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마을(1)
세 달 전.
댈런이 성기사단을 떠날 당시, 루시아는 수련을 위해 본단에 한동안 머물기로 했었다.
‘단장님께서는 원한다면 댈런을 따라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만······. 그랬다가는 댈런 덕에 지금까지 얻은 깨달음을 정리할 시간조차 없을 것 같습니다.’
작별하기 이틀 전, 그녀가 침울한 얼굴로 꺼낸 말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어떤 전설집에 수록되어도 부족함이 없는 여정이었으니까.
미궁의 악마와 타락한 성기사를 쓰러뜨려 성검을 되찾고, 도시 주민들을 몰살시키려는 마녀의 계략을 막았다.
땅속의 고대 유적을 통과하며 며칠간 사투를 벌인 끝에, 부단장의 반란군 세력 심부에 침투해 항전을 벌이기도 했다.
영웅적인 행보 속에서 쌓아낸 밀도 높은 깨달음을, 갈무리하지 않고 내버리는 것이야말로 몰상식한 일.
오히려 그녀가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다시 외부로 나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역시 영웅은 영웅인가.’
고작 3개월. 아니, 미궁도시까지 왔을 여정을 고려했을 때 그보다도 더 짧은 기간.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루시아의 기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댈런마저도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그녀의 기척을 구별해내지 못했으니까.
여러 방면에서 어수룩하던 수습기사의 모습은 완벽하게 지워졌다.
지금의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건, 흔들림 하나 없이 정갈한 순백의 신성력뿐.
한 자루의 빛나는 검처럼 느껴지는 그녀의 기세는, 모니터 너머에서 보던 고결한 성기사가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그 많은 깨달음을 다 흡수한 모양이군. 영웅이 품은 오성은 다르다는 건가.’
댈런처럼 상태창의 힘을 빌리지도 못할 텐데, 저 정도로 급격한 성장이라니.
종말 속에서도 빛을 발한 영웅들의 잠재력은, 확실히 그로서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종류였다.
달칵.
“각국의 지원 요청에 따라 성기사단은 다시금 활동 영역을 넓히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시 찾은 대장간의 응접실 안.
루시아는 페니가 내준 차를 홀짝이며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한때 성기사단은 악마와 마물들을 퇴치하기 위해, 대륙 전역에 지부를 세우고 병력을 파견했었습니다. 수천의 마물이 사냥당했고, 수십 마리의 악마가 소멸되거나 봉인되었죠.”
“그리고 봉인한 악마의 숫자만큼 많은 귀족을 잡아 죽였지. 제국의 공작을 포함해서.”
“···예. 기록상으로는 모두 악마 숭배자들이었습니다만, 사람의 손에 의한 기록은 신뢰하기 어려운 법이죠.”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성기사로서 쉽게 인정하기 힘든 과거일 게 분명한데.
“결국 자국의 주권을 침탈당한다고 생각했던 각국의 지도자들은, 기사단에게 자중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이르렀고요.”
성기사단의 중흥과 몰락. 이건 댈런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설정이었다.
몇백 년 전까지만 해도 성기사단의 위세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다른 나라의 귀족들까지도 악마의 끄나풀이라는 명목하에 잡아 가두거나 죽일 정도였으니까.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판 위에서, 명분을 떠나 그런 단순한 힘자랑은 오래가기 어려운 법.
결국 삼백 년 전 대륙 각국의 견제를 받은 기사단은, 지금처럼 본단에서 균열을 지키기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지.’
종말이 다가옴에 따라, 수많은 마물들이 대륙 전역에서 출몰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치안을 유지하던 병력만으로는 드넓은 땅덩어리를 지키는 게 쉽지 않은 상황.
거기다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양성된 병력들은, 인외의 존재를 사냥하며 어쩔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결국 여러 나라들은 다시 한 번 전문가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천 년이 넘도록 악마와 마물을 전문적으로 사냥해온 이들의 손을.
