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격(1)
“자네 그런 면으로도 꽤나 범상치 않은 사내였군.”
펠버가 말했다. 댈런은 뭔 소린가 싶어 옆을 돌아봤다.
기운을 완전히 회복한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는, 말 안장 위에서 눈을 황금빛으로 빛내는 중이었다.
그가 짓궂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토록 아리따운 아가씨를 울리다니.”
“···울리지 않았소, 노인장. 그리고 그거 사생활 침해요.”
“허허, 농담일세. 내 어찌 주군의 사생활을 엿보겠는가.”
펠버는 껄껄 웃으며 말의 목덜미를 슬슬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기분 좋은지, 덩치 큰 갈색 암말이 푸르르 하고 울었다.
댈런과 펠버, 토미는 말을 타고 대로를 따라가고 있었다.
성기사단의 본단에서 출발해, 노리아 왕국과 제국 접경지를 거쳐온 여정이었다.
펠버와 토미의 목적지는 르비바흐였다. 약초꾼들의 도시이자, 얼마 전 댈런의 손에 재의 마녀가 죽은 장소.
그리고 펠버가 그곳을 찾고자 하는 건, 스스로의 육신을 좀 더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자네의 과거를 조금 엿보았네.’
아직 본단을 떠나지 않았을 적에, 펠버는 그렇게 고백했었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생애. 종말에 맞선 투쟁으로 점철된 시간들. 수백 번에 달하는 회귀를 일부나마 목격하며, 나 또한 고민이 깊어졌다네.’
오랜 고민이었다.
이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일지. 어떻게 하면 이 영겁에 가까운 사투를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을지.
자기애가 강할 수밖에 없는 마법사인 그가, 권속이라는 족쇄를 스스로 받아들인 것도 그 고민의 결과 중 하나였다.
댈런이 그 어느 때보다도 종말을 성공적으로 이겨내고 있는 지금, 펠버 역시도 이번 회차에 희망이 있다 생각했으니까.
물론 그 느닷없는 고백을 들은 댈런의 초점은 조금 다른 곳에 맞춰져 있었다.
‘혹시 마녀를 졸래졸래 쫓아다니는 성기사라든지, 근육만 우락부락하게 키운 암살자 같은 사람도 봤소?’
‘···그런 사람은 못 봤네만. 혹시 전생의 동료들인가?’
‘아니오. 됐소. 앞으로 내 전생을 보는 건 자제해주길 부탁하지.’
‘알겠네.’
어쨌든 펠버가 르비바흐로 가는 건 그런 이유였다.
종말과의 싸움을 대비해, 일신의 역량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올리겠다는 것.
주문의 측면에서 그는 이미 정점에 다다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영역을 이루고 그걸 전수할 정도라면, 사실상 한 마탑의 창시자나 다름없는 것이니까.
다만 그 대영역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기 위해서는, 수백 년에 달하는 권속의 수명과 댈런에게 받은 용혈의 재생 인자라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권속으로서 받은 힘이 모자라다기보다는, 이뤄낸 대영역의 격이 너무 강대하기에 발생한 일.
종말과의 싸움을 앞두고, 펠버는 영역의 힘을 연구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육신을 갈고닦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약초꾼들만큼이나 다양한 약초가 넘쳐나는 도시, 르비바흐는 그 시작을 끊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나저나 주군이라 하니 궁금해지는군. 권속이 된 이후 뭐 달라진 게 있긴 하오?”
댈런이 물었다.
진룡의 권속이란 희석된 불멸성과 함께, 용 본신의 능력도 일부분 떼어줌으로써 성립되는 관계.
힘을 하사받은 권속은 그 대가로 주군인 용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댈런은 능력치 몇 개와 용혈의 재생 인자, 그리고 급속 빙결 스킬을 펠버에게 넘겨주었다.
그렇다면 펠버의 영혼에도, 마치 악마 아르보르에게 걸린 것 같은 어떤 구체적인 제약이 걸린 것일까.
“글쎄, 잘은 모르겠네. 하지만 자네가 뭔가를 명령하면 따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은 있구만.”
“신기하군.”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잘 집중해보니 미약한 연결이 느껴지기는 했다.
