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94화 (94/288)

길들여진 재앙(4)

쿠르릉······.

검붉은 하늘이 나직하게 울었다.

뇌성과 불덩이로 뜨겁게 달아오른 하늘 아래. 설산의 공기는 반대로 차가웠다.

“음.”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그는 눈 덮인 오두막 뒷마당에 서있었다. 언제 여기 왔지? 내가 명상중이었나?

발목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나아가며, 댈런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청린과의 싸움 이후 벌써 보름 가까이 흘렀다.

댈런이 용굴에 다녀온 다음날, 펠버는 의식을 차렸다.

바로 본단으로 복귀할 수는 없었다. 원체 육신이 쇠약해져 있던 터라, 권속의 힘이 접붙여지는 데 시간이 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쯤 지나자 펠버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댈런은 곧바로 그와 함께 본단으로 돌아왔다.

에스트라 강을 건너고, 며칠 간의 여정 끝에 본단에 도착한 게 바로 어제.

하루만 쉬었다가 바로 미궁도시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쿠르르릉······.

우렛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댈런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보니 이런 방식으로 영역에 들어온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동안은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듯, 영역 전체를 관조하는 시점으로 들여다본 게 대부분.

지금처럼 육신을 입은 채로 영역 안을 거닐었던 게 마지막으로 언제였던가.

사박.

발밑에서 부서지는 차가운 부드러움. 댈런은 문득 고개를 들어 산봉우리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보니 위로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이번 삶의 시작점이자, 게임의 스타팅 포인트였던 설산의 오두막.

수백 번이나 방문했던 곳임에도, 단 한 번도 산 아래가 아닌 산봉우리로 향한 적은 없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게임에서는 튜토리얼 구간의 시작점이기에,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 자체가 제한되었고.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에는 뭐가 있는 지도 모를 가파른 능선과 절벽을 향해, 하나뿐인 목숨을 건 도박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산봉우리 사이에서 아스라이 메아리치는 우렛소리는, 마치 댈런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사박. 사박.

어느새 그는 눈 덮인 능선을 오르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은커녕 동물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험지.

바위투성이 능선과 깎아지른 절벽 너머로는, 이따금씩 우렛소리에 쓸려 내려가는 눈더미가 보이곤 했다.

눈밭은 무릎까지 뒤덮기 시작한다. 공기는 차가워지는 동시에 후끈한 열기를 품었다.

설산의 봉우리 중 하나의 정상에 가까워질 즈음, 몰아치는 눈보라가 시계를 극도로 제한시켰다.

댈런의 초인적인 감각에도 수 미터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

“······.”

심상 너머의 세계이기에 그런 것일까. 신비를 꿰뚫어보는 시야마저도 눈보라를 뚫어내지 못한다.

뺨을 스치는 눈발은 불티가 반쯤 섞여있었다.

붉으면서도 노란빛의 평범한 불티가 아닌, 검붉게 이글거리는 이질적인 반짝임들이었다.

스릉.

댈런은 검을 뽑아 휘둘렀다. 어깨부터 시작된 회오리가 검끝에서 터져나오며, 시야를 가린 눈보라를 거칠게 밀어냈다.

곧이어 드러난 산봉우리의 탁 트인 전경.

살짝 찌푸린 댈런의 눈에, 산봉우리의 절벽 앞 공터에서 꼬리를 말고 웅크린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보였다.

검붉은 비늘의 용.

‘용신의 적창.’

이미 한 번 마주한 바 있는 저 용의 정체를, 댈런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

용이 눈을 뜬다.

몇 개의 눈꺼풀이 겹눈으로 열렸다.

세로로 죽 찢어진 동공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안에서 검붉은 불길이 뭉근하게 일렁였다.

치이이이이······!

그 시선을 향한 것만으로 산봉우리 일대의 눈밭이 삽시간에 기화되었다.

공터가 딱딱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민낯을 드러내고, 이내 그마저 쩍쩍 갈라지며 붉은 기운을 내비치기 시작.

쿠그그그그······.

동시에 용이 앉은 곳에서부터 퍼져나가는 진동은, 순식간에 산봉우리를 무너뜨릴 기세로 일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

용이 전성을 토했다. 그 외침에 하늘이 일그러진다.

