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곡창(1)
[파리지옥에 빠진 사냥꾼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감각 +2, 아커만의 작도법(C)]
잿빛 시체의 환영이 스르르 바스라진다. 댈런은 손끝을 슬쩍 털었다.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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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25
[근력 : 38] [기량 : 37] [체력 : 31]
[감각 : 32] [지능 : 31] [마력 : 33]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고유 스킬(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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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은 그대로 25. 다만 레벨업이 아슬아슬하게 코앞이었다.
더불어 시체를 회수하며 얻은 보상이 짭짤했기에 문제는 없었다.
댈런은 굴러다니는 도끼를 주워 허리띠에 꽂아 넣었다. 흑마법사와 암흑기사의 소지품까지 뒤져본 그는 재차 걸음을 옮겼다.
“작업은 끝났소?”
“네. 막 끝났습니다.”
긴 금발에 검은 피가 덕지덕지 눌러붙은 채, 악마를 살해한 성기사가 싱긋 웃었다.
마을 중앙의 대로는 난장판이었다. 벨제붑의 사체는 정수를 찾기 위해 말 그대로 낱낱이 해체되었기 때문이었다.
미끈거리는 거죽과 거대 파리의 부속물들, 살점과 내장이 잔뜩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
루시아는 긴 해체 작업에 뻐근했는지 가볍게 어깨를 풀고는, 배낭에서 작은 봉인함을 꺼내 정수 조각을 넣었다. 그녀가 말했다.
“정수는 성기사단에서 사료로 보존해 연구할 겁니다. 훗날 같은 악마, 혹은 비슷한 계열의 악마와 싸워야 할 때를 대비해서요.”
악마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칼카스와 같이 자신만의 지옥을 가진 악마가 첫 번째.
악신에게 소속되어 있으나 자신만의 지옥은 없는, 벨제붑 같은 악마가 두 번째.
그리고 지옥도 없으며 소속도 없이, 미궁이나 남의 지옥을 떠도는 버림받은 악마가 세 번째.
‘성검을 탈취한 악마, 골라캅은 마지막 세 번째였지.’
악마와 싸우는 건 언제나 골치 아픈 일이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골라캅과 같은 경우가 상대하기 가장 수월한 쪽이었다.
한 번의 싸움에서만 승리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반면 앞의 두 부류와의 싸움은 필멸자 간의 싸움과는 사뭇 달랐다.
첫째는 스스로의 정수를 지옥에 융합시켰기 때문에, 소환된 본체를 죽여도 정수를 얻을 수 없었다.
둘째는 악신의 지옥에 자신의 정수 대부분을 둔 채, 작은 조각만을 가지고 본체로서 소환되곤 했고.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건 소환된 악마를 죽이는 건 진정한 끝이 아니었고, 놈이 머무는 지옥에 직접 찾아가 소멸시키기 전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흑마법을 극한으로 익혔을 때의 이야기니까.’
수많은 시체들을 계승할 수 있는 댈런이라면 몰라도, 성기사단에서 염두에 둘 방법은 아니다.
그렇기에 성기사단은 악마를 처치할 때마다 그 정수 조각을 수집해,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상대할지 연구해왔다.
적어도 다음에 같은 악마를 마주쳤을 때는, 이번보다 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도록.
천 년이 넘도록 악마와의 전쟁을 이어온 성기사단의 저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끝났으면 이놈을 깨우겠소.”
루시아가 봉인함을 갈무리하는 사이, 댈런은 구석진 곳에 기절시켜두었던 흑마법사를 끌고 왔다.
루시아의 단검 투척으로 귀가 잘려나가고, 이어진 전투의 여파 속에서 기절해버린 놈이었다.
댈런은 흑마법사를 대충 악마의 잔해 사이에 던져놓았다. 주문이나 저주로 기절한 게 아니니 특별한 조치는 필요 없었다.
그저 정강이 위에 가볍게 발을 올려두고, 힘을 조금 주면 끝.
우드드득!
“끄아아아악!”
흑마법사가 눈을 번쩍 뜨며 거품을 입에 물었다. 동시에 시에나가 주문을 외었다.
“녹스. 샤시카움.”
짧은 영창과 함께 흐릿한 깃털 하나가 흑마법사의 벌린 입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흑마법사는 거칠게 기침을 몇 번 하고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시에나가 말했다.
“이제 주문은 못 쓸 거야. 쓰려면 스스로의 심장이 파괴되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훌륭하군.”
주문을 잃은 주문쟁이라. 이만큼 심문하기 쉬운 상대도 있을까.
