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만남(1)
흔들림 없는 고정식 의자와 테이블이 자리하고, 화려한 문양들로 벽면이며 천장을 장식한 고급 마차 안.
츠아아아···.
푹신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댈런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손 위에서 정교한 얼음꽃을 피워냈다.
「빙정」
지옥에서 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하며 얻은 고유 스킬.
손 안에서 피어난 냉기의 결정체를 섬세하게 조작하며, 댈런은 상태창을 위에서부터 찬찬히 뜯어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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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25
[근력 : 38] [기량 : 34] [체력 : 31]
[감각 : 30] [지능 : 31] [마력 : 33]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고유 스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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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군.”
지옥에서 얻어온 수확이 확실히 어마어마하기는 했다.
소환된 악마를 죽이고 하나. 진룡이 힘으로 놈을 사슬옥좌에서 떨어뜨림으로 둘.
굳이 따지자면 두 번에 걸쳐 나눠 들어오기는 했으나, 어쨌든 악마 하나를 죽이고 올린 레벨이 세 개나 됐다.
거기다 회수한 시체들에서 얻은 보상까지 합치면, 한 번의 싸움으로 얻은 능력치는 무려 10 이상.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래,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폭발적인 성장이었다.
‘하지만 핵심은 이게 아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탐험을 통해 얻어낸 가장 큰 보상은 능력치가 아니었다.
아공간에는 낙성의 비약과 상급 악마의 정수가 보관되어 있고, 숙련도 100퍼센트에 도달한 스킬도 무려 둘이나 됐지만.
악마를 소멸시키고 지옥을 무너뜨리며 얻어낸 가장 큰 과실은, 그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가능성이었으니까.
‘고유 스킬.’
[고유 스킬(6)]
[뇌격, 파영의 마안, 염사, 답보, 홍염주, 빙정]
보유 가짓수가 다섯을 초과하면서 생성된 고유 스킬의 목록.
원래는 게임 후반부에나 볼 수 있었던 히든 컨텐츠이자, 단 한 번도 다섯 개를 넘도록 가져본 적 없는 미답의 가능성.
사실 모니터 너머의 플레이어였던 과거의 그에게, 고유 스킬은 어떤 의미에서 계륵 같은 요소였다.
그 위력 자체는 일반적인 스킬을 아득히 상회할 만큼 강력했으나.
입수 난이도부터 사용법까지, 욕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어려웠기 때문.
‘일반 스킬은 비전서를 통해서나 스승 밑에 들어가면 익힐 수 있지. 사용하는 법 역시 단축키 한 번이면 끝났고.’
고유 스킬은 사뭇 달랐다. 애당초 획득부터가 플레이어가 아닌, 오로지 캐릭터의 역량에 달려있었다.
캐릭터가 전투나 수련 중에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의 심상과 영역을 통해 기존에 가졌던 힘을 비틀어 얻는 게 고유 스킬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깨달음’이라는 것 자체가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무작위적인 요소였다는 점.
때문에 최후반부에 돌입한 영웅급 캐릭터라도, 운 없으면 고유 스킬은 구경도 해보지 못하고 죽곤 했다.
‘영역을 이뤄야 한다는 최소 조건도 까다로웠지.’
습득할 때 알림창이 뜨는 것도 무작위에, 따로 습득 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
무작위로 지정된 스킬 커맨드는 또 어찌나 복잡하던지, RPG가 아닌 격투 게임을 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츠아아아아···!
모니터 너머의 게이머가 아닌, 살아 숨 쉬는 대륙의 주민이 된 이상 상황은 달라졌다.
고유 스킬의 제약은 더이상 제약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가능성의 발아는 게임 캐릭터라는 제 3자의 심상이 아닌, 댈런 자신의 심상에서부터 시작됐으니까.
심상의 출발점도 그였고, 힘을 비틀고 엮어내는 과정 역시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게임 상에서 각종 무작위 버프나 추가 공격 등으로 구현되었던 부과 효과들 역시, 오롯이 스스로의 재능과 센스에 의해 펼쳐지는 변칙의 산물.
그 범용성과 응용력은 단순한 스킬의 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이었고.
이로 말미암은 도취감은 능력치 획득과는 궤 자체를 달리하는 감각이었다.
그동안의 성장이 정해진 틀 안에서 발전하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아예 그 틀을 반쯤 부수고 나온 듯한 해방감이었으니까.
콰즈즈즈즈···!
손바닥 위. 끝을 모르고 꽃잎을 만개시키는 얼음의 결정.
그 꽃잎의 수는 수십을 넘어 이미 세 자릿수로 접어들었다.
카각. 카가각―!
응축된 냉기에 서린 마력의 밀도 역시, 그 꽃잎의 수에 비례해 증폭되고.
