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슬옥좌(1)
차르르르···.
불길한 금속의 마찰음. 공기를 가득 채운 비릿한 쇠 냄새.
지면을 뒤덮고 나무를 휘감은 사슬들은, 광택 없이 음울한 빛깔로 젖어들었다.
시에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하얗게 맺혔다.
‘결국 이렇게 되었네.’
칼카스의 지옥, 사슬옥좌의 정경.
얼마 만에 보는 지옥의 그림자이던가.
‘열 살이 되었던 겨울 이후 처음이지.’
시에나는 오래 전의 기억을 되짚어봤다.
홀로 선 지 삼 년이 지날 무렵, 그녀는 마녀의 힘을 점점 통제하기 힘들어졌다.
마녀의 힘은 가벼운 주문에도 어김없이 발현되었다. 때로는 조금만 감정이 격해져도 폭발할 정도였다.
이러다가는 금강궁의 정적들에게 발각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판단한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악마의 힘이 유일한 답이었어.’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온 마녀의 힘은, 어설픈 주문 따위로는 억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신전을 찾아가자니 금강궁의 손 안에 스스로 머리를 들이미는 꼴.
낮은 거리의 흑마법사를 찾아간 건, 당시의 그녀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커헉! 꼬, 꼬마야, 이게 무슨 짓이냐!’
‘닥치고 악마를 불러내. 소환은 힘들더라도, 계약 의사 정도는 전달할 수 있잖아?’
마녀의 힘으로 흑마법사를 제압하고, 악마와의 계약을 중재하도록 협박했다.
마침 사슬옥좌의 칼카스가 모자란 제물에도 불구하고 응답해주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칼카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마녀들의 힘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
그렇게 사슬옥좌의 권능으로 마녀의 힘을 봉인한 뒤, 이제 걱정할 거리는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바로 저번 겨울까지만 해도.
‘대격변이 다가오고 있어.’
일 년쯤 전부터였을까.
대륙의 정세는 시시각각 불안해지고 있었다.
마물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면서, 잠잠했던 전운이 대륙 곳곳에 감돌았다.
북쪽에서는 악신에게 홀린 야만족이 차르국을 압박했다.
남쪽의 제국은 혼란을 틈타 주변 소국들의 땅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중이었다.
성기사단의 내전 소식에는 균열의 진룡이 사냥당했다는 이야기가 섞여 들리고, 동쪽에서는 이백 년 만에 엘프가 상선이 아닌 전함을 끌고 왔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일 년 사이에 대륙의 앞날은 한 치도 알 수 없게 됐다.
아직까지는 위태로운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길어야 5년. 어쩌면 그보다 훨씬 모자랄지도.’
뒷골목 정보상의 안온한 생활은 끝났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신의 무력을 키워야 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그녀는 차르국의 의뢰를 받아 미궁으로 내려왔다.
오랜 시간 봉인해뒀던 혈통의 힘을, 악마와의 담판을 벌여서라도 되찾기 위해서.
푸드드득!
뻗어내는 마력. 그 사이에서 날갯짓 소리가 흘러나온다.
육신과 영혼을 짓누르던 칼카스의 권능, 속박하는 사슬의 저주가 마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어져나가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 안쪽에서는 흐릿하게 휘날리는 수천 개의 깃털과, 그걸 호시탐탐 노리는 차가운 사슬들의 형상이 드리웠다.
가볍게 들어올린 손날을 내리그으며, 시에나는 외쳤다.
“모습을 드러내라, 칼카스!”
스아아아―!
가벼운 손짓에, 밀림이 갈라진다.
콰자자자작!
두부처럼 으깨지는 지면. 다 타버린 삭정이처럼 부스러지는 지옥의 나무들.
그 위를 뒤덮었던 수백 가닥의 사슬 역시, 수많은 고철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휘날렸다.
십수 년 만에 깨워낸 마녀의 힘.
악마가 도전자를 시험하기 위해 강림시키는 지옥의 그림자는, 그 힘 앞에 걸레짝처럼 스러지고 말았다.
츠아아아아···.
지옥의 정경이 걷혀나간다. 마법진이 빛을 잃은 거대한 공동이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지옥의 그림자 안에서 해메고 있겠지. 댈런은···잘 이겨낼 수 있을까.’
문득 한 전사의 안위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시에나는 곧바로 고개를 털었다.
지금은 자신의 싸움에 집중하는 게 맞았다.
