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오크(2)
정문을 통과해 돌벽 안쪽으로 들어가니 석재 건물들로 이루어진 마을이 일행을 반겼다.
“흐하핫! 잡아 봐라!”
“키도 작은 자식이! 잡히면 너는 고블린이다!”
집과 집 사이를 뛰어노는 어린 하이 오크들.
머리 위에 물동이를 이고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고블린.
우렁찬 박장대소가 집 밖까지 들려오고, 병장기를 손질하는 소음과 고기 굽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뒤섞인다.
저 멀리 절벽 위에는 족장의 집으로 보이는 2층짜리 석재 건물이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덩치가 크고 피부색이 다를 뿐, 인간의 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경.
루시아는 신기한 눈으로 그 풍경을 감상하며 중얼거렸다.
“성기사단의 기록에 의하면 하이 오크들은 천막 생활을 한다던데···역시 문헌과 현실은 다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그랬다. 하지만 천막만 치면 춥다. 추우면 힘이 빨리 빠진다. 우리 힘은 싸울 때를 위해 아껴둬야 한다.”
하이 오크 전사장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나머지 전사들이 하나둘씩 본인의 처소로 흩어진 뒤에도, 전사장은 안내를 위해 일행의 곁에 남아있는 중이었다.
“신기하군요. 언제 이렇게 바뀐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족장이 바꿔놓았다. 대족장은 하이 오크가 자유롭게 싸우는 종족이라고 말했다.”
“자유롭게 싸우는 종족이라. 대족장이라는 분은 분명 고결한 신념을 가지신···아니, 강하고 멋진 분이시군요.”
“···그래. 그랬었지.”
전사장이 말끝을 흐렸다. 선 굵직한 얼굴에 흐릿하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물론 그것도 잠시뿐. 그는 금방 고개를 털고 잰걸음으로 안내를 이어갔다.
비요른과 아카샤가 거의 뛰어가듯 따라가기를 잠시, 일행은 머지않아 널찍하게 지어진 돌집 앞에 도착했다.
전사장은 맨들거리는 정수리를 긁적이며 집 문을 열어주었다. 그가 말했다.
“여기가 손님 집이다. 밥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먼저 온 손님들도 있으니 친하게 지내라.”
“먼저 온 손님?”
“근육은 많이 없지만 똑똑한 마법사다. 밥 되면 부르겠다!”
전사장은 그 말만 남기고는 휘적휘적 자리를 떴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이 산간오지의 하이 오크 부락에 찾아온 사람이 또 있다고?
“누굴까요?”
“글쎄.”
느껴지는 기척은 둘. 그중 하나는 기척이 반쯤 흐릿했다.
댈런의 기감이 전사로서나 마법사로서나 수준급에 달한다는 걸 생각했을 때, 저 흐릿한 기척의 정체는 그마저 넘어서는 실력자라는 이야기.
자연스레 허리띠에 손을 끼운 댈런은, 일행의 선두에서 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이런 첩첩산중의 골짜기까지 왔다는 건, 그 능력이나 목적 모두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일 터.
그 목적이 그의 여정에 걸림돌이 될 지 아닐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알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면대면으로 부딪혀봐야겠지.
약간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좁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접어들었을 때, 댈런의 그런 생각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나쁜 쪽이 아닌, 좋은 방향으로.
“댈런? 여긴 또 어쩐 일인가!”
거실에서 두꺼운 장서를 넘기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엘가이아 마탑의 탑주.
대영역을 이룬 대마법사이자, 사경을 헤메던 중 댈런의 권속으로 되살아난 노인.
펠버 발렌티노와 그의 제자 토미였으니까.
***
두꺼운 장서들이 수백 권씩 쌓여있는 거실.
일행이 휴식을 취하며 여독을 푸는 사이, 댈런은 펠버와 헤어진 이후의 근황을 나눴다.
커피잔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던 김은 이미 식어버린 뒤. 갈색 눈을 빛내며 댈런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펠버는 끝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덩굴의 마녀라니. 정말로 끝이 다가온다는 게 실감이 나는구만. 에낙사구스야 원래부터 사람들을 숱하게 유혹해온 악신이라지만···라필렘과 쑴까지 전면에 나설 줄은 몰랐네.”
“세계의 이빨 산맥에 온 것도 그 이유요.”
“그 이유라니?”
“하이 오크의 성소에 쑴의 악마 군대를 상대할 힘을 얻을 방법이 있거든.”
