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무덤(5)
“시발.”
댈런은 입안의 핏물을 모아 뱉었다. 붉은 액체가 중력을 거스르듯 둥실 떠올랐다.
무중력 공간에서는 액체가 둥글게 구를 이룬댔나? 오래전 유튜브에서 봤던 우주정거장 실험 영상이 연상되는 장면이었다.
물론 지금 그가 떠 있는 이 공간은 단순한 무중력이 아니라, 수많은 힘의 기류들이 모여 위쪽으로 휘몰아치는 현상.
때문에 부유하는 듯 보였던 핏물은 그대로 어떤 기류에 휘말려 휘리릭 흩어져갔다.
“······.”
그 흩어짐을 잠시 지켜보던 댈런은, 다시 대족장의 시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대족장의 뻥 뚫린 가슴팍에서 흘러나오는 은청색의 기묘한 기운을.
“너네 족속들은 좀처럼 뒈질 생각들을 안 하는군.”
[흐흐흐···삶과 죽음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는 건 필멸자들의 저급한 세계관이지.]
은청색 기운이 말했다. 혀도 입도 없는데 또렷한 육성이었다.
뭐지, 진동으로 소리를 내나? 수은처럼 흘러내리는가 하면 불 붙은 기름처럼 타오르는 기운은, 그 구성 물질조차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물론 댈런에게 저 물질의 구성 따위는 신경 쓸 바가 아니긴 했다. 중요한 건 저게 대족장에게 깃들었던 악마의 일부라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하는 꼴을 보아하니, 내버려 두면 분명 더 큰 뭔가로 변신할 작정인 듯했다.
악마 놈들 한두 번 상대해 본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 보스 경험치가 두 배군.’
댈런은 상태창을 슬쩍 확인했다. 레벨은 어느새 30을 넘겨있었다.
미궁도시를 떠난 후 산맥에 들어와 오크들을 학살하면서 하나, 그리고 성소 수호자에 이어 대족장까지 처리하며 하나 더 오른 것.
슬슬 빌어먹게 안 오르는 레벨이지만 악마까지 쓰러뜨리면 하나쯤은 더 얻을 수 있겠지.
당장에라도 불꽃으로 태우든 전격으로 지져버리든 할 수 있음에도, 댈런이 저 꾸물거리는 은청색 물질을 내버려 두는 이유였다.
‘최소한 화신체. 거기다 높은 확률로 마물 한 다스는 덤. 정말 제대로 붙어볼 생각이면 본체가 직접 현현할지도.’
그럼 오히려 더 좋았다. 놈도 상급 악마인 만큼 정수 자체는 지옥에 두고 왔겠지만, 3할 정도의 힘이라도 깎아낼 수 있으면 차후에 큰 도움이 될 터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은청빛 기운은 서서히 댈런에게 멀어지며, 어떤 분명한 형체를 이뤄내기 시작했다.
[크흐흐, 방심했구나 전사야. 내가 정말 이대로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느냐?]
악마가 말했다. 놈은 이제 부정형의 기운이 아닌, 앙상하게 마른 시체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방심하다니. 기다려준 건데.”
[···웃기는군. 오만에도 도가 있는 법이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덤벼라. 영원히 기다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손가락을 까딱이자 어디선가 도끼가 날아와 손아귀 안에 안착했다. 댈런은 도끼를 허리춤에 꽂고는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마치 뭔가 숨겨놓은 수가 있으면 얼른 써보라는 듯한 행동.
성소가 박살나면서 결계는 물론이고, 수호자와 골렘들까지도 전부 무력화된 상태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시간에 쫓기듯이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런 여유가 눈에 거슬렸던 걸까. 창백한 시체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후회하게 해주마. 필멸자의 한계를 경험하게 만들어주지. 수만 구의 시체들 사이에서 썩어가다 보면, 너 스스로도 별다를 것 없는 필멸자였다는 걸 자각하게 될 것이다.]
놈이 손을 들어올렸다.
손바닥 안에서 화륵 타오르는 푸른 불꽃.
댈런은 놈에게서 눈을 돌려 저 아래의 분지를 내려다봤다. 족장들과 일행이 성소 수호자와 전투를 벌이던 곳이었다.
[내가 왜 이곳을 탐했는지 아느냐?]
악마가 물음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전장의 시체들이 불붙어 타오르기 시작한다.
창백한 화염은 거무튀튀한 수호자들의 몸뚱이를 먼저 집어삼키고, 이내 방금 숨이 끊어진 족장들과 대전사들의 시체에까지 옮겨붙었다.
불타는 시체들 사이로 족장 타룸과 루시아, 비요른과 아카샤가 보였다. 타룸은 왼팔이 없어졌지만, 일단 넷 다 무사했다.
걱정할 건 없겠군.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이 오크는 미개하지. 인간 왕국쯤은 손쉽게 무너뜨릴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륙 변방의 산골짜기에 틀어박혀서 인간들의 방파제 노릇이나 하고 있···억!]
악마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손도끼가 머리를 쪼개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머리통이 반으로 갈라진 채 축 늘어진 앙상한 몸뚱이.