성물을 통해 만들어진 악마와의 연결과는 다르게, 훨씬 흐릿한 느낌의 연결이긴 했지만.
‘아직 용혈의 힘을 온전히 손에 넣지 못해서 그런 걸지도.’
문득 본단에 있을 적 꿨던 꿈이 떠올랐다.
전성을 토하고 불을 뿜는 용. 그리고 그 용의 힘을 막아서는 성검.
스릉.
허리춤의 검을 살짝 뽑아보니, 검신이 얕게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정말로 미세한 떨림이라, 댈런조차도 감각을 집중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수준.
용의 힘을 얻은 이래로 성검은 단 한 순간도 저 떨림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성검이 도움을 주고 있어서 당장 큰 탈은 없는 거겠지.’
댈런은 검을 도로 꽂아넣었다. 성검의 도움은 분명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물건에 의존할 수는 없는 법.
최소한 스스로의 힘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르비바흐에서 한동안 머물 예정인 펠버와 다르게, 댈런이 곧장 미궁도시로 돌아가는 건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문제 말일세,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해결책이 있을지도 모르네.”
댈런의 목적을 들은 뒤, 뭔가 한참을 궁리하던 펠버의 대답이었다.
“배낭에 있는 자네 친구, 청린용의 새끼 아니던가?”
“맞소.”
“완전한 해결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용의 힘이 문제라면 임시방편이라도 그 녀석이 억제해줄 수 있을 걸세.”
끼잉?
펠버의 이야기에 배낭이 꿈틀거렸다. 마치 자기 이야기냐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댈런은 배낭 아래쪽을 툭툭 쳐주고는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이야기요?”
“청린용은 용신의 좌완 갑주라고 하지 않나. 전설에 따르면 그 이유가···.”
“잠깐.”
댈런이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의 말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히히히힝!
뒤에서 따라오던 토미가 화들짝 놀라 고삐를 잡아채며, 덩달아 놀란 말의 울음소리가 길게 숲을 따라 울려퍼졌다.
“······.”
댈런은 숲속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곳은 르비바흐에서 고작 한나절 떨어진 대로의 작은 숲.
도시와 가깝다는 건 여행객에게 안전하다는 예표였고, 반대로 습격자들에게는 그만큼 리스크를 떠안아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도시의 경비대와 상행을 호위하는 용병들과 부딪힐 걸 감수하면서도, 이런 숲길에 매복했다는 건 단 하나를 의미했다.
‘처음부터 대상을 특정한 습격.’
그건 평범한 도적 나부랭이보다, 암살자들에게나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군.”
댈런은 가만히 허리춤의 도끼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의 시선 끝. 백여 미터 떨어진 숲속에서 희미한 살기가 당혹감으로 바뀌는 게 느껴졌다.
***
“저, 저희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복면인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떨리는 어깨. 힘이 빠진 손아귀.
금방이라도 손에 쥔 총을 떨어뜨릴 것 같은 자세를 보며, 나타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했다.
“바보 같은 생각 말고 앞이나 똑바로 봐라, 신참. 누가 너한테 목표에서 시선을 떼라고 가르쳤나?”
“그, 하지만, 저 야만인인 방금 이쪽을···.”
“닥쳐.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네 아비의 얼굴이 내 군홧발에 짓밟히는 꼴을 보고 싶은 건가?”
“히익!”
복면인이 질겁하며 다시 총을 들었다. 그러나 목표물을 제대로 찾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파르르 떨리기만 하는 눈동자. 불량한 어깨 견착. 이리저리 흔들리는 총구.
나타샤는 짧게 혀를 찼다. 쯧. 어쩌다 이런 어리버리한 놈이 저격수랍시고 신참으로 들어와서는.
좀 더 제대로 된 놈을 보내주면 덧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윗선의 판단이 이해가 가는 그녀였다.
지금의 작전은 애당초 목표물을 암살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잘해야 피해를 감수한 사살. 혹은 그저 부상 선에서 그쳐도 성공이었다.
그 대가로 그녀를 제외한 전 부대원의 몰살을 가정하는 작전이니만큼, 상부에서 출중한 인력을 보내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눈 똑바로 뜨고. 호흡을 가라앉혀라.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들이쉬고.”
