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무덤(6)
쿠구궁! 쿠궁···!
영역이 해제되자 집채만 한 돌덩이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땅속으로 대피하는 개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낙석의 비에서 벗어난 댈런은 곧장 부글거리는 용암 호수로 다가갔다.
수면 위로 손을 뻗자 화륵 하고 타오르는 검붉은 불꽃.
용의 꼬리처럼 길쭉하게 뻗어나간 화염 줄기는, 용암 호수 안을 뒤적이더니 청백색의 큼직한 구슬 하나를 건져올렸다.
‘시체늪의 대공, 즈탄크의 정수.’
진체로 강림한 악마는 정수를 남기고 완전히 소멸했다.
힘의 근원을 잃어버린 놈의 지옥 역시, 얼마 가지 않아 무너져내릴 것이었다.
레벨업을 하고도 중간쯤 차오른 경험치 바를 한쪽에 띄워두고 곁눈질하며, 댈런은 즐거운 눈빛으로 악마의 정수를 회수했다.
그리고 바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뭔 썩은 내가 이렇게······.”
지옥문을 열 때부터 악취가 장난 아니더니, 죽고 남긴 정수에서까지 시체 썩는 냄새가 물씬 악취가 풍겨온다.
이 세계에서 구를 대로 구른 터라, 어지간한 자극에는 눈 하나 깜빡 않는다고 자부했건만.
콧속을 넘어 폐부까지 더럽히는 감각에, 댈런은 황급히 아공간을 열어 정수를 집어넣었다.
[끄아아아악! 이···이게 뭡니까 주인님!]
난데없는 악취 테러에 입주민이 질겁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악마 정수다. 칼카스의 정수처럼 네가 잃어버린 힘의 조각일 수도 있지 않겠냐?”
댈런은 검붉은 화염을 일으켜 손에 남은 냄새를 털어내며 말했다.
한때 별나무라 불렸다던 불사의 악마 아르보르.
천변만화의 얼굴 에버론 라크탈라의 말에 따르면, 지금의 몸뚱이는 예전의 권능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영락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잃어버린 힘 중 하나인 칼카스의 정수를 흡수한 끝에 그 권능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다루게 되지 않았던가.
마녀와의 전투와 성소 수호자의 포획 모두 그 권능이 없었다면 상당히 귀찮아졌을 과정이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제가 이런 악취덩어리를 남겼을 리가 없잖습니까!]
“일단 먹어보고 말해.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쓴 거다.”
[그게 대체 무슨 논리···그럼 독초도 몸에 좋다는 겁니···우으읍! 커흡!]
아공간에 손을 넣어 직접 악마의 입속에 정수를 쑤셔 넣어주고 난 뒤, 댈런은 손을 휘휘 털며 용암 웅덩이에서 돌아섰다.
분지의 한가운데, 성소가 있던 자리는 방금 전의 싸움으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웅장하던 고대 건축물은 어디 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마구잡이로 쌓아올린 돌무덤 같은 폐허.
댈런은 그 경계선 바깥까지 굴러나온 돌덩이 중 하나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대족장의 몸뚱이가 힘없이 기대어져 있었다.
“죽었나?”
“···아직이다.”
대족장이 클클 웃으며 대답했다.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으니 호흡과 심박은 이미 멈춘 지 오래다.
영역의 힘을 통한 선조들의 주술과, 스스로의 마력제어 능력만으로 몸을 움직이는 셈.
그마저도 이제 한계인지, 두 눈에서 번뜩이던 자색 불꽃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중이었다.
“상급 악마를 상대로 활약이 대단하더군. 덕분에 편하게 싸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댈런은 근처의 바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야기했다.
실제로 그가 내지른 마지막 일격은, 대족장이 악마를 붙잡아두지 않았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용심장을 얻어 몸에 가해지는 부하를 극적으로 줄이고, 그로 인해 적창이 보여줬던 무위를 어설프게나마 재현해내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용혈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이제야 감을 잡았을 뿐, 숨 쉬듯이 자유롭게 힘을 다루던 적창에게 비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반대로 대족장이 풀어낸 영역의 힘은, 하나하나의 위력은 용혈에 비해 볼품없음에도 그 조화와 능숙함의 측면에서 독보적이었다.
