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55화 (155/288)

하이 오크(1)

“잉가아아아안!”

반쯤 헐벗은 오크가 달려들었다.

어지간한 장정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키와 덩치.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초록색 피부.

놈은 투박한 검을 높이 들고 내리찍었다. 말 그대로 바위라도 쪼갤 듯한 기세였다.

그 앞에서.

“죽이고 먹는다! 잉간 꼬기 맛있다!”

“염병.”

댈런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창을 휘둘렀다.

콰장창!

굵고 넓은 오크의 대검이 산산조각난다. 동시에 놈의 손목과 허리에 얇은 실선이 그어졌다.

철퍽!

부서진 검 파편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함께 지면으로 떨어지는 오크의 두 손과 상반신.

“잉간···꼬기······.”

허리 아래가 날아가 주르륵 내장을 흘리는 신세임에도, 붉게 충혈된 시선은 먹잇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 잃은 손목이 연신 허공을 휘젓고, 송곳니 사이로 피와 침이 주르르 흐른다.

댈런은 창을 한 번 더 휘둘러 목을 잘랐다. 오크는 그제서야 허우적대기를 멈췄다.

지척에 깔린 수십 구의 오크 시체 중 마지막이었다.

“휴우. 오늘만 벌써 네 번째네요. 어디서 이렇게 계속 튀어나오는 건지.”

루시아가 검에 엉겨붙은 피를 닦아내며 다가왔다. 그녀의 갑옷과 머리칼은 이미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었다.

나머지 일행의 몰골 역시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발한 이후로, 그들이 쓰러뜨린 오크의 머릿수가 거의 삼백에 달했으니까.

더 놀라온 점은 아직 해가 머리 위에 오지도 않았다는 것.

지난 며칠 동안의 경험에 의하면, 앞으로 잠이 들때까지 대여섯 번은 더 습격이 있으리라.

“말을 잃은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네. 우리가 잘 가고 있는 게 맞나?”

비요른이 수염에서 핏방울을 탈탈 털어내며 물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회차에서 세계의 이빨 산맥을 방문하는 건 그도 처음이었으나, 다른 곳들과 달리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비록 산맥의 크기가 게임에서보다 수십 배는 거대해졌음에도, 길을 찾아가는 방식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까.

“오크들의 체격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 않소. 제대로 가고 있다는 증거요.”

“이해가 안 되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세계의 이빨 산맥은 오크들이 번성한 땅이오. 깊이 들어갈수록 오크들의 덩치가 커지고, 동시에 하이 오크 부족들의 영토에 가까워지지.”

“잠깐. 그럼 지금 설마 우리 목적지가···.”

난쟁이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하이 오크들의 영토 안에 있지. 출발 전에 말하지 않았소?”

“다,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네. 하이 오크라니, 그 싸움광들은 기를 쓰고 피해 다녀도 모자랄 족속들 아닌가!”

거 참 호들갑은. 숲이 무섭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상한 부분에서 겁이 많은 난쟁이였다.

그러면서 코앞에서 수제 폭약을 뻥뻥 터뜨려대는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니.

비범함과 반쯤 미친 건 한끝 차이라는 생각을 하며, 댈런은 창을 휘휘 털고 걸어나갔다.

***

일행은 자연스럽게 전장을 떠나 움직였다. 오크의 거듭된 습격에 말을 잃은 뒤로, 이동수단은 다시 튼튼한 두 다리가 되었다.

사실 속도 자체는 큰 차이가 없었다. 산맥의 지형이 워낙 험준한 터라, 훈련받은 군마라 해도 반쯤 짐짝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정도로 악한 종족입니까?”

계속 궁금증이 남아있었던 걸까. 한참을 걷던 중 아카샤가 난쟁이에게 슬쩍 속삭였다.

“악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네만···적어도 위협적인 종족은 맞다네. 덩치나 힘이 보통 오크보다 월등한 건 물론이고, 본성 자체가 극도로 호전적인 족속이야.”

“호전적이라···한입 거리 삼기 적당하겠군요.”

“엉···?”

왠지 등골이 서늘해진 비요른이 고개를 돌렸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건 호기심과 식탐이 동시에 번뜩이는 눈동자였다.

“아, 별 건 아닙니다. 대부께서 저를 교육하실 때 소나 돼지 수준의 비지성체, 그중에도 특히나 악한 개체라면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하셨거든요.”

“······.”

순수하게 끔뻑거리는 소년의 눈. 난쟁이는 그제야 질문의 저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종족의 규격 자체가 다른 탓에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의미.

새끼용의 물음은 처음부터 ‘위험하고 악한 놈들? 혹시 먹어도 되는 종류인가요?’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아마 저 교육을 해준 장본인은 지금쯤 까마귀 둥지에서 열심히 술잔을 닦고 있을 바텐더겠지.

오랜만에 유전자 레벨에서 각인된 두려움을 느낀 난쟁이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사이, 곁에서 함께 걷고 있던 루시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카샤. 하이 오크는 다른 오크들보다 지성도 뛰어나고, 말도 훨씬 잘 통하는 종족이야. 스파타 왕국과 무역 관계에 있기도 하고.”