영역 전체가 그 전성에 서서히 이지러지고, 심장이 조여오는 듯 쿡쿡 쑤시기 시작하는 느낌.

“···썩을.”

이 영역의 주인인 댈런은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저 전성은 단순한 도구로서의 힘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날 때부터 스스로 쥔 존재의 격을 주장하는 선언.

그말인즉 나를 놓아보내지 않으면, 이 세계의 주인 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여야 할 것이라는 불멸자의 선포나 다름없다는 것을.

우웅···.

그 순간 댈런의 손아귀 안에서 성검이 작게 울었다.

마녀와의 싸움 이래로 처음 발하는 울림이었다.

댈런은 거기서 어떤 의지를 느끼고, 성검을 가만히 놓아주었다.

쐐애애애― 퍼걱!

비검의 도움은 없었다. 말 그대로 저 혼자 날아간 성검이, 용의 발치쯤의 바위에 스스로를 꽂았다.

기이이잉―

동시에 어떤 힘의 역장이 뻗어나와 용이 있는 자리를 뒤덮기 시작하고.

그저 뭉근하게 타오르던 용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하며, 하늘을 향해 숨결을 토해낸 순간.

꽈과과과과―

검붉은 부채꼴의 화염이 성검에서 뻗어나온 역장에 막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면서, 댈런의 의식은 영역에서 아득하게 멀어졌다.

***

“···런! 댈런!”

댈런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성기사단 양식의 천장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루시아의 금발, 그리고 시야 가장자리에서 타오르는 검붉은 불길.

시발, 불이라고?

댈런은 용수철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휙 하고 일어나는 잿바람.

일어나보니 방 안의 가구며 벽, 바닥, 천장에 죄다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었다.

“씨발, 댈런! 불! 저 불 좀 꺼 주십시오!”

곳곳에 피어오른 검붉은 불꽃은, 자질구레한 집기들을 거진 다 태우고 아예 방 전체를 삼켜버릴 기세였다.

댈런은 손끝을 뻗었다.

용의 피에서 신비로운 힘이 흘러나오고, 이내 모든 불이 그의 손끝으로 빨려들어와 소멸했다.

“······휴우.”

루시아는 그제야 신성문신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신이시여, 이대로 화형당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미안하게 됐소.”

“아닙니다. 미리 언질을 받고도 주의하지 못한 제 탓도 있죠.”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욕설이 부끄러운 걸까. 슬쩍 콧등을 긁적이는 루시아.

그녀의 살짝 붉어진 얼굴에 댈런은 무심코 픽 웃었다. 그는 방 안을 차분하게 둘러봤다.

재빠르게 불을 갈무리했음에도 피해는 적지 않았다.

나무 가구들은 이미 다 잿더미가 되었고, 금속 재질의 가구들 역시 반쯤 녹아 흐물흐물해진 상태.

벽과 천장은 그나마 가까스로 그을음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개판이 다 됐군. 망가뜨린 값은 충분히 배상하겠소.”

“괜찮습니다. 단장님께서 방이 좀 망가지더라도 값을 받지 말라고 일러두셨습니다. 댈런이 기사단에 베푼 선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요.”

선물? 댈런은 잠시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러나 곧 청린의 사체를 기사단에 넘겼던 걸 기억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진룡의 시체면 온 대륙의 마탑이 금화를 무더기로 주고 남겠지.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댈런 역시 금화 한 무더기 정도는 최소한의 성의로 요구했을 테였다.

허나 멸망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 속, 성기사단의 호의라는 카드가 가진 가치는 금화의 무게로 달 수조차 없는 것.

때문에 그는 선심 쓰듯 진룡의 시체를 기사단에 넘겨주었다.

그로 인해 성기사단의 전력이 지금보다 더 강화될 수 있다면, 댈런에게도 충분히 반가운 일이었으니까.

“단장님께서는 댈런이 얻으신 힘에 대해 말을 아끼셨습니다. 이제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군요.”

잿더미 사이, 덩그러니 남은 침대 다리를 발끝으로 툭툭 무너뜨리며 루시아가 이야기했다.

“인간의 몸으로는 쉽게 제어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고 하시셨지만, 설마 용의 힘이었을 줄이야.”

“놀랐소?”