단순히 악마의 시선을 끄는 걸 넘어서서, 수십 종류의 주술로 진체를 결박하는 동시에 촉수 사이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놈의 몸뚱이를 착실하게 깎아내린 무투의 정수.
그건 용혈을 배제한 댈런의 싸움 방식과도 얼핏 비슷했고, 이번 싸움의 가장 큰 소득은 경험치가 아닌 그 싸움을 관찰하는 데 있을지도 몰랐다.
5위계의 초월자가 수십 가지 힘을 뒤섞어가며 사용하는 건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멍청했다.”
그때 한동안 침묵하던 대족장이 입을 열었다.
“초월의 격을 쥘 때부터 멸망이 다가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내다본 미래와는 달리, 모든 게 예정보다 너무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
“적응력 좋은 인간들은 어떻게 버텨내고 있는 것 같았지. 하지만 하이 오크는 아니다. 이대로는 하이 오크답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끝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고 말았지.”
회한 섞인 목소리. 입꼬리가 쓴웃음을 지어낸다.
댈런은 대답할 수 없었다. 괜찮다는 위로의 말이나, 이겨낼 거라는 격려도 불가능했다.
종말은 실제로 앞당겨지고 있었고, 그 원인의 일부분은 댈런 자신의 몫이었으니까.
정해진 멸망의 길을 빗겨나가는 중이라는 결과론적인 이야기를, 종족을 위하려다 오히려 악마에게 이용당한 이에게 어떻게 건넬 수 있을까.
용암 호수가 부글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적막함 사이로, 또 다른 인기척이 다가왔다.
“대족장 쓰툼파.”
“···족장 타룸. 아니, 이제는 대족장 타룸이군.”
비척이는 발걸음으로 다가온 건 타룸이었다.
왼팔은 상박부터 잘려나갔고, 몸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한 모습.
자줏빛이 희미해져가는 눈으로 그 전신의 부상을 훑어본 대족장은, 입을 우물거리다가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미안하다.”
“아니다. 오면서 다 들었다. 너는 너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렇지···하지만 멍청했던 건 사실 아닌가?”
“그건 맞긴 하다. 그래도 이제 똑똑해졌으니 됐다.”
타룸의 대답에 대족장이 낮게 웃었다. 생기가 사라져가는 웃음이었다.
“족장 타룸.”
“뭐냐?”
“대선조가 남긴 말을 기억해라. 하이 오크는 자유롭게 싸운다. 나는 싸우는 것보다 자유가 중요하다는 걸 몰랐고, 그게 내가 실수한 원인이었다. 너는 같은 실수를 하지 마라.”
“진짜 죽을 때가 됐나 보군. 너무 어렵게 말한다.”
“···됐다. 넌 똑똑하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말을 마친 대족장은 바위에 머리를 툭 기댔다.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산맥의 해는 빨리 저물었다.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부글대는 용암 호수의 붉은빛은 마치 자신의 세상이 다가온다는 듯 하늘로 기운을 뻗어내고 있었다.
악마가 남긴 시취와 탄내 사이, 바람이 실어온 먼지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댈런은 코를 슥슥 비볐다. 그리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없나?”
“···고기가 먹고 싶군.”
곁에 있던 타룸이 픽 웃었다. 과연 하이 오크다운 대답이었다.
“걱정 마라. 대선조의 하늘 성소에서 실컷 맛볼 수 있을 거다.”
타룸의 말에 대선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는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댈런은 무릎에 손을 얹고 몸을 일으켰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
며칠이 흘렀다.
원정에 나섰던 하이 오크들은 각자의 부락으로 돌아갔지만, 일행은 성소에서 가장 가까운 부족으로 거처를 옮겨왔다.
새로 대족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 타룸의 부탁 때문이었다.
전대 대족장 쓰툼파를 떠나보내는 자리에, 일행이 함께해줬으면 좋겠다고 그가 말했던 것.
물론 사상자를 수습하고 원정의 여파를 정리하는 게 먼저였고, 그리고 나서도 장례를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덕분에 일행은 본의 아니게 며칠이나 푹 쉬게 되었다.