직후 하늘이 쩍 갈라지며, 지독한 시취가 물씬 풍겨왔다.
***
화르르르―!
열기 없는 불꽃이 치솟는다. 수호자들의 몸뚱이에서 시작된 불꽃은 어느새 분지를 넘어 골짜기까지 옮겨붙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메마른 골짜기에, 들불처럼 번져가는 푸른 불길.
그건 수천 년 동안 죽어나간 하이 오크들의 시체를, 모조리 태워버리는 악마의 제사 의식이었다.
‘이것까지 노린 건가.’
댈런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원래라면 성소의 주술로 보호되어야 할 하이 오크의 시체들이, 성소가 무너지며 악마의 마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황.
대족장의 몸뚱이와 성소의 능력을 사용한 걸 넘어서서, 악마는 자신이 깔아놓은 판이 뒤집힐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쑴이 아니라 에낙사구스의 악마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계책이었다.
[조심해라, 전사야. 아무래도 놈이 완전한 진체로 직접 강림하려는 것 같구나.]
“단단히 빡쳤나 보군.”
[그러게 적당히 입을 놀리지 그랬느냐.]
고룡의 핀잔에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를 꺾어 갈라진 하늘을 올려다본다.
백 미터가 넘는 길이로 갈라진 균열은, 악취에 이어 기괴한 덩어리를 드문드문 뱉어내고 있었다.
눈과 혀, 잘려나간 코, 절단된 사지의 조각들이 뭉친 덩어리들.
우박처럼 쏟아지는 역겨운 덩어리들의 사이로, 다른 것들보다 수백 배는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으으으으으―
어우어어―
망자들의 비명이 절벽 사이를 메아리친다.
지옥의 마물인 시체 거인 수십 구를 뭉치면 저런 모양일까.
피부가 벗겨지고 불에 타 바싹 말라버린 몸뚱이, 사지가 뒤틀리거나 물에 퉁퉁 불어터진 익사체까지.
천 단위의 시체를 찰흙처럼 뭉쳐서 만든 듯한 거인은,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를 휘적이며 균열에서 떨어졌다.
쿠구구구구···.
상승기류에 휘청이던 악마가 금새 균형을 되찾았다. 놈의 몸 곳곳에 달린 입이 동시에 열렸다.
[이 땅에 진체를 강림시키는 건···참으로 오랜만이로구나. 곧 나의 일부가 될 네 시체가 충분한 값어치이기를 바라마.]
시체늪의 대공, 창백한 불의 기만자 즈탄크가 말했다.
댈런은 사납게 웃으며 성검을 고쳐 쥐었다. 상급 악마의 진체를 상대하는 건 칼카스 이후로 처음이었다.
놈은 수많은 제물을 희생하고, 상급 악마 수준의 주문을 이용해 정수의 힘을 완전히 끌어다 강림한 상태.
그 말인즉 이곳에서 놈을 죽이면, 동력원을 잃은 놈의 지옥 역시 소멸된다는 뜻이었다.
저벅.
그때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 외의 기척은 없었다. 심박이나 호흡도 마찬가지.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가슴팍에 구멍이 뻥 뚫린 대족장이 허공을 밟고 서있었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죽은 거 아니었나?”
“이 몸뚱이는 이미 죽었다. 하지만 전사의 영혼은 쉽게 죽지 않는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내 심장이 사라지기 전에 선조들의 힘이 내 몸에 들어왔다. 그 힘이 내 영혼을 죽은 육체 안에 붙들어두고 있다.”
대충 영역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는 말인가.
하이 오크 선조들 중에서는 성소 수호자를 만들어낸 이도 있을 테니,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했다.
불타오르는 자줏빛 눈동자와, 녹색 피부 위에 자줏빛 마력으로 돋아난 혈관들이 그 증거이기도 했고.
대족장은 핏기 잃은 입술을 움직였다.
“악마의 속임수에서 구해줘서 고맙다, 잉간. 이제 내게 두 번째 기회를 줘라. 내가 저 악마를 썰어버리겠다.”
댈런은 잠시 침묵했다. 도움이라면 환영이지만, 경험치를 포기하기는 아까운데.
“막타는 내 거다.”
“···어려운 말 하지 마라. 칭구는 어렵게 말하는 거 아니다.”
“저놈에게 마지막 일격을 먹이는 건 나라는 소리다.”
“알겠다. 그럼 내가 힘을 꺾어놓을 테니, 너가 마무리를 해라.”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막타로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면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대족장은 허공을 성큼성큼 걸어 악마에게 향했다.
신비를 꿰뚫는 댈런의 눈에, 그의 등 뒤로 백이 넘는 하이 오크들의 그림자가 비쳤다.
[호오.]
악마는 흥미로운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놈의 몸뚱이에 붙어있는 수천 개의 눈동자가 대족장을 향한 것이었다.
[왜 제물로 바쳐지지 않는가 했는데, 아직 영혼이 육신을 떠나지 않아서였군.]
“악마.”
[뭐냐?]