“사실 그리 놀라진 않았습니다. 악마의 목줄을 잡은 것도 봤는데요, 뭘. 댈런이 진짜 용이라 해도 별로 안 놀랐을 겁니다.”

어깨를 으쓱하는 루시아. 댈런은 낮게 웃었다.

저렇게 여상한 태도로 반응할 수 있는 건, 지난 몇 달 동안 두 사람이 붙어다닌 탓이겠지.

그나저나 에드거가 생각보다도 더 입이 무겁다는 점이 놀라웠다.

다른 이들은 아니라도 루시아에게는 말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단장이 아끼는 심문관이기도 하고, 댈런 자신과도 꽤 오랜 시간 붙어 있었으니까.

그때 잔기침을 몇 번 한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야기하기에는 좋지 않은 장소가 됐군요. 잠시 산책 괜찮으십니까?”

***

방을 청소할 사람을 부른 뒤, 댈런과 루시아는 본단의 뒤편 숲의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오솔길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사실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건 본단의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인력이 방어선 복구 작업에 투입되어 있는 상황.

루시아 역시 안내인 역할을 겸해서 잠시 본단에 들렀을 뿐, 머지않아 다시 균열 안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끼잉. 끼이잉.

느닷없이 가방이 꿈틀거렸다. 새끼용이었다.

청소할 방에 용을 덩그러니 둘 수는 없으니, 큼직한 배낭에 숨겨서 가지고 나온 것.

가방 안이 비좁고 불편한지 새끼용은 몸을 끊임없이 뒤틀어댔다. 댈런은 잠시 지켜보다가 가방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릉. 그르릉···.

몇 번 두드리자 가방의 꿈틀거림이 이내 멎었다. 기분 좋은 그르렁거림과 함께였다.

“균열 방벽 열쇠는 어떻게 되었소?”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청린의 사체는 물론 댈런이 정리하신 용굴에도 수색대가 파견되어 샅샅이 뒤졌지만, 열쇠의 행방은 여전히 미궁 속입니다.”

“그거 좋지 않군.”

용에게 없다면 아마 악마나 악신의 손에 있을 테였다.

그리고 용이 열쇠를 가진 것보다, 악마가 열쇠를 가진 게 좀 더 심각한 문제였다.

물론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기도 했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무심한 말투. 루시아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살짝 서운한 티가 묻어났다.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수습하곤 대답했다.

“바로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턱을 긁적이던 손이 멈칫했다. 그거 단장과 펠버 두 사람한테밖에 하지 않은 이야긴데?

“단장님이 귀띔해 주셨습니다.”

“······.”

댈런은 단장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기로 했다. 그냥 입 무거운 사람이 아니라, 꽤 선택적으로 입이 무겁다고.

“왜 벌써 가십니까?”

루시아가 물었다. 묻어나는 몇 방울의 감정들.

몇 방울이기에 더 진심일 테였다. 이런 종류의 감정은 꽁꽁 숨긴 끝에 새어나오는 법이니까.

“한 숲에 호랑이가 둘이어서는 안 되는 법이오.”

그 숲에 거대한 괴물 곰이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은 말이지. 댈런은 덧붙였다.

갑작스런 비유에 루시아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용살자라 불리시는 걸 의식하시는 겁니까?”

“맞소.”

댈런은 끄덕였다.

“청린을 죽인 이상 사람들은 단장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할 거요. 대부분은 외부인인 나보다 단장을 더 따르겠지만, 일부는 딴 마음을 품을 지도 모르지.”

단장 에드거는 청린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대신 자신도 회복 불가능한 장애를 얻었다.

반면 댈런이라는 용병은 청린의 침공을 막아냈을 뿐 아니라, 놈의 편에 붙은 반역자와 수하의 아룡, 나아가 청린 본신의 목까지 잘라버렸다.

사실 댈런이 이길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에드거가 청린에게 치명상을 입혀놓았기 때문이긴 했다.

그말인즉 부상 입지 않은 청린을 상대한 에드거가, 용혈을 각성한 댈런보다도 여전히 강하다는 뜻이었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 않겠지.’

대중은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 매몰된다.

단장은 청린과 사투를 벌였고, 용병은 그 청린의 목을 잘랐다.

더없이 단순하고도 편협한 시각이지만, 그 단순함이 사람들의 마음에는 더 깊이 박히는 법.

