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환 의식(3)
‘많은 희생을 치뤘으나, 그 대가로 오랜 대계는 완성되었다.’
일곱 왕관의 수호단. 그중에서도 셋째 왕자를 따르는 파벌.
파벌의 원로이자 소영역을 이룬 흑마법사, 카프렌나 지드코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5분 전, 방해꾼 놈들이 공동 안쪽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성공적이었다.’
대역을 앞세워 온건파의 눈을 속이고, 평범한 대원으로 파티에 위장 잠입했다.
팔시온으로 진입해 미궁으로 내려올 때까지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점은, 차르국 특무대가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길잡이를 고용했다는 것.
그 때문에 열 개의 파티 중 무려 세 개가 초반에 섬멸당했으나, 이 정도 희생은 이미 각오한 바였다.
하지만.
‘···저놈, 성검 든 야만인 전사가 끼어들면서부터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빠드득.
카프렌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사실 놈이 특무대를 이끌고 미궁에 진입했다는 걸 알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리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미궁 1층이야 공간 전이 위치가 무작위였기에, 운 좋게 금방 내려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층의 작열사막에서 벌어진 거리를 좁히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
헌데 무슨 수를 썼는지 놈은 순식간에 사막을 횡단했고, 그 때문에 선발대에 역습을 가하던 병력들마저 전멸하고 말았다.
‘칼카스 님의 계시와 조언 덕분에, 이어지는 추격을 조금이나마 지연시킬 수 있었거늘.’
그렇게 번 여유로 아슬아슬하게 원혼의 핵을 손에 넣고, 온건파의 끄나풀을 제거한 뒤 늦지 않게 의식을 치뤄냈다.
상급 악마를 소환하는 복잡한 의식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이제 돌이킬 수 없을 터인데, 이로써 대계는 성공인 것인데···.”
온건파 측에서 제물이라고 알고 있었을, 아공간 배낭에 담아온 삼백 예순 아홉 개의 심장이 의식의 마중물이었고.
원혼의 핵에 서린 지독하고도 강력한 사념은,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마력을 마중물 삼아 지상의 존재들을 직접 사냥하는 도구였다.
차르국 백성 수천 명이 원혼들의 저주에 사로잡혀 죽기까지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고통 속에 죽어간 영혼들을, 다시 한 번 악마 소환의 대가로서 지옥에 바치는 건 두 시간이면 족했고.
그렇게 막바지에 접어든 의식.
이미 완전하게 발동한 악마 소환의 의식을 취소하는 건 불가능했다.
소환 의식의 결과를 다소 비틀 방법이 있긴 했으나, 뛰어난 흑마법사만이 가능한 일이었기에 걱정하지는 않았다.
소문의 전사가 동굴에 들어왔다는 걸 알고서도, 대계가 완성되었다는 확신을 가진 이유였다.
분명 그랬는데.
“···어떻게 성검의 주인이라는 놈이, 사특한 흑마법에 손을 댈 수 있다는 말이냐!”
“뭐야, 지 얼굴에 침 뱉기냐?”
피식 웃으며 성검을 뽑아드는 눈앞의 전사는, 성검의 주인인 동시에 흑마법사였다.
그것도 지옥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는 제대로 된 흑마법사.
거기다 놈은 흑마법사들이라면 누구나 얻고자 하는 보물, ‘핏빛 제례용 단검’까지 가지고 있었다.
스아아아···!
단검에서 흘러나온 막대한 양의 원념과 영혼이, 마법진 위에 지옥문 소환의 주문을 덧씌우고.
기이이잉―
찢겨나간 공간의 틈으로, 지옥의 불길한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우우웅···.
공명한다.
마법진과 지옥의 문이, 점차 울림의 결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공동에 설치된 거대한 마법진.
그 역할은 소환의 대가를 지불하고, 소환된 존재를 지옥의 문으로 전이시키는 교두보였다.
지금쯤이면 차르국 변방에서 흑마법사들이 지옥의 문을 열어놓고 대기 중일 터.
계획대로라면 칼카스는 그 문을 통해 지상으로 소환되어야 했다.
마법진 바로 위에 열린 채, 소환 의식과 공명 중인 지옥의 문만 아니었다면.
차르르르···.
공동 전체에 사슬 소리가 울려퍼진다. 살을 에는 한기가 순식간에 벽과 천장에 고드름을 맺었다.
머지않아 직경 오 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공간의 틈에서, 수천 가닥의 사슬이 파도처럼 쏟아져나왔다.
“피, 피해! 커어억!”