「빙정 : 개화(開花)」
근방 일대를 죄다 얼려버릴 수 있는 냉기가 폭발하려는 순간.
‘여기까지.’
댈런의 한 줄기 의지에 따라, 꽃을 피워내기 직전에 스르르 사그라들었다.
치직, 치지직···.
손바닥 위에서 바스라지는 결정 사이, 한 줌도 안 되는 냉기가 미처 소멸하지 못하고 흘러나온다.
대륙의 어느 마탑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만의 주문.
그 탄생과 소멸을 바라보며 댈런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쁘지 않은데.’
기존의 스킬과 능력치를 비틀어 아예 새롭게 창조해낸 능력, 고유 스킬.
힘의 설계부터 종말 단계까지 모든 과정이 그의 손 안에 있었다.
몇 번을 되새겨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시작점.
고작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된 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서 수백 갈래의 가능성을 그려나가는 중이었다.
‘경매장에서는 비전서를 구해야겠군. 아니면 스킬을 배울 수 있는 비슷한 종류의 물건이라든가.’
상태창의 하단에 생긴 고유 스킬 목록은, 이미 그런 뿌리가 여섯이나 그의 심상 너머에 자리했다 말하고 있었다.
그 가짓수를 늘여낼 수만 있다면, 다가오는 종말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아득히 먼 미래에나 거머쥘 거라 생각했던 실낱같은 희망.
그 작은 빛이 어느새 성큼 다가온 것처럼 느껴졌다.
꽈악.
댈런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여전히 갈 길은 멀었다.
허나 지금껏 밟아온 길 역시, 결코 짧지 않은 길이와 밀도를 품고 있다 자부하는 바.
단 한 번도 정복하지 못했던 종말을 눈앞에 뒀지만, 포기할 생각은 단 한 순간도 가진 적 없었다.
“으음, 조금 춥네······.”
“이런.”
시에나의 잠꼬대에 정신을 차려보니, 마차의 창문마다 서리가 낀 게 눈에 들어온다.
빙정을 소멸시키며 티끌만큼 새어나온 냉기가, 마차 안의 온도를 고산 지대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낮춰버린 것.
‘되찾은 힘에 적응하느라 체력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감기라도 걸리면 골치아파지겠지.’
오랜만에 난로 겸 버너가 제 역할을 할 때였다. 댈런은 아공간 속의 악마를 불렀다.
‘야.’
[예, 주인님?]
‘나와서 난로 좀 틀어봐라.’
[그, 고위 마법사쯤 되셨으면 주문 제어 정도는 쉬우실 텐데 어째서···.]
얼씨구, 이 새끼가.
[···가 아니라 당연히 제가 모셔야죠. 주인님, 최적 온도는 어떻게 설정해 드릴까요?]
어느새 허공에 열린 아공간의 입구에서 온풍이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급 마차에 딱 어울리는 학습형 온풍기였다.
***
미궁도시 팔시온은 총 일곱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외부 인력과 다양한 산업의 원재료를 공급하며, 도시의 근간을 책임지는 청동 구역.
미궁의 입구이자 탐험가들의 요람인 동시에, 미궁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부산물들의 산지인 순은 구역.
거기서 성벽 하나를 더 넘어가면 나오는 황금 구역은, 그 이름처럼 팔시온의 재력 대부분이 집중되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대륙 전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상단들의 지부가 이곳에 자리했으며, 도시연합의 조폐국 역시 여기 위치했다.
그리고 돈이 모이는 곳에는 권력이 모인다던가.
‘중앙 의회도 이곳에 있지.’
덜커덩. 덜커덩.
일행을 내려주고 돌아가는 마차들을 뒤로 한 채, 댈런은 고개를 꺾어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봤다.
무려 40층을 넘어서는 까마득한 높이.
어지간한 상단 몇 개를 합친 수준의 드넓은 부지.
수천 개의 창문은 성벽 너머로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머금었고, 그 아래의 거대한 정문은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을 삼키고 뱉어내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로 이처럼 거대한 빌딩을 본 적이 있었던가.
나머지 일행들 역시 인상 깊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마차에서 내리고도 뚫어져라 건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팔시온의 중앙 의회 본청입니다.”
행렬을 뒤따라온 가웨인이 말했다. 비요른이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흐하하! 이거 참 대단하군. 인간들의 건축 기술이 확실히 발달하기는 한 모양이야. 아, 물론 우리 드워프를 따라오려면 아직 좀 더 분발해야 하겠지만! 으하하하!”
“···입가에 흘린 침부터 닦고 말해.”
표정과 말이 따로 노는 난쟁이와, 그걸 타박하는 시에나의 목소리에 특무대 요원들도 한결 편안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 곁에서 댈런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의회 건물을 응시했다.