댈런은 놈 앞에 자연스럽게 쭈그려 앉았다. 흑마법사는 이미 모든 걸 다 포기한 듯한 표정이었다.
***
심문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하던 정보를 얻어내기까지, 댈런이 추가로 부러뜨린 손가락은 고작 두 개뿐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전설 속에 나오는 덩굴의 마녀가 부활했다는 거지?”
마침내 흑마법사의 입에서 토해진 전말을 들은 시에나가, 한숨을 푹 쉬며 미간을 짚었다.
“마, 맞소. 덩굴의 마녀···천 년 전에 죽은 마녀는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에서 다시 태어났소.”
“그 마녀가 지금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거고?”
“그렇소. 저, 정말이오. 스스로도 덩굴의 마녀라 밝혔고, 그 겉모습도 전설 속에 나오는 것과 동일했소. 칙칙한 색의 두꺼운 로브를 걸치고, 언제나 가면으로 얼굴을 숨기는 왜소한 체구의 여인. 가시덩굴의 길이 그 발자취를 쫓으며, 미궁도시의 설립자 중 하나와도 맞붙은···끄아아악!”
우드득!
댈런은 잡고 있던 손의 나머지 손가락을 죄다 꺾어버렸다. 주문쟁이의 쓸데없는 혀놀림으로 시간 끌릴 이유는 없었다.
중요한 건 그의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
게임에서는 후반부에 근접해야 등장하는 보스몹 중 하나, 덩굴의 마녀가 이 시점에 나타났다는 것뿐이었으니까.
‘문제가 하나 있다면···.’
흑마법사의 증언에, 다소 이질적인 단어가 섞여 있었다는 점.
그 어색함을 잡아낸 건 댈런만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던 내내 심각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루시아가, 검을 들어 흑마법사의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라고 했나, 흑마법사?”
“그, 그렇소.”
“기사단의 문헌에 의하면, 덩굴의 마녀는 패배하기 전 자신의 영혼을 라필렘에게 바쳤다. 그리고 라필렘은 제 소유를 아끼는 편이지. 에낙사구스와는 성향이 맞지 않아.”
“아아···그, 그건······.”
흑마법사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자신의 허벅지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검신 위로, 백색 화염이 천천히 번져가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대답해. 어째서지? 성기사단이 악신들의 성향조차 파악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내뱉은 거짓말인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나?”
“아니오, 나, 난 그저······.”
흑마법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피 섞인 걸쭉한 침이 턱을 타고 흘러내린다.
단마의 백염.
심문관의 흰 불꽃에 대한 두려움은 흑마법사들에게 마치 악몽처럼 각인된 것.
저항할 수 있는 주문마저 속박된 이런 상황에서, 놈이 느끼는 감정은 죽음의 공포 이상이겠지.
그럼에도 놈이 그럴싸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기 때문.
“루시아.”
백염이 흑마법사의 살갗을 지지기 직전, 댈런은 손을 뻗어 루시아의 손을 감싸쥐었다.
곰발바닥처럼 두터운 손이 작고 흰 손을 살며시 덮었다. 루시아는 순간 흠칫하며 검을 거둬들였다.
“크흠···.”
미약하게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뒤로하고, 댈런은 흑마법사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가 말했다.
“이놈들은 버림패요.”
“···버림패?”
시에나가 반문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아주 전략적인 버림패지. 그쪽과 나의 시선을 끌기 위한.”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번에는 루시아였다. 댈런은 빠르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번 일에는 에낙사구스가 직접적으로 개입되었소. 암흑기사가 에낙사구스의 종자였다는 걸 봐도 그렇고, 이놈의 증언까지 하면 결정적이지.”
에낙사구스의 하수인이던 암흑기사는 이 파티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고작 악마 하나 소환하는 걸로 자신만만하게 덤벼들었다는 건, 리더인 놈도 두 사람이 가진 힘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뜻.
특히나 댈런이 가진 적창의 힘은 에낙사구스의 권속, 칼카스의 지옥을 완전히 소멸시켜버린 강력한 권능.
그런 중요한 사실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게 뭘 의미하는가.
‘처음부터 이놈들은 눈속임용 버림패였다. 처음부터 시에나와 나를 지하에 묶어둘 속셈이었어.’
마을 하나를 통째로 증발시킨 일마저 그저 미끼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놈이 준비하던 진짜 계획은 어느 정도의 규모란 말인가.