“우욱, 살려줘!”
피할 틈도 없이 범람한 사슬의 파도에, 마법진 위에 서 있던 흑마법사들이 휩쓸리고.
가까스로 보호막을 만들어 목숨을 부지한 원로는, 턱을 달달 떨면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
거대한 사슬의 언덕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하얀 한기가 새어나오는 수만 가닥의 사슬. 그 사이에서 번쩍이는 두 개의 푸른 안광.
압도적인 존재감이 목과 어깨를 짓누른다. 기도를 파고드는 냉기에 목이 따끔거렸다.
폐부를 찌르는 차가운 기운에서, 악마의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묻지.]
“예, 예예.”
[내가 왜 미궁에 있는 건가?]
“그, 그것이···.”
계획에 없던 지옥문 탓이다. 정확히는 지옥문을 연 단검, 아니 그 단검을 던진 전사 때문이었다.
원로는 입을 열어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목을 감아쥔 사슬이 그보다 빨랐다.
[말 안 해도 알겠군. 이런 얕은 수작에조차 대비하지 않은 건가. 불충한 종속이로다.]
“커허···아, 아닙니···!”
[그렇다면 대비하지 못한 것이겠군, 무능한 종자여.]
사슬이 목 아래를 휘감는다. 몸통과 팔, 다리까지 두꺼운 사슬에 속박됐다.
마치 거대한 뱀이 먹잇감을 조이듯, 사슬은 흑마법사의 숨통을 천천히 조여갔다.
얼어붙은 피부가 조각조각 떨어지기 시작한다. 유물 로브의 높은 저항력은 지옥의 냉기 앞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답이 없구나. 어느 쪽이든 벌을 받는다는 걸 안 모양이지.]
파랗게 질린 하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정답이었다.]
악마가 잔혹하게 웃었다. 흑마법사가 잠깐 발버둥 쳤지만 그뿐이었다.
촤르륵―
머리통을 휘감은 사슬이, 순식간에 온몸을 두세 겹으로 둘러싸고.
콰직!
다음 순간, 흑마법사의 육신은 한 줌 핏물로 변했다.
***
“···도망쳐야 합니다.”
흑마법사가 썩은 햄처럼 으깨진 걸 본 사샤가 말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로?”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 있다가는 전부 죽을 겁니다.”
“도망치면 살 수는 있고?”
사샤는 입을 다물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는 죽은 원로의 머리통에서 도끼를 회수해 왼손에 들었다.
촤르르르···.
지옥문은 끊임없이 왈칵이며 사슬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이미 거대한 공동의 한쪽 구석을 가득 채울 규모였지만, 칼카스의 본체를 생각하면 두 배는 더 쏟아져야 하겠지.
댈런은 산처럼 쌓인 사슬 더미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의 등 뒤에서 사샤가 물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글쎄.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이 세상은 그래픽 덩어리의 게임이 아니다.
흩뿌려진 피는 모니터 너머의 물리엔진으로 구현할 수 없는 생생함을 지녔으며.
죽음과 함께 내뱉는 숨결에는, 현대인이었던 그가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허망함과 섬뜩함이 묻어났다.
영역을 이룬 뒤 많이 나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가끔씩은 악몽을 꾸곤 했다.
무력하게 고블린의 단검에 찔려 죽는 꿈. 악마의 손아귀에서 으깨지는 꿈.
전장의 화마 속에서 스러지는 꿈. 미궁의 끝을 눈앞에 두고 허망하게 악신에게 짓밟히는 꿈까지.
‘비명이지.’
그건 마음속 한 켠, 삼십 대 아저씨가 질러대는 비명이었다.
피와 살육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두려움에 물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의 무기력한 절규.
사회에 나가 경제적으로 독립했음에도, 서른 넘게 먹은 그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모니터 너머에서만 보던 세계에 떨어져, 초인적인 육신을 손에 넣은 순간에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른 이제는,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지구의 평범한 배불뚝이 회사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때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싸움들이라면.
지금은 그보다 더 많은 이유들이 더해졌다.
싸움으로 강해지고, 강해진 끝에 승리한다. 싸움 자체를 즐길 때도 있었으며, 언젠가 돌아갈지 모르는 끝날을 내다본다.
당장 내일 일도 알 수 없던 인생에서, 미래를 스스로 그려내는 이 태도는 어디서 온 것일까.
변한 육신과 힘에 적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도 모르게 찾아온 정체성의 변화일까?
‘쓸데없는 생각이다.’
알 수 없었다. 캐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중요한 건 그 심경의 변화는, 그의 모든 결정에 적용된다는 사실.
