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31화 (131/288)

세 번째 만남(2)

[머, 먹으려던 게 아니라 가져다 드리려고 했는데! 손이 닿자마자 저도 모르게 그만···! 절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일단 닥치고 있어.’

악마의 입을 다물게 한 뒤, 댈런은 욱신거리는 미간을 문지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악마가 정수를 집어삼켰다는 전말을 드러내기까지 꽤 지지부진한 설명이 필요했다.

눈앞의 초월자에게 어디까지 밑천을 드러내야 하는지와, 정수의 상실을 어떻게 설명할지에 대한 줄다리기.

다행히 눈치 빠른 에버론은 금강궁이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먼저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주었다.

‘모니터 너머에서의 수백 회차와, 지옥에서 있었던 일을 제외하고는 대략적으로라도 다 파악한 상태였군.’

악마를 사로잡고 성기사단의 내전을 진압한 일부터, 청린을 떨어뜨리고 새끼용과 함께하게 된 것까지.

에버론은 댈런이 미궁 속에서 겪었던 일들 역시 대부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선각자가 그에게 들려준 내용들이겠지만.

‘백안의 선각자···게임에서도 어지간한 사건들은 다 꿰고 있었지. 그 시야가 넓기는 넓군.’

천 년을 넘게 살아온 초월자의 능력은 확실히 천외천이라 할 만했다.

댈런은 그 경지에 새삼 감탄하면서, 칼카스의 정수를 악마가 먹어버렸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해합니다. 나무라면 그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전말을 알게 된 에버론의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였다.

“···그럴 수 있다니?”

“역천에 드리운 어두운 별나무, 아르보르. 불사의 악마가 가진 가장 본질적인 이명이죠.”

후릅.

찻잔을 기울인 에버론은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저도 잘은 알지 못하지만, 불사의 악마는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역사 이전에는 성수(星樹), 즉 별나무라 불렸다던가요.”

[호오.]

옅은 감탄을 뱉은 건 심상 너머에 웅크리고 있던 용이었다.

[흥미롭구나. 나이에 비해 아는 게 많은 녀석이야. 잘 귀 기울여 보거라.]

“많은 종족들의 번영을 도와준 성수는, 돌연 어느 날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성수가 가진 수많은 뿌리와 줄기, 잎사귀들은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에서 갈가리 찢겼다고 합니다. 고작 넷뿐이던 악신의 권속이 두 배 이상 늘어난 게 그 때라고 하던가요.”

처음 들어보는 설정이었다. 불사의 악마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문헌은커녕,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조차 찾기 힘들었으니까.

다만 적창의 반응을 보니 저 말이 사실이긴 한 듯했다.

“역사가 시작되기도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꽤 많은 숫자의 악마들이 그때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르보르가 칼카스의 정수를 흡수한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죠.”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힘을 이제 와서 다시 되찾았을 뿐이라는 건가?”

“어떤 의미에서는요. 정수의 소화가 끝나면 잃었던 권능을 제것으로 만들지도 모릅니다. 물론 추측일 뿐이니 가볍게 생각해주시길.”

에버론이 싱긋 웃었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애매한 상황이었다.

휘하의 하수인이 성장한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추후 따로 저주라도 먹여봐야 하나 생각해보기도 했었으니까.

다만 칼카스의 정수가 가진 가치를 고려하면, 속이 쓰리다 못해 배가 아프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 심정을 눈치챈 것일까.

“보상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버론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륙의 평화를 지켜낸 당신의 공로를, 금강궁은 결코 잊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소?”

“선각자께서도 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추후 적정한 보상을 선정하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주겠다는데 안 받을 이유는 없는 법.

[살았···다···.]

아공간의 악마 역시, 그 말에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댈런은 열흘 동안 여관에 틀어박힌 채, 미궁에서 얻은 힘을 갈무리해 연구했다.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도 가졌다.

그의 목표는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은화 한 닢짜리 방에서 적어내려가던 목표와 전략들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었으니까.

‘시시각각 멸망으로 다가가는 세상에서 살아남고, 종말을 막는 동시에 미궁 밑바닥에 있을 소원의 돌을 찾는 것.’

물론 그때는 지금과 형편이 많이 달랐다. 막 팔시온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레벨도, 돈도 부족했었으니까.

반면 지금 그의 레벨은 20대 중반에 달했고, 아공간에는 무더기로 쌓인 금화와 보석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거기다 소영역을 이루고 고유 스킬까지 쓸 수 있게 됐지.’

츠즈즈즈···.

손 안에서 번쩍이는 전류의 공을 굴리며 댈런은 생각했다.

‘문제는 그만큼 난이도도 함께 올라갔다는 거야.’

