, 성소 안의 수많은 무기고 중 하나의 저 안쪽 구석.

단검으로 등을 몇 번이나 찔려 죽은 시체가, 잿빛 음영의 형태로 거기 남아있었다.

[성기사단의 무기고를 털던 도둑의 시체]

- 성기사단의 성물을 탐낸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도둑의 시체다. 모래바람 왕조의 지하 유적을 통해 무기고에 잠입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탈출 직전에 동료 도둑에게 맹독 바른 단검으로 등을 찔렸다. ‘성물로 세계를 구해야 한다니. 도둑 주제에 대의를 외치는 너 같은 새끼랑은 오래 붙어먹을 수 없어.’ 단검에 묻은 맹독으로 죽어가는 도둑에게, 배신한 동료가 마지막으로 속삭인 말이었다.

“쯧.”

[성기사단의 무기고를 털던 도둑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1, 작은 노파 올가의 투명 망토]

그렇게 성소의 시체까지 회수한 그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대니 극심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체력 수치가 어느 이상 다다른 뒤에는 느껴본 적 없는 탈력감.

근 며칠간 쉬지 않고 움직이며, 몇 번의 치열한 전투를 거쳤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기사단 특임대의 습격을 받은 뒤, 바로 작전에 투입되어 지하 유적 자체와 맞서 싸우고.

묘실의 수호자를 쓰러뜨리자마자 한참을 길을 찾아 헤멘 끝에, 결국 유적의 천장을 죄다 부수고 올라오지 않았던가.

그 고생 끝에 일행에 합류하고서도 끝이 아니었다.

성기사단의 부단장 에버로크와 검을 맞대고, 끝내 푸른 비늘 아룡 옥시키루스의 목을 자르기까지 했으니.

‘이러고도 안 지치면 사람이 아니겠군.’

댈런은 실소를 머금은 채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그나저나 용살자라.’

나쁘지 않은 이명이었다. 피식 웃으며 그 단어를 되뇌이던 중, 문득 오래 전 기억이 떠올랐다.

머나먼 대륙 중앙의 미궁도시. 청동 구역의 외곽 골목길에 위치한 작은 정보상.

마력석으로 운치 있는 분위기를 빚어내는 술집과, 그 뒷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은은한 차향 가득한 사무실에서 나눴던 이야기.

‘말만 들으면 무슨 용이라도 사냥할 전사라니까.’

납치당한 원로 마법사의 제자를 구하는 지명 의뢰를 받고서, 퀴퀴한 산책 한 번 하고 오겠다는 그를 보며 시에나가 했던 말이었다.

그녀는 물론 당시의 댈런 자신마저도, 몇 달이 지나 그 농담이 진짜가 될 줄은 몰랐었지.

고작 몇 달만에 얻어낸 용살자라는 이명은, 지난 시간들의 무게를 새삼 실감나게 했다.

그 시간들 속, 종말과 자신 사이에 벌어진 줄다리기가 얼마나 치열했었는지도.

‘이번 의뢰가 끝나고 나면 미궁도시로 돌아가야겠군. 전략을 조금 확장시켜야겠어.’

종말의 추격은 치열하고도 집요했다.

추가 능력치와 계승자 옵션도 모자라, 가능성을 실체화하는 영역의 힘까지 얻었음에도 그 추격은 때때로 위협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위협에 굴복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에게 이빨을 들이미는 종말의 하수인들은 그의 검에 목이 달아날 테니까.

다만 그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몸뚱이가 하나뿐인만큼, 그가 없는 곳에서도 종말을 저지할 세력이 필요했다.

‘팔시온으로 돌아가면 시에나와 이야기해봐야겠군.’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전략과 계획의 방향을 하나씩 세워나가며, 댈런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항거할 수 없는 수마가 몰려왔다.

다행히 이곳은 기사단의 성소였다.

반란군의 세뇌는 풀렸고, 단장이 이끄는 기사단의 병력은 금방 그 혼란을 정리할 테였다.

무기고를 점검하다보면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겠지. 눈을 뜨면 침대로 옮겨져 있을 것이다.

그의 제어를 떠난 의식의 흐름 속, 어느새 루시아가 요리한 용 꼬리에까지 생각이 닿을 즈음. 댈런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가 눈을 뜨자마자 듣게 된 것은 기사단의 가장 중요한 보물 중 하나가 부단장에 의해 도난당했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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