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무덤(4)
우르르 성소가 진동하고, 부서진 석관의 파편들이 허공에 둥둥 떠오르기 시작한다.
댈런의 손에 박살 났던 자줏빛 영체들은, 어느새 처음 나타났던 장소에서 다시금 형체를 갖춰가는 중이었다.
‘대족장의 영역이 사기이긴 해.’
소환되자마자 수인을 맺기 시작하는 주술사 영체를 보며 댈런은 생각했다.
하이 오크 대족장의 영역은 대대로 단 한 가지 심상과 능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떠나간 선조들의 힘을 되살려내는 것.
고대의 대전쟁 이후 백 명이 훌쩍 넘는 하이 오크들이 대족장의 자리에 머물다 떠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차기 대족장 후보에게 영역을 전수해줄 때, 자신의 힘 일부를 떼어내 담아주는 관례를 따랐다.
그렇게 수천 년간 대대로 계승되어온 대족장의 영역은, 선조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채로운 가능성과 능력을 품어낸 심상이었다.
원래의 위력 그대로라면 댈런이 저항조차 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물론 악마가 그 몸을 점거한 지금은, 그저 반쪽짜리 영역일 뿐이었지만.
“···과연 재주가 좋구나! 허나 승패는 변하지 않는다! 네놈이 이 장소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미 내 승리는 확정되었으니!”
경악으로 물들었던 표정을 수습하며 악마가 말했다. 댈런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놈이 노리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다.
수십의 선조들이 묻힌 이곳 성소의 지하 전당.
대족장이 가진 영역의 힘이 가장 극대화되는 이 장소를, 최대한 이용하며 시간을 끌 심산이겠지.
애당초 수천 년간 하이 오크 선조들이 유업으로 쌓아올린 이적을, 대족장의 몸을 점거한 몇 달 사이에 완전히 강탈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영체들의 행동이 미묘하게 허점투성이고, 주술이나 검격의 위력 역시 원래의 반조차 내지 못하는 게 그 증거.
시체늪의 대공 역시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기에, 이 장소를 전장으로 선택한 게 아니었나.
이곳은 과거 회차에서 악신들의 대대적인 침공 당시, 대족장이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최후의 보루.
당대의 대족장에게 악마 본체에 필적하는 재생력과, 쓰러뜨려도 끝없이 재소환되는 영체들을 선물하는 장소다.
놈은 설령 영역의 힘이 온전하게 발휘되지 않더라도, 성소의 신비와 영역의 힘의 조화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을 테였다.
그리고 사실상 틀린 판단이 아니기도 했고.
‘이미 본인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깔고 들어간 싸움이었겠지. 수틀리면 장기전으로 끌고 가서 내 체력을 갉아먹을 심산이었던 거다.’
시체늪의 대공, 창백한 불의 기만자 즈탄크.
과연 쌈박질밖에 모르는 쑴의 악마들 중에서라도, 그나마 머리를 쓸 줄 아는 놈이라는 건가.
족장 회의를 기습해 사상자를 낳고, 하이 오크들의 복수심을 부추긴 끝에 이곳으로 수뇌부 전원을 끌어들인 것부터가 놈의 계략이었다.
댈런에게 붙잡힐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그마저도 스스로의 정체를 일부 드러내면서까지 안배로 삼았던 것이겠지.
죽은 족장들의 복수를 위해, 그리고 악마에게 사로잡힌 대족장을 구하기 위해 부족한 병력이라도 긁어모아 출정하도록.
“후우.”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다시금 속에서 뭉근한 무언가가 치솟는 게 느껴진다.
발밑에서 울려오는 진동을 느껴내며, 댈런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싸움을 시작하며 맺혔던 가슴 속 응어리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만하면 족하지 않은가.
지금까지의 개고생을 대체 언제까지 더 해야 한단 말인가.
그건 생존과 귀환이라는 뚜렷한 목표 하에 끊임없이 외면해왔던, 그의 깊은 곳에서부터 토해지는 고함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네를 받아들이게.’
문득 떠오르는 펠버의 조언.
노인장이 그 말을 남긴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자격 자체는 손에 거머쥐고 있었던 거군.’
기존의 심상을 극한까지 비틀어내는 능력이 대영역의 첫 번째 조건이라면.
악마 놈이 은연중에 흘린 것처럼, 미래의 편린을 엿보는 것이 그 두 번째 자격.
모니터 너머에서 목도해왔던, 이제는 그게 정말로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워진 수백 번의 결말들은 이미 충분한 자격을 부여해주었다.
천변만화의 얼굴과 마녀가 싸우는 광경을 보고, 곧바로 영역을 개방해냈던 게 결코 우연은 아닌 셈.