일행의 활약상을 들은 하이 오크들이 매일 밤마다 만찬을 대접하겠다며 자기 집으로 초청해대는 통에, 좀 다른 의미로 정신없는 나날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결국 어제 만찬의 팔씨름 대회 우승자는 나, 비요른 칼라드라쿰이었다는 거지! 누구도 난쟁이를 힘으로 이길 순 없다네! 설령 하이 오크나 용이라 해도 말이야! 으하하하!”
[논리에 오류가 있군요. 그 자리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안 계셨습니다. 이 부락의 족장이 두 분을 따로 초청한 것만 아니었으면, 당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원래 패배자는 말이 많은 법이지! 이해하네, 어찌 나라고 평생 승리만 거듭해왔겠나! 으하하···아아악!”
[제가 조금만 더 성장했으면 발가락 하나로도 당신을 이길 수 있었을 겁니다. 자꾸 그러면 탈모로 만들어버리겠습니다, 난쟁이 영감님.]
“아악! 머리 쥐어뜯지 말라고! 이 요망한 도마뱀 녀석이!”
댈런은 낮게 웃으며 나무잔을 들어올렸다.
자기 덩치만 한 새끼용을 정수리 위에 얹은 채, 머리털이 뜯겨나가며 비명을 지르는 난쟁이는 꽤 진귀한 광경이었다.
보다 못한 루시아가 둘 사이를 뜯어말리는 동안, 그 모습을 관람하며 술을 홀짝이는 그에게 펠버가 말을 붙여왔다.
“그러고 보니 축하가 늦었군. 초월자의 자격을 얻은 걸 축하하네. 소감이 어떤가?”
“소감이랄 것까진 없고···그때 노인장이 해준 이야기에 감사드리오.”
“끌끌, 내 말이 없었더라도 언제든 가능했을 걸세. 자네는 이미 모든 자격을 거머쥐고서, 아주 얇은 벽만을 남겨두고 있었으니까.”
펠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그의 잔에는 독한 술 대신 뜨끈한 차가 우려져 있었다.
“소영역을 이뤄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위계라니. 세상이 놀랄 일이군. 심지어 멀리서도 느낄 수 있었네. 자네가 가진 심상의 크기가, 다른 초월자들을 아득하게 넘어선다는 걸.”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상태창을 슬쩍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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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32
[근력 : 45] [기량 : 40] [체력 : 36]
[감각 : 37] [지능 : 36] [마력 : 39]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필즈의 바람 결계(C), 화영창술(D), 살아 움직이는 뿌리(D)
*고유 스킬(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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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도시를 떠나기 전과 비교했을 때, 레벨이 오른 것 외에도 대영역을 이루면서 모든 능력치가 상승했다.
사실 그밖에는 수치와 내용에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5위계에 닿았다는 건, 스스로 빚어낸 영역의 일부분으로 이 세상을 덮어씌울 수 있다는 의미.
현실 자체를 멋대로 개변하는 초월자의 힘은, 단순히 상태창으로 보이는 능력치나 스킬의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고유 스킬 역시 하나의 줄기에서 수십 가지 갈래로 뻗어나가며, 표기되는 숫자 이상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힘이었고.
‘그 무투가의 시체를 회수하면 어떻게 될까.’
소영역을 이뤘을 때와 마찬가지로, 캐릭터가 대영역을 이룰 때 역시 알림창이 작게 지나가곤 했었다.
모니터 너머에서는 무작위적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 공략에서 크게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았던 부분.
허나 돌이켜보면 최후의 최후까지 버텨냈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대영역을 이뤘던 전적이 있었다.
댈런이 세계의 이빨 산맥을 방문한 근본적인 이유인, 무투가 캐릭터 역시 대영역의 소유자였고.
‘예상이 가지 않는군. 게임에서는 무작위 이펙트 몇 번 튀어나오고 데미지 들어가는 게 끝이었으니까.’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이어가는 대신, 댈런은 술잔을 쭉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쿵쿵.
때마침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족장 타룸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두건을 깊게 눌러쓴 채 문앞에 선 그는, 일행이 전부 모여있는 걸 보고 말했다.
“마침 다 있군. 출발하자. 대족장을 흙과 바람으로 돌려주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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