댈런은 반쯤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아직까지 일행에게는 정확한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권속인 펠버에게까지 비밀로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펠버는 대영역의 권능으로 댈런의 지난 회차들을 일부 엿본 전례가 있었으니까.
진룡과의 싸움에서 남은 삶을 불사른 끝에 권속의 계약을 맺게 된 것 역시, 그 과정에서 댈런을 회귀자라 생각했기 때문이고.
‘하이 오크의 성소로 가겠다고 하면 비요른 그 양반은 바로 질겁하겠지.’
물론 하이 오크 부족과 접선한다는 일차적인 목표를 완수했으니, 슬슬 이야기를 꺼낼 시점이긴 했다.
“그나저나 노인장은 여기 무슨 일이오?”
“나야 요양차 방문했지. 여기만큼 물 좋고 공기 좋은 곳도 없거든! 생각이 조금 단순하긴 하지만, 그래도 친절한 친구들도 있고 말일세.”
그러고보니 르비바흐에서 약초술의 도움을 받은 뒤, 북쪽 산지를 돌아다니며 요양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지.
생각해보면 그 소식을 전해준 비요른 역시 갈리오스 상단주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상단주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져가는군.’
르비바흐와 엘가이아 마탑, 필로폰의 과수원에 이어 이제는 성기사단까지 거래처를 넓힌 볼크마 갈리오스.
일신의 무력이 좀 떨어질 뿐, 곳곳에 미치는 영향력과 그 성장세만 놓고 본다면 영웅이라 불려도 과언이 아니었다.
도박장에서 탕진한 돈을 메꾸기 위해 상단 호위 의뢰를 받았던 인연이, 이렇게까지 흘러올 줄 누가 알았을까.
펠버와 마찬가지로 그쪽 역시 지금까지의 회차에서 발아한 적 없던 초유의 가능성이었다.
“더불어 이 높은 산자락에서 연구를 계속하다보니, 예상 외의 소소한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네.”
“왜 기척이 달라졌나 했더니 그래서였군.”
“허허,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주문 한 줄 모르는 용병이었던 그대가, 1년도 지나지 않아 완숙한 4위계에 올라 있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었을 걸세.”
댈런은 말없이 웃으며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미궁도시에 첫발을 들인 뒤로 벌써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있었다.
낡은 갑옷에 손도끼와 검 하나씩 달랑 걸치고 청동 성문을 통과하던 게 엊그제 같건만.
사교도 집단을 무너뜨리고 성기사단을 포함한 굵직굵직한 의뢰를 수행하는 사이, 어느새 초월자의 자리를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처음과는 비교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높이 올라왔다.
모니터 너머에서 지나간 수백 회차 중 어디에서도 지금 만큼의 속도로 강해진 적은 없을 정도.
그럼에도 여전히 초월자의 위계는 닿을 듯 말 듯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들조차 뛰어넘은 악신의 힘 앞에서는, 처음과 비할 바 없이 무력한 신세일 뿐이었다.
“······.”
허나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 와서 나아가기 망설일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이 길을 선택하지조차 않았다.
완력 좋고 싸움 좀 하는 용병 정도로 살아갈 기회는,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첫 순간부터 그의 앞에 놓여 있지 않았나.
그걸 걷어차고 숱한 사선을 넘어선 끝에, 강해지기 위한 끝없는 노력으로 거머쥔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여전히 아득하게만 보이는 미답의 목적지.
허나 처음보다 가까워진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금 해야할 일은 드넓은 영역 속의 설산을, 수많은 가능성들로 채워가 5위계의 단초를 열어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해왔던 것처럼, 수백에 달하는 과거의 잔재를 찾아내 새로운 가능성들을 얻어내야 하겠지.
하이 오크의 성소에서 회수할 시체는, 그 잔재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진 것 같네. 그럴 법도 하지.”
푸근한 할아버지 같은 웃음을 지으며, 펠버가 수염을 슬슬 쓰다듬었다.
“항거할 수 없는 듯한 강대한 악 앞에서, 수백에 달하는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일이 쉬울 리가. 자네는 그 어떤 초월자도 하지 못할 일을 해내고 있는 걸세. 나였으면 그 무한한 굴레 속에서 진작에 미쳐버렸을 게야.”
“글쎄. 어쩌면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 지도 모르지.”