마법진을 통한 담판이나, 기껏해야 화신체 정도를 상대하려 했던 원래의 계획은 이미 틀어졌다.
예상치 못하게 악마의 본체와 맞서야 하는 상황.
한순간의 방심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있는 중, 지옥의 그림자가 모두 지워지고.
차르르르···.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내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나. 거기다 모든 이들 중에 가장 빨랐군. 에낙사구스께서 주시하고 계신 그 전사가 첫 번째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절그럭.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사슬 소리가 울려퍼진다.
차르르르···.
다시 한 걸음. 지면을 즈려밟는 발밑에서부터 사슬 가닥이 덩굴처럼 무더기로 자라났다.
사슬 장막이 벗겨져나간 칼카스는, 로브를 뒤집어쓴 거대한 주술사의 형상이었다.
못해도 십 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신장과 덩치.
얇고 굵은 사슬로 짜인 로브 밑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서리의 기운.
[그나저나 그 힘을 사용한 건 꽤 대담한 행동이었다. 아니, 다시 말하지. 대담한 만큼이나 멍청한 선택이겠군.]
얇고 굵은 사슬로 짜인 두건 안쪽에서, 악마의 푸른 눈이 번들거렸다.
[십오 년 전 계약의 내용을 잊었느냐? 네 의지에 따라 단 한 번은 봉인의 서약을 깨고 마녀의 힘을 사용할 수 있으나, 그 대가로 너의 존재 자체를 내게 바쳐야 한다는 맹세를?]
악마는 입맛을 다셨다. 쩍쩍 갈라진 입술 안쪽으로 창백한 혓바닥이 낼름거렸다.
시에나는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녀는 품에서 작은 나무 인형을 꺼내들었다.
까마귀의 깃털을 덧댄 채, 얇은 쇠사슬로 꽁꽁 묶어놓은 인형.
그건 십오 년 동안 그녀를 구속해왔던 계약의 증표였다.
“우리의 계약에는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지. 네가 직접 내게 해를 끼칠 경우에, 계약은 파기되며 내 힘은 온전히 내 것이 된다고.”
검은 눈에서 마력광이 이글거린다. 그녀는 인형을 잡은 손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네 저주가 나에게 닿은 순간 우리의 계약은 파기되었다, 칼카스. 내 힘은 이제 내 것이야.”
콰직!
선언과 동시에 부서지는 인형.
초월적인 존재들의 계약에서, 정당한 선언과 증표의 상실은 곧 계약 종료를 의미하는 바.
촤르르르륵!
시에나의 무형의 사슬 수십 가닥이 뻗어져, 구속력을 잃은 채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거구의 주술사는 손을 펴 계약의 잔재를 회수했다. 놈은 히죽이던 입술을 슬그머니 끌어내렸다.
[···머리를 잘 썼구나, 마녀. 하긴 어릴 적에도 너는 영특했었지. 너무나 영특하고 출중해서, 상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내 종속을 삼고 싶을 정도였어.]
“꿈 깨시지. 나와 거래를 하고 싶다면 잘 생각해야 할 거야. 네 얕은 수작에 놀아날 정도로···.”
[허나.]
쿠웅.
수정구 부서진 지팡이가 땅을 내리찍었다. 수천 가닥의 사슬이 새로이 뻗어나왔다.
공동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내달리는 사슬의 파도.
마치 거대한 거미가 먹잇감을 포획하기 위해 지은 함정처럼, 사슬 그물은 공동을 빈틈 하나 없이 촘촘하게 뒤덮었다.
[세계의 종점이 머지않은 지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영혼이 소멸하지만 않으면 에낙사구스께서 어떻게든 솥구덩이에 데려가 살려주시겠지.]
악마는 끌어내렸던 입꼬리를 다시 올렸다. 놈이 말했다.
[어디 갓 되찾은 힘으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보거라, 깃털의 마녀야.]
***
‘잠깐은 버틸 수 있겠지.’
쇠 냄새 가득한 밀림을 천천히 걸으며, 댈런은 생각했다.
칼카스의 두 번째 페이즈는, 놈이 기거하는 지옥의 그림자가 강림한 가운데 펼쳐진다.
광대한 지옥의 그림자 속.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 채, 각자에게 주어진 지옥의 시험을 통과하는 게 2 페이즈의 정석 공략법.
그리고 놈의 보스전에서 시에나를 동료 삼은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애초에 그녀가 중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칼카스와의 계약으로 인해 봉인된 마녀의 힘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파티에 시에나가 있을 경우, 2 페이즈에서 칼카스는 오직 그녀만을 노리는 바.