“죽을 준비나 해라.”
수많은 입술들이 히죽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 몸으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심장과 폐는 으깨져서 흔적도 없고, 내장도 절반 가까이가 날아갔구나. 주술로 움직이는 인형 따위가···.]
“하이―오크는! 자유롭게 싸운다!”
대족장의 신형이 사라지고, 악마의 입이 다물어졌다.
뻐어어엉―!
북 두드리는 소리가 먼저.
다음 순간 악마의 몸이 휘청하며 네 개의 팔 중 하나가 터져나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피보라와 살점 조각들.
검붉게 피칠갑을 한 대족장의 신형은, 악마의 반대쪽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이, 무슨, 간신히 움직이는 시체 따위가!]
대답은 없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악마의 몸통과 팔 사이 접합부를 내리칠 뿐.
화륵!
다섯 선조에게서 나온 오색의 불꽃이, 주먹을 감싸고 폭발력을 잔뜩 축적해내며.
후우웅―
주술사들의 바람이 회오리처럼 몸을 휘감은 채, 앞에서는 권로를 닦아내고 뒤에서는 추진력을 더해간다.
일순간 대족장의 몸뚱이가 세 배쯤 커졌다. 그 몸뚱이를 뒤덮은 수십 명의 자줏빛 그림자가 순간 번쩍이며 힘을 뿜어냈다.
떠어━━━━
북 치는 소리가 한 번 더 난 뒤, 악마의 팔과 함께 몸통의 일부분이 사라졌다.
[크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남은 팔다리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악마.
잘려나간 두 팔이 빠르게 재생되는 동시에, 남아있던 팔다리가 갈래갈래 찢어지며 수백 가닥의 채찍처럼 변한다.
악마의 몸뚱이는 이제 수많은 촉수가 달린 둥근 공 같은 형태였다. 각각이 수십 구의 시체로 이루어져, 날카로운 뼛조각을 드러내고 있는 촉수들.
거대한 덩치에서 비롯된 힘은 단숨에 절벽도 무너뜨릴 괴력이었지만, 대족장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이며 그 공격을 모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대단하군. 게임에서도 이렇게 강했던 적은 없었는데.’
단순한 동작에 수십 개의 묘리가 얽혀들고, 악마의 진체마저 으깨버리는 위력을 만들어낸다.
아무리 대족장이라 하더라도, 원래의 몸뚱이를 입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이적.
허나 지금 그의 육체는 그저 그릇이자 도구일 뿐, 생명체라는 개념조차 상실한 채였다.
이미 끊어진 숨을 억지로 붙여놓았기에, 오히려 스스로의 손실을 걱정하지 않고 영역의 힘을 펼쳐낼 수 있는 건가.
수많은 힘을 한 몸에 담아내는 대족장의 전투 방식은, 마찬가지로 수십 가지 힘을 한 영역에 담고 있는 댈런에게 더할 나위 없는 영감의 보고였다.
‘마음 같아서는 한참 보고 싶지만.’
스스로의 존재를 태워 빚은 마지막 불꽃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터.
그렇게 생각한 댈런은 성검을 놓고 단창을 손에 쥐었다. 그 모습에 적창이 물었다.
[혼자서 할 수 있겠느냐?]
댈런은 피식 웃었다.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지금 내가 네 몸을 빌리게 되면, 기껏 이식한 용심장의 주도권이 내게로 넘어올 것이다.]
‘용심장이 당신의 육체가 된다는 건가?’
[맞다. 그러면 네가 싸울 때마다 나도 함께 나서는 꼴이 되겠지. 기껏 이 한 몸 편하자고 거래를 했는데, 그런 고생은 사양이다.]
그러니 알아서 해보거라. 나직한 고룡의 웃음을 뒤로하고, 댈런은 허공을 박찼다.
콰아아앙!
발밑에서 폭발하는 검붉은 화염. 솟구치는 신형이 불꽃 같은 잔영을 남겨낸다.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 허나 이전과는 달리 전신의 혈관은 용혈의 열기를 넉넉히 감당해냈다.
칼카스의 진체와 싸울 당시, 적창이 몸을 빌렸을 때의 감각을 되새겨본다.
용혈의 원래 주인이 손수 보여줬던 무용은 여전히 한참 멀었지만, 그럼에도 그때만큼 까마득한 건 아니다.
화르르륵!
불꽃이 창을 감싸고.
휙―
악마의 몸뚱이를 향해 내리긋는다.
대족장에게 시선이 뺏긴 악마가 이상함을 눈치챘을 땐, 이미 끝없는 열기가 놈의 몸뚱이를 가르고 있었다.
[커···어···!]
뒤따라 덮쳐드는 화염에 비명을 지르려던 입술들이 죄다 녹아버린다.
마치 용의 숨결과도 같은 화염의 파도가, 악마의 전신을 집어삼키고도 모자라 지면에 폭포같이 쏟아졌다.
콰과과과―!
순식간에 암반이 녹아 화산 지대처럼 변해버린 일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용암의 호수 위에, 반으로 잘린 거대한 시체 덩이가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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