마천루가 가득 들어찬 현대의 도시에 살았던 그에게, 이 건물이 주는 감회는 사뭇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시죠.”
곁에 다가온 가웨인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병사와 기사들은 어느새 출입구 중 하나를 통제해 일행이 드나들 길을 터놓은 채였다.
댈런은 건물의 전경을 한 번 더 눈에 담고는, 가웨인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종말이 그 기세를 멈추지 않는다면, 이 전경은 머지않아 볼 수 없게 될 테니까.
***
일행이 안내받은 곳은 15층. 반면 댈런이 안내받은 곳은 21층의 한 응접실이었다.
웅장한 규모와는 다르게 건물 내부의 모습은 꽤나 수수했다.
청동 구역의 마탑 지부나, 순은 구역의 미궁 관리청 응접실보다도 더 사무적으로 보일 정도.
이 도시에서 중앙 의회가 맡은 역할과, 구성원들이 가진 색깔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커피 맛은 이쪽이 더 좋군.’
댈런은 벌써 두 번이나 리필한 커피잔을 기울였다. 세상에 여기서 바닐라 라떼를 마셔보게 될 줄이야.
그가 달짝지근한 커피향을 한껏 음미하고 있는 사이, 응접실 문이 열리고 금발의 청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잘 지냈지. 이제는 얼굴을 바꿀 생각도 없나 보군.”
“다른 모습으로 찾아와봐야 눈치 채실 걸, 귀찮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편한 게 좋은 거죠.”
금발 청년은 가볍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반 년 전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듣는 귀가 있을 지도 모르니, 일단은 미궁 관리청 소속의 에반이라고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러겠소.”
미궁 관리청 소속의 에반.
정확히는 그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는 금강궁의 초월자, 에버론 라크탈라.
천변만화의 얼굴이라 불리는 이 기인에게서는, 여전히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저 몸뚱이는 그가 가진 수십 개의 의체 중 하나일 뿐.
천변만화의 얼굴이라는 이명 자체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으니까.
“여기에 모셔오고자 한 건, 우선 얼마 전 차르국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미리 세팅된 커피로 목을 축이며, 에버론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수만의 원혼이 지상에 풀려나 사람들을 덮쳤고, 희생자들의 영혼은 거대한 의식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저희 측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얼마 전 미궁으로 내려간 차르국 반란군과, 그 반란군을 추적한 특무대가 이 일에 연관되어 있었죠.”
그리고 그 특무대의 길잡이가 되어준 게 바로 당신이고요. 에버론이 덧붙였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강궁에는 백안의 선각자가 있으니, 이 사건을 아예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험해봐야 할 의문은, 그 선각자의 눈이 닿는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냐는 것.
전지의 편린을 쥐었다 해서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필멸의 존재라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초월자라 해도 그건 마찬가지.
백안의 선각자는 과연 어디까지 내다볼 수 있을까. 미궁 저 깊은 곳의 심연? 혹은 에낙사구스 휘하의 옥좌들까지도?
“그래서?”
댈런의 무덤덤한 대답에 에버론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혹시 그 사건으로 소환된 존재가 누구인지, 혹은 그로 인한 여파와 누군가에게는 돌아가야 할 책임의 무게가 어떤지 아직 모르신다면···.”
“설명은 필요 없소.”
댈런은 품속 아공간으로 손을 뻗었다. 대놓고 떠보는 걸 가만히 들어주고 있을 필요는 없는 법.
“사슬옥좌의 칼카스. 놈은 완전히 소멸했으니까.”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이 초월자의 말문마저 막아버리고, 대화의 주도권을 단숨에 가져와 버린다.
“칼카스의 소멸이라니······. 에낙사구스의 성운이 장막으로 가리워진 건 그럼···.”
창백한 낯빛으로 생각에 잠긴 초월자 앞에서, 댈런은 다음 카드를 준비했다.
이미 단 한번의 질답으로 이어질 협상을 이끌어가는 건 이쪽이 된 상황.
마지막으로 필요한 카드는, 이 테이블에 쐐기를 박을 결정적인 증거뿐이었다.
“증거가 필요하다면 여기 있소. 놈의 옥좌를 부수고 나온 정수가······.”
아공간 안쪽. 손이 허공을 휘젓는다. 시발, 뭐지?
순간 느껴지는 섬칫한 육감에, 댈런은 아공간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아공간의 풍경 속,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저, 전 아닙니다! 끄윽, 아니. 이건······.]
대신 보이는 건 뭔가 몰래 먹다 걸린 사람처럼, 눈가를 파르르 떠는 악마놈의 표정.
“······.”
어쩐지 요새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더라니.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지.
이 새끼가 아무리 그래도 악마 정수를 훔쳐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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