그럼에도 나타샤는 짜증이 좀 날 뿐,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토록 어리버리한 얼간이라도 숙련된 용병을 죽일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분대원 전체에게 들린 무기였으니까.
‘총 맞고 뒈지는 건 인간이든 오크든 마찬가지지. 백 년 묵은 트롤이 아닌 이상 어쩌겠어?’
그녀와 그녀의 분대원들에게 주어진 건 장총이었다.
강력한 폭발의 원천인 화약을 이용해 엄지손톱만 한 총탄을 소리보다 빠르게 발사하는 무기.
모국의 뛰어난 기술자들이 낳은 이 최첨단 병기는, 몇몇 나라들이 암암리에 개발해 운용 중인 소형 대포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의 모국과 남부 제국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장총의 정확도와 휴대성은 그 어느 나라도 따라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진정됐나?”
“···예.”
“사격 준비.”
복면인 신참의 호흡이 천천히 정돈되는 걸 느끼며, 나타샤는 숲 너머의 목표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의 뛰어난 시력이 세 명의 남자를 포착했다.
마법사처럼 보이는 차림의 노인과 청년. 그리고 그 둘보다 월등한 체격의 전사.
작전의 목표물은 저 전사였다. 오던 걸 멈추고 제자리에서 이쪽을 훑는 게, 감이 꽤 좋아 보였다.
돌덩이 같은 근육들은 어쩌면 소형 활 정도는 막아낼 수 있을지도. 세상은 넓고 초인들은 많으니 모를 일이었다.
‘어디 총알도 막을 수 있는지 보자고.’
나타샤는 씩 웃었다. 그녀는 복면인 저격수를 슬쩍 확인하고 물었다.
“준비됐나?”
“예.”
“그럼 셋에 발사한다. 하나, 둘, 세···.”
타아아앙!
나무들 사이로 총성이 울려퍼졌다.
불을 붙이고 발사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대포와 달리, 방아쇠를 누르기만 하면 그 즉시 발사가 이루어지는 장총.
그러나 전사는 쓰러지지 않았다. 나타샤는 눈을 부릅떴다.
“······어?”
“병신 새끼. 그것도 못 맞추냐.”
나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총탄의 위력은 의심할 구석이 없었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게 총탄.
그러니 전사가 쓰러지지 않았다는 건 무조건 빗나갔다는 소리다. 나타샤는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전 분대 사격 준비.”
분대원들이 일제히 총을 들어올린다.
일반적인 습격이었다면 반쯤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전사는 쓰러지지 않았고, 총성은 이미 울려퍼졌으니까.
하지만 이쪽에는 아직 일곱 자루의 총이 더 있었다. 그녀의 것까지 하면 여덟이었다.
신참과는 달리 비교적 빠르게 조준을 마친 분대원들이, 분대장의 명령을 기다렸다.
나타샤는 이미 조준선 너머로 전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덤덤한 표정. 이쪽을 훑는 시선.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총성을 들었을 텐데, 저런 여유로운 표정이라는 게 뭔가 이상하긴 했다.
그러나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나타샤는 곧바로 명령했다.
“전원 발사.”
타타타타탕!
연이은 총성이 숲을 꿰뚫는다. 먼젓번은 빗나갔어도 이번 건 어찌할 수 없을 테였다.
여덟 발의 총탄 중 하나만 맞더라도 성공이었다.
화살촉보다도 작은 탄환이지만, 그 위력은 근육과 뼈를 찢고 부러뜨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으니까.
그리고 나타샤는 저격수가 된 이후, 처음으로 제 눈을 의심했다.
전사의 팔이 순간 흐릿해지는 듯하더니, 여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때 전사의 시선이 그녀와 마주쳤다.
피식 올라가는 입꼬리. 들어올리는 오른손.
보란 듯이 천천히 펴보이는 손바닥에서, 콩알만 한 금속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어, 어어······.”
나타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전사의 손이 다시 흐릿해졌다.
패래래랙―!
직후 뭔가 번쩍이더니 옆에서 퍽 소리가 들렸다. 나타샤는 뻣뻣해진 고개를 돌렸다.
복면 신참의 장총은 반으로 갈라진 채였고, 그 이마에는 도끼자루가 돋아나 있었다.
털썩.
쓰러진 신참 저격수를 보며, 복면 안 나타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