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32화 (132/288)

과수원(1)

“우욱···.”

영겁처럼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갔다. 수술 도중 의식을 잃은 횟수만 다섯 번.

살이 뜯겨나가고 온몸이 부서지는 싸움 속에서 버틴 정신마저도, 마취 없는 수술의 고통은 견뎌내지 못한 것이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마취제를 줄 수는 없었던 거요?”

[또 웃기는 소릴 하는구나. 그 몸뚱이를 마취할 만한 약초가 흔할 것 같으냐?]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은 없다. 스스로의 몸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댈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마취 없이 직관하게 된 수술 장면만 봐도 그랬다.

개복하는 즉시 열린 배를 닫아버리는 재생력.

외부 마력이 간섭하려 할 때마다 반발하듯 튀어오르는 화염과 스파크.

정상적인 수술 진행을 위해서만 수십 개의 마법진이 동원되지 않았던가. 겉으로 보기에는 이식 수술이라기보다 마도공학 공정에 가까웠던 수술 현장이었다.

[알아두어라. 네 육신의 나이는 오래되지 않았건만, 심상의 연식은 그걸 아득히 초월한다는 걸. 무슨 삶을 살아온 건지 나조차 궁금할 지경이니라.]

“그냥 평범하게 살았소. 요즘은 좀 아닌 것 같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댈런은 그저 평범한 회사원에 불과했으니까.

[···그렇다면 네 존재의의는 역천의 우물이 택한 재능일 수 있겠지. 예언이 정말로 맞다면 말이야.]

“예언?”

[아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나. 한 번 일어나보거라. 어디 몸은 좀 움직여지느냐?]

개수대에서 손을 씻은 버번이 바테이블 밖으로 걸어나오며 물었다. 댈런은 그 말대로 몸을 일으켜서 슬슬 움직여봤다.

“···굉장하군.”

결과는 놀라웠다.

두어 시간 전까지만 해도 신경계를 두들기던 고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이전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힘이 전신에 충만하게 휘돌고 있었다.

쿵···. 쿵···.

가장 또렷하게 느껴지는 변화는 바로 심장 부근.

진룡 청린과 놈의 수하에게서 얻은 부산물은, 댈런의 심장을 포함한 순환계를 대체하는 데 사용되었다.

신비의 산물인 용의 피를 얻은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건 그 피를 담을 신비의 그릇.

직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혈액을 담는 그릇은 심장과 혈관이고, 버번 역시 그쪽이 우선순위라고 말했다.

[내용물과 그릇이 어우러졌으니, 적창의 힘이 네 존재 자체를 으스러뜨릴 일은 없을 거다. 힘을 쓰는 것만으로 목숨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지.]

“다행이군. 고맙소.”

[합당한 거래였을 뿐이다. 그리고 순환계를 제외한 다른 부위들은 여전히 필멸의 격 아래 있으니,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쉽게 깨지고 부서질 것이니라. 그래도 금방 회복하기는 할 테지만.]

거듭 부서지고 수복하는 꼴도 꽤 재밌겠구나. 버번이 슬쩍 웃으며 덧붙였다.

‘···그게 재밌다고?’

댈런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월자들은 다들 정신머리가 어디 하나씩 이상하다더니, 저쪽도 왠지 묘한 부분에서 나사가 빠진 느낌이었다.

“어쨌든 내 손으로 내 목 조를 일은 없다는 거군.”

[그렇다.]

“그거면 됐소.”

한 번에 모든 걸 이룰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강대한 힘과 그에 걸맞는 육체를 얻으려면, 그만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애당초 지금 초월자라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이 못해도 백 년 이상 그 육체와 정신에 격을 쌓아올리지 않았던가.

그에 비해 댈런은 아직 제대로 활동을 시작한 지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 그런 존재들과 눈높이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 건 과한 욕심이겠지.’

조급할 필요는 없다. 아직까지 시간은 많았으니까.

그리고 육체의 격을 올리는 방법에는, 용심장을 뽑아서 쓰는 것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차차 알아보면 될 일이다.’

지금은 당장 눈앞에 놓인 일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

갑옷을 걸치고 장비를 점검하는 그에게 버번이 말을 걸어왔다.

[이제 어디로 가느냐?]

“시에나에게 가볼 생각이오. 금강궁과 차르국 특무대의 보상은 그쪽을 통해 받기로 했었으니까.”

[마침 잘 됐구나. 안 그래도 네가 의식을 잃은 동안 그녀에게서 전언이 도착했다.]

팔랑.

말이 끝나자마자 큼직한 검은색 깃털 하나가 댈런의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잡아들자, 깃털이 끝에서부터 바스라지며 머릿속에 전성을 흘려보냈다.

[시간 있으면 필로폰네 과수원으로 와주겠어? 내 지인이 의뢰를 하나 맡기고 싶어하거든. 지인이라도 보수는 당신의 실력과 이름값에 맞게 철저하게 매길 거니까, 그쪽 관련 걱정은 안 해도 돼.]