“그럼 미스릴 제련소를 찾은 건 보급 때문이겠군.”
“맞습니다. 본단 밖에서 백은강을 제조할 수 있는 대장간을 찾기는 쉽지 않죠. 미스릴 제련소는 앞으로 도시연합을 포함한 대륙 중부에 파견될 병력들의 무구, 그중에도 백은강 소재의 무구들을 독점적으로 공급하게 될 것입니다.”
[흐음, 놀랍구나. 그 대장장이를 아끼는 듯 보이더니, 설마 이마저도 계획한 것이더냐?]
심상 속, 적창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댈런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반쯤 노린 건 맞았지만, 이렇게 빠르게 성기사단의 족쇄가 풀릴 거라곤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적창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과연 범상치 않구나. 내 앞으로 네가 한 약속을 조금 더 기대해보도록 하마.]
“사실 그래서···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었습니다.”
“···음? 뭘 말이오.”
댈런은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음흉한 용가리랑 이야기하다 맥락을 놓친 건가?
“후우···기사단이 외부인에게 백은의 불씨를 제공한 건 손에 꼽으니까요. 어쩌면, 정말 어쩌면 만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푹 숙인 고개. 축 늘어져 얼굴을 가린 금발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홍조가 엿보인다.
쿵쿵. 쿵쿵. 높은 감각 수치는 가파르게 치솟는 그녀의 심박수를 전해주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누가 들으면 뭐 큰일이라도 치른 줄 알겠소.”
“크, 크, 큰일···이요?”
“그냥 인사라고 하지 않았소? 감사를 표하는 고향의 전통이라 들었는데. 나도 그런 의미였고.”
“아, 아니 그게 어떻게···아니 맞기는 한데···그러니까······.”
고개를 치켜든 성기사는 홍당무가 된 얼굴로 울먹였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모니터 너머의 고결한 악마 살해자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
이 세계가 0과 1로 이루어진 코드 덩어리가 아님을 다시 한번 알 수 있게 해 주는 순간이었다.
***
루시아는 이 도시에 머물면서 기사단의 임무를 계속 수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미스릴 제련소의 공급 거래를 따내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개인적으로 맡은 임무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 정도 되는 인재를 놀리는 것도 아까운 일이지. 최근의 성장세를 생각한다면 도전적인 임무를 통해 더 높은 성장을 유도하는 게 옳아.’
성기사단의 단장, 에드거 라인하르트는 그 정도 전략적 판단은 해내고도 남는 인물이었다.
루시아가 떠난 뒤, 댈런은 르베론에게 새 도끼와 단창을 주문했다.
단창은 적창의 힘을 견딘 뒤 가루가 되어버렸고, 기사단에서 받은 도끼 역시 숱한 싸움을 거치면서 고철에 가까워진 상태.
사실 손도끼의 내구성은 기사단장이 직접 자랑할 정도였지만, 진룡의 비늘과 악마의 가죽을 찢으면서까지 멀쩡하길 기대한다면 양심이 없는 것이겠지.
“도끼? 사흘만 있다 오게나! 내 자네가 준 불씨로 최상급의 손도끼를 만들어주겠네. 얼마냐고? 자네는 앞으로 내 대장간에서 물건값을 낼 생각이랑 접어두는 게 좋을 걸세!”
가격을 묻는 댈런에게 르베론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주 고객이자 은인을 위한 사은품이라며, 맥주를 작은 오크통째 건넨 건 덤이었고.
이후에도 며칠간 바쁜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 첫 번째는 칼카스 퇴치 건으로 금강궁이 내준 보상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금화 다섯 궤짝 값어치의 보석들과 흑철로 만든 브리간딘 아머, 가웨인이 약속했던 황금 경매장의 낙찰권까지.
거기에 더해 금강궁은 순은 구역의 중심부, 결계탑이 있는 광장에서 멀지 않은 부촌에 3층짜리 자택을 마련해주었다.