이번에도 그랬다.
칼카스의 소환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차선책을 찾을 뿐이다.
지상에 소환된 악마는 수만의 인명을 집어삼키고, 더 많은 군세를 자신의 옥좌 곁에서 불러냈겠지.
그렇게 만전이 된 놈을 상대하는 건 최악의 수였다. 차라리 이 좁아터진 동굴에서 1대 1로 한 판 뜨는 게 승산이 높았다.
최선의 결과를 위해 설계를 거듭한다. 그게 안 된다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높은 길을 택한다.
수백 회차의 간접적인 경험과,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지 모르는 대담함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옛 자아의 두려움 따위는 그 다음에야 생각할 일이었다.
[호오?]
댈런이 성검을 뽑고 걸어오자, 거대한 사슬 언덕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천 가닥의 사슬 깊은 곳. 기묘하게 번뜩이는 두 개의 푸른 안광.
진룡을 앞에 두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뻣뻣하게 저려오는 감각이 전신을 강타했다.
‘속박하는 사슬의 저주.’
순간적으로 팔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짓누르는 탈력감.
[으븝! 우우웁!]
악마가 아공간에서 강제로 만찬을 즐기기 시작하며, 그 무게감은 단번에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허, 에낙사구스 님의 실험체를 종속으로 삼았다는 게 사실이었군. 어찌 이런 일이······.]
사슬 더미가 중얼거린다. 댈런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상 저주에 면역인 그와는 달리, 다른 일행에게 놈의 저주는 치명적일 테니까.
‘사슬 옥좌의 주인, 악마 칼카스의 페이즈는 총 세 개.’
게임에서도 그 공략의 핵심은, 저주와 주문 위주의 첫 페이즈를 얼마나 빠르게 넘어가느냐였다.
촤르륵― 캉!
심장을 노리고 날아드는 얇은 사슬을, 의지를 가진 듯 쏘아진 도끼가 가볍게 걷어낸다.
까가가가각!
구 형태로 그를 둘러싸려는 사슬의 파도는, 성화를 깃들인 성검으로 전부 쳐냈다.
전후좌우, 위아래 할 것 없이 수백 가닥의 사슬이 날아든다.
그 광경은 마치 오래 전, 악마의 분신을 덧씌운 대사도를 상대할 때와 비슷했다.
물론 차이는 명백했다.
칼카스의 사슬은 살덩이 촉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고, 흘러나오는 냉기는 댈런의 피부마저 상하게 하기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강해진 건 댈런도 마찬가지였다.
스친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치유되었고, 한 번도 쓰기 힘들어했던 뇌격이 성검으로부터 수도 없이 뻗어나온다.
꽈르릉― 꽈릉!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사슬 파편들. 그 사이로 거침없이 파고든다.
노리는 건 사슬 더미 한가운데, 번뜩이는 푸른 안광 사이.
1페이즈를 넘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칼카스의 몸을 덮은 수만 가닥의 사슬이, 전부 사용되고 부서질 때까지 버티거나.
혹은 그 수만 가닥의 사슬 안쪽, 옥좌에서 떨어지고도 이 많은 사슬을 제어하게 해주는 칼카스의 지팡이를 부수거나.
댈런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다.
촤라라라락!
파도처럼 몰아치는 사슬의 틈, 번쩍이는 지팡이의 수정구를 눈에 담아낸다.
두 손으로 쥔 성검에, 섬광과 회오리가 함께 얽혀드는 건 한순간이었다.
꽈르르릉―!
휘두른 검끝 너머, 섬광이 선두에서 길을 뚫고.
화르르륵!
성화와 분쇄의 기운이 함께 뒤섞인 채, 뇌격의 배후를 밟아가며 공간을 넓혀낸다.
[무슨···!]
그 찰나의 순간에 훤히 드러난 지팡이의 모습. 댈런은 손가락을 까딱여 도끼를 불러들였다.
쉭―
닫혀가는 사슬의 장막을 향해 도끼를 내리긋는다.
공간을 빗겨간 도끼는 지팡이 끝의 수정구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쩌적! 쩌저적―!
생생하게 들리는 파열음. 산산조각난 채 비산하는 수정구의 파편들.
[내 지팡이가···!]
화아아악!
그 조각들 사이에서, 마치 지옥문을 열었을 때처럼 불길한 빛이 뿜어져나오고.
시야를 가득 메운 빛이 잦아들었을 때, 눈앞에 보이는 건 공동이 아니라 금속의 정글이었다.
2 페이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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