“···과수원이라.”

댈런은 익숙한 이름을 되뇌며 턱을 쓰다듬었다.

장소가 장소임을 생각했을 때 의뢰 내용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댈런이 알기로 과수원의 주인은 자기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

그런 그녀가 시에나를 찾았다는 건, 뭔지는 몰라도 지금 벌어지는 문제가 자신의 손을 아득히 넘어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아직 마녀의 힘을 되찾았다는 건 알지 못할 테니, 까마귀 둥지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겠군.’

청동 구역의 뒷골목과 낮은 거리, 그걸 넘어 하수도까지 걸친 거대한 정보망과 인력풀.

기이할 정도로 체계적이면서도 엉성한 이 지하조직의 힘이 필요할 정도의 문제라면, 지금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과도 연관되어 있을 테였다.

[무슨 내용이더냐?]

“의뢰요. 아무래도 마약쟁이들을 좀 주물러줘야 할 것 같군.”

[네 전문이구나. 다만 조심하거라.]

쪼르륵.

얼음 넣은 잔 안으로 갈색 액체가 채워진다. 댈런은 바로 술집을 나서려다 잠시 멈춰섰다.

[네 몸을 진단하면서 조금은 알게 되었다. 네가 지금껏 어떤 식으로 성장해왔고, 앞으로 어떻게 강해져갈지를. 힘의 출처와 근원 모두 불가해하더구나.]

바텐더가 테이블을 툭 건드렸다. 술잔은 자연스럽게 둥실 떠올라, 댈런을 향해 부드럽게 날아갔다.

[네 가능성에 훼방 놓을 생각은 없느니라. 허나 분명한 건, 지금의 네 위계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끌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이지. 재능과 노력으로 빚어진 초인들. 그 대다수는 초월의 벽을 뚫지 못한 채 지금도 돌파구를 찾아 방황하고 있다.]

세로로 찢어진 용의 눈이 번뜩였다.

[그들의 성정은 네가 지금껏 만나온 초월자들과 사뭇 다를 것이다. 벽 앞에 패배한 전적이 있는 이들은 네 성장에 시기심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거라. 어쩌면 그 비밀을 캐고, 더 나아가 빼앗고 싶어 할 수도 있고.]

“···명심하지.”

댈런은 잔을 받아들었다.

통상의 법칙과 개념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존재의 조언이다. 헛소리라고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다른 이의 의견을 마냥 무시해서 좋을 것도 없는 법이다.

오히려 그 모든 의견과 조언들을 재료로서 그러모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길을 다지는 게 상책.

달칵.

단숨에 비운 잔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약간의 과일향이 더해진 게 꽤 괜찮은 맛이었다.

[그럼 되었다. 거기 두거라. 내가 정리하면서 치울 테니.]

버번은 어느새 행주를 손에 들고 술잔들을 닦고 있었다.

***

찰박. 찰박.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청동 구역 뒷골목. 판석 없는 길바닥은 반쯤 진창이었다.

댈런은 우비를 뒤집어쓴 채 그 진창 위를 걷고 있었다. 까마귀 둥지를 나와 필로폰네 과수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위계라.”

영역. 그리고 위계.

둘 다 모니터 너머에서는 인게임 설정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갔던 단어들이었다.

플레이어에게 중요한 건 상태창에 숫자로 표기되는 능력치, 그리고 등급으로 구분되는 스킬뿐.

심상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영역이나, 그 심상의 크기와 밀도에 따라 구분되는 위계는 애매한 개념의 설정일 뿐이었다.

“흠······.”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신경이 쓰인다.

종말이 다가오는 세계가 현실이 된 지금, 모니터 너머에서 고려하지 못했던 것들이야말로 그에게 돌파구가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

‘대충 F등급 스킬을 완숙하게 다루면 1위계. E등급이면 2위계. 이런 식이었지.’

완벽한 기준은 아니다. NPC들의 대화에서 언급됐을 때를 돌아보면, 그보다는 더 본질적인 기준이 있는 듯했으니까.

그보다는 심상으로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영역, 혹은 시스템상 고유 스킬이라 불리는 능력들이 훨씬 근접한 기준일 터.

‘펠버를 통해 좀 더 알아봐야겠군.’

간극이 느껴진다.

플레이어로서 수백 회차를 밟아온 기억들과, 살아 숨 쉬는 세상에서 익혀나가는 것들 사이에는 간극.

하지만 굳이 둘 중 하나를 버릴 필요는 없었다.

이 간극을 차차 좁혀나갈수록, 이미 가진 것들과 새로 얻을 것들을 융합해 더 높은 곳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테니까.

상념을 갈무리한 댈런은 모퉁이에서 꺾어 더 좁은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찰박. 찰박.

더욱 진창이 되어가는 길바닥.

비와 흙만이 아닌, 오물과 쓰레기로 점철된 웅덩이들.