“그래. 그럴 지도 모르네. 그러니 자네의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이 더 심한 것이겠지. 허나 이렇게 머리가 복잡해질 때 가장 중요한 일이 뭔지 아는가?”
“···뭐요?”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되물었다. 그 앞에서 펠버는 싱긋 웃으며 잔에 남은 커피를 싹 비웠다.
그리고 말했다.
“좋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나눌 좋은 음식.”
쾅쾅쾅!
“손님들! 밥 다 됐다! 나와라!”
문밖에서 전사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밥 먹을 시간이었다.
***
일행은 족장의 집으로 안내받았다.
처음 방문한 손님에게는 성대한 만찬을 대접하는 게 하이 오크들의 관례라나.
완만한 산길을 돌아 탁 트인 절벽 위에 지어진 족장의 집에 도착하니, 식사는 이미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식탁 앞에 앉아 기다리던 족장은, 일행이 보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 벌려 맞이했다.
“밥손님! 어서 와라! 나는 족장 타룸이다! 절벽골짝 부족에 온 걸 환영한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자기 소개는 나중에 하도록! 밥 식기 전에 먹어야 한다!”
“······.”
“어서 앉아라! 성기사 칭구!”
잠시 넋을 놓고 몸이 굳어버린 루시아.
댈런이 그녀를 거의 들다시피 해서 앉히고서야, 루시아는 얼굴이 새빨게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끌끌끌, 좋을 때구만. 좋을 때야.”
“맞다! 밥 먹을 때는 좋은 때다!”
“그렇지. 족장이 뭘 좀 아는구만!”
“고맙다, 마법사! 역시 똑똑하다!”
하이 오크 문화에 완전히 적응해버린 대마법사가 족장과 담소를 나누는 사이, 일행이 전부 자리에 앉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는 문자 그대로 만찬이었다.
야외에 넓게 깔린 돌 테이블 위, 수십 개의 나무 그릇들에 담긴 가지각색의 음식들.
기본적으로 고기 위주의 식단이긴 했지만, 곡물과 채소 요리는 물론 과일로 만든 타르트 느낌의 디저트까지 놓여 있었다.
“맛있다! 역시 밥이 최고다!”
“많이 먹어라, 손님들!”
“배터지게 먹고 죽은 오크는 근육도 빵빵하다고 그랬다!”
하이 오크들의 걸쭉한 전통 술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은 전사장들은 순식간에 음식을 헤치워갔다.
식사를 시작하고 얼마 가지도 않아, 곳곳에 빈 그릇이 생겨날 지경.
다만 음식이 떨어질 일은 없었다. 테이블 주변에서 뛰어다니는 고블린들이, 빈 그릇이 생겨나는 족족 가져가고 새 음식을 올려두었기 때문.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고블린 여러 마리가 돼지를 통째로 꿰어 불 위에서 돌리고 있었고.
족장의 집 옆에 딸린 단칸짜리 부엌에서도, 끊임없이 달그락거리며 뭔가가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큼큼, 굉장한 진미들이군. 실례지만 혹시 이걸 다 직접 한 건가?”
이것저것 집어먹어보던 비요른이 감탄한 얼굴로 물었다.
하이 오크 족장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사냥만 한다! 고블린들이 요리한다! 우리 부족 고블린 손재주 좋기로 유명하다!”
“허어, 어지간한 요리사들보다 낫군.”
“많이 먹어라! 난쟁이라도 많이 먹으면 혹시 키가 클지도 모른다! 머리가 좋으면 몸을 덜 축내고도 더 많이 싸울 수 있다!”
“······.”
만찬은 두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던 해가 산봉오리들 너머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
차디찬 만년설의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흘러가는 가운데, 짙은 남색의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파르르 떨며 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들도 추운가 봅니다.”
태어난 지 몇 달도 안 된 어린 용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동심 가득한 말을 흘리고.
“잘 먹고 간다, 족장!”
“다음에 새 밥손님 왔을 때 찾아오겠다!”
“그전에 사냥이라도 한 번 같이 가자!”
돌탁자 위의 음식이 네 번쯤 갈아치워졌을 무렵, 전사장들 역시 하나씩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한 녹색 거인들이 떠난 돌탁자에는 은은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닥불 타닥거리는 소리와, 부엌에서 식기들을 설거지하는 소음만이 배경처럼 깔린 가운데.
작은 오크통 크기의 술잔을 들어올리던 족장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잉간. 여기는 왜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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