“그럼 아인종 수준의 지성체라고 보면 되는 겁니까?”

“그렇지. 싸움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점이 독특하긴 하지만. 아무튼 대부라는 분도 하이 오크를 먹잇감으로 생각하시진 않으셨을 거야.”

“아쉽군요. 새로운 종류의 음식을 맛볼 수 있나 했는데···.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머니의 요리는 용신의 식탁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진미가 분명하니까요.”

“···어휴. 누굴 닮았는지 말은 번드르르하게 잘해요.”

해맑게 웃으며 아부를 떠는 소년과,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그 머리를 쓰다듬는 루시아.

댈런은 일련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선두에서 길을 찾아갔다.

오크의 체격 변화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이긴 했으나, 오직 거기에만 의존해서 길을 찾고 있는 건 아니었다.

험준하게 뒤틀린 산자락 저 멀리, 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들이 역시 또 하나의 이정표였기에.

[하이 오크들의 성소로 가는 것이냐?]

심중에서 피어오르는 진룡의 물음.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짐작도 빠른 것일까.

적창의 말대로, 그의 목적지는 저 산봉우리들 사이에 있는 하이 오크들의 성소였다.

하이 오크들 사이에서는 선조들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알려진 성지이자, 동시에 모든 오크들의 지배자인 대족장이 머무르는 처소.

댈런이 처음으로 극후반까지 살아남아 악신의 대대적인 침공을 목도했던 회차의 결말은, 바로 그곳에 잠들어 있었다.

‘그래도 이번 시체는 좀 쉽게 얻을 수 있겠군.’

오가는 길이 험악하고, 자격을 얻어내기 위한 능력의 허들이 높은 게 문제일 뿐.

충분한 능력만 있다면 성소의 시체는 그리 얻기 힘든 종류가 아니었다.

루시아의 말대로 하이 오크들은 말이 통하는 지성체. 물론 싸움광에 생각이 단순하다기는 했지만, 그건 반대로 악에 물들 가능성이 적다는 뜻이기도 했다.

흑마법사들의 온갖 궤계를 물리친 끝에야 회수할 수 있었던 다른 시체들과 달리, 성소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하이 오크들에게 자격만 인정받으면 되는 바.

지금의 댈런이 가진 무력이라면, 적당하게 대련 몇 번쯤 어울려주는 것으로 자격을 따낼 수 있을 테였다.

거기다 그는 초반에 하이 오크에게 호감을 사는 방법까지도 알고 있었으니···.

바스락.

“정지.”

그때 먼발치에서 풀숲이 흔들렸다. 댈런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매복이 들킨 걸 알아챈 오크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풀숲 사이에서 나타났다.

“크흐흐흐, 들켰다! 싸운다!”

“여기까지 온 잉간 강하다! 강한 꼬기 맛있다!”

“싸움! 꼬기! 싸운다! 먹는다!”

“구와아아아아!”

어눌한 발음의 함성과 고함들. 뒤쪽을 돌아보니 어느새 놈들은 일행이 지나온 길까지 둘러싸고 포위한 상태였다.

“아까보다 조금 더 많군요. 대략 백 마리 정도입니다.”

루시아가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긴장감이나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습격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것도 있었고, 애당초 일행의 수준에서 저런 어설픈 매복을 눈치채지 못할 리도 없었으니까.

일일이 피해 다니며 갈 길을 꼬아대는 것보다, 한 번 부딪힐 때 화끈하게 쓸어버리고 직진하는 게 시간이 절약된다는 판단이었을 뿐.

스으으···.

그녀의 검신을 따라 신성력을 피어오르고, 곁에서 비요른이 둥근 수류탄 다발을 꺼내 허리에 둘렀다.

소년의 검은 눈이 노랗게 뒤바뀌면서, 주위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공격하라.]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동시에 어디선가 날아온 투창의 비가 일행을 포위한 오크들의 진형을 강타했다.

퍼버버버벅!

“그아악! 그억!”

“넘들이 왔다! 그림 그린 넘들이다!”

“도망, 도망쳐···!”

순식간에 두 자릿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크들은 단번에 혼이 빠진 듯 달아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아무리 많이 죽어나가도 끄떡하지 않던 놈들이, 고작 투창 세례 한 번에 사기가 꺾이는 기이한 현상.

‘예상대로군.’

그 광경을 바라보던 댈런은, 허리띠에 손을 가볍게 얹은 채 감각을 한층 더 곤두세웠다.

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주변의 기척을 낱낱이 훑어내고 있었다.

적들이 튀어나온 즉시 응수하지 않은 것 역시도, 이 투창 세례를 반쯤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

사방에서 좁혀들어오는 열댓 개의 기척들은, 분명 백에 달하는 오크들 정도야 가볍게 학살할 수 있었으니까.

“하나도 살려 보내지 마라! 사냥의 시간이다!”

외침과 함께 튀어나온 거구의 사냥꾼들.

일견 다른 오크들과 비슷한 외견이었으나, 무려 3미터에 달하는 전신에는 다른 오크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흰색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사, 살려, 그어억!”

“이대로 꼬기가 될 수는···크아악!”