오랜 시간 마녀의 힘을 탐해온 놈이라면 그럴 이유가 충분했다.
‘그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상급 악마.
오래 전, 성검을 강탈했던 악마 골라캅과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강대한 적.
태초의 마녀로부터 이어져온 혈통의 힘은, 그런 악마와도 승산을 점쳐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물론 이제야 힘을 막 되찾은 시에나가 그 혈통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아주 조금의 승산이라도 있는 이유는, 칼카스가 상급 악마 중에서 약체에 속하기 때문이겠지.
‘옥좌에서 멀어진 만큼 원래 힘의 절반도 못 내는 이유도 있고.’
원래 싸움은 홈그라운드가 제일 유리한 법.
옥좌를 떠나 지상에 가까운 미궁 저층부까지 소환되었으니, 놈의 힘이 제약되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그것 때문에 죽일 수도 없다는 거지만.’
골라캅 같은 떠돌이와 다르게, 자신만의 지옥이 있는 악마는 결국 그 지옥에 쳐들어가야만 완전히 죽이는 게 가능하다.
물론 이건 아직까지 머나먼 미래의 일.
당장 악마의 본체를 상대한다는 것도, 원래 게임에서라면 이 시점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잘그락.
바닥에 너저분하게 깔린 사슬을 밟아가며 이동하던 중, 댈런은 눈앞의 나무 한 그루를 보고 멈춰섰다.
불에 탄 숯처럼 새까맣고, 빼곡한 가시가 껍질을 덮은 지옥나무.
그 나무껍질에는 작은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오직 그만이 새길 수 있고,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
[왔던 곳]
한국어로 적힌 세 글자를 보고, 댈런은 오랜만에 턱이 아닌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말했다.
“길을 잃었군.”
***
길을 잃었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사슬옥좌의 칼카스.
놈의 소환된 본신을 상대하는 보스전에서, 두 번째 페이즈는 총 세 부류로 나뉘었으니까.
‘파괴의 시험과 인내의 시험, 그리고 주문의 시험’
세 부류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았다.
모든 시험의 장소는 차디찬 사슬로 뒤덮인 지옥나무 밀림. 바로 칼카스가 기거하는 지옥을 본딴 그림자였으니까.
‘하지만 비슷한 지옥의 그림자라도 파훼법은 다 다르지.’
파괴의 시험은 단 일격으로 주변 일대를 뒤엎어야 하고.
인내의 시험은 칼카스의 사냥개 수백 마리를 상대로 일정 시간 이상을 버텨야 했다.
그리고 미로 그 자체가 된 밀림 속에서, 뛰어난 마력 감응력으로 출구를 찾아내야 하는 게 바로 주문의 시험.
댈런은 확신했고, 미소 지었다.
‘이곳은 주문의 시험이다.’
그의 예민한 감각마저 속절없이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환상이나 환각이 아닌, 세계의 법칙 그 자체가 비틀리면서 벌어진 일.
결정적인 단서는 하나 더 있었다.
가장 간교하기로 소문난 악신, 에낙사구스의 수하 아니랄까.
칼카스의 지옥이 제시하는 각 시험은, 도전자의 가장 뒤떨어지는 능력을 기반으로 정해진다는 점이었다.
‘근력과 민첩이 낮으면 파괴의 시험, 체력과 감각이 낮으면 인내의 시험, 이런 식이었지.’
댈런은 상태창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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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22
[근력 : 34] [기량 : 30] [체력 : 31]
[감각 : 27] [지능 : 28] [마력 : 29]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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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과 감각의 합산은 58.
지능과 마력은 도합 57이다.
단 1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낮은 수치. 당연하겠지만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지능과 마력 수치가 조금이라도 더 낮으면, 두 번째 페이즈에서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1 차이는 경험해본 적 없어서 혹시나 싶었는데. 다행이군.’
칼카스의 본체를 상대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댈런은 늪지 원혼들과 모태를 잡고 레벨업해 얻은 능력치를 투자하지 않고 아껴두었다.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게임 중반부에 가장 필요한 아이템 중 두 개를, 이곳 어딘가의 시체들에서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비축했던 잔여 능력치를 마력에 투자했다.
이로써 그의 마력 수치는 30.
머지않아 검은 눈에서 마력광이 번뜩이며.
············.
이전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것들이 눈과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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