코를 찌르는 냄새에 댈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뒷골목의 악취는 원래도 심했지만, 요즘 들어 나날이 더 역해지는 중이었다.

‘···아무리 뒷골목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군.’

곳곳에서 몰려오는 난민들이 그 이유였다.

마물을 퇴치하려는 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물들로 인해 집과 땅을 잃은 사람은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었기 때문.

‘팔시온이라서 더 심한 것도 있겠지. 다른 도시들은 안 되겠다 싶으면 문을 걸어 잠그지만, 여긴 그런 정책 자체가 없으니까.’

실제로 청동 구역의 남부 지구는 수백 년간 완전한 개방 정책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댈런의 경험상, 이는 악마의 군세가 코앞까지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마물이 판치기 시작하는 중반 이후부터, 미궁도시에서 발생하는 퀘스트의 숫자가 몇 배로 불어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셈.

지금도 기껏해야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를 걸어가면서,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가는 난민을 수백 명씩 지나치지 않았나.

‘과수원의 문제도 아마 난민과 연관되어있을···.’

쉬익!

상념을 끊는다. 찔러오는 단검. 반사적으로 뻗어낸 손.

“칵!”

억센 손아귀에 잡힌 부랑자가 목 졸린 소리를 냈다. 힘차게 찌른 단검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주며, 댈런이 물었다.

“넌 뭐냐.”

“크흐, 크아아악!”

대답하려는 기색은 없다. 그저 몸을 한계까지 비틀며 손에 꼬나쥔 단검을 들이밀었을 뿐.

이번에는 댈런도 손속을 좀 거칠게 했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씩이나 날붙이를 들이미는데, 봐줄 필요는 없는 일이다.

와지직!

“캬아아아악!”

부랑자의 손목부터 손가락까지가 순식간에 으스러진다. 놈은 눈을 까뒤집고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

‘흠?’

그리고 댈런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거적때기 아래로 느껴지는 체구는 앙상하기 그지없는데 반해, 남자의 힘은 무슨 숙련된 용병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남자의 입에서 풍겨오는 악취 속, 시큼한 냄새는 그가 알던 뒷골목의 악취와는 사뭇 다른 종류.

“약쟁이냐?”

“크히, 크히히!”

“···말이 통할 상태가 아니군.”

적당히 기절시켜서 시에나에게 데려가면 뭔가 알아내 주겠지. 마침 필로폰네 과수원에 있다니까, 전문가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한 댈런이 손아귀에 힘을 조금 주려고 할 때였다.

“크힛?!”

부랑자의 눈동자가 훽 돌아갔다.

입가에 부그르르 끓어넘치는 녹색 거품과, 발작하는 것처럼 경련하는 팔다리.

그 순간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댈런은 망설임 없이 놈을 거리 저편을 향해 내던졌다.

“크흐, 크히히, 크하아아악···!”

내던져지면서도 거품 사이로 토해내는 괴성. 그리고 그 끝에.

뻐어어엉―!

부랑자의 몸이 왈칵 부풀더니 터져버리며, 진득한 부산물로 골목 사방을 뒤덮어버렸다.

치이이이······.

녹아내리는 벽돌. 끓어넘치는 진창 바닥.

한눈에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 속. 댈런은 이상한 점을 한 가지 더 느낄 수 있었다.

쉬이이이···

찰나의 순간. 공간에 얕은 틈이 생기고, 터져버린 시체의 흔적에서 희끗한 무언가가 떠올라 빨려들어간다.

“······.”

무슨 일인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희끗한 건 영혼. 그리고 공간의 틈은 사후세계든 뭐든 어딘가로 향하는 통로였겠지.

흑마법을 익히고 지옥문을 열어낸 뒤, 감각 수치마저 30을 넘어섰기에 이런 것까지 볼 수 있게 된 것일까.

그렇다기에는 미궁에서 빠져나오며 수많은 죽음을 목도했음에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현상이었다.

‘마약. 난민과 부랑자들. 필로폰네 과수원의 의뢰. 어디론가 빨려들어간 영혼. 흑마법.’

이질적인 상황. 추측을 위해 머릿속에 키워드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고작 약에 취한 걸인 하나가 난동을 부렸다기에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원혼의 밤 사태.’

뜨겁게 달아오르는 머릿속. 뜬금없이 얼마 전 에버론에게 들었던 단어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겠지.

날이 갈수록 비인간적으로 강해져가는 건 힘과 마력뿐만이 아니다. 이 육신에 깃든 직관과 논리 역시 결코 무시할 건 못 되었다.

찰박.

확인을 위해서는 일단 전문가를 찾아가 봐야 할 것이다.

빈 병을 꺼내 녹색 액체를 조심스레 담은 댈런은, 곧장 몸을 돌려 좁은 골목을 나섰다.

쏴아아아······.

때마침 거세지기 시작한 빗줄기가, 애꿎은 누군가의 집 벽면을 녹이던 녹색 물질을 서서히 씻어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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