녹색 물결 안으로 뛰어든 하이 오크들이, 순식간에 자신들보다 몇 배나 많은 오크들을 썰어버리기 시작했다.

2미터에 달하는 거검을 가볍게 휘두를 때마다, 녹색 물결이 으깨지며 피와 내장이 비산한다.

일방적인 전투는 금세 끝을 맺었다.

피 냄새가 짙게 밴 공기 아래.

살아있는 건 열댓쯤 되는 하이 오크들과, 댈런의 일행 네 명뿐이었다.

“······.”

정적 속에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3미터짜리 거인들이 피칠갑을 하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면 으레 만들어질 분위기였다.

다른 오크들과 달리 대화가 통한다는 걸 알고 있어도, 섣불리 나서기는 꺼려지는 상황.

댈런은 허리띠에서 손을 떼고 성큼 걸어나갔다.

“잉간, 무슨 일인가.”

하이 오크들 중 하나가 말했다. 가장 덩치가 크고 문신이 많은 놈이었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무심하게 말했다.

“밥 좀 얻어먹자.”

“댈런?”

루시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그에게 되물었고, 비요른은 아예 쌍심지를 켠 채 수류탄 핀으로 손을 가져갔다.

소년만이 갸웃거리며 이 대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뿐.

그 앞에서 하이 오크 대장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댈런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좋다! 밥 먹고 가라!”

호쾌한 대답에 일행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검문 통과였다.

***

[신기하구나. 하이 오크들은 필멸자들 사이에서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종족일 텐데.]

심상 속, 적창이 조용히 감탄했다.

[밥을 먹자는 말이 일종의 열쇠인 건가. 어떻게 했는지는 나로서도 모르겠지만, 너는 이전에 이들의 문화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런 셈이지.’

[그래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이 종족은 인사 대신 투창을 날린다는 농담도 있었으니···아, 그래서 말이 통하는 건가?]

···이 용가리는 또 뭐라는 거야.

나름 극적인 조우와 협상을 뒤로 한 채, 일행은 학살의 현장을 떠나 하이 오크의 부락으로 향하고 있었다.

피바다를 만들어버리며 등장한 첫인상과는 상반되게, 하이 오크들은 꽤나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밥은 중요하다. 밥을 먹어야 근육도 머리도 힘을 쓴다!”

“하이 오크들은 밥 잘 먹어서 머리가 좋다. 비실이와 땅딸보는 머리가 안 좋은 모양이다!”

“여기 이 전사 칭구를 봐라! 이 칭구도 머리가 좋게 생겼지 않나!”

더불어 은근히 수다쟁이이기도 했고.

“대체 내가 왜 머리가 좋지 않다는 거지?”

“근육이 부실하면 머리에 피가 안 가는 법이다!”

“뭐라? 근육이 부실해? 지금 드워프의 육체를 모독하는 건가!”

“난쟁이는 키가 작다! 키가 작으면 심장도 작다! 심장도 근육이다! 근육이 부실하면 머리에 피가 안 간다!”

“···이럴 수가.”

뭔가 전후가 뒤섞인 주장임에도 설득되어버린 비요른이, 침울한 표정이 되어 일행의 후미로 축 뒤처졌다.

“칭구는 몸이 튼튼하다! 근육이 돌 같다!”

“아니다, 강철 같다! 분명 머리도 강철 같이 좋을 거다!”

“이 꼬마는 아들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것 같군! 아비를 닮아 훌륭한 전사가 될 거다!”

한편 댈런의 곁에서 동행하는 하이 오크들은, 그에게 쉴 새 없이 칭찬을 퍼붓는 중이었다.

등 뒤에서 난쟁이의 억울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근육질에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야말로, 하이 오크 문화권에서 극도의 호감상으로 통하는 외형이었으니까.

거기다 하이 오크들은 전부 먹을 것과 싸움에 환장하는 이들이었으니, 싸우자 혹은 밥 먹자라는 인사가 굉장한 호의로 인식되는 편이었고.

말하자면 그들 눈에 댈런은 미남인 데다 센스까지 갖추고, 능력까지 출중한 완벽한 남자라는 이야기였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됐음에도 앞다퉈 친해지고 싶을 정도로.

‘은근히 순박한 면모가 많은 종족이라니까.’

워낙 대륙의 구석진 지역에 살아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뿐.

하이 오크는 어떤 면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여타 아인종들보다 나은 구석도 있는 이들이었다.

기본적으로 악마에게 극한 반감을 가졌다는 점 때문에, 실제로 많은 회차에서 이들에게 도움을 받은 전례도 있었고.

“다 왔다. 우리 부족이 사는 부락이다.”

일행은 두어 시간쯤 걸은 끝에 하이 오크의 거주지에 도착했다.

그리 높진 않지만 마을 전체를 둘러싼 돌벽과, 중간중간 4미터 정도의 높이로 솟아오른 감시탑들.

중무장한 하이 오크 전사 두 명이 정문을 가로막고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전사가 물었다.

“웬 잉간인가?”

“손님이다! 밥 먹고 간다고 했다!”

“좋군. 잘 먹여줘라! 통과!”

이번에도 프리패스였다.

15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