‘가장 간단한 마지막 퍼즐을···여태껏 놓치고 있었나.’
대영역을 이룬 5위계의 초월자.
이미 실존하는 현실 위에, 자신만의 세상을 덧씌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겠는가.
기존의 심상을 비틀어 수용할 정도로 확장된 영역의 힘과, 시간선을 엿봄으로 확장된 지식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그보다 앞서 필요한 건, 자신이 주장하는 심상에 대한 확신.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가 이 현실을 덮어버릴 정도로 옳다는 확언을 스스로가 할 수 없다면.
대체 그 누가 그 확언을 대신해줄 수 있겠는가.
스으···
발을 들어올린다.
그것만으로도 일대의 마력이 무채색의 파동을 뿜어댔다.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어떤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찬바람이 들이치는 설산의 오두막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수습 용병의 나무패를 받고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처음 만난 동료의 시체가 식어가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던 때와, 닳고 닳았음에도 과거를 그리워하며 짐마차 안에서 스스로에게 편지를 적던 때.
살아남아야 하기에 쌓아놓아야만 했던 울분을, 전부 그러모아 토해내듯이 다음 걸음을 내딛는다.
쿠우우웅―!
세 번째 발걸음.
땅속 깊은 곳에서 전해지던 떨림이 걷잡을 수 없이 거세진다.
내면으로 돌린 시선의 일부분은, 한참 전부터 심상 너머 설산의 한 부분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약(E)]
- 한 번의 발디딤으로 몸을 높게 띄워올리는 기술.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안에 힘과 기교의 총체적인 응용이 담겨있다.
- 숙련도 100%
미궁도시에서 은가면 사도 중 하나를 쓰러뜨리고 회수했던 스킬을 기원으로 삼고.
[답보(고유)]
- 용을 떨어뜨린 전사가 창안해낸 기술. 마력으로 디딜 수 없는 곳을 딛고 서는 기예다. 첫 발디딤의 순간에 방출되는 마력의 일부분을 완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늪지의 원혼들을 상대로 고유 스킬로 전환되며, 한층 더 높은 기동력과 활용도를 가져다주었던 심상.
설산 구석진 곳의 암벽에 걸쳐 흐르며, 중력을 무시하듯 하늘로 솟구치는 돌과 자갈의 폭포를 바라보면서.
마치 중력이 뒤집히기라도 한 듯한 그 현상을, 눈앞의 현실 위에 그대로 끄집어낸다.
「거꾸로 솟아오르는 폭포」
「반전(反轉)」
쩌적―
천장이 기이하게 뒤틀린다. 전당의 벽과 바닥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남아있던 석관들이 모조리 뽑혀 천장으로 날아가 부딪히고, 석재 바닥 밑에 있던 흙더미들이 샘물처럼 터져나왔다.
“지형을···뒤엎는다고? 완전 개방도 아닐진대, 무슨 심상의 크기가 이 정도로···!”
둥실 몸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치는 악마.
[호오···상대방에게 유리하도록 이미 판이 깔렸으니, 그 판 자체를 엎어버리는 건가.]
그리고 심상의 진동에 눈을 뜬 고룡의 중얼거림을 흘려넘기며, 댈런은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쩌저적! 콰지직! 콰직!
밀려 올라가다 못해 조각조각 찢어지기 시작하는 돔형 천장.
마치 새가 알껍질을 깨고 나가듯, 새하얀 빛의 실금이 쩍쩍 갈라지며 틈을 드러낸다.
그 끝에.
콰과과과―!
전당 전체가 상공으로 뜯겨져나가며, 하늘의 청명함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시야를 가득 채우는 새빨간 피보라.
숨이 턱 막히는 느낌과 함께, 타룸은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울컥이며 치솟는 지독한 혈향. 짜고 비린 맛.
대족장의 후계자이자 뛰어난 전사인 타룸에게는 익숙한 냄새와 맛이었다.
하지만 원래라면 고개를 돌려야만 볼 수 있을 큼직한 어깨와 상박 근육이, 눈앞에서 펄떡거리는 장면까지 익숙하지는 않았다.
타룸이 비틀거리며 물러난 사이, 그의 왼팔을 잡아 꺾어 잘라내버린 수호자는 잘려나간 팔을 쓰레기처럼 던져버렸다.
“크흐, 흐으···.”
숨을 헐떡거리며 검을 바로 세운다. 후들후들 떨리는 검날 너머로 덩치 크고 거무튀튀한 하이 오크가 보였다.
저게 아마 구십 몇 대 대족장인가 그랬지.
지금보다 젊을 적에 공부했던 가물가물한 역사를 되짚어보면, 산속에 숨어든 악마 하나를 맨손으로 두들긴 전사였나 그랬을 것이다.