아직 모든 내막을 파악할 수는 없으나, 흑마법사의 증언을 통해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에낙사구스와 라필렘, 두 악신이 손을 잡았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원래라면 라필렘의 권속일 덩굴의 마녀를 에낙사구스에게 넘겼다는 건, 한시적이나마 완전한 동맹을 맺었다는 상징이나 다름없다.
거기다 그녀가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에서 나온 이상, 지금의 전개는 이미 기존의 전례들을 완전히 깨부순 상황.
존재와 존재를 뒤섞어, 종의 탈피를 앙망하는 진화의 솥구덩이에서 어떤 결과물이 나왔는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확실한 건 원래보다 더 끔찍한 결과물일 것이라는 사실뿐.
“버림패···라니. 그게 무스···컥!”
서걱!
도끼날이 번쩍이고 몸 잃은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흑마법사의 한탄 따위는 들을 시간이 없었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었으니, 이제 남은 건 빠르게 발을 움직이는 일뿐.
“악신의 연합이라니···기사단에 보고를 올리든, 눈앞의 상황을 처리하든 우선은 지상으로 올라가야겠군요.”
“여기서 가장 가까운 하수도 출구는 서부 지구 방향이야. 최단경로로 안내할게. 따라와.”
언제 으르렁거렸냐는 듯 합이 척척 들어맞는 마녀와 성기사.
그건 두 사람이 숱한 훈련과 실전을 거쳐왔으며, 사소한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기에는 지나치게 커다란 영웅의 그릇이라는 증거였다.
암흑기사 일당의 유품인 핏빛 단검을 빠르게 챙긴 일행은, 곧장 마을을 떠나 지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적 하나 없는 을씨년스러운 마을 한가운데, 널브러진 악마와 추종자들의 시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쥐와 벌레들의 만찬석이 되었다.
***
스각!
섬광이 번쩍인다. 핏줄기가 솟구쳤다. 진득한 암녹색의 핏물이었다.
물감 담은 통을 던져놓은 듯, 벽에 비산하는 녹색 자국을 남기며 떨어지는 머리통.
콰직!
그 머리통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댈런의 주먹은 다른 놈의 머리통을 깨뜨려버렸다.
“녹스! 오벡스!”
뻐버버벅! 서걱!
부랑자 네 명을 동시에 벽에 패대기치는 주문과, 두 놈을 단칼에 양단해버리는 날카로운 검격.
구정물로 질척이는 낮은 거리. 댈런과 일행은 약에 취한 부랑자들의 습격을 돌파하며 지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구어어억!”
“그르륵! 그아악!”
적게는 대여섯씩, 많게는 무려 백에 가깝게 몰려다니는 부랑자 무리.
그중에는 근래 도시에 유입된 난민들도 있었고, 원래부터 낮은 거리에 거주하던 부랑자들도 존재했다.
허나 그들의 출신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눈을 희번뜩하게 뒤집은 채, 사람의 인육을 뜯어먹기 위해 달려드는 놈들은 그저 마물에 가까운 존재일 뿐.
놈들이 내는 힘은 비실거리는 팔다리로 낼 수 있는 근력의 한계치를 아득히 뛰어넘었고, 약에 취한 두 눈에서는 흑마력이 희미하게나마 넘실거리기까지 했다.
“전쟁의 신이시여―!”
새로운 무리를 만날 때면 루시아가 한 번씩 정화의 신성력을 쏟아붓기도 했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흑마력에 잠식당한 영혼은 해주되기는커녕, 마치 마물에게 신성력을 퍼부었을 때처럼 고통스러워하기만 할 뿐.
이 정도면 숫제 마약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제조된 마약인지, 그 출처와 방식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게임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하지만 덩굴의 마녀가 등장하는 회차에서, 그녀가 노리는 목표는 항상 한정적이었어.’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렸기에, 지나간 회차들과 비교하는 건 큰 의미가 없는 상황.
다만 한두 가지의 단서라도 잡아낼 수 있다면 남는 장사인 만큼, 도움이 될 편린들을 긁어모으는 데 게을리할 이유는 없겠지.
“오른쪽 통로! 삼십 미터쯤 간 다음 왼쪽 건물 담벼락 뒤에 사다리···아니 담벼락을 부수라는 게 아니라! 녹스! 오벡스!”
그러는 한편 시에나의 안내를 따라 선두에서 길을 뚫고 달리며,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새로 얻은 스킬을 시험한다.
C등급 스킬. 아커만의 작도법.
무려 미궁 4층의 지도를 그려냈다는, 전설적인 지도 제작자가 남긴 비의.
미로 같이 얽힌 낮은 거리를 거닐며,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전경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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