더군다나 지금은 성기사단이 반란과 침공으로 무너진 요새들을 복구하고, 제 세력을 한창 확장해나가야 할 시기.

이런 시기에 댈런의 존재는 독이나 다름없었다.

“···어쩔 수 없군요.”

루시아도 이해한 듯, 체념의 눈빛을 한 채 중얼거렸다.

“오늘 댈런을 찾은 건 전해드릴 게 있어서입니다. 잠시 앉으시겠습니까?”

마침 널찍한 바위가 오솔길 곁에 있었다. 댈런과 루시아는 바위에 조금 떨어져서 걸터앉았다.

루시아는 메고 온 배낭을 풀어, 그 안에서 이것저것 물건들을 꺼냈다.

“단장님께서 요새 복구 작업으로 바쁘신지라, 댈런에게 약속한 보수를 대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녀가 가장 먼저 건넨 건 작은 금속 궤짝이었다.

“의뢰 전에 부탁하신 백은의 불씨입니다. 실력 있는 대장장이라면 이 불씨로 지펴낸 화로에서 백은강을 제련할 수 있을 겁니다.”

“고맙소. 이걸로 이번 의뢰 보수는 다 받았군.”

댈런은 금속 궤짝을 아공간 안에 집어넣었다.

백은의 불씨는 균열로 들어가기 전, 그가 보수로 요구했던 세 가지 중 마지막이었다.

신성 문신, 도끼, 그리고 백은의 불씨.

신성 문신과 손도끼는 이미 균열에서 톡톡히 효과를 본 바 있었다.

백은의 불씨는 미궁도시의 장인, 훗날 미스릴의 제련자라 불리게 될 르베론 아하킴에게 줄 생각이었고.

“그리고 이건 진룡의 사체를 넘겨주신 데 대한 기사단의 보답입니다.”

루시아는 목걸이 하나를 내밀었다.

얇은 마름모꼴 패 위에 정교하게 검의 형상이 정교하게 세공되어, 가느다란 은사슬에 꿰인 목걸이였다.

“기사단의 은인을 의미하는 성물입니다. 더불어 성기사단의 이름을 걸고, 이 목걸이의 주인이 하는 부탁은 단 한 번 무조건적으로 들어주겠다는 약속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유용하겠군.”

“더불어 이건 여비로 쓰라고 주셨습니다.”

보석이 가득 찬 작은 궤짝까지 건네고서, 루시아는 가방을 닫았다.

댈런은 받은 물건들을 아공간에 잘 갈무리했다.

배낭에 넣었다가는 왠지 새끼용이 가지고 놀다가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그가 제 몸 누일 공간을 점점 잃어가는 악마의 투덜거림을 듣는 사이, 루시아는 바위에서 폴짝 뛰어 일어났다.

그녀가 말했다.

“아직 하나 더 남았습니다.”

“뭐요?”

대답은 문장이나 단어가 아니었다. 빠르게 다가오는 얼굴. 왼쪽 뺨에 부딪히는 입술.

입술과 입술 끝이 미묘하게 살짝 맞닿았고,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 지나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

댈런은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의 주인을 쳐다봤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을까. 루시아는 얼굴이 잔뜩 새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더듬거렸다.

“어, 이건, 그러니까···제 고향의 인사법 같은 겁니다. 은인에게 감사를 표하는 거죠. 말하자면 댈런은 제 목숨을 여러 번 구해주신 은인이시니, 제 나름대로의 작별 인사를···.”

쪽.

성기사의 하얀 이마에, 조금 거친 입술이 닿았다. 루시아는 그대로 얼음처럼 굳었다.

댈런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이것도 내 고향의 인사법이오. 좀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한테 하는 종류지. 꼭 다시 만나자는 의미요.”

건강하시오. 댈런은 굳어버린 성기사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지나갔다.

자박. 자박.

발소리가 멀어져간다. 오솔길을 따라,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성기사는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발소리를 눈으로 쫓았다.

그녀는 오솔길을 따라 저 혼자 걸어가는 전사의 뒷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과 허리춤에 걸린 성검과 손도끼. 그리고 갑옷 위로도 근육의 굴곡이 보이는 탄탄한 등.

왠지 오늘따라 외로워보이는 그 등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그녀는 같은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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