살아있을 때 뛰어났던 전사는 죽어서도 대족장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수호자는 언젠가 타룸이 대족장이 되면 그를 지키게 됐을 테였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였다. 저 전사는 이미 족장 둘을 죽였고, 이제는 그들을 구하려던 차기 대족장을 죽이려 들고 있었다.
다름 아닌 현 대족장, 정확히는 현 대족장의 몸을 장악한 악마의 명령에 의해서.
쐐애애애―!
수호자가 검을 내리쳤다. 타룸은 훌쩍 뒤로 물러났다.
수호자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그를 따라붙었다. 어떤 주술이나 이능도 없이, 그저 육체능력만으로 휘두름에도 그랬다.
막기 위해 하나 남은 팔로 검을 휘둘렀지만, 수호자의 검은 막히는 대신 그의 검을 반토막 냈다.
촤아악!
무기를 동강 내고도 힘이 남아 어깨를 깊게 찢어버린 수호자의 검.
그 검이 다시 한 번 들이닥쳤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는 궤적과 속도였다.
타룸은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검을 직시했다. 진짜 전사라면 죽음의 순간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무···”
그가 입을 열었다. 유언이라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영역의 힘을 전수받을 때, 전대 대족장이 그에게 해줬던 말.
동시에 첫 번째 대족장, 하이 오크들의 대선조가 후손들에게 남겼다는 문장.
“무너지지 마라! 끝까지 맞서라! 하이 오크는 자유롭게 싸운다!”
폐에 남았던 공기를 탁 내뱉자 팔다리에서 힘이 훅 빠졌다. 훈련받은 대로 마지막까지 아껴뒀던 숨과 힘을 다 뱉은 것이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검날. 번뜩이는 첨단이 목을 찌···
─────!
눈앞이 뒤집어졌다.
타룸은 본능적으로 몇 바퀴 구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나뿐인 손에는 누구 건지 모를 창이 들려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잡히는 대로 주워든 모양.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콰과과과과과······!!
먹먹해진 귀가 빠르게 회복되면서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마력을 끌어올려 보호하기도 전에, 타룸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 그 중앙에 자리한 하이 오크의 성소.
이천 년도 전에 지어졌다는 거대한 석재 건축물이,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조각조각 부서진 채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이게 무슨···?’
성소에 숨겨져 있던 방어 기능인가? 아니면 대족장의 몸을 집어삼킨 악마의 힘?
하지만 전자라면 성소 자체를 박살 냈으니 말이 안 되는 일이고, 후자라면 이미 손에 넣은 대족장의 권한과 힘을 되려 망치는 일이었다.
그때 박살 나 떠오르는 파편들 사이에서 두 인영이 치솟았다.
하나는 하얀 문신이 빼곡한 하이 오크. 다른 하나는 군데군데 갑옷이 찢겨나간 인간이었다.
하이 오크는 둥둥 떠오르는 파편들 사이를 뛰어넘어가며 인간을 피했고, 인간은 허공에 파문을 남기며 도약해 불과 얼음을 흩뿌려댔다.
‘대족장···그리고 댈런 칭구?’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저 둘이 누군지는 분명했다. 그리고 싸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허공을 걷어차며 대족장에게 따라붙은 댈런이, 흰 문신 가득한 가슴팍에 성검을 꽂아넣은 것.
동시에 마른하늘에서 한 줄기 섬광이 내리꽂히며, 성검에 찔린 대족장의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을 뻥 뚫어버렸다.
꽈르르르···.
“······.”
뒤늦게 들려오는 우렛소리. 그 나직한 울음에 부서진 성소와 죽은 대족장, 쓰러져나간 동족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휙휙 지나갔다.
타룸은 뭔지 모를 감정들이 교차한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수호자를 돌아봤다.
“······.”
성소가 부서지며 수호자는 이미 기능이 정지한 상태였다. 시체를 보존하는 주술만이 남아있어, 아직까지 형체를 잃지 않았을 뿐.
근원적인 공급처가 파괴되었으니, 머지않아 주술의 동력이 다하면 저 형체마저도 바스라질 테였다.
성소 수호자는 하이 오크에게 큰 전력이니만큼, 임시로라도 성소를 만들고 주술사들을 불러 되살려야 하겠지.
전대 대족장이 죽어버린 탓에, 갑작스럽게 현 대족장이 된 입장인 타룸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일단 잘린 팔부터 회복해야지. 부상당한 동료들도 수습하고. 나머지는 그 뒤에 생각할 일이었다.
그 순간.
화륵!
난데없이 허공에서 시퍼런 불이 튀어나오더니, 기능 잃은 수호자의 시체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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