대륙의 정세는 점점 불안정해져갔다. 날뛰는 마물들과 짙어지는 전쟁의 기운, 그리고 그로 인해 끝없이 불어나는 난민들까지.

곳곳에서 은거기인들이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리는 걸 봐서, 완연하게 게임 중반부로 접어든 모습이었다.

물론 댈런이 걱정하는 건 전쟁이나 마물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가장 위험한 건 악신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니까.

‘에낙사구스.’

운명과 역천의 악신.

악신들 중에서도 가장 간교하다고 알려진 존재.

게임에서도 시작부터 끝까지 가장 경계해야 할 악신을 꼽으라면, 단연코 첫 번째가 바로 에낙사구스였다.

‘그런 놈이 나를 직접 함정에 빠뜨리려 했지. 심지어 차원 전이 마법까지 써가면서.’

인간을 포함한 각종 동식물이 살아 숨 쉬는 현실과, 그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구현되는 환상 세계.

두 차원 사이를 오갈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주문이다.

유사한 계열이자 열화판이라 할 수 있는 지옥문 소환 주문마저도, 제대로 사용하는 데 많은 양의 제물을 필요로 하지 않던가.

거기에 칼카스의 지팡이 파편을 매개로 삼았다는 건, 고정된 공간이나 시간 좌표 등의 기본적인 조건마저 배제했다는 이야기.

그만큼 지불해야 할 대가 역시 막중한 게 당연했다.

칼카스의 보구 중 하나인 지팡이를 주문의 마중물로 삼고, 상급 악마의 본신을 제물로 태워버려서야 수지가 맞을 정도로.

‘이 주문으로 가장 많은 걸 희생한 게 칼카스였다. 그러면서도 여유롭게 손님맞이를 운운했다는 건, 악신이 손해 본 것 이상의 무언가를 차후 하사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겠지.’

결국 적창의 힘에 의해 소멸해버렸으니, 그 약속 역시 휴지 쪼가리가 되긴 했을 테지만.

중요한 건 에낙사구스가 스스로의 힘을 지불하면서까지 함정을 팠다는 사실 자체였다.

그 말인즉 댈런을 그 가치에 맞먹는 위협으로 인지했다는 이야기.

과장 좀 보태서 지금까지 그의 행보가, 종말의 주역 중 하나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소리다.

‘혹시 내가 시체를 회수해 지옥문 주문을 익혔다는 걸 눈치챈 건가?’

문득 떠오른 가능성을 점쳐본다. 답은 부정이었다.

만약 계승자 DLC에 대해 놈이 인지하고 있다면, 단순히 함정을 파는 것 이상의 계략을 꾸몄을 게 분명하다.

다만 머지않은 시점에 댈런과 칼카스가 한 판 붙을 것 정도는 예상했던 것이겠지.

그리고 놈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이번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댈런은 칼카스가 차르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에 어떻게든 처치하려 했을 테니까 말이다.

“쯧.”

콰직!

댈런은 주먹을 쥐어 전격의 구체를 부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검을 탈취한 악마, 도시를 제물로 바치려 한 재의 마녀.

타락한 성기사단의 부단장과, 놈이 바친 성검으로 힘을 회복한 균열의 진룡.

어쩌다 보니 반 년 동안 사건이 터지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한 모양새였다.

물론 그가 가는 곳마다 종말의 손아귀를 성공적으로 저지한 건 사실. 허나 더이상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세상은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 게임과 동일하게 흘러갈 거라 생각해서는 안 돼.’

게임의 지식으로 종말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애당초 그 지식을 얻어온 세계들이 모두 멸망을 피하지 못했으니까.

지금 필요한 건 종말보다 한 박자 앞서나가는 발걸음.

그러기 위해서는 미답의 길에 과감하게 발을 내딛을 줄도 알아야 했다.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되, 그것들에 내 한계를 제한받지 않도록 경계하자. 게임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시야가 가리워지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으니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들. 한 번도 손에 넣어본 적 없는 힘.

상정하지 못한, 혹은 상상마저 뛰어넘는 일은 이미 반 년 사이에 몇 번이나 일어났다.

이제는 그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했다.

이 길에서 나타날 방해가 무엇이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동력으로 삼아서.

그리고 그 자신감은 이미 그에게 내재되어 있었다. 상식을 벗어나는 육신과 재능, 거기서 비롯된 가능성은 연구를 거듭할수록 끝없이 뻗어나가고만 있었으니까.

‘슬슬 거래의 대가를 받으러 가볼까.’

댈런은 갑옷을 걸치고 방문을 나섰다. 오늘의 일정은 그의 가능성 위에 안정감을 한층 더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일주일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했으니, 열흘째인 지금은 다 완성하고도 남았겠지.’