‘집이라는 자산을 미끼로 팔시온에 적을 두게 하려는 생각이겠지.’
그야말로 속내가 뻔히 보이는 보수. 하지만 댈런의 입장에서 받아서 나쁠 건 없었다.
땅값이나 건물값으로 들었을 비용을 생각해보면, 이건 금강궁이 그만큼 그의 몸값을 높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도 되었다.
거기다 이 정도의 명성을 쌓아놓고서, 언제까지나 여관 신세에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택을 방문한 댈런은 가장 먼저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뒤, 엘가이아 마탑을 통해 다량의 마법 이론서를 구해 비치했다.
검술이나 체술 등에 비해 마법은 이론적인 면이 특히나 중요한 능력.
고유 스킬을 통해 기존의 스킬이 가진 틀을 깨고자 한 이상,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넓혀나가는 게 옳았다.
그렇게 며칠이 더 흐르고.
비요른의 공방에 들러 차르국 특무대에게 보수로 받기로 한 화약 공급 건에 대해 이야기해준 뒤, 특제 12연발 쇠뇌를 만들어주겠다는 걸 진정시키고 돌아온 다음 날.
“어젯밤 정보원들의 연락이 두절됐어. 그리고 이 쪽지가 술집으로 날아왔지.”
시에나의 호출을 받고 방문한 까마귀 둥지의 사무실에서, 댈런은 마침내 움직일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됐다.
“‘약에 절여져서 뒈지기 싫으면 알아서 기어라, 썅년아.’라. 흠, 고전적인 협박문이군.”
“뒷골목 인간들 특유의 허세지, 뭐. 한동안 자리를 비웠더니 별 같잖은 녀석들이 기어오르네.”
시에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서 날갯짓 소리가 나더니, 반투명한 회색 깃털들이 책상 위의 편지에 녹아내리듯이 스며들었다.
“편지에 눌러붙은 액체 있지? 마력을 분석해보니 그중에는 우리 정보원들의 피도 묻어있었어. 놈들 딴에는 협박이랍시고 한 모양인데, 이렇게 꼬리를 길게 남겨서야 뒷골목에서 살아남기 힘들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찻잎이 놓인 찬장 아래쪽 서랍에서 시약 몇 가지를 더 꺼내왔다.
작은 병에 이것저것 뒤섞으며 조합하는 모습은, 정보상이 아니라 무슨 약제사나 연단술사라도 되는 것 같은 그림.
사실 마녀와 정보상이라는 커다란 두 간판에 가려져서 그렇지, 시에나의 능력은 생각보다 다재다능했다.
어릴 적 낮은 거리에 버림받은 뒤, 비요른이나 필로폰처럼 여러 실력자들에게서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
“···녹스. 아헬타르. 리메트.”
완성된 비약을 편지에 떨어뜨리며 길게 이어지던 영창을 끝맺자, 선명하고도 찐득한 기운이 편지에서부터 흘러나와 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기감에 뚜렷하게 그려지는 느슨한 곡선.
허공을 빙빙 돌다가 방문 밖으로 이어지는 그 선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했다.
“샤니아에게 배워서 개량한 추적 술식이야. 약에 중독된 혈액이라면 사흘 내의 자취를 쫓을 수 있어.”
“바로 쫓을 생각인가?”
“그래야지. 내 사람들을 건드려놓고 곱게 죽게 둘 수는 없으니까.”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그는 익숙하게 갑옷 끈을 조이고 부츠를 다시 묶은 뒤, 탁자에 기대어둔 성검을 허리띠에 고정시켰다.
곁에서 5연발 쇠뇌와 얇은 소검을 챙긴 시에나는, 마력이 흘러나오는 편지를 집어들고 말했다.
“정보원들이 마지막으로 향했던 곳은 서부 지구 방향의 낮은 거리야. 서부 지구와 남부 지구 사이에 형성된 경계선 마을. 흑마법사들은 그쪽에 자리 잡은 게 분명해.”