댈런이 미궁의 일로 받아낼 보수는 금강궁에만 있지 않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미궁에 내려가기 전, 까마귀 둥지의 바텐더와 했던 거래가 훨씬 더 큰 건이겠지.

용의 이름으로 맺은 계약의 보수는 다름 아닌 신비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육신이었으니까.

오늘은 적창의 피를 얻게 된 이후로, 오랜 시간 고질적으로 그를 괴롭히던 문제가 해소되는 날이었다.

***

[시에나는 자리를 비웠다.]

쪼르르륵.

잔에 술을 따라주며 버번이 말했다.

[필로폰네 과수원에 볼일이 있다고 하더군.]

“···과수원이라. 마약 문제요?”

[통찰력이 좋구나. 마약쟁이들에 관한 일이라고는 했다. 나머지는 나도 알지 못하니 직접 물어보도록.]

버번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용이면서도, 그는 은근히 주변 사정에 무지하곤 했다.

‘굳이 관심 가질 필요가 없어서겠지.’

용신의 첫 포효, 카일버르쿠스 아르번은 강자다.

금강궁의 초월자들을 포함해, 도시의 음지와 양지에 널린 기인이사들을 다 끄집어내 봐도 비견될 자가 거의 없는 강자.

본신이 아닌 분신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도시에서 위협을 느낄 만한 일은 사실상 전무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깃털의 마녀의 안위뿐.

도시에 난민이 넘쳐나건, 출처 모를 마약이 돌건, 아니면 그 마약을 복용한 난민들이 떼로 소요를 일으키건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마셔라.]

파짓!

섬세한 마력의 울림과 함께 바텐더의 손끝에서 작은 섬광이 일어났다.

곧이어 반짝이는 가루들이 스르르 떨어져 술잔 안으로 녹아들었다.

“···방금까지 마약 이야기 하던 와중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수상쩍어 보이는데.”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수술의 진행을 도와주는 활성제다. 네 특이한 몸뚱이 때문에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했으니,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남김없이 마시는 게 좋을 거다.]

“그렇다면야.”

댈런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평소에 마시던 것과 똑같은 색깔과 향이었지만, 입안에 들어온 순간부터는 전혀 아니었다.

“···후우.”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실시간으로 목구멍과 위장의 지도가 그려지는 감각.

체력 수치가 인간의 레벨을 벗어난 댈런에게도 그렇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숫제 알코올이 아니라 독극물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

“이거 잘못 먹으면 뒈지겠는데.”

[네 육신과 정신을 탓하거라. 심상과 어찌나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지, 5위계를 넘어서는 초월자들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버번이 살짝 짜증난다는 투로 말했다.

미궁에서 돌아온 지 이튿날, 그는 마무리 작업에 필요하다며 댈런의 육신을 진단해갔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그날 진단 결과가 평범하지 않기는 했던 모양. 하루면 끝난다던 마무리 작업이 일주일이나 연장됐던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일지도 몰랐다.

“자꾸 이상하다 이상하다 거리는데, 난 평범한 사람이오.”

[그런 걸 기만, 혹은 무지라 하느니라. 어느 쪽이 좋으냐?]

“······.”

거 무서워서 농담도 못 하겠네.

[아무튼 흡수가 잘 된 것 같구나. 눕거라.]

버번은 댈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가벼운 손짓만으로 테이블을 움직여 임시 침상을 만들었다.

술집 테이블 같은 비위생적인 공간에서 수술을 해도 되나 싶었지만, 이제 와서 용을 믿지 못한다는 것도 웃긴 일이겠지.

믿을 수 없었다면 이런 수술을 맡긴다는 것 자체부터가 어불성설이다. 남의 손에 목숨줄을 맡기는 일. 사실상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는 처음이었으니까.

[마음의 준비는 됐느냐?]

“···언제든지.”

[좋다. 그럼 시작하지.]

버번은 아공간을 열어 목함 하나를 꺼내들었다.

구우우웅···.

아공간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도 술집 전체에 걸쳐 공명하는 마력.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버번은 목함 위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미리 이야기해두지. 청린과 그 수하의 심장을 가지고 네 육신 전체를 개조해주는 건 불가능했다.]

“심장의 크기는 충분히 컸던 것 같소만.”

[오늘 몇 번이나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육신이 일반적인 인간과는 뭔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 가불기 쓰네. 댈런은 그냥 누운 채 어깨를 으쓱였다.

“또 다른 안내사항은 없소?”

[아무렴 있지.]

“뭐요?”

잠깐의 침묵.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에 지어지는 미소.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시종일관 일관된 표정이던 용의 얼굴에서 처음 본 웃음이었다.

[좀 많이 아플 거다.]

13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