“낮은 거리라.”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이거 오랜만에 하수도 구경을 하게 될 듯했다.
***
초월자들의 마법이 깃들어, 수백만에 달하는 인구를 품게 된 거대도시 팔시온.
그러나 6위계에 닿았다는 초월자의 마법으로도, 모든 인구를 넉넉하게 품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애당초 21세기 지구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중세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극복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일곱 구역으로 나뉜 이 도시에 수십만의 부랑자가 발생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찰박.
그렇게 낙오된 이들이 향하는 장소가, 바로 이곳 낮은 거리.
하수도의 일부분이 슬럼화되어 만들어진, 도시의 빈민굴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곳이었다.
“···후우.”
“괜찮소?”
“···어어, 괜찮아. 냄새 때문이니까 금방 적응할 거야. 그런데 여기 악취가 예전에도 이 정도로 심했었나?”
“글쎄. 난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푸흡, 맞네. 어째서인지 꽤 오랫동안 안 사이 같아서.”
“그래도 그쪽이 잘못 느낀 건 아닐 거요. 근래 들어 뒷골목 부랑자들의 숫자가 몇 배는 늘어났으니까.”
잡담을 주고받는 사이 지대는 점점 더 낮아진다.
이미 수 미터 깊이의 지하로 내려와 햇빛은 찾아볼 수도 없고, 졸졸거리며 흐르는 물 위로는 괴상하게 생긴 벌레들이 날아다녔다.
시에나보다 반 걸음쯤 앞서 걷던 댈런은, 문득 감각을 가다듬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뒷골목의 악취보다도 몇 배는 역한 공기. 단순히 기분 나쁜 냄새라기보다는 독기에 가까운 냄새가 코와 폐부를 파고든다.
온갖 배설물과 사체가 썩어가며 나는 냄새 속, 강렬한 마약의 향을 놓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사이.
‘철향···?’
희미하게 느껴지는 날카로운 향취에, 댈런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시에나를 막아섰다.
[프키킥. 눈치가 빠르구나. 조금만 더 들어왔으면 완벽했는데 말이야.]
그러자 목소리가 들렸다. 복잡하게 얽힌 낮은 거리의 통로들을 울리는, 어딘가 비틀린 듯한 음성이었다.
[뭐, 됐다.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극적인 연출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나라는 관객은 그리 까다롭지 않으니까. 프히히힛!]
마력으로 한 차례 왜곡된 뒤, 통로들을 수없이 메아리치며 방향성을 상실한 목소리.
댈런은 그 기분 나쁜 목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빠르게 감각을 넓혀냈다.
“···썩을.”
그러나 뻗어낸 감각권에 걸린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이 아닌 수천 개의 다른 기척들이었다.
“···댈런?”
그의 반응을 확인한 시에나가 적당한 긴장감을 실어 의문을 표했다. 댈런은 짧게 답했다.
“시에나, 빛.”
별다른 말은 필요 없다. 그건 두 사람 모두 인지하고 있는 사실.
“녹스! 리눅스!”
파앗―!
시에나의 주문으로 반경 백 미터에 가까운 어둠이 일순 걷혀나가자, 어떤 마법적인 힘으로 감춰졌던 존재감들이 순간적으로 범람하고.
찍찍찍!
키이! 찌이이익!
들킨 걸 깨달은 어둠 속 그림자들이, 꿈틀거리기를 멈추고 우르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건 쥐였다.
팔뚝만 한 크기부터, 호랑이 수준으로 거대한 개체까지 혼재한 수천 마리의 쥐떼.
다양한 크기에 가지각색으로 뒤틀린 형태였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놈들을 묶어주고 있었다.
가시처럼 빳빳한 잿빛의 털.
식탐으로 붉게 번뜩이는 눈동자.
그리고.
[암월의 쥐떼에 먹힌 거지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머리통 위에 일렁거리는, 눈에